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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미달 님의 서재입니다.

라이칸슬로프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완결

다미달
작품등록일 :
2022.08.01 22:22
최근연재일 :
2023.03.28 22:20
연재수 :
134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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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4
글자수 :
1,060,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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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9.11 2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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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9쪽

달빛 손톱과 검은 갈퀴 (1)

DUMMY

사냥꾼 롬은 뻐근해진 목덜미를 주물렀다. 가능하면 눈가도 비비고 싶었지만 손이 기름과 피로 물들어 있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롬은, 배가 좌우로 벌어진 고라니 사체로부터 물러났다. 주위에는 횃불을 든 사람 몇 명이 서 있었다.


롬은 그들을 천천히 둘러보다가 한 사람 앞에서 멈췄다. 다른 사람들은 그렇다 쳐도 영주까지 이 자리에 올 줄이야.


아무리 축제 막바지라고 해도 아직 성에 남아 있는 다른 귀족들이 있었다. 손님을 두고 성을 비운다는 건 자신이 알기로 굉장히 실례되는 일이었다.


물론 롬은 머릿속에서만 의문을 표할 뿐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주제넘은 짓이기도 했지만 지금은 이 상황에 집중해야 할 때였다.


"호랑이나 곰이 한 것 같진 않습니다. 설혹 했다고 해도 아직 독립한지 얼마 안 된, 경험이 부족한 녀석일 것입니다."

"어째서 그렇지?"


게티아르가 물었다. 롬은 한쪽 무릎을 꿇고는 사체 복부를 가리켰다.


"이걸 보십시오. 가죽이 지저분하게 찢겨져 있잖습니까? 게다가 목덜미에 난 이빨 자국도 선명하게 새겨져 있지도 않고요. 아직 이빨과 발톱이 날카롭지 않아 생긴 흔적일 겁니다."

"다른 짐승이 했을 가능성은 없나?"

"있긴 합니다. 굳이 말씀을 드리자면..그러니까 늑대나 산돼지라면 가능할 듯합니다."

"산돼지도 이런 끔찍한 짓을 벌일 수도 있소?"


조사대원 가나마가 회의에 찬 얼굴로 물었다. 롬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놈들은 날카로운 엄니를 갖고 있소. 상황에 따라선 맹수도 위협적으로 다가올 정도로 강력한 무기지. 그러니 고라니라면 오죽하겠소."

"아무리 그렇다 쳐도···."


가나마는 시선을 돌렸다.


"사체가 하나가 아니라 무려 여덞 개나 되잖소. 이 말고도 도중에 떠내려간 사체가 있다고 가정하면 두 자릿 수는 넘겠지."


그들이 있는 곳은 강 하부였다. 강을 타고 떠내려온 사체가 바위나 수초에 걸리기라도 한 모양인지 이곳에 쌓여 있었다.


한 고라니 사체의 배에는 아직도 살아 있는 물고기가 펄떡거리고 있었다.


게티아르가 말없이 그레로를 쳐다보았다. 그레로는 허리를 숙여야 할지 머리를 숙여야 할지 몰라 허둥댔다.


편하게 말하라는 말을 듣지 않았으면 그레로는 거의 절한 상태에서 말했을 것이다.


"예, 예. 황송합니다. 고귀하신 영주님. 정말 그땐 놀라서 죽는 줄 알았죠. 강이 피로 물들어 있었다고 하면 믿으실 건가요? 전 안 믿어요. 직접 보지 않고서는 절대로 안 믿죠. 근데 웬걸요. 보고야 말았는데. 사체와 피가 강을 타고 흐르는 걸 봤단 말이죠."

"얼마나 많았지?"

"수는 세지 못했지만 어쨌든 열 마리는 넘었습니다. 지금은 고라니만 보이지만 그땐 토끼랑 너구리도 있었죠. 하나 같이 끔찍한 모습이었습니다."

"이것처럼 배가 갈라져 있었다는 건가."


그레로는 열렬히 고개를 끄덕였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강에 피도 흘렀어요. 푸르고 맑던 그 물이 빨갛게 변해 있었단 말입니다. 마치 악마가 물장구를 친 것 같았죠."

"물장구?"


재밌는 표현이라고 생각해 가나마는 피식 웃었다. 그러나 다들 진지한 얼굴을 하고 있자 얼른 웃음을 거뒀다.


롬은 자신의 생각을 영주에게 말해주었다.


"물론 흔치 않은 일인 건 맞습니다. 그러나 아예 불가능한 일이냐고 물으신다면 그건 아니라고 답하고 싶습니다. 지금처럼 날이 길고 밤이 짧은 계절에는 당연히 짐승들도 활발히 활동합니다. 그러다 보면 맹수의 영역을 침범하는 일도 빈번해져서 이렇게 떼죽음을 당하곤 하죠."

"하지만 그걸 감안해도 사체가 많은 것 같소만."


로이벤이 침착한 어조로 물었다. 롬은 기다렸다는 듯 이제껏 사냥질을 해오면서 겪었던 특이한 일들을 말해주었다.


조금씩 과장을 섞어서 얘기하긴 했지만 롬은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았다. 어쨌든 사실을 기반으로 한 말이기 때문이다.


롬은 기나긴 말 끝에 '그러므로 그렇게까지 걱정할 일은 아닌 것 같다.' 는 사견을 아주 조심스레 덧붙인 뒤 물러났다.


사람들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한 곳으로 집중되었다. 게티아르는 생각에 잠긴 눈으로 강물을 바라보다가 그레로에게 물었다.


"내 듣기로 오늘 싸움판에 흔치 않은 경기가 나왔다고 하더군. 그 자리에 검은 갈퀴도 올라섰다는 얘기를 들었다. 혹시 너도 그 자리에 있었나?"

"예예, 고귀하신 영주님. 영광스럽게도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그럼 검은 갈퀴가 어디로 갔는지 알고 있나?"

"아, 아뇨. 모릅니다. 고귀하신 영주님."


가나마는 그놈의 '고귀하신' 이란 표현은 그만 썼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게티아르는 팔짱을 낀 채 손가락을 두드렸다. 검은 갈퀴가 한 말이 절로 떠올랐다.


-내 직감이 말해주고 있소. 이곳에 라이칸스로프가 있다고.


'혹시..'


게티아르가 이내 고개를 들었다. 그는 그레로에게 자리를 비키라고 말한 뒤 곁에 있는 병사에게 지시했다.


"경비대장에게 가서 전하라. 도시를 방비하고 바깥 마을에도 순찰병을 늘려 경계를 강화하라고."


가나마는 놀랐다.


"영주님."

"로이벤, 가나마. 두 사람은 병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다른 조사대원들을 이끌고 강 주변을 수색하라. 또다른 사체가 있는지, 혹 희생자가 있진 않은지 면밀히 살펴야 한다."

"수색 범위는 어디까지입니까?"


로이벤이 물었다.


"여기부터 미리내 산 부근까지. 본인 판단 하에 필요하다면 그 이상 해도 좋다. 다만 숲이나 산 안쪽까지 들어가진 말도록. 위험할 수 있다. 그리고 롬."

"예."

"방금 들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계속 산에 기거할 생각인가? 자식도 있는 걸로 아는데."

"아, 어제부터 마을로 내려와 있었습니다. 축제 끝나기 전까지 아내와 같이 지내고자 하여 그랬습니다."

"그런가. 다행이군."

"혹시 명하실 일이라도 있으신지요. 저도 도와드릴 일이 있으면 하고 싶습니다."


됐다고 말하려던 게티아르는 생각을 바꿨다. 그는 롬을 빤히 쳐다보다가 말했다.


"어쩌면 자네이기에 할 수도 있을 것 같군. 누구보다도 닻별 산에 대해 잘 알 테니."

"지식으로만 따지면 산지기 영감님이 저보다 많이 알고 있죠. 거동만 불편하지 않았다면 날라다녔을 겁니다. 어쨌든 주저말고 말씀해주십시오."

"그렇군. 그럼 오늘 밤만은 산에 머물러 있길 원한다. 깊은 곳까진 말고, 혹 무슨 일이 벌어지면 언제든지 벗어날 수 있는 지점에서."

"무슨 일이라 함은,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지금처럼 여러 사체가 한 곳에 동시에 발견되는 경우. 아니면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울음 소리나 발자국, 털 같은 흔적을 발견했을 경우다. 라이칸스로프처럼."


사람들 사이에서 충격이 오고 갔다. 가능한 한 다양한 경우의 수를 염두해두고 있던 로이벤도 입술을 꾹 깨물었다.


가나마는 더듬거리며 말했다.


"여, 영주님. 정말 그 늑대 괴물이 한 짓이라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이걸 보고도 달리 말할 생각인가?"


게티아르가 덤덤한 어조로 대꾸했다. 가나마는 고개를 흔드려다가 문득 누구 앞에 있는 건지 깨닫고는 자세를 바로 잡았다.


"하지만 앞서 사냥꾼이 말했던 것처럼 사체 훼손도가 심하진 않습니다. 정말 라이칸스로프가 했다면 형체도 남기지 않을 정도로 갈기갈기 찢어놨을 겁니다. 게다가 그 괴물이 근처에 있다면 벌써 어떤 일이라도 벌어졌을 겁니다. 하지만 최근까지 불미스러운 일이 일어난 적은 없었습니다."

"무두장이."


게티아르가 말했다.


"내가 알기로 한 무두장이가 크게 다친 걸로 안다. 충분히 불미스러운 일이지."

"그렇긴 하지만···."


가나마는 어깨를 움츠렸다. 그깟 무두장이가 다친 게 뭐가 중요하다고 묻는 듯했다. 그건 단지 사고일 뿐이며 이것과는 다른 문제라고 생각했다.


게티아르는 로이벤을 쳐다보았다. 동료 의견에 어떻게 생각하냐고 묻는 것 같았다. 로이벤은 고개를 숙여보이고는 말했다.


"저도 가나마와 비슷한 생각을 마음 한 편에 품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라이칸스로프가 했느냐가 중요한 게 아닌 일단 사건 자체에 집중하고 싶습니다. 어쩌면 어느 미치광이가 저지른 일일 수도 있으니까요."

"미치광이?"

"가능한 한 많은 수를 염두해두어야 하니 말입니다. 맹수나 괴물만이 아니라 사람도 저지를 수 있는 일입니다."


듣고 있던 롬이 점잖게 끼어들었다.


"미안하지만 사람일 가능성은 대단히 적소. 사람이 짐승을 이 지경으로 만드려면 단검이나 몽둥이로 두들겨 패야 했을 거요. 하지만 그러면 내가 모를 리가 없소. 금방 티가 나니까. 그렇다고 사람이 손톱이나 이빨로 하진 않았을 거 아니오. 설령 했다 해도 짐승 가죽은 무척 질기지. 그런 걸로 상처가 나는 경우는 거의 없소."

"한정 지어놓고 보지 말자는 얘기로 한 거요. 다른 뜻은 없었소."


로이벤과 롬은 적당히 말을 끝내고 물러났다. 게티아르는 천천히 주위에 있는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어찌 됐든 흔치 않은 일인 것만은 확실하다. 원인이 무엇인지 정확히 밝히진 못하더라도 이게 앞으로 더한 일을 불러일으킬 전조 현상은 아닌지는 알아놔야 할 것이다."


주변인들은 고개를 숙였다. 게티아르는 한 명씩 바라보면서 명령을 내렸다.


"병사, 호위는 됐으니 얼른 경비대장에게 가서 내가 했던 말을 전하라. 로이벤, 가나마. 어떤 것이든 좋으니 조사하다가 수상한 흔적을 발견하면 바로 보고하라. 아닐 거라 넘겨 짚은 흔적이 나중에 결정적인 증거가 될 수도 있으니. 롬, 그대가 보고를 하건 안 하건 상관없이 포상을 주도록 하겠다. 그러니 보고할 일을 찾겠다고 무리하게 돌아다니지 말도록."


그리고 게티아르는 슬쩍 가나마를 쳐다봤다. 가나마는 붉어진 얼굴로 우물쭈물하다가 고개를 숙였다.


게티아르는 별 말 않고 넘어갔다. 대신 저 멀리 있는 그레로를 쳐다보았다. 어정거리면서도 힐긋힐긋 이쪽을 보던 그레로는 게티아르의 시선에 헐레벌떡 뛰어왔다.


무슨 말을 나눴는지 모르지만 잔뜩 긴장된 분위기가 느껴졌다. 그레로는 괜히 위축이 되었다.


"만약 검은 갈퀴를 발견하면 성문지기에게 얘기하라. 포상을 주겠다."

"예? 아, 예. 고-."

"그건 그만해도 좋다."

"-영주님. 알겠습니다!"


그레로가 힘껏 외쳤다. 말이 이상하게 이어졌지만 잔뜩 긴장한 탓에 알아채지 못했다.


주변 사람들-특히 로이벤과 가나마-은 졸지에 영주를 작고하게 만들어버린 저 거지에게 뭐라 혼쭐을 내야 할지 고민했다.


"그리고 축제는 오늘로 끝이로군."

"예? 아직 내일이 남았습니다만.."

"아니. 끝이다. 내일은 없으니 그리 알도록."


게티아르는 할 말을 마치자마자 곧장 성으로 돌아갔다.



******



광증을 부르는 밤이다.


검은 갈퀴는 사방에 널려 있는 사체들을 보며 그리 생각했다. 그는 시선을 옮겼다. 계곡물에 반쯤 몸을 담그고 있는 사체가 눈에 보였다.


좌우로 쩍 갈라진 복부 사이로 내용물이 뱀 같이 길게 늘어져 있었다. 마치 구렁이가 내장을 파먹고 밖으로 나온 것 같은 모습이었다.


계곡물은 창자와 핏덩이를 꿀떡꿀떡 마셔댔다. 근처에 있는 물돌과 자갈에도 피가 묻어 있었다.


그 광경은 입가에 피를 묻힌 맹수를 연상케 했다.


그나마 아까보다는 맑아진 편이다. 처음 이곳에 발을 들였을 때는 계곡물이 아니라 핏물이 흐르고 있었다.


검은 갈퀴는 한쪽 무릎을 꿇고서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바닥에 새겨진 발바닥 혹은 손바닥을 보니 여전히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 말은 사람의 힘으로 이 난장판을 만들었다는 얘기가 됐다.


'특이한 일이군.'


검은 갈퀴는 달이 떠 있는지 재차 확인했다. 진작 변했어도 이상하지 않을 시간이었다. 혹시 흔적을 감추기 위해 억지로 참고 있는 걸까.


그렇다는 말은 이 근처에 숨어서 자신을 보고 있을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


가능성이 적은 일이었지만 방심은 금물이었다. 녀석은 인간이어도 괴물 같은 힘을 낼 수 있다. 짐승 가죽을 손으로 뜯어버린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검은 갈퀴가 손을 뒤로 돌렸다. 익숙한 감촉이 느껴지자 그는 미소를 지었다.


그의 등에 장검이 매달려 있었다. 늑대포식자. 검의 이름이다.


늑대포식자는 여타 다른 검과 달리 검신이 곧게 서 있지 않았다. 마치 물결이 치는 것처럼 날이 부드러운 곡선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어설프게 사용하면 일반적인 검만 못하지만 출중한 검사의 손에 들렸을 때는 이야기가 달라진다.


어떻게 베고 찌르느냐에 따라 피해를 얼마 못 줄 수도, 상처를 후벼파서 출혈이 생기게 만들 수도 있었다.


이 때문에 어떤 검사들은 겉멋만 부린다며 비웃기도 했다. 검은 갈퀴에게 된통 깨진 뒤로 다시는 그런 말을 꺼내지 못했지만.


어쨌든 검은 갈퀴가 라이칸스로프를 사냥한 숫자만 해도 세 마리였다. 그 세 마리를 잡을 때 늑대포식자가 지대한 공헌을 했다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검은 갈퀴는 늑대포식자를 제 가족처럼 여겼다.


모든 연을 끊고 홀로 살아가고 있는 지금, 늑대포식자는 그에게 있어 유일하게 남은 가족이라고도 볼 수 있었다.


검은 갈퀴는 왼손으로 검자루를 쥔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지러이 펼쳐진 흔적 속에 발자취를 찾는 건 쉬운 일은 아니었다.


특히 숲의 그림자가 두텁게 깔린 밤에서는.


하지만 검은 갈퀴는 뛰어난 관찰력으로 하나의 흔적을 발견했다. 급하지 않고 천천히 좇아가던 검은 갈퀴의 시선이 한곳에 머물렀다.


'계곡물을 따라 올라간 건가.'


물을 거슬러 올라가는 건 흔적을 감추기 좋은 행동 중 하나였다. 아무리 바닥에 깊은 발자국을 새긴다 해도 물이 금방 지워버리기 때문이다.


이 말은, 녀석이 아직까진 제정신을 유지하고 있다는 소리였다. 하지만 검은 갈퀴는 확신했다.


정신이 아무리 굳건하다 한들 결국 괴물의 본성을 이기진 못할 거라고.


검은 갈퀴는 사냥감이 그러했던 것처럼 자신 또한 계곡물을 거슬러 올라갔다.



******



우적우적.


다리뼈가 부러진 토끼는 도망치지도 못하고 얌전히 잡아먹히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흘리는 눈물이 피눈물이 될 거라는 걸 알고 있었을까.


그저 빛바랜 눈으로 자신을 씹어먹는 포식자를 바라볼 뿐이었다.


아간은 반쯤 목이 덜렁거리는 토끼를 몇 번 더 씹다가 앞으로 던졌다. 그렇게 토끼는 짧은 생을 마치고 물줄기 속으로 빠져들었다.


아간은 가파른 절벽에 서 있었다. 절벽 밑에는 폭포가 콸콸거리며 쏟아지고 있었다.


골이 흔들릴 정도로 커다란 소리다. 그럼에도 아간은 이곳이 좋았다. 계속 폭포 소리를 듣고 있자니 자연스레 귀가 먹먹해졌다.


덕분에 소리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


아간은 고개를 내렸다. 손바닥에 피가 고여 있었다. 고인 피 안에 달빛이 고여 있었다.


그를 미치게 만드는 피와 달빛이 이처럼 가까이 있었다. 그의 팔이 제멋대로 탈바꿈을 하기 시작했다.


검고 빳빳한 털이 팔뚝과 손등으로부터 솟아나왔다. 손톱이 길어지고 손가락 관절이 굵어졌다.


하지만 아간은 남의 일 보는 것처럼 무심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문득 아간은 어째서 자신이 이곳까지 왔는지 생각했다.


검은 갈퀴가 말했다. 자신에게서 도망치지 못할 거라고. 혹시 그 말을 듣고 겁이 나기라도 한 걸까.


아간은 진지하게 고민했고 이내 부정했다.


그 남자가 다른 사람과는 다르다는 건 인정한다. 어디서 뭘 했는지 몰라도 실력이 출중하다는 건 사실이니까.


냄새가 거의 나지 않아 당황했던 것도 인정한다. 어쨌든 지문 같이 사람마다 고유의 냄새가 있는 법이다.


아무리 몸을 깨끗이 씻는다 해도 피부 깊숙히 배어져 있는 살내음은 사라지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폐부까지 깊이 들이마시면 그놈의 냄새를 희미하게나마 맡을 수 있다. 그러니 그 또한 무서울 건 전혀 없었다.


무섭다고 한다면, 그래. 내 정체가 남들에게 밝혀지는 것이겠지.


특히 라이트가 알아차리는 게 제일 두려운 일이었다. 유일하게 안식처를 제공해준 그 순박한 무두장이가 상처 입을 걸 생각하니 도저히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이 깊은 곳까지 들어온 것이다.


방해를 받거나 원한을 받는 일 없이, 오로지 이 순간에 집중할 수 있었다. 그걸 위해 아간은 절벽에 서서 아낌없이 달빛을 맞고 있었다.


어느새 아간은 라이칸스로프로 변해 있었다. 극심한 자기 혐오에 휩싸여 변해 왔었던 전과 달리 지금은 차분해보였다.


이제 극복한 것일까. 아니, 그게 아니었다. 분노가 정점에 이르면 되려 차분해지는 것처럼 이 또한 마찬가지였다.


아간은 잔잔한 분노를 느끼며 고개를 돌렸다. 자신을 상대하기 위해 굳이 이곳까지 찾아온 한 인물이 눈에 들어왔다.


저 자의 이름은, 검은 갈퀴.


아간은 마음속으로 담담히 읊조렸다.


'평화로운 일상을 깨뜨리려 하는 놈. 녀석은 내 정체를 알고 있다. 그러니 죽여야 해.'


깊게 생각할 필요가 없었다. 보이니까 죽인다. 라자살라가 전에 말했던 대로. 그대로 실행하는 것이 아간이 내린 결론이었다.


'크군.'


한편, 검은 갈퀴는 순수하게 감탄했다. 3미터는 족히 될 법했다. 눈대중으로 계산해보니 마지막으로 만난 라이칸스로프보다 약 60센티미터 더 컸다.


검은 갈퀴가 무기를 뽑아들었다. 특이한 모양을 한 검신은 사방에 달빛을 흩뿌리고 있었다. 검신 자체가 월장석이 된 것 같았다.


"배고픈가?"


검은 갈퀴는 말하자마자 기이함을 느꼈다. 지금까지 한 번도 라이칸스로프에게 말을 건 적이 없었다. 어차피 변하면 못 알아먹기 때문이다.


그러나 왠지 이 라이칸스로프는 알아들을 것 같았다. 과연 아간은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검은 갈퀴는 주변에 죽어 있는 짐승을 가리켰다.


"이렇게 많이 먹었는데?"

"그래도."


아간이 입을 열었다. 검은 갈퀴는 눈썹을 꿈틀였다.


"배고파."


죽 벌어진 입가 사이로 침이 흘러내렸다. 검은 갈퀴는 씩 웃었다. 동의한다는 듯 한 차례 고개를 끄덕인 검은 갈퀴는 배를 쓰다듬는 시늉을 했다.


"그래. 나도 그렇다."


검은 갈퀴가 양손으로 늑대포식자를 들었다. 드높이 솟아오른 칼날이 사선으로 기울었다.


칼끝이 라이칸스로프의 미간을 정확히 겨누었다.


"밥 먹을 시간이다."


작가의말

즐거운 한가위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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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달빛 손톱과 검은 갈퀴 (3) 22.09.13 57 3 16쪽
41 달빛 손톱과 검은 갈퀴 (2) 22.09.12 59 4 20쪽
» 달빛 손톱과 검은 갈퀴 (1) 22.09.11 60 4 19쪽
39 피로 물든 강물 (3) 22.09.10 55 4 15쪽
38 피로 물든 강물 (2) 22.09.09 51 4 19쪽
37 피로 물든 강물 (1) 22.09.08 53 4 17쪽
36 선전 포고 22.09.07 54 4 22쪽
35 엇갈림 (3) 22.09.06 53 4 18쪽
34 엇갈림 (2) 22.09.05 49 3 13쪽
33 엇갈림 (1) 22.09.04 51 3 14쪽
32 검은 갈퀴 22.09.03 58 4 20쪽
31 달빛 손톱 (5) 22.09.02 54 5 26쪽
30 달빛 손톱 (4) +1 22.09.01 54 4 14쪽
29 달빛 손톱 (3) 22.08.31 56 4 20쪽
28 달빛 손톱 (2) 22.08.30 54 4 13쪽
27 달빛 손톱 (1) 22.08.29 57 4 20쪽
26 잠든 야수 (6) 22.08.28 61 4 16쪽
25 잠든 야수 (5) 22.08.27 54 5 18쪽
24 잠든 야수 (4) 22.08.26 54 3 19쪽
23 잠든 야수 (3) 22.08.25 61 4 17쪽
22 잠든 야수 (2) 22.08.24 58 4 17쪽
21 잠든 야수 (1) 22.08.23 65 4 2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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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피 냄새 (5) 22.08.20 66 4 1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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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피 냄새 (3) 22.08.18 75 3 16쪽
15 피 냄새 (2) 22.08.17 83 5 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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