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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미달 님의 서재입니다.

라이칸슬로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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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다미달
작품등록일 :
2022.08.01 22:22
최근연재일 :
2023.03.28 22:20
연재수 :
134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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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600
추천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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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1,060,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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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9.15 2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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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23쪽

변화 (1)

DUMMY

누워 있는 아간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라자살라는,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어 어깨를 흔들었다.


"이제 일어나지 그러나. 이러다 영영 잠에서 안 깨어날 것 같군."


아간은 이맛살을 잔뜩 찌푸렸다. 눈이 부신지 손등으로 차양을 만들었다.


그는 그 상태로 한동안 말없이 눈만 깜빡였다.


"어서 일어나. 배도 고플 텐데 일단 뭐 좀 먹지."


라자살라가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아간의 배에서 위장이 요동치는 소리가 났다. 부엌에서 풍겨오는 음식 냄새가 침샘을 자극했다.


몸을 일으킨 아간은, 그러나 몸이 너무 뻣뻣하게 굳어 있어서 쉽사리 걸음을 떼지 못했다.


"아갸가···."


아간은 급히 입을 다물었다. 목이 잠겨 있어서 목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자."


라자살라가 따듯한 차를 건네주었다.


아간은 받는 대신 멍한 눈으로 라자살라를 쳐다보았다. 지금에서야 알아본 건지 생경한 얼굴이었다.


"며칠 안 봤다고 벌써 까먹은 건 아니겠지?"

"아가아아."

"일단 마셔. 그리고 말하게."


아간도 마침 그러는 게 좋겠다고 생각하던 참이었다. 차 몇 모금 마시자 몸이 조금 풀어졌다.


잠겼던 목도 가라앉고 딱딱하게 굳어 있던 턱도 훨씬 움직이기 편해졌다.


어느 정도 정신이 돌아오자 아간은 의구심이 가득한 얼굴로 제 몸을 관찰했다.


다쳤던 적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부상이 거의 다 아물어 있었다. 다만 복부와 어깨에는 흉터가 조금 있었다.


이건 상처가 다 낫는다 한들 사라지지 않을 것 같았다.


"거짓말 했군요."


아간이 입을 뗐다. 냄비를 식탁에 내려놓던 라자살라는 영문 모를 표정을 지었다.


아간은 원망이 깃든 눈으로 말했다.


"언제는 자기는 의원이 아니라면서 라이트 씨를 치료하는 걸 거부했잖습니까. 그런데 이번에는 절 말끔히 치료해주셨군요. 대체 이유가 뭡니까? 그때는 왜 그랬던 거죠?"

"일어나자마자 하는 말이 고작 그거라니. 자네, 예의범절을 다시 배워야겠어."

"말 돌리지 마십시오."

"시끄럽고 일단 해야 할 말이나 먼저 하게. 그게 순서야."


라자살라가 눈썹을 위로 올려 미간에 주름을 만들었다. 감정이 격양되어 있던 아간은 별로 말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어찌 됐든 라자살라가 자신을 구해준 건 맞기에 어쩔 수 없이 입을 열었다.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별 말씀을."

"그럼 이제 대답을-."

"와서 먹게."


라자살라는 친히 의자를 뒤로 끌어주었다.


그리고 자신이 이런 호의를 보이는 건 극히 드문 일이며 그걸 알면 얼른 엉덩이 깔고 앉으라는 무언의 눈빛을 보냈다.


결국 아간은 순순히 따르기로 했다. 침대에서 내려와 의자에 앉은 그는 차려진 음식을 살펴봤다.


만찬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음식가지가 풍성했다.


머뭇거리던 아간은 곧 손으로 음식을 집어 먹었다. 아간은 화들짝 놀랐다. 맛있었다.


"어떻게, 이런···."

"당연하지. 그 난리를 피웠는데 입맛이 안 돌 수가 있나."

"예?"


라자살라는 양 다리를 한 손에 쥐고는 거리낌 없이 뜯어먹었다. 뜯긴 자리에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아주 제대로 짓이겨놨더군. 누구인지도 모를 만큼. 그동안 얼마나 분을 삭히고 있었길래 그 지경으로 만든 겐가?"

"···알고 있었습니까?"

"여긴 내 땅이야. 당연히 알고 있지."


아간은 검은 갈퀴와의 일전에 대해 생각해보려 했다. 그러나 이내 두통을 느껴 그만두었다.


흐릿한 기억의 파편이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머릿속을 콕콕 찔러댔다.


라자살라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하긴. 일어난지 얼마 안 돼서 머리가 아프겠군."

"제가 얼마나 잤습니까?"

"사흘."


아간이 퍼뜩 고개를 들었다.


"사흘이라고요?"

"그래. 사흘. 그러니까 상처가 다 나았지. 그러니 이상한 오해 하지 말게. 난 자넬 치료한 적이 없어. 굶지 말라고 입에 물이랑 음식 흘려준 거 말고는 몸에 손도 대지 않았지."

"그럼 스스로 아물었단 말입니까?"

"당연히. 그야 보통 사람이 아니니까. 저주가 깃든 몸이 그리 쉽게 쓰러질 거라 생각하는 겐가?"


아간은 생소한 기분이 들었다. 전에는 이렇게까지 다쳐본 적이 없어서 몰랐었다.


그때 무심코 흘려들었던 단어가 떠올랐다.


"잠시만요. 사흘? 사흘이라고 했습니까?"

"음? 그렇네만."


아간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안절부절 못 했다.


"왜 그러나?"

"집에 가야 합니다. 라이트 씨가 혼자 있어요."

"그 선한 자는 걱정하지 말아. 돌봐주는 사람이 있으니까."


당장 나갈 준비를 하던 아간은 행동을 멈췄다. 돌봐주는 사람이라니? 자기 말고 누가 또 있다고.


"누구죠?"

"돌아가면 알게 되겠지. 그러니까 이제 좀 앉아서 배나 채우게. 만든 사람 성의를 무시하는 건가?"

"그게 아니라, 걱정이 돼서 그럽니다."

"걱정할 필요 없네."


고집스러운 눈으로 말한 라자살라는 손가락을 들어 휙 움직였다. 그러자 의자가 아간의 오금을 때렸다.


"···알겠습니다."

"좋은 생각이야."


사실 아간 입장에서도 마다할 이유는 없었다. 음식을 먹고 맛있다고 느껴본 적이 대체 얼마 만인지.


보기만 해도 군침이 도는 음식들은, 외형만 그런 게 아니라 실제로도 아주 맛있었다.


물이나 우유를 따로 마시지 않고도 수분이 많고 부드러워서 꿀떡꿀떡 잘도 넘어갔다.


이것저것 집어먹다 보니 어느새 절반이나 사라져 있었다. 아간은 배부름이라는 걸 느끼고 있는 자신이 불가사의하게 다가왔다.


"이제야 혈색이 돌아왔군. 아까는 피부도 창백하고 볼도 쏙 들어가서 산송장처럼 보였는데."


아간은 괜히 볼을 매만졌다.

"잊고 있던 미각을 되찾은 기분이로군요. 평생 못 느낄 줄 알았습니다. 근데 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 혹시···."


아간은 자신이 사람으로 돌아오고 있는 거냐고 눈으로 물었다.


헛소리 하지 말라는 답이 돌아올 줄 알았지만 라자살라가 말없이 음식만 먹었다.


"해본 소리입니다. 도중에 약을 끊었는데 그럴 리가 없겠지요."

"그건 차차 얘기하지. 그보다 나랑 떨어져 있는 동안 어떻게 지냈는지나 말해보게. 난 그래도 한 번은 찾아올 줄 알았어."


아간은 어깨를 움츠렸다.


"경황이 없었습니다, 여러모로. 다 보고 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렇다고 당사자가 어떤 생각까지 하고 있는지는 모르지. 그래, 아간. 아주 신나게도 저지르셨더군. 웬 꼽추 녀석이랑 의기투합해서 돌아다니질 않나, 싸움판에 올라가서 힘 자랑을 하지 않나-."

"돈만 궁하지 않았다면 그런 일은 쳐다도 보지 않았을 겁니다."

"-게다가 애꿎은 사람도 죽여버리고 말이야."


아간은 라자살라를 노려보았다. 라자살라는 인자한 미소를 흘렸다.


"눈깔 뽑아버리기 전에 고개 숙이게."

"그러는 당신은 왜 진작 찾아오지 않은 거죠? 당신도 자기 만족을 위해서, 라는 목적이 있다고 했잖습니까."

"내가 자네에게만 실험하고 있는 줄 아나? 말고도 많아. 그중에는 자네보다 훨씬 실험을 많이 진행한 자들도 있다고."

"그럼 왜 이제 와서 저를 구해준 겁니까?"

"그럼에도 자네가 제일 가능성이 높으니까."


옷을 툭툭 털고 일어난 라자살라는 창가로 다가갔다. 비가 오고 있는지 톡, 톡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다른 녀석들은 도통 진척이 보이질 않더군. 더군다나 혼자 사는 녀석들이 태반인지라 사교성도, 인내심도 너무 떨어져. 그나마 가족과 연을 맺고 있다면 모르겠지만 그런 놈은 한 놈도 없었지. 한심한 것들."

"그러니까, '떨어지고 나서야 소중함을 깨달았다.' 라는 말을 하고 싶은 겁니까?"

"틀린 소리는 아닌데 몸에 소름이 돋을 정도로 징그러운 말이로군."

"그렇다 해도 너무 늦게 찾아왔군요. 좀 더 일찍 찾아오셨다면, 제가 싸움판에서 그런 행동은 하지 않았을 겁니다."

"그야 폭주할 줄 알았으니까. 제 손으로 동료를 해쳤으니 언제고 미쳐 날뛰어도 이상하지 않을 거라 생각했거든."


그때 생각만 하면 지금도 감정이 날카로워졌다. 아간은 감정에 휘둘려 말하고 싶지 않아서 입을 꾹 다물었다.


"그래도 그건 문제가 아닐세. 이 다음이 중요하지."


적적하게 들려오는 빗소리가 갈수록 커져갔다. 점점 거세지고 있는 것일까.


창가를 통해 바깥을 보니 나무 윗부분이 살짝 휘어 있었다. 아무래도 비바람이 불고 있는 듯했다.


"솔직히 말하게. 이번에 변했을 때 어떤 마음이었지? 예전처럼 괴로웠나? 아니면 기꺼워했나?"


아간이 눈살을 찌푸렸다.


"기꺼워하지 않았습니다."

"괴롭다는 말은 하지 않는군."

"그저 그랬다는 뜻입니다. 괴롭다면 괴롭겠죠. 하지만 그때 상황은 잘 기억이 안 나서 확실하지 않아요."

"그래도 기억이 나긴 하는 모양이군. 기억이 난다는 건 조금은 의식을 갖고 있었다는 의미고, 그 말은 예전보다 좀 더 뚜렷한 정신으로 라이칸스로프로 변할 수 있다는 의미겠지. 안 그런가?"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겁니까?"

"무슨 말이긴."


라자살라가 아간 옆으로 다가오더니 무릎을 꿇었다.


"이제야 내 실험이 제대로 들고 있다는 말이지."


그리고 당황해하는 아간을 무시하고 쭈글쭈글한 손을 들어 가슴에 갖다 댔다.


두근두근. 심장이 힘차게 뛰고 있는 게 느껴졌다. 라자살라는 희열이 엿보이는 얼굴로 말했다.


"얻어걸렸다고 해야 하나. 도중에 약을 끊었던 게 결과적으로 잘된 일이었군. 사실은 몸이 적응할 기간이 필요했던 거야. 무턱대로 밀어붙이기보다 한 걸음 물러서서 경과를 지켜봐야 했던 거지."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만."


왠지 불쾌한 기분이 들었다. 아간은 라자살라를 밀어내는 대신 자신이 뒤로 물러났다.


라자살라는 얼굴을 찌푸렸지만 별말 하지 않았다.

"잘 모르겠다니. 아무래도 머리도 다친 게 분명하군. 이리 뚜렷하게 변화가 이루어지고 있는데 모른단 말인가?"


라자살라가 고기 한 점을 집어 아간 눈앞에 흔들었다.

"채워도 채워지지 않던 허기짐이 지금은 어떤가. 피와 살점을 먹어야만 채워졌던 그 허기짐 말일세. 배가 부르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가? 아까 자네가 그랬지. 맛있다고."


아간은 저도 모르게 배를 쓰다듬었다. 부정할 수 없었다. 확실히 그랬다. 오히려 배가 부르면 불렀다.


"그게 바로 바뀌기 시작한다는 증거일세. 이제야 실험이 제대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소리겠지."

"그럼, 그럼···."


아간 눈빛에 서서히 기대감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빙긋 웃어보인 라자살라는, 그러나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이제 시작이라는 거지, 아직은 멀었어. 물론 다른 라이칸스로프와 다르게 진척도가 빠른 건 사실일세. 어쩌면 머지 않아 사람이 될 수 있겠지. 그러나 벌써부터 그런 생각하진 말게. 괜히 실망만 들 수도 있으니."


라자살라가 아간 어깨를 툭툭 두드려주었다.

아간은 웃는 건지 우는 건지 모를 표정으로 라자살라를 바라보았다. 아직 실감이 잘 안 되는 모양이다.


라자살라는 잠시 기다리라고 말하고는 방으로 들어갔다. 이내 그의 손에 약병이 들려 있었다. 안에는 우유 빛깔의 액체가 찰랑이고 있었다.


"내가 저번에 말했던가. 기가 막힌 약을 만들어주겠노라고. 여기 있네. 이게 그 약이야."


아간은 행여 힘줘서 깨뜨릴까 봐 조심히 받아들었다.


"이것도 마신 다음에 달빛을 쐬야 합니까?"

"아니. 쐴 생각도 하지 못할 걸. 어차피 기절하듯 잠들 테니."


그런 거면 수면제와 다를 바가 뭐가 있을까.


아간의 생각을 읽은 듯, 라자살라는 약병 뚜껑을 검지로 가볍게 치며 말했다.


"당연히 이것 나름의 효과도 있지. 갈수록 식욕이 돌아온다거나 피 냄새를 맡아도 버틸 수 있다거나."

"보름달이 떠오르는 날에도 변하지 않을 수 있다거나?"

"그것까진 아닐세."


라자살라가 담백하게 말했다. 아간은 조금 실망했는지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라자살라가 했던 말을 떠올리고는 다시 시선을 위로 올렸다.


"그렇다면 보름달이 떠오르는 날에 마시면 되겠군요. 깊이 잠을 자면 변하지 않을 수 있으니까."

"이제야 좀 머리가 돌아가는 모양이로군."

"하지만 약효가 잘 들을지는 미지수입니다. 저라고 보름달이 뜨는 날에 수면제를 먹어보지 않은 건 아닙니다. 그런데도 결국 변하고 말더군요."

"그야 보통 약이라면 그렇겠지. 하지만 이걸 누가 만들었는지 알면 그런 소리 못할걸."


재수 없는 말이었지만 부정할 순 없었다. 아간은 소중하게 약병을 품에 넣었다.


"그리고 이것도 가져가게."


라자살라가 천에 칭칭 감겨 있는 어떤 물건을 건네주었다.


"이건 뭐죠?"

"풀어보면 알게 돼."


천을 푼 아간은 결코 반갑지 않은 기분이 들었다.


그건 검은 갈퀴의 무기, 늑대포식자였다. 구불구불한 검신을 보는 순간 아간은 복부에 통증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전리품이라고 생각하게."

"전 검을 다룰 줄 모릅니다. 있어봤자 괜한 오해만 살 것 같은데요."

"그건 자네 사정이고. 벽에다 걸어놓든 바닥에 내려놓든 자네 마음대로 하게."


그럼에도 아간이 내키지 않는다는 얼굴을 하자 라자살라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럼 팔아버리던지. 내참, 기껏 생각해서 챙겨줬더니만."

"아뇨, 싫다는 게 아니라···."

"그래도 이거 한 가지는 알아둬. 적어도 보통 무기는 아니라는 것을. 꼬리별 영주가 갖고 있는 것보다는 질이 떨어지지만 그건 그 검이 특별한 거고. 이 정도만 되도 어디 가서 떨어진다는 소린 듣지 않을 거다."


그리고 라자살라는 무기 관리하는 법을 간단하게 알려주었다. 아간은 다른 건 몰라도 기름을 구해야 한다는 말에 눈살을 찌푸렸다.


아무리 값싼 기름을 산다 해도 무두장이 입장에서는 비싼 가격이었다.


"어차피 싸움판에서 돈 많이 벌었잖은가. 그거 좀 쓰게."


할 말을 마친 라자살라는 짧게 박수를 쳤다. 대화는 이쯤에서 끝내려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밖에 비바람이 불었기에 금방 떠날 수는 없었다. 조금이라도 밖에 서 있다간 홀딱 젖어버리고 말 것이다.


라자살라는 비가 그칠 때까지만이라도 있으라고 권했다. 아간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라이트 씨를 계속 혼자 둘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하는 수 없지. 다만 유의할 점이 있어. 산길을 타고 곧바로 마을 쪽으로 내려가지 말고 반대편으로 돌아서 가게."

"무슨 일 있습니까?"

"꼬리별 영주가 산이나 숲에서 오는 사람을 검문하라고 지시했거든. 조만간 끝날 것 같긴 하지만 그래도 조심해서 나쁠 건 없겠지."

"혹시, 검은 갈퀴가 죽었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까?"

"글쎄."


라자살라는 확답을 주지 않았다. 그런 건 알아서 생각해보라는 듯했다.


아간이 문을 열었다.


야트막하게 들려오던 빗소리가 갑작스럽게 들이닥쳤다. 바닥에 튀어오르는 물방울을 묵묵히 보던 아간은 라자살라에게 말했다.


"검은 갈퀴와 잠시 대화를 나누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싸우던 중에? 팔자 좋군."

"서로 지쳐서 잠시 쉬는 시간이 있었지요. 아무튼 그가 제게 그러더군요. 왜 자살하지 않고 살고 있느냐고. 아무리 본의 아니게 변했다 하더라도 스스로 목숨을 끊었어야 했다고 말했습니다."

"염병. 자기 일 아니라고 함부로 지껄이는군. 그래서 뭐라고 해줬나. 개소리 하지 말라고 했나?"

"아들이 살아 있어서 못했다고 했습니다."

"그게 사실이더라도 그런 변명을 하는 건 좋지 않아. 그냥 당당하게 말하게. 살고 싶어서 살았다고."

"그렇군요."


아간이 읊조렸다. 라자살라는 고개를 살짝 삐딱하게 기울이고는 말했다.


"그래. 그러면 돼."


아간은 말없이 가만히 있었다. 라자살라는 문가로 다가가 아간과 시선을 맞췄다.


아간의 눈동자는 다소 가라앉아 있었다. 라자살라는, 잠시 후 미간을 좁혔다. 그리고 뭔가 확인하려는 것처럼 고개를 앞으로 뺐다.


차분하고도 담담한 눈빛. 전과 달리 동요와 좌절이 뒤섞인 기색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 라자살라는 미묘한 웃음을 보이며 말했다.


"잘 가게."



******



금방이라도 땅으로 떨어질 것처럼 무거워 보이는 비구름이 하늘 이편에서 저편까지 쭉 펼쳐져 있었다.


라이트는 그 구름을 유심히 보다가 불현듯 고개를 돌렸다. 그의 앞에는 조사대원 한 명이 서 있었다.


그는 뒤에서 비바람이 몰아쳐도 별로 상관하지 않은 듯했다. 집으로 들어오라고 권했지만 서 있는 게 편하다고 한사코 거부했다.


라이트는 이 자기 주장이 강한 사람의 이름이 뭐였는지 기억해냈다.


'로이벤이라고 했었지.'


"불쑥 찾아와서 미안하게 됐습니다. 몸도 다 낫지 않았을 텐데요."

"아뇨. 그보다 하려던 말이 뭐였죠?"

"다쳤을 당시 어떤 일이 있었는지 묻기 위해 왔습니다."

"아. 그랬죠."


라이트는 생각에 잠긴 눈으로 로이벤 어깨 너머를 바라보았다. 로이벤은 라이트가 또 발작하지 않을까 염려했다.


다행히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냥 곰이 발톱을 휘두른 것 말고는 딱히 안 떠오르는군요."

"곰? 확실히 곰이었습니까?"

"네. 곰이었어요."

"저번에는 기억이 잘 안 난다고 들었었는데요."

"그때는 그랬죠. 지금보다 훨씬 몸 상태가 안 좋았으니까요. 여러모로, 정신도 없었고."


로이벤은 뚫어져라 라이트를 쳐다보았다. 라이트는 물이라도 마시지 않겠느냐고 권했지만 곧 포기했다.


로이벤은 말도 않고 가만히 서서 관찰하기만 했다.

"라이칸스로프가 아니었습니까?"


한참이나 말없이 있던 로이벤이 갑자기 물었다. 라이트는 고개를 갸웃했다.


"늑대 괴물을 말하는 건가요? 아뇨. 그랬다면 난 이미 죽었겠죠."

"그렇습니다. 당신은 이미 죽었습니다."


라이트는 당황했다. 멀쩡히 살고 있는 사람한테 죽었다고 말하다니. 당장 사과하라고 윽박질러도 될 법했지만 라이트는 그러지 않았다.


당황도 잠시, 라이트는 의문과 흥미를 품은 채 물었다.


"어째서죠?"

"나도 모르죠. 하지만 당신이 그때 입었던 부상을 보면 결코 살 수 없는 몸이었습니다. 설령 신께서 기적을 내리신다 해도 말이죠."

"사제님이 들으셨으면 불손한 말이라고 했겠군요."

"혹시 사제였습니까?"

"설마요. 보다시피 무두장이죠."

"다행이군요."


진심인가 아니면 농담인가. 어쨌든 매사에 밝은 라이트마저도 곤혹스럽게 만드는 걸 보면 평범한 사람은 아니었다.


로이벤은 계속 라이트를 주시했다. 이러다 몸에 구멍이라도 나겠다는 생각이 들 무렵, 로이벤이 마침내 시선을 뗐다.


"사과하겠습니다. 요즘 일어난 소동 때문에 머리가 복잡해서. 나도 모르게 실언을 했군요."

"괜찮아요. 대화하는 건 언제나 즐거우니까."

"밝은 분이군요. 그건 그렇고."


로이벤은 집안을 슬쩍 보는 시늉을 했다.

"내가 알기론 한 명 더 있던 걸로 아는데. 어디 갔죠?"

"잠시 산책 갔어요."

"이 날씨에?"


라이트는 어깨만 으쓱였다. 로이벤은 젖은 머리칼을 뒤로 넘기면서 말했다.

"함부로 돌아다니면 곤란하니다. 영주님께서 공표하셨다시피 봇짐장수나 상단이 아니고서는 당분간은 밖으로 나가는 걸 자제하라고 하셨으니까요. 그 때문에 사냥꾼도 산에 오래 있지 못하고 있지요."

"숲이나 산에 들어가는 걸 금하는 거지, 이 근처에 돌아다니는 건 괜찮잖아요?"

"내가 생각하는 근처와 다르게 생각하는가 보군요."

"사람마다 생각이 다르긴 하니까요. 이런 날씨를 산책하기 좋은 날이라고 여기는 사람이 있는 것처럼."


로이벤은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유약한 인상이라 소극적일 거라 생각했는데 제법 지지 않고 잘 받아쳤다.


"어쨌든 묻고 싶은 건 다 물었죠? 계속 서 있으면 몸살 걸리니 얼른 돌아가요."

"흐음."


로이벤은 아직 물어볼 게 남은 것처럼 고집스레 팔짱을 꼈다. 하지만 라이트가 말한 대로 으슬으슬 추워지기 시작했다.


하는 수없이 물러나기로 했다. 요즘 잠도 제대로 못 자고 조사하러 다닌 터라 피로가 잔뜩 쌓여 있었다.


로이벤은 아무쪼록 건강해지길 바란다는 말을 남기고 뒤돌았다. 그러나 얼마 안 있어 바로 라이트에게 몸을 틀더니 말했다.


"혹시 동료가 돌아오면 검은 갈퀴는 어디로 갔는지 물어봐주십시오."

"검은, 뭐라고요?"

"검은 갈퀴. 싸움판을 구경한 사람들 말로는 당신 동료와 마지막으로 붙었던 상대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이후로 모습을 보인 적이 없어서 말이죠."

"뭐, 알겠어요. 오면 물어볼게요."

"꼭 물어봐주세요."


라이트는 하늘이 갈라져도 물어보겠노라고 답했다. 로이벤은 그거면 됐다고 고개를 끄덕이고는 자리를 떴다.


찰팍찰팍, 하고 떠나는 발걸음 소리가 빗소리와 겹쳐졌다.


라이트는 긴 한숨을 내쉬며 바닥에 앉았다. 그리고 진흙탕처럼 변한 땅을 바라보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와야 물어보지."


아간이 불시에 자리를 비운 적은 많았다. 그러나 이렇게 오래도록 안 나타난 건 처음이었다.


설마 영영 떠난 것일까. 무두질을 하는 게 귀찮아서, 아픈 자신을 돌보는 게 힘들어서 아예 떠나버린 건 아닐까.


라이트는 문가에 몸을 기댔다. 빗방울이 몸을 적셨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어차피 외로움으로 온몸이 젖어 있어 상관없었다.


'오늘은 그레로도 찾아오지 않네. 무슨 일 있으려나.'


아간이 없는 사이, 라이트를 돌봐준 사람은 그레로였다. 손길이 좀 서투르고 섬세하지 못했지만 그래도 열심히 붕대도 갈아주고 연고도 발라주었다.


'조만간 이 빚을 갚아야겠다고 생각했었는데.'


자신 말고는 주변에 아무도 없는 황량한 풍경을 보며 라이트는 괜히 마음이 울적해졌다.


그때, 비 안개를 뚫고 누군가 나타났다. 익숙한 걸음걸이, 익숙한 체형, 익숙한 그림자.


라이트는 혹시 귀신이 아닌가 싶어 눈가를 비볐다.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시간이 지날수록 더더욱 뚜렷해졌다.


"라이트 씨?"


라이트는 상대가 길다란 무언가를 가지고 있는 걸 발견했다. 또한 평소 입던 옷이 아닌 새 옷을 입고 있는 것도 알아챘다.


하지만 라이트는 그 어느 것도 지적하지 않은 채 밝은 미소만 지었다. 마침내 그의 소중한 무두장이 동료, 아간이 돌아왔기 때문이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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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칸슬로프 연재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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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변화 (1) 22.09.15 62 4 23쪽
43 달빛 손톱과 검은 갈퀴 (4) 22.09.14 56 4 18쪽
42 달빛 손톱과 검은 갈퀴 (3) 22.09.13 58 3 16쪽
41 달빛 손톱과 검은 갈퀴 (2) 22.09.12 59 4 20쪽
40 달빛 손톱과 검은 갈퀴 (1) 22.09.11 60 4 19쪽
39 피로 물든 강물 (3) 22.09.10 55 4 15쪽
38 피로 물든 강물 (2) 22.09.09 51 4 19쪽
37 피로 물든 강물 (1) 22.09.08 53 4 17쪽
36 선전 포고 22.09.07 54 4 22쪽
35 엇갈림 (3) 22.09.06 53 4 18쪽
34 엇갈림 (2) 22.09.05 50 3 13쪽
33 엇갈림 (1) 22.09.04 52 3 14쪽
32 검은 갈퀴 22.09.03 58 4 20쪽
31 달빛 손톱 (5) 22.09.02 55 5 26쪽
30 달빛 손톱 (4) +1 22.09.01 54 4 14쪽
29 달빛 손톱 (3) 22.08.31 56 4 20쪽
28 달빛 손톱 (2) 22.08.30 54 4 13쪽
27 달빛 손톱 (1) 22.08.29 58 4 20쪽
26 잠든 야수 (6) 22.08.28 61 4 16쪽
25 잠든 야수 (5) 22.08.27 55 5 18쪽
24 잠든 야수 (4) 22.08.26 54 3 19쪽
23 잠든 야수 (3) 22.08.25 61 4 17쪽
22 잠든 야수 (2) 22.08.24 58 4 17쪽
21 잠든 야수 (1) 22.08.23 65 4 20쪽
20 피 냄새 (7) 22.08.22 71 4 13쪽
19 피 냄새 (6) 22.08.21 60 4 17쪽
18 피 냄새 (5) 22.08.20 66 4 18쪽
17 피 냄새 (4) 22.08.19 72 4 15쪽
16 피 냄새 (3) 22.08.18 76 3 16쪽
15 피 냄새 (2) 22.08.17 83 5 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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