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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미달 님의 서재입니다.

라이칸슬로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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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다미달
작품등록일 :
2022.08.01 22:22
최근연재일 :
2023.03.28 2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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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4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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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518
추천수 :
514
글자수 :
1,060,207

작성
22.08.26 2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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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9쪽

잠든 야수 (4)

DUMMY

달려오던 그레로는 돌뿌리에 걸려 넘어졌다. 차라리 땅을 구른다면 모를까 그레로는 뛴 자세 그대로 엎어지고 말았다. 안쓰럽다는 생각이 절로 들 만큼 불쌍한 모습이었다.


아간은 그레로에 대해 아는 게 별로 없었지만 가만히 있어도 사고를 불러 일으킬 것 같았다. 사지가 온전히 붙어 있는 채로 지금껏 살아온 게 신기했다.


그레로는 부들부들 떨며 손을 들었다.


"좀 도와주십시오. 저 사람이 날 죽이려고 합니다!"


아간은 그레로가 가리킨 방향을 바라보았다. 누군가가 두 사람에게로 걸어오고 있었다. 눈을 가늘게 뜨고 바라보던 아간은 그레로에게 물었다.


"왜 널 죽이려는 건데?"

"내가···좀 놀렸습니다."


아간은 그레로의 말에 많은 부분이 생략되었다는 걸 눈치챘다.


"고작 자기를 놀렸다고 죽일 사람이 어디 있겠어."

"죽이진 않더라도 그 직전까지 맞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좀 도와주십시오."


아간은 '내가 왜?' 라는 눈으로 쳐다보았지만 그레로는 '내가 어떻게?' 라고 이해한 듯했다.


"아저씨는 강하잖아요. 조금만 혼내키면 알아서 꼬리를 말 겁니다."


황당함을 느낀 아간은 뭐라 대꾸하려다 말았다. 두 사람이 얘기하는 동안 어느새 상대가 근처까지 다가왔다.


상대는 톤이었다. 그레로에게 된통 모욕을 당한 톤은 하루 종일 만나는 사람마다 성적인 농담을 들어야 했다.


톤은 이를 부득부득 갈며 밤이 되기를 기다렸다. 아무도 보지 못하는 새에 혀를 잡아 뽑아서 다시는 말도 못하게 만들어줄 생각이었다.


톤은 그레로에게 눈을 부라렸다. 그레로는 몸을 움츠러들더니 아간의 다리를 꼭 붙잡았다. 그러자 톤은 아간을 쏘아보았다. 마치 그레로의 보호자냐고 묻는 것 같았다.


아간은 영 내키지 않는다는 얼굴을 지었다.


"그 생쥐 같은 놈이랑 아는 사이에요?"


톤이 물었다. 아간은 잠시 고민하다가 말했다.


"글쎄. 얼굴만 겨우 알 뿐이야."


그레로는 실연을 당한 사람처럼 아간을 쳐다보았다. 그동안 알고 지낸 시간이 다 헛된 것이었느냐고 묻는 듯했다. 표정이 너무 생동감 있던 터라 아간도 순간 헷갈렸다. 오래 전부터 알고 지낸 게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아간은 일단 다리를 흔들어 떨쳐내려고 했다. 하지만 고목나무에 붙은 매미마냥 딱 달라붙어서 힘들었다.


톤이 말했다.


"알든 모르든 어차피 상관없겠지. 비켜요. 그쪽이 관여할 일이 아니니까."

"알겠다. 비키지."


그레로가 꽥 하는 이상한 소리를 냈다. 그리고 아간의 다리를 더욱 꽉 잡았다. 아간은 신음을 내다가 말했다.


"다만 얘한테 뭘 할 건지 알려줄 수 있나?"

"뭐라고요?"

"말해주기만 하면 돼. 그럼 비킬게."


톤은 괜한 소리 하지 말고 당장 비키라고 말하려 했다. 톤은 아간의 덩치가 자기 못지 않게 크다는 걸 알게 되었다.


들끓는 분노로 인해 꾸깃꾸깃 접었던 이성이 조금 펴졌다.


톤은 미간을 좁히고는 아간을 훑어보았다. 보면 볼수록 다부진 몸이었다. 두툼하게 부풀어오른 팔뚝과 딱 벌어진 어깨가 눈에 들어왔다.


'잠깐만. 이 사람, 무두장이 아니야?'


아까부터 이상한 냄새가 난다 했다. 혹시나 싶어 고개를 기울인 톤은 무두질 작업장을 발견했다.


톤은 입매를 비틀렸다. 대놓고 무시하는 인상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기분 좋은 미소도 아니었다.


"사체 가죽만 좋아하는 줄 알았더니 살아 있는 사람에게도 눈길이 가긴 가는 모양이군."


그레로는 입을 떡 벌렸다. 아간은 덤덤한 얼굴로 바라보기만 했다. 톤은 아간의 무반응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상한 동정심으로 배려할 생각은 하지 마. 그냥 저 녀석이나 넘겨줘. 서로 불편한 일은 만들지 말자고."

"말해."

"뭐?"


아간은 약간 고개를 옆으로 젖혔다. 눈두덩이 밑으로 그늘이 졌다.


"이 청년에게 뭘 하려고 하는지. 말하기나 하란 말이다."


아간의 입가 사이로 그르렁하는 소리가 났다. 톤은 물론이고 바로 아래에 붙어 있는 그레로도 들리지 않을 만큼 작은 소리였다.


톤이 앞으로 한 발자국 다가왔다. 아간의 시선이 미묘하게 아래로 향하고 있었다. 톤은 아간에게 얼굴을 들이밀었다.


"혀를 잡아뽑고 그 혀를 강에 버릴 생각이다."


그레로는 황급히 입술을 말았다. 입안에 혀가 요리조리 움직이는 게 느껴졌다.


"그리고 오지랖 넓은 그쪽도 마찬가지야."


톤이 검지로 아간의 가슴을 쿡 찔렀다.


"당신 혀도 뽑아서 던져주지. 아니, 내가 손수 씹어먹어주겠어. 영광인 줄 알아, 무두장이. 네 꼬장꼬장한 혀를 친히 먹어주겠다는 얘기니까."


톤이 뒤로 물러났다. 그에 따라 짙게 드리운 그림자도 사라졌다.


아래에서 모든 상황을 지켜보는 그레로는 압박감을 느끼고 있었다. 장정 두 명이 가까이서 서로를 보고 있는 광경은 그레로의 가슴을 짓누르는 듯했다.


"당하고 싶지 않으면 지금이라도 비켜. 그럼 네 혀는 뽑지 않겠어."


톤이 손가락을 꺾으며 말했다. 아간은 그레로를 바라보았다. 그레로는 또 딸국질이 나올 것만 같았다.


아간은 고개를 들었다.


"미안하지만 비킬 수 없겠어."


톤은 기가 막히다는 얼굴을 보였다. 아간은 팔을 아래로 내리더니 그레로의 새끼 손가락을 잡았다. 그레로는 이대로 꺾어버리는 줄 알고 경악했다.


아간은 그러지 않았다. 단지 부드러운 손길로 새끼 손가락을 톡톡 두드릴 뿐이었다.


그레로는 자연히 손을 놓았다. 다리를 결박하고 있던 팔다리를 풀자마자 그레로는 엉덩걸음으로 후다닥 물러났다.


톤은 다시 한 번 기막히다는 얼굴을 보이더니 그레로를 데려가려고 했다. 아간이 팔을 들어 막았다.


톤은 얼굴을 잔뜩 구겼다.


후웅! 톤이 주먹을 휘둘렀다. 목표점을 잡지 않고 갑자기 휘두른 터라 힘이 세게 실리진 않았다. 하지만 운좋게도 주먹은 아간의 얼굴을 향해 날아왔다.


아간은 허리를 옆으로 젖혀 피하고는 무릎으로 톤의 배를 가격했다. 톤은 머리가 반응하기도 전에 몸이 먼저 움직인다는 게 뭔지 알게 되었다.


아간이 무릎으로 공격하는 순간 톤은 저도 모르게 같이 무릎을 들어올렸다. 결과적으로 두 무릎이 맞부딪치게 되었다.


"악!"


그레로는 눈동자가 빠질 것처럼 크게 떴다. 톤이 무릎을 손으로 감싸고서 깡총거리고 있었다. 반면 아간은 아무렇지 않은지 가만히 있었다.


톤은 무릎이 박살난 것 같은 아픔에 눈물을 찔끔 흘렸다. 고통이 너무 커서 그런 걸까. 끼잉끼잉하는 신음 외에는 어떤 소리도 나지 않았다.


"아, 아저씨. 무릎 멀쩡합니까?"


그레로는 희미한 경외감을 보이며 물었다. 만약 아간이 여유로운 미소를 보였다면 그레로는 바로 환호를 질렀을 것이다.


아간은 그리 하지 않았다. 덤덤한 얼굴로 톤을 물끄러미 보고 있었다.


'잠깐. 덤덤하다고? 저게?'


그레로는 손에 찌릿한 통증을 느꼈다. 알고 보니 주먹을 꽉 쥐고 있었다. 손바닥에 손톱 자국이 진하게 났다. 그레로는 왜 자신이 주먹을 쥐고 있었는지 알지 못했다.


이제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아간은 끙끙거리며 누워 있는 톤에게 다가갔다. 톤은 어렵사리 일어났다. 깽깽이 발로 바닥을 딛은 톤은 뚜벅뚜벅 걸어오는 아간이 기이하게 보였다.


"잠깐-."


톤이 손바닥을 내밀 때였다. 아간은 톤이 내민 손을 잡더니 앞으로 강하게 끌었다. 톤이 속수무책으로 끌려오자 아간은 손바닥으로 뺨을 후려쳤다.


톤의 머리가 홱 돌아갔다. 한 방에 입안이 터졌다. 하지만 주저앉을 수 없었다. 아간이 여전히 손을 붙잡고 있었다.


아간은 재차 손을 끌어당겼다. 반쯤 몸을 기울이고 있던 톤은 다시 끌려왔다. 아간은 이번에는 반대편 뺨에 손바닥을 날렸다. 새빨간 핏방울이 후두둑 날아가는 게 보였다.


뺨을 단 두 번 휘둘렀을 뿐인데 톤은 거의 정신을 놓고 있었다. 아간은 톤을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톤은 흰자를 보이며 꿈틀거렸다.


"어···."


그레로는 멍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기도 전에 종료되었다. 그레로의 눈에는 아간이 팔을 휘두르는 것도 보기 힘들었다. 그저 철썩, 하는 소리만 들었다.


그레로는 서서히 환희에 젖었다. 이렇게 일방적으로 이기다니. 저번에 봤던 장면도 멋졌지만 지금이 더 멋져보였다.


"와. 아저씨 진짜 짱이네요."


그레로가 아간에게 다가갔다. 장난스럽게 등이라도 두들기려던 그레로는 손을 들어올린 채로 멈췄다. 분위기가 이상했다.


"아저씨?"


아간은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끙끙거리는 톤에게 다가가 허리를 굽히더니 왼손으로 뺨을 눌렀다. 중지와 엄지로 양 뺨을 짓누르자 입이 위아래로 벌려졌다.


아간은 오른손으로 입안에 넣더니 톤의 혀를 잡았다. 톤은 괴상한 소리를 내며 발버둥쳤다. 아간은 아랑곳않고 손가락으로 혀를 꾹 붙잡았다. 그리고 팔을 뒤로 당기기 시작했다.


"에, 에, 에에에!"

"아저씨!"


그레로는 경악을 하며 달려들었다. 아간이 뭘 하려고 하는지 깨달았다.


"이제 그만하세요! 다 끝났잖습니까!"


아간은 냉철한 얼굴로 계속 혀를 잡아당겼다. 톤은 거의 실신 지경까지 가게 되었다. 그레로는 팔을 붙잡아 떼어내려고 했지만 턱도 없었다. 아간의 두 팔은 대들보처럼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레로는 최후의 수단을 사용했다.


아간이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아간은 고개를 돌렸다. 그레로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주먹을 쥐고 있었다. 뺨을 매만진 아간은 그레로가 주먹으로 때렸다는 걸 알았다.


"그만, 하세요. 이제 됐습니다. 진짜 혀를 뽑을 것까지는, 없잖아요."


그레로가 헉헉거리며 말했다. 아간은 톤과 그레로를 번갈아보더니 손을 뗐다. 톤은 허우적거리며 혀가 제대로 있는지 확인했다. 다행히도 얼얼하다는 점만 빼면 멀쩡했다.


그레로는 품에 돈주머니를 꺼내더니 톤에게 돈을 건네주었다.


"미안해, 톤. 다시는 놀리지 않을게. 이걸로 용서가 될지는 모르지만 그래도 받아줘."


톤은 돈을 받지 않았다. 그대로 줄행랑을 쳤다. 톤은 우는 건지 뭔지 의미 모를 소리를 내며 사라졌다.


그레로는 땅에 떨어진 돈을 주웠다. 달빛을 받은 은편은 희미한 빛깔을 내고 있었다. 그레로는 어색한 손길로 아간에게 내밀었다.


"구해준 보답입니다. 받아주세요."


아간도 돈을 받지 않았다. 대신 바닥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다시는 나에게 이딴 일 시킬 생각하지 마라. 네가 저지른 짓은 네가 스스로 해결해. 알겠어?"


딱히 어떤 감정이 깃들었다고 볼 수 없는, 무미건조한 말이었다. 하지만 그레로는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 없었다.


자리에 일어난 아간은 그레로에게 눈길 한 점 주지 않은 채 집으로 들어갔다. 홀로 남게 된 그레로는 손바닥에 놓인 은편을 바라보았다.


은편에는 흙이 덕지덕지 묻어 있었다.



******



"그렇지! 더 세게 휘둘러!"

"로바를 이길 사람은 없어. 포기하라고."


싸움판을 구경하는 무리들은 날이 갈수록 많아졌다. 도시 사람은 물론이고 외부에서 온 여행가와 모험가도 모여들었다. 다른 지방에서 찾아온 귀족도 마차를 세우고 직접 걸어와 볼 정도였다.


어쩌면 꼬리별 축제의 또다른 전통이 생기는지도 몰랐다.


꼬리별 영주, 게티아르 남작은 병사들에게 싸움판을 항시 주시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아직 축제가 본격적으로 시작하지도 않았는데 불필요한 마찰이 생기면 곤란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전보다 많아진 경비병의 숫자에 약간 불만을 품었다. 조금만 거칠어지면 바로 싸움판에 개입하여 제지할 것 같았다. 하지만 사람들의 걱정은 기우였다.


오히려 주변을 배회하는 경비병이 많아진 바람에 함부로 돈을 훔치거나 싸울 수가 없었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돈은 다 자신의 것이라 주장하는, 일부 못난 사람들은 여전히 불만을 품었지만 대부분은 아니었다.


덕분에 다들 예전보다 편안한 마음으로 내기를 벌일 수 있었다. 여기 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그레로는 멍한 얼굴로 싸움판을 보고 있었다. 구경하기 좋은 적당한 자리에 앉아 손에 턱을 괴고 있었다. 여유로운 모습이었지만 눈빛이 흐리멍텅했다.


"와!"


사람들이 감탄을 질렀다. 로바의 주먹이 상대의 급소를 제대로 가격했다. 숨이 턱 막힌 상대는 바닥에 웅크렸다. 중재자는 경기를 속행할 수 없다고 판단, 곧바로 옆에 있는 사람의 팔을 들어올렸다. 군중에게 승자가 누군지 알려주었다.


"승자, 로바!"


비탄과 환희가 뒤섞였다. 로바는 해도 질투할 만한 환한 미소를 보였다. 로바의 매력적인 얼굴과 몸매 덕분에 군중에는 젊은 처녀들도 많이 있었다. 부러움 섞인 질투와 시샘이 넘치도록 쏟아졌다.


예전이었다면 그레로도 사람들 틈에서 질투 어린 시선을 던졌을 것이다. 그레로는 객관적으로 보나 주관적으로 보나 매력적으로 보이는 외모는 아니었다. 등이 좀 굽은 건 그렇다 쳐도 입술 사이로 툭 튀어나온 앞니는 확실히 거슬렸다.


비가 많이 내리거나 바람이 세게 부는 날이면 앞니가 절로 시릴 정도로 컸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 로바를 바라보는 그레로의 눈에는 질투나 시샘은 보이지 않았다. 목초지를 돌아다니며 풀을 뜯어먹는 양 보듯 멍하니 바라볼 뿐이었다.


"그레로, 또 이상한 녀석에게 걸진 않았겠지?"


어느 한 사람이 그레로에게로 다가와 걸걸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레로는 눈동자만 굴려 바라보다가 다시 싸움판으로 눈길을 돌렸다. 로바는 처녀들이 주는 술을 벌컥벌컥 마시고 있었다.


"뭐. 재수없게 잘생기긴 했지만 강한 건 맞잖아. 내가 여자였어도 저 놈한테 반했을 거야."

"강하다고?"


그레로가 중얼거렸다.


"저게?"


말을 건 사람은 한심하다는 얼굴로 그레로를 쳐다보았다.


"야. 인정할 건 해야지. 뭣하면 네가 나가서 상대해봐. 장담하는데 넌 맞기도 전에 바로 뻗어버릴 거야."

"난 그렇겠지."

"그럼 누가 또 있어?"


그레로는 입을 다물었다. 말을 건 사람은 옆구리를 쿡쿡 찌르며 재차 물었지만 그레로는 여전히 묵묵부답이었다.


"쳇. 자존심 세우기는. 뭐, 네가 말하려는 사람이 톤이라면 인정한다. 그래도 로바와 대등하게 겨뤘으니까. 만약 초조하게 덤비지만 않았다면 이겼을지도 몰라."

"로바가 톤하고 비슷하다고?"

"그래봤자 로바가 더 강하겠지만."

"그럼 결국 로바도 약한 거네."


그레로가 한숨 쉬듯 말했다. 말을 건 사람이 짜증을 냈다.


"그럼 누가 더 강한지 얘기해봐. 빙빙 돌리지만 말고."


그레로는 입을 열었지만 다시 닫았다. 툭 튀어나온 앞니로 아랫입술을 꾹꾹 누르기만 했다.


"그건 안 돼."

"왜."

"말하면 내 혀가 뽑힐 거야."

"뭐?"


그레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 갈게."


말을 건 사람은 비웃었다.


"말도 못할 거면서 성질만 있어서는. 이봐, 그레로! 그나저나 네 몫이나 빨리 내. 대장이 너 돈 갖고 있는 거 알고 있어."


그레로는 어깨만 으쓱일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자리를 떠나면서 그레로는 로바를 슬쩍 보았다.


로바는 호탕하게 웃으며 여유를 부리고 있었다. 다음 싸움을 준비해야 했지만 별로 긴장된 기색이 없었다. 실제로 연전연승을 이어나가고 있는 만큼 아무도 뭐라 하지 않았다.


그레로는 이전처럼 로바에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보다 더한 사람을 만나봐서 그런 걸까. 그레로는 로바보다 더 강한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사람들에게 말할 때 어떤 일이 벌어질지 생각했다.


당연히 처음에는 믿지 않을 것이다. 그레로에게 야유하기도 할 테고 조소도 보낼 것이다. 하지만 그레로의 말대로 한 무두장이가 홀연히 나타나 로바를 한순간에 거꾸러뜨린다면?


그레로는 상상 속 사람들이 보일 반응에 잠시 희열을 느꼈다.


하지만 말 그대로 잠시 뿐이었다. 그레로는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고 터덜터덜 걸었다.


'실제로 그런 일이 벌어질 가능성은 극히 낮겠지.'


만약 그 무두장이가 싸움판에 실제로 나타난다 해도 환호는 오래 가지 않을 것이다. 분명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분위기가 가라앉을 것이다.


로바처럼 긴장감 있게 이기는 것이 아닌 아주 싱겁게 끝이 날 테니까.


그레로는 무두장이의 정체가 궁금해졌다. 정말로 은둔 고수인 걸까. 어쩌면 몰락한 가문의 기사일 수도 있었다. 대개 기사들은 같은 사람이라고 믿기 힘들 정도로 강한 힘을 갖고 있다고 들었다.


아간이 기사라면 어제 보여준 모습은 충분히 납득가는 일이었다.


하지만 어째서 기사가 무두장이 일을 하고 있는 걸까. 아무리 몰락했다고 해도 그런 냄새나고 더러운 일을 할 정도란 말인가.


"아!"


그레로는 짧게 탄성을 질렀다. 이제 알았다. 아간은 대역죄인인 것이다. 분명 출중한 실력을 갖고 있었지만 죄가 너무도 무거운 바람에 무두장이 일을 하게 된 것이다.


그렇다고 죽이자니 가진 능력이 아까워서 목숨만은 남게 된 것이다.


그레로는 제멋대로 아간의 정체를 결정짓고 있었다. 누가 들으면 한낱 망상에 불과하다고 일침을 내렸을 테지만 그레로는 이 비통하고 슬픈 이야기를 쉽게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다른 사람과 부딪혀도 모를 만큼 생각에 몰두하고 있던 그레로는 아간이 있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지금이라면 아직 한창 일하고 있을 시간이었다.


그레로는 잠시 망설였지만 이내 아간이 있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가는 동안 그레로는 왜 무두장이가 있는 곳은 사람들로부터 멀찍이 있어야 하는지 알게 되었다. 주변 공기가 확실히 달라지는 게 느껴졌다. 바람이라도 불라치면 절로 얼굴이 찌푸려질 정도로 냄새가 심했다.


그레로는 저런 곳에서 먹고 자고 한다는 게 믿기지가 않았다.


"아저씨."


작업장에 도착한 그레로는 차마 들어가지는 못하고 밖에서 불렀다.


"네, 저 또 왔습니다. 뭐 이상한 일 끌고 온 건 아니고요. 그냥 술이나 있으면 잠깐 마실까 하고..아니, 뭣하면 제가 살까요? 생각해보니 그게 낫겠군요."


반응이 없었다. 그레로는 탐탁잖은 얼굴로 보다가 심호흡을 했다. 가슴 깊이 숨을 들이마신 그레로는 작업장 안으로 고개를 들이밀었다.


빠르게 안을 훑은 그레로는 곧 고개를 갸웃했다. 아간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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