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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미달 님의 서재입니다.

라이칸슬로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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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다미달
작품등록일 :
2022.08.01 22:22
최근연재일 :
2023.03.28 22:20
연재수 :
134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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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5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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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4
글자수 :
1,060,207

작성
22.08.27 2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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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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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8쪽

잠든 야수 (5)

DUMMY

아간은 벽에 머리를 기대고는 눈을 감고 있었다. 눈가에는 짙은 그림자가 내려앉아 있었다.


바위처럼 꼼짝 않고 가만히 앉아 있던 아간은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자 번쩍 눈을 떴다.


문을 연 사람은 의원이었다. 아간을 발견한 의원은 고갯짓으로 안을 가리켰다.


"깨어 있는···."


아간이 입을 열자 의원은 빠르게 손을 휘저었다. 그리고 입술에 검지를 올렸다. 아간은 고개를 끄덕였다.


"들어가시오."


의원이 옆으로 비켜서면서 잔뜩 낮춘 목소리로 말했다.


안으로 들어간 아간은 하마터면 헛구역질을 할 뻔했다. 온갖 냄새가 나서 멀쩡히 서 있기가 힘들었다.


덧창은 조금 열려 있었다. 햇살이 기다란 직사각형 모양을 띄고 바닥에 내려앉아 있었다. 밖에 사람이 지나가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의원은 손가락을 두 개 들어보인 다음 문을 닫았다. 2분 준다는 의미였다.


아간은 닫힌 문을 바라보다가 시선을 돌렸다.


침대에 라이트가 누워 있었다.


의자 끄는 소리도 거슬릴 것 같아 아간은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기로 했다. 라이트는 눈을 감은 채 느릿하게 호흡을 하고 있었다.


"라이트 씨."


의원은 절대 소리를 내지 말라고 했었지만 아간은 참을 수 없었다. 라이트는 금방이라도 눈을 떠서 재미없는 농담을 할 것 같았다.


기대와 달리 대답이 없었다. 개구쟁이처럼 한쪽 눈을 뜨고 찡긋해보이는 행동도 하지 않았다.


요람에 누워 있는 아기처럼 깊은 잠에 빠져 있을 뿐이었다.


아간은 가라앉은 눈으로 바라보다가 시선을 밑으로 내렸다. 누런 이불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건 원래라면 있어서는 안 될 일이었다. 처음부터 왼팔이 없이 태어난 사람이라면 모를까.


하지만 아간이 기억하는 라이트는 두 팔 모두 멀쩡히 갖고 있었다. 비록 심한 피부병을 앓고 있었지만 움직이고 힘을 쓰는데는 전혀 문제가 없었다.


그래. 아간이 잘근잘근 씹지만 않았더라면. 그렇다면 아마 죽을 때까지 두 팔을 온전히 갖고 있었을 것이다.


아간은 침대에 주먹을 올린 뒤 이마를 댔다. 한참 동안 시근거리는 숨소리만 방 안에 울려퍼졌다.


문이 조용히 열렸다. 발자국 소리를 죽인 채 들어온 의원은 아간의 어깨를 두드렸다. 아간은 퀭한 눈으로 돌아보았다.


나오시오.


의원이 입모양으로 말했다. 아간은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의원이 사나운 얼굴을 지었다.


얼른.


아간은 의원이 왜 화내는지 몰랐다. 뒤늦게야 자신이 위아래로 고개를 끄덕인 게 아닌 좌우로 흔들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게다가 일어나는 대신 고집스럽게 몸을 앞으로 당기기까지 했다.


아간은 무거운 몸을 일으켰다. 바닥에 나무 뿌리 같은 것이 돋아나서 발목을 낚아채주길 바랐다.


그러나 여긴 숲이 아니었다. 거동이 불편한 환자를 위해 방 안에는 간단한 가구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밖으로 나온 아간은 길다란 한숨을 내쉬었다. 의원은 최대한 천천히 문을 닫았다.


"한쪽 팔이 없더군요."


문이 닫히자마자 아간이 말했다. 의원은 얼굴을 찌푸렸다.


"허리 안쪽에 고인 화농을 빼는 것도 힘든 마당에 팔까지 고치라니. 장담하는데 대륙 제일의 의원이 와도 그건 불가능하오."


의원은 잠시 말을 멈추더니 이어 붙였다.


"오히려 팔 하나만 잃고 목숨을 건졌다면 아주 싸게 먹힌 셈이오."


아간은 혼란스러운 얼굴로 바라보다가 물었다.


"그 말은 즉···."


의원은 희미하게 미소를 보였다. 그리고 보호자가 꿈에서라도 듣고 싶어하는 말을 해주었다.


"고비는 넘겼소."


아간은 한동안 숨을 쉬지 못했다. 놀란 의원이 숨 쉬라고 등을 두드려주기 전까지 아간은 숨 쉬는 법을 까먹었다.


간신히 숨을 토해낸 아간은 의자에 주저앉았다. 아간의 입꼬리가 올라가다가 다시 내려갔다. 하지만 곧 다시 올라가더니 힘없는 웃음을 흘렸다.


의원은 식은땀을 닦았다.


"깜짝 놀랬잖소. 환자 한 명 더 생기는 줄 알았군."

"미안합니다."


의원은 피곤한 얼굴로 눈두덩이를 문질렀다.


"하긴 놀랄 만 하겠군. 나도 믿기지 않소. 당신 동료는 언제 죽어도 절대 이상하지 않았소. 나도 '조만간 장례를 치루겠구나, 즐거운 축제날에 웬 장송곡이 울리겠구나.' 하는 생각만 했었지. 분명 신께서 치유의 손길을 뻗어주신 게 틀림없소."

"그리고 당신께서도 열심히 치료해준 덕분이겠지요. 고맙습니다, 의원님."

"그래. 나도 열심히 하긴 했지. 그 양반도 최선을 다했고."


의원은 아간에게 약제사 이야기를 해주었다. 며칠 동안 잠도 제대로 못 자고 갖가지 약재를 구하느라 애를 썼다는 것이었다.


아무리 바빠도 잠만큼은 포기하지 않던 양반이 그렇게 바지런히 움직이는 모습은 처음 봤다고 덧붙였다.


"그 밖에도 많은 사람들이 도와주었소. 가뜩이나 다가오는 축제 때문에 술 만드느라 바쁠 텐데도 틈틈히 와서 뭐 필요한 게 없느냐고 묻더군."

"이 은혜 어찌 다 갚아야 할지 모르겠군요."

"평생 갚아야 할 거요."


아간은 꼭 그러겠노라고 답했다. 아간은 돈을 꺼내 복도에 있는 헌금함에 넣었다.


"그동안 모아놓은 돈이 있었나 보군. 착실히 내는 걸 보면."

"그런 셈이죠."


아간은 약간 가라앉은 목소리로 답했다. 그동안 최대한 돈을 아끼면서 생활했건만 빠져나가는 게 만만치 않았다.


이제는 정말로 허리띠를 졸라매야 할 필요가 생겼다.


"아무튼 돌아가도 좋소. 다음에 의식을 차린다면 곧장 심부름꾼을 보내서 소식을 전해주겠소."


그리고 의원은 이제 잠이나 좀 자야겠다며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 아간은 라이트를 한 번 더 보고 갈까 고민했지만 그만두기로 했다.


성소원 내부를 가로지르며 걷고 있자니 성소당에서 예배를 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평소처럼 보육원 담벼락에서 기다리려던 아간은 갑자기 몸을 돌렸다.


아간은 성소당 쪽문을 향했다. 수사가 문 근처에 서서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아간은 수사의 주의력을 흐트러뜨리고 싶지 않아 되도록 조용히 걸었다. 그는 엄숙한 얼굴을 보이며 맞이했다.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아간이 소리 죽여 물었다. 수사는 문을 조금 열어주었다. 관리를 철저히 하는 모양인지 경첩이 삐걱거리는 소리도 나지 않았다.


아간은 고맙다는 목례를 보인 뒤 허리를 숙여 들어갔다.


사람들이 빼곡히 있었다. 앞에는 기다란 의자가 주욱 늘어서 있었다. 그곳은 지체 높은 사람이 앉는 자리였기에 아간은 쳐다도 보지 않았다.


그 뒷편에는 의자가 없는, 평평한 바닥이었다. 바닥에는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그는 누군가를 찾는 것처럼 벽에 바짝 붙어서 주변을 훑어보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한 사람을 발견했다. 자연히 미소를 지은 아간은 그쪽으로 향했다.


가는 길에 사람들은 어디선가 풍겨오는 냄새에 코를 틀어막았다. 그들은 서로 속삭이며 어디서 나는 냄새인지 눈으로 찾아다녔다.


"저놈이군."

"이 신성한 곳에 더러운 몸이 들어오다니."


소란이 커질 무렵, 벽에 서 있던 수사가 조용히 시켰다. 소음이 잦아들었다.


이윽고 자리를 옮기는 데에 성공한 아간은 손을 공손히 모은 채 벽에 기댔다. 그리고 졸린 듯한 눈으로 단을 바라보고 있는 디아프를 바라보았다.


디아프 곁에는 한 여자 아이가 앉아 있었다. 저번에 디아프와 같이 놀던 그 아이였다.


'타샤라고 했던가. 참 고마운 아이야.'


타샤는 예배가 지루한지 자꾸 디아프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 디아프는 딱히 반응을 하고 있지 않았지만 가끔 고개를 돌려 타샤를 바라보곤 했다.


한참 디아프 귀에 대고 속삭이던 타샤는 아간과 눈이 마주쳤다. 타샤는 살짝 입을 벌리더니 손가락으로 아간을 가리켰다.


아간은 동그란 눈으로 마주보았다.


디아프 아빠?


타샤가 입을 뻐끔거렸다. 아간은 뭐라 반응해야 할지 몰라 가만히 있었다.


타샤는 고민하는 듯 턱에 손가락을 대더니 디아프 어깨를 톡톡 쳤다. 그리고 귓가에 대고 조곤조곤 속삭였다.


멍한 얼굴로 앞을 보고 있던 디아프는 천천히 시선을 돌렸다. 아간과 디아프는 서로를 발견했다.


아간은 손을 짧게 흔들며 입모양으로 말했다.


아빠 왔어.


디아프의 무미건조하던 얼굴이 조금 바뀌었다. 약간 신기하다는 표정을 지은 디아프는 갑자기 입술을 꿈틀거렸다.


입술은 '오' 와 '아' 둘 다 소리를 낼 수 있는 위치에서 멈췄다.


미소 짓고 있던 아간의 얼굴이 빠르게 굳어갔다.


"어?"


저도 모르게 큰소리를 낸 아간은 따가운 눈총을 곳곳에서 받았다. 장소가 성소당이 아니었다면 모욕적인 언사를 들었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아간은 아랑곳않고 손가락을 바르르 떨더니 상체를 앞으로 기울였다.


잘못 보지 않았다. 분명 디아프는 말을 하려고 했었다.


디아프는 혀로 입술을 축였다. 그러고는 고개를 홱 돌리더니 다시 단을 바라보았다. 조급해진 아간은 디아프에게로 달려갈 뻔했다.


주변에서 쏟아지는 눈초리와 작게 수근거리는 말소리만 아니었다면 말이다.


주변이 약간 소란스러워지자 수사가 미끄러지듯 다가왔다. 그는 아간을 쳐다보더니 고개를 흔들었다.


아간은 애타는 심정으로 디아프를 바라보았지만 디아프는 더 이상 고개를 돌리지 않고 있었다.


결국 아간은 밖으로 쫓겨났다. 물론 누구도 나가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수사도 소란 피우지 말아달라는 주의만 주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아간은 자발적으로 나갈 수밖에 없었다. 스스로를 진정시키기 위해서는 이 방법밖에 없었다.


아간은 숨을 다스리며 흘러가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분명 말하려고 했어.'


누군가는 잘못 본 게 아니냐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아간은 절대 그리 생각하지 않았다. 부질없는 희망이 만들어낸 환상이 아닌 분명한 현실이었음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혹시 라자살라가 만든 약이 통한 걸까. 그것 말고는 설명이 되지 않았다.


'이토록 빨리 약효가 드러날 줄이야.'


아간은 가슴을 진정시키려 애썼다.


예배가 끝났다. 사람들이 밖으로 나오는 소리에 아간은 귀를 쫑긋 세웠다. 아간은 튀어나가려는 몸을 간신히 제지했다.


안달하지 않아도 디아프는 하리 수녀의 손을 잡고 이곳으로 올 것이다.


아간은 눈을 질끈 감은 채 침을 삼켰다.


"아저씨."


그때 바지가 밑으로 당겨졌다. 아간은 눈을 떴다. 타샤가 똘망똘망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아저씨, 디아프 아빠 맞죠?"


타샤는 확실하다는 듯이 말했다. 당황한 아간은 디아프가 어디 있는지 찾았다. 저 멀리서 아이들 틈에 섞여 오고 있었다.


아간은 얼른 디아프를 만나고 싶었다. 하지만 타샤가 놓아주질 않았다.


"그래. 맞아. 근데 어떻게 알았지?"

"그림에서 봤어요. 디아프가 항상 품에 안고 있더라고요."

"그랬어?"

"네. 안녕하세요, 전 타샤에요. 디아프 친구죠. 아, 디아프도 절 그렇게 생각해줄 지는 모르겠지만요."


아간은 미소를 지었다.

"디아프도 당연히 그리 생각해줄 거다. 말은 하지 않아도."


그렇게 말한 아간은 방금 자신이 한 말을 떠올렸다. 아간은 디아프가 어디까지 다가왔는지 확인하더니 타샤에게 물었다.


"혹시 디아프가 말한 적은 없니?"

"없어요."


타샤는 단언하듯 말했다. 아간은 초조한 얼굴로 말했다.


"확신에 찬 말이구나. 이유라도 있어?"

"저랑 약속했거든요. 나중에라도 말할 수 있게 되면 저한테 먼저 말하기로. 근데 디아프는 아직 저한테 말을 한 적이 없어요."

"정확하게 말을 하지 않았을 수도 있잖아. '아' 나 '어' 정도는 했을 수도 있지."

"당연히 그것도 포함이죠. 저도 아저씨 못지 않게 디아프 목소리를 듣고 싶다고요."


타샤는 허리에 손을 올렸다.


"걱정 말아요. 디아프가 조금이라도 말하면 곧장 아저씨한테 알려줄게요. 하리 수녀님보다도 먼저요."

"고맙다. 아, 내가 디아프 아빠라는 건.."

"비밀."


확고하게 고개를 끄덕인 타샤는 아간에게 악수를 청했다. 그리고 설령 이 땅이 뒤집어지는 한이 있더라도 말하지 않겠노라고 덧붙였다.


아간은 타샤와 손을 맞잡고 위아래로 흔들었다.


그 사이 디아프가 곁에 다가왔다. 하리 수녀에게 인사한 아간은 디아프를 데리고 자주 노는 곳으로 갔다.


눈치를 보던 타샤는 하리가 잠시 다른 데 보는 사이, 곧장 부자의 뒤를 따라갔다. 졸지에 아간은 타샤와 디아프가 같이 노는 걸 구경하게 되었다.


아간은 혹여 디아프가 말을 하려는 낌새라도 보이지 않을까 세심하게 관찰했다.


기대와는 달리 디아프는 고아원에 들어가는 순간까지도 입을 열지 않았다.



******



아간은 깊은 밤이 되서야 작업장으로 돌아왔다. 늦은 밥을 먹기 위해 집으로 들어가려던 아간은, 못 보던 가구가 모닥불 근처에 덩그러니 놓여 있는 걸 발견했다.


한 눈에 봐도 무척 낡아보이는 의자였다. 누구의 관심도 받지 못한 채 바깥에서 오래도록 방치해둔 것처럼 보였다.


아간은 왜 이 의자가 여기에 놓여 있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아무리 쓸모가 없어졌다 해도 가구를 버리는 경우는 거의 없다. 부숴서 멀쩡한 부분만 골라 새로 만들 수 있거니와 그게 힘들다면 땔감으로 써도 충분했기 때문이다.


아간은 혹시 의자에 저주라도 걸린 건 아닌지 의심이 들었다.


주변에 누가 보고 있는 건 아닌지 둘러봤지만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아간은 불 피울 때 써야겠다고 생각하고는 집으로 들어갔다.


구석에 세워둔 자루 포대에서 감자를 꺼내던 그는 어떤 숨소리를 들었다. 웬 낯선 인영이 라이트의 잠자리에 누워 있었다.


경계에 찬 눈으로 유심히 보던 아간은 그 인영을 어디서 많이 봤다고 생각했다.


난감하게도 인영은 곤히 잠에 빠져 있었다. 어찌나 깊게 자고 있던지 도로롱도로롱 코까지 골고 있었다.


이대로 놔둘까 했지만 그랬다간 내일 아침까지 잘 것 같았다. 아간은 흔들어 깨우기로 했다.


"왜."


인영이 중얼거렸다. 분명 말을 한 것 같은데도 눈은 여전히 감고 있었다. 아간은 다시 흔들었다.


"응. 왜."


일부러 이러는 건가. 눈살을 찌푸린 아간은, 그러나 인영이 깊은 잠에 빠져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런데도 또박또박 대답하는 걸 보면 아마 잠꼬대를 하는 듯했다.


머리를 긁던 아간은 손을 높이 들어 펼쳤다. 쾅!


"으헙!"


인영은 반쯤 뜬 눈으로 벌떡 일어났다. 입가에 마른 침자국이 묻어 있었다.


"무너진다!"


사색이 된 얼굴로 소리친 인영은 급히 몸을 일으켰다. 그러나 다리가 엉킨 바람에 얼마 못 가서 넘어지고 말았다.


기어서라도 나가려던 인영은 문득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을 느꼈다. 인영이 고개를 돌렸다. 아간이 바닥에 손바닥을 댄 채 물끄러미 보고 있었다.


"집 안 무너집니까?"

"왜 무너져."

"뭐가 박살나는 소리가 난 것 같아서요."

"내가 손으로 바닥을 내리쳤어."

"아하."

"왜 여기서 자고 있어?"

"밥 먹으니 좀 졸립더군요. 그렇다고 밖에서 잘 수는 없잖습니까."

"밥?"

"괜한 의심 마시죠. 따로 가져와서 먹었으니까. 벼룩 간 빼먹는 짓을 제가 하겠습니까. 보니까 감자랑 빵 밖에 없던대요."

"뒤져보긴 했다는거군."

"보긴 봤습니다."


아간이 씨익 입꼬리를 올렸다. 그레로도 아간 따라 같이 웃었다.


하하하. 뚝. 아간이 정색하자 그레로도 빠르게 웃음을 멈췄다.


"저 밖에 있는 의자는 네가 갖고 온 거야?"

"예."

"왜?"

"저번에 말씀드렸잖습니까. 마땅히 앉을 곳이 없다고요. 또 의자 하나라도 있으면 여러모로 편하기도 하고요."

"편하다고?"

"의자에 앉는 거 별로 안 좋아하세요?"

"그건 아니지만 의미가 좀 다르게 들려서. 마치 여길 계속 올 거라는 말처럼 들리는데."

"안 되나요?"


아간은 눈살을 찌푸렸다.


이곳을 어떻게 생각하는 거냐, 네 집인 줄 아느냐, 똥고집을 부리면 세상만사 다 해결되는 줄 아느냐 등등 온갖 말이 입 안에 맴돌았다.


아간은 그 중 하나를 골라서 말하지 않았다. 이 뻔뻔한 청년을 내쫓기에 아주 간단한 방법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레로는 제 몸집이 왜소한 편이라는 걸 인정하지만 누구나 번쩍 들 만큼 가벼운 편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아간이 뒷덜미를 잡고 강제로 일으킨 다음 바깥에 던져버릴 거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그레로는 내던져진 자세 그대로 말했다.


"한때 고국을 위해 목숨을 바친 기사가 이 외딴 곳에서 홀로 지내는 게 불쌍해서 와줬더니만. 이렇게 짐짝처럼 취급하기 있습니까?"

"대체 뭔 소리인지···. 내가 어제 그랬지. 이상한 일 끌고 오지 말라고."

"그런 거 없어요. 오늘은 그냥 왔단 말입니다. 아저씨는 술 같이 마시자고 찾아온 친구도 내쫓고 그럽니까?"


아간이 황당한 얼굴로 쳐다보았다. 그레로가 빙긋 웃었다.


"제 혀를 구해줬잖아요. 둘도 없는 친구죠."


아간은 이 이상 말해봤자 입만 아프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는 그레로를 놔두고 고요히 자고 있던 불을 깨웠다. 마른 삭정이를 넣고 숨을 불어넣으니 곧 불이 잠투정을 하며 일어났다.


아간이 물에 젖은 나뭇잎에 감자를 싸서 불에 넣었다. 불티가 성난 파리 떼처럼 날아오르다 가라앉았다.


그때 낡은 나무 의자가 질질 끌려 왔다. 아간 옆에 의자를 둔 그레로는 속이 불투명한 병을 들어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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