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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미달 님의 서재입니다.

라이칸슬로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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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다미달
작품등록일 :
2022.08.01 22:22
최근연재일 :
2023.03.28 22:20
연재수 :
134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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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589
추천수 :
514
글자수 :
1,060,207

작성
22.09.07 2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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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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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글자
22쪽

선전 포고

DUMMY

여기, 깊은 한숨을 내쉬며 몸을 가만두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 그는 어릴 적부터 세상을 비관적으로 바라보았다.


태어날 때부터 허리가 굽은 탓에 사람들로부터 곱지 않은 시선을 받으며 살아왔다. 단지 이것뿐이라면 그럭저럭 이겨내며 살아갔을지도 모른다.


그의 외형은 배 아파 낳은 부모라도 그리 곱게 보이지 않았다.


태어난 지 9년 후, 그는 하수구 앞에 버려졌다. 하지만 혼자는 아니었다. 누이가 그를 보살피기 위해 부모 몰래 뛰쳐나온 것이다.


때문에 그에게 있어 누이란 세상 그 자체였다.


그런 누이가 어느 날, 꽁꽁 얼어 있었다. 추위 때문인지 굶주림 때문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중요한 건 누이가 곁을 떠났다는 것이다.


그는 동생을 위해 자신의 삶을 바친 누이의 희생이 값진 것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세상에서 가장 쓸모없는 희생이라 생각했다.


아무 능력도 없는 꼽추가 살 바에야 예쁘장하고 상냥한 사람이 살아가는 게 훨씬 더 나을 테니까.


그러니 그가 비관주의자라고 해서 비난할 이유는 없을 것이다. 동정은 못할지언정 흘겨볼 이유도 없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 그는 자신보다 더한 비관주의자를 발견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아니. 무기력증 환자라고 표현해야 하나.


욕을 퍼부어도 상관없으니 제발 어떤 반응이라도 보여주었으면 싶었다. 하다 못해 무슨 일 때문에 집에만 틀어박히고 있는지 알려주었으면 싶었다.


"제가 잘못했어요. 그러니 이제 모습 좀 보여봐요. 제기랄! 벌써 오후가 지나고 있다고요, 오후가! 좀 있으면 해도 넘어갈 시간이라고요. 이게 무슨 의미인지 알겠어요?"


그레로는 애간장이 타들어갔다. 마음 같아서는 문을 박살내고 싶었다. 하지만 뒷감당을 생각하자니 두려워졌다.


"몸이 아프면 아프다고 하던지 아니면..아, 빌어먹을! 화가 나서 그런 거죠? 예. 이해해요. 저라도 상대방이 술잔 들고 노려보면 어이가 없을 거예요. 실제로 아저씨 머리 깨부술까 잠깐 고민하긴 했으니까. 근데 아주 잠깐이지 진심은 아니었어요. 제가 설마 그런 멍청한 짓을 하겠어요? 진짜로 그럴 거라 생각한 건 아니죠?"


문을 두드리던 그레로는 힘이 죽 빠졌다. 어떤 말을 하건 아간은 묵묵부답이었다.


답답한 마음이 든 그레로는 대상을 바꾸기로 했다. 생각해보니 집안에는 아간만 있는 게 아니었다.


"거기 동료분도 같이 계시죠? 집에 돌아온 걸로 알고 있는데. 일단 당신께 일어난 일은 유감이에요. 원래 세상살이 사람 마음대로 안 된다고 하잖아요. 너무 상심하지 마세요. 자비하신 신께 감사를."


그레로는 잠시 말을 멈추고 귀를 기울였다. 뭔가 움직이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긴 한데 확실하진 않았다.


뒤로 반 걸음 물러난 그레로는 손나발을 만들어 외쳤다.


"근데 그거 아세요? 그쪽 치료비가 많이 들어서 아저씨가 돈이 쪼들리나 봐요. 그 때문에 싸움판에 올라갔단 말이죠. 다른 사람을 쥐어패는 한이 있더라도 돈을 벌겠다는 일념 하나로 말이죠. 그러니 그쪽도 아저씨 좀 설득해봐요. 당신 치료비 때문에라도 다시 싸움판에 올라가야-."


문이 열렸다. 그레로는 놀란 눈으로 쳐다봤다. 아니. 열거면 인기척 좀 내고 열지, 이렇게 갑자기 열면 어떡하라고. 아직 마음의 준비도 안 됐는데..


그레로는 주먹이 날아올까 싶어 급히 방어 자세를 취했다. 우려했던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이제 보니 문도 제대로 열린 게 아니었다.


손가락 하나가 겨우 들어갈 법한 틈새가 생겼을 뿐이었다. 앞으로 다가간 그레로는 틈새 사이로 깜빡이고 있는 눈동자를 발견했다.


"안녕."


눈동자가 말했다. 낯선 목소리에 의아해하던 그레로는 곧 고개를 끄덕였다.


"동료분, 이신가요?"

"응."

"아, 안녕하세요. 아간 아저씨의 동업자이자 마음을 나눈 친구인 그레로라고 합니다. 혹시 존함을 여쭈어도 될까요?"

"라이트."

"듣기만 해도 행복해지는 이름이군요. 정말 좋은데요."


그레로는 귀를 기울였다. 누구처럼 헛소리 하지 말라고 할 줄 알았지만 의외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고마워. 그보다 무슨 일로 왔어? 아간 만나러 온 거야?"

"예. 잠깐 볼 수 있을까요?"


눈동자가 사라졌다가 이내 다시 나타났다.


"안 될 것 같아."

"그럼 이 상태에서 말해도 될까요?"

"으으음. 미안해."

"혹시 어디 다치기라도 했어요? 아니면 실연이라도 당한 겁니까? 왜 꼼짝않고 집에만 있는 거죠?"

"나도 몰라."


그레로는 눈살을 찌푸렸다.


"정말 궁금해서 묻는 건데 살아는 있어요?"


뜬금없이 박장대소가 터졌다. 라이트는 기침을 콜록콜록 하면서도 웃음을 멈추지 못했다. 격한 반응에 놀란 그레로는 눈만 동그랗게 떴다.


아간의 동료라고 해서 성격도 비슷한 줄 알았는데 아예 딴판이었다. 웃기도 잘 웃을 뿐더러 눈동자도 누구와 달리 부드럽고 따뜻했다.


라이트는 간신히 웃음을 멈추고는 말했다.


"그런 것 같아. 숨은 잘 쉬고 있거든."

"그···것 참 다행이군요."

"전할 말 있으면 말해줘. 내가 전해줄게. 아니면 나중에 찾아와도 좋고. 아마 얼마 안 갈 거야."

"아니, 저기···."


문이 닫혔다. 그레로는 우두커니 서서 바라보았다. 그러다 울컥 화가 솟아 애꿎은 흙만 걷어찼다.


"에휴."


그레로는 바깥에 놓인 의자에 앉아 허리를 뒤로 젖혔다. 자연스레 입이 헤, 벌어졌다.


흘러가는 구름을 멍하니 바라보던 그레로는 또르륵 시선을 돌렸다. 도시와 연결된 도로에 사람들이 바글바글 했다.


꼬리별 축제는 두 번째 마상 경기가 펼쳐진 어제가 절정이었다. 제일 많은 꼬리별이 떨어지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거의 낮과 비견해도 될 정도로 밤하늘이 환하게 빛이 났다. 만약 달이 완연한 보름달이었다면 더욱 장관이었을 것이다.


앞으로 남은 기간 안에 이보다 아름다운 장면은 일어나지 않을 거라 생각하는 걸까. 시민은 물론이고 귀족들도 마차를 타고 도시를 떠나는 모습이 보였다.


특히 귀족은 영지를 오래 비워둘 수 없기에 서둘러 돌아가는 듯했다.


"이제 다 끝났어. 모든 게 다 끝난 거야."


그레로가 하늘을 보며 중얼거렸다. 이번이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했다.


물론 왕초는 그레로에게 기한을 정해준 적 없었다. 금편 열 다섯 닢만 준비된다면 언제든지 줘도 된다고 했었다.


그러나 그레로는 점점 지쳐갔다. 목걸이를 되찾아야 한다는 생각보다 포기하고 싶다는 마음이 갈수록 커져갔다.


이러다간 어느 날 갑자기 자리를 박차고 떠나게 될 것 같았다. 물론 생각만 했지 실제로 그런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진짜 나한테 화나서 저러는 건가?"


정말 그런 거라면 아간은 쪼잔하기 그지 없었다. 술집에서 술 마시고 벌어지는 일은 다 꿈에서 일어난 것과 같다는 말도 있잖은가.


꿈 가지고 화내는 건 그야말로 미련한 짓이었다.


그때 그레로는 취해 있었고 단지 그뿐이었다. 그 이상 그 일에 대해 논하는 건 바보 같은 행동이었다.


"에휴. 될 대로 되라지."


그레로가 몸을 일으켰다. 지금이라도 내기판에 뛰어들어야 했다. 하다못해 다른 싸움꾼에게라도 걸어야 했다. 많이 늦긴 했지만 이보다 빠른 시일 내에 돈을 버는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라이트 아저씨, 저 갈게요. 쥐 죽은 듯이 틀어박혀 있는 누구 때문에 한심해서 두고 볼 수가 없네요. 이제 신경도 안 쓸 거예요. 나중에 돈 달라고 해도 소용 없다고 전해주세요. 절대 안 줄 거니까!"


그레로는 주머니에 손을 찌르고는 씩씩거리며 떠났다. 그럼에도 혹여 문이 열리진 않는지 살짝 뒤돌아 봤다. 여전히 그대로였다.


그레로는 차마 면전에서 하지 못할 말들을 혼잣말로 중얼거리며 떠나갔다.


발자국 소리가 멀어져갔다.



******



라이트는 벽에 기대고 서 있었다. 그레로 앞에서는 내색하지 않았지만 사실 라이트는 아픔 때문에 머리가 어지러운 상태였다.


울렁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기 위해 눈을 감고 숨을 골랐다.


"아간. 갔어."


라이트가 말했다. 아간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저 등을 내보인 채 옆으로 누워 있을 뿐이었다.


아들을 도시에 데려다준다고 한 뒤로, 줄곧 저런 상태였다. 물론 이틀 동안 누워만 있었던 건 아니었다.


간간히 일어나 작업장에서 일도 하고 밥 시간이 되면 나가서 요리도 했다. 어찌 됐든 제 할 일은 꾸준히 하고 있던 셈이었다.


하지만 그 외에 시간은 오로지 누워만 있었다.


라이트가 몇 번 물어봤지만 아간은 끝내 대답을 회피했다. 간혹 고통스러운 얼굴로 침음을 흘리곤 했는데 그게 입에서 나온 유일한 소리였다.


"나도 궁금해. 네가 왜 그러는지. 혹시 아들과 헤어진 게 아쉬워서 그런 거야? 아니면 싸우기라도 했어? 아간. 말 좀 해봐."


간절한 마음을 담아 물었지만 역시나 대답은 없었다. 라이트는 한숨을 내쉬고는 덧창 밑으로 갔다. 유일하게 햇볕이 들어오는 곳이었다.


'그나저나 로미어는 괜찮은 걸까.'


그 당시 로미어는 정상적으로 보이지 않았다. 광기에 휩싸인 것처럼 거칠고 사나웠다.


특히 아간 얘기를 했을 때 격하게 반응한 걸 보면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긴 한 모양이다.


그러나 이건 의중일 뿐이었다. 당사자한테 물어봐도 대답 하나 하질 않으니 답답함만 쌓여 갔다.


라이트는 몸을 제대로 움직일 수 없다는 게 아쉬웠다. 멀쩡했다면 진작 로미어를 만나러 갔을 것이다.


밖에서 야유와 조롱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전히 싸움판이 열리고 있는 모양이었다. 나뭇잎을 스쳐 지나가는 바람처럼 바깥소리가 재잘거리며 집안에 맴돌았다.


"라이트 씨."

"음?"


라이트가 눈을 떴다. 분명 아간이 말을 한 것 같은데.


"나 불렀어?"

"냄새가 납니다."

"냄새?"


라이트는 제 몸을 맡는 시늉을 했다. 확실히 냄새가 났다. 사실 안 나는 게 이상했다.


고약한 냄새를 풍기는 연고를 매일 바르기도 하거니와 제대로 씻을 수도 없었다.


그저 물 묻은 천으로 중요 부위만 겨우 닦을 뿐이었다.


"그럼 밖에 잠깐 나가 있을까? 그 정도라면 충분히 할 수 있어."


라이트가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아간은 여전히 등을 보인 채 고개만 흔들었다.


"아냐. 그게 아냐."


아간이 억눌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냄새가 난다고. 냄새가."


어디 아프기라도 한 걸까. 걱정이 된 라이트가 다가가서 위로해주려고 했다.


갑자기 아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라이트는 놀라서 멍하니 바라보았다.


벽을 보고 일어선 아간은 천천히 뒤로 돌았다. 그는 자신을 보는 라이트를 무시한 채 덧창을 바라보았다.


맑은 하늘이 보였다. 묘하게도 해와 달이 동시에 떠 있었다. 낮달이었다.


달은 거의 보름달 모양을 하고 있었다.


다시 밖에서 소란이 터졌다. 싸움꾼을 욕하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렸다. 아간이 어금니를 꾹 물었다.


"시끄러운 것들."

"아간. 어디 가?"


아간은 말없이 밖으로 나갔다.



******



재미없어.


그레로가 싸움판을 보면서 느낀 감상이었다.


싸움꾼 두 명은 서로 위협이 되는 행동을 하기는커녕 허우적거리고만 있었다. 돈을 나눠갖기로 합의라도 한 걸까.


최대한 다치지 않고 끝낼 작정인 듯했다.


그레로만 싸움에 관심이 없는 건 아니었다. 싸움판을 구경하는 내기꾼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싸움꾼들이 싸우건 말건 잡담이나 하고 있었다. 마치 술집이나 마을 광장에 있는 분이다.


이럴 거면 다른 곳에서 떠들어도 될 법 했지만 그들은 싸움판에서 떠나지 않았다. 익숙한 곳에서 수다를 떨어야 편한 법이었다.


참고로 바람잡이 역할을 해야 할 브랜디는 그늘에 앉아 구경만 하고 있었다. 그도 이제 괜한 일에 힘 쓰는 일은 하지 않았다.


아무리 해설자가 흥을 돋운다 해도 관객이 반응을 안 하면 헛수고였다. 이를 모를 리 없던 브랜디는 이참에 자신 또한 쉬기로 마음먹은 듯했다.


"재미없군."


누군가 그레로 옆에 앉으며 중얼거렸다. 고개를 돌린 그레로는 두 눈을 의심했다.


"당신은···."


상대는 그레로를 보더니 멋드러지게 웃었다.


"술집에서 만난 청년이로군. 이름이?"

"그, 그레로입니다. 그쪽은 제가 아는 사람, 맞죠?"

"맞을 거야. 앞 글자가 '검' 자로 시작한다면."


그레로는 설마 또다시 검은 갈퀴를 볼 줄 몰랐다. 술집에 만났을 때는 워낙 경황이 없어서 대화도 잘 나누지 못했었다.


그레로는 선망의 대상을 보는 것처럼 눈에서 뗄 줄 몰랐다.


검은 갈퀴는 손바닥만 한 육포를 꺼내더니 반으로 쪼갰다. 하나는 자신이, 나머지 하나는 그레로에게 주었다.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그레로는 육포를 뜯어먹으려다 질겁했다.


"되게 질기네. 이거 무슨 고깁니까?"

"늑대."


검은 갈퀴는 대수롭잖게 말하고는 질겅질겅 씹었다. 그리고 고갯짓으로 싸움판을 가리켰다.


"하루 사이에 판이 뒤집히기라도 한 건가? 저딴 실력으로 경기장에 올라가 있다니. 이젠 어중이떠중이 밖에 안 남았군. 어쩌다 이렇게 된 거야?"


"어, 글쎄요."


그레로는 콧등을 긁었다. 육포는 나중에 물에 불려서라도 먹어야 할 듯싶었다.


"전보다 흥미가 식어서일 겁니다. 새로운 사람보단 아는 사람이 계속 나오다 보니 재미가 없어진 거죠. 그리고 이때까지 판돈을 올려준 부유한 귀족들도 많이 떠났고요."

"그래도 배불러 보이는 양반들이 곳곳에 보이긴 하는데?"

"저게 제대로 구경하는 것처럼 보입니까?"


검은 갈퀴는 수긍하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레로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이제 축제도 끝나가지, 판돈은 안 오르지, 이름 날렸던 싸움꾼들도 이제 돈 좀 모았겠다 굳이 더 있을 필요도 없지, 내기꾼들도 흥미가 떨어져서 예전처럼 열성적이지 않지. 망해가고 있는 싸움판의 전형적인 모습이죠. 사실 지금까지 유지되었던 게 기적이었어요."


검은 갈퀴가 그레로를 보며 말했다.


"판을 볼 줄 아는데 그래. 보기보다 눈썰미가 있는군?"

"외모가 병신이면 눈치라도 쓸 줄 알아야죠. 사실 잘 쓸 줄도 모르지만."

"스스로 바보라고 인정하는 사람들이 실은 천재라고 한다지. 지금까지 살아본 경험으론 그렇더군."

"헛살았네요."


검은 갈퀴는 크게 웃었다. 농담이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시원스러운 반응에 그레로는 만족했다.


그래, 이거지. 누구처럼 무뚝뚝하게 노려보는 게 아니라.


그레로는 검은 갈퀴가 제법 말이 통하는 상대라고 생각했다.


"저기요. 그래도 아예 망한 건 아니거든요. 혹시 아직도 싸움판에 흥미가 있다면 제가 적절한 상대 구해드릴 수 있는데 말이죠. 당신 실력에 미치진 못하겠지만 재미는 있을 겁니다."

"흐음."


검은 갈퀴는 심드렁한 표정을 지었다. 그레로는 물러서지 않았다.


"손해보는 건 아니잖아요. 당신이 올라서면 하품만 쩍쩍 하고 있는 저 사람들도 다시 흥미가 생길 겁니다. 아직 귀족들도 있겠다, 넉넉하게 돈도 구할 수도 있을 테고. 어떻습니까?"

"달빛 손톱은 어디 있나?"

"예?"


검은 갈퀴는 싸움판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말했다.


"생각해보니 그 친구가 떠올라서. 술집에 있을 때 자네 맞은편에 있던 자. 그 자가 달빛 손톱 맞지? 그 친구 실력이 꽤 괜찮다던데."

"직접 본 적 있어요?"

"남들에게 들어본 게 다야. 그래도 심심찮게 입방아를 찧는 것 같아서. 지금은 저기에 안 올라가나 보지?"

"뭐···. 그런 셈이죠."

"왜지?"

"모릅니다, 저도. 이유가 뭔지 알고 싶네요."


잠시 후, 그레로는 아간과 있었던 일을 검은 갈퀴에게 술술 말하기 시작했다.


마침 기분이 상해 있던 참이었다. 누군가에게 이 기분을 토로하지 않으면 미칠 것 같았다.


처음에는 흘려듣던 검은 갈퀴는 점차 집중해서 듣게 되었다.


싸움판에만 머물러 있던 시선이 조금씩 옮겨가더니 종내에는 그레로에게로 아예 고정되었다.


"그러더니 갑자기 물에 풍덩 빠지는 겁니다! 뭐하는 건가 싶었는데 강가 바닥에 있던 돌덩이를 들고 나오더군요. 그때 겉으로는 표현 안 냈는데 사실 상당히 놀랐죠. 그 무거운 걸 들고 헤엄쳐 나오다니. 믿어집니까?"

"상상이 잘 안 가는데."

"나도 직접 안 봤으면 절대 안 믿었을 거예요. 그 정도로 힘이 강하더랍니다. 싸움 실력은 또 어떻고요? 솔직히 당신 기분 상할까봐 얘기 안 했지만 당신과 붙어도 밀리지 않았을 겁니다. 어쩌면 이겼을 수도 있다고요."

"직접 붙지 않고는 모르는 일이지. 섣부르게 판단하지 말라고, 청년. 그보다 눈에 대해서도 얘기하던데. 눈이 그렇게 무섭나?"

"예? 에이. 말이 그렇다는 거지 진짜 무섭겠어요? 과장해서 표현한 거지 실제로 보면 그저 그래요."


그레로는 손사래를 쳤다. 하지만 얼마 안 가 소극적으로 수긍했다.


"그래도 움찔하긴 하죠. 그 사람 눈은 다른 사람과 좀 다르더군요. 푸르게 빛이 난다고 해야 하나. 별명에 달빛이라는 말이 들어간 것도 그 때문이죠."

"푸르게, 라."


검은 갈퀴는 턱을 쓸며 중얼거렸다. 무슨 생각을 그리 깊게 하는지 그 뒤로 그레로가 어떤 말을 해도 반응하지 않았다.


경기가 끝났다. 사람들은 썩은 경기력을 보인 두 싸움꾼에게 야유와 욕을 퍼부었다.


특히 돈을 건 내기꾼들이 더 했다. 그들은 절대 길거리에서 눈에 띄지 말라고 협박까지 했다.


브랜디가 경기장에 올라가 험악한 분위기를 적당히 눌렀다.


"그래도 뭐 어떻습니까. 덕분에 나도 쉬게 되었으니 감사한 일이죠. 괜찮으면 이 형편없는 싸움꾼 한 번 더 경기장에 올려도 되겠습니까? 먹다 남은 복숭아가 있어서 말이죠."


브랜디가 능청스레 말했다. 관객들은 되도 않는 소리나 말라며 성을 부렸다.


그때 형편없는 싸움꾼이라 불린 자가 브랜디 옆에 섰다.


그는 브랜디에게 뭐라 속삭이더니 몸을 풀었다. 브랜디는 얼굴을 찌푸렸다. 제대로 들은 게 맞는지 재차 물었지만 대답은 한결 같았다.


브랜디는 한숨을 쉬었다.


"농담이었는데 진짜 쉬게 되겠군요. '푸른 늑대' 가 연속 경기를 하고 싶답니다, 여러분."


관중들은 썩은 음식을 내던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푸른 늑대는 다음 싸움꾼을 기다렸다.


아마 아까처럼 합을 맞춘 싸움꾼이 나오는 듯했다.


생각보다 거센 항의에, 브랜디는 얼굴을 찌푸렸다. 숨만 간신히 쉬고 있던 싸움판이 마침내 와르르 무너지려는 순간이 다가온 것이다.


브랜디는 더 이상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줄 수 없다는 생각에 슬퍼하지 않았다.


그보다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풍족한 음식을 먹을 수 있었던 지난날의 시간이 눈에 어른거렸다.


브랜디는 푸른 늑대에게 경고라도 하려고 했다. 이번 싸움도 재미없게 만들면 알아서 분위기 수습하라고.


"아까 같은 되도 않는 짓을 또 하면···."


브랜디는 미간을 좁혔다. 푸른 늑대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자신을 보고 있었다.


저 얼빠진 면상에 주먹 꽂고 싶다는 생각이 들 무렵. 푸른 늑대가 말했다.


"사람 잘못 올린 것 같은데?"

"뭐?"


브랜디가 고개를 돌렸다. 한 사람이 싸움판에 뚜벅뚜벅 올라오고 있었다. 그늘진 곳에 있어서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상대가 고개를 든 순간 브랜디는 대번에 누구인지 알아챘다.


싸움판으로 올라온 그는 원래부터 그럴 생각이었다는 듯 푸른 늑대 맞은편에 섰다.


브랜디는 푸른 늑대와 올라온 상대를 번갈아 보더니 씩 웃었다.


"이거, 오래간만에 반가운 얼굴이 등장했군요. 그동안 어디서 뭘 했는지 모르지만 그게 뭐가 대숩니까. 이번 싸움은 여러모로 볼만할 것 같다는 게 중요한 거죠."

"아니. 잠깐, 나는···."


푸른 늑대가 뭐라 말할 때였다. 브랜디는 능글맞은 표정을 지으며 뒤로 멀찍이 물러섰다.


"푸른 늑대가 이번에도 이길 수 있을지 궁금합니다. 분명한 건 방금 경기처럼 웃기지도 않은 공격을 했다간 바로 질 거란 거죠. 어쨌든 푸른 늑대와 달빛 손톱의 대결! 시작하죠."


말이 끝나자마자 브랜디 앞으로 무언가 날아갔다. 푸른 늑대가 공중에서 나부끼고 있었다. 아직 내기 돈이 제대로 걷히기도 전이었다.


푸른 늑대가 데굴데굴 굴러 장외로 빠져나가는 순간에도 내기꾼들은 누구를 걸지 고민하고 있었다.


"끝났네."


한 사람이 멍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뒤늦게 상황을 파악한 사람들은 가볍게 손을 말아쥐고 있는 달빛 손톱과 이미 기절하고 만 푸른 늑대를 발견했다.


눈치가 빠른 편이라고 자부하던 브랜디도 사태를 파악하는데 시간이 걸렸다.


팔을 내린 달빛 손톱은 쓰러진 상대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대신 브랜디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브랜디는 황급히 승자를 알렸다. 환호성은 없었다. 사람들은 눈만 굴리며 서로를 바라보았다.


재빨리 진행시키기로 마음먹은 브랜디는 달빛 손톱에게 물었다.


"혹시 그 다음 맞붙고 싶은 상대가 있습니까, 달빛 손톱? 없다면 내가 임의로 붙이죠."


달빛 손톱은 주변을 훑어보았다. 누군가를 찾는 것처럼 꼼꼼히 둘러보았다.


"딱히 없소."

"아, 그러면-."

"다 올라와라."


달빛 손톱이 브랜디를 지나쳐 좌중을 향해 몸을 돌렸다. 쾌청하게 내리쬐는 햇살 아래. 달빛 손톱은 그림자를 얼굴에 드리우며 말했다.


"싸움꾼이라 자청한 놈들은 다 올라와. 한꺼번에 상대해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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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피로 물든 강물 (1) 22.09.08 53 4 17쪽
» 선전 포고 22.09.07 54 4 22쪽
35 엇갈림 (3) 22.09.06 53 4 18쪽
34 엇갈림 (2) 22.09.05 49 3 13쪽
33 엇갈림 (1) 22.09.04 51 3 14쪽
32 검은 갈퀴 22.09.03 58 4 20쪽
31 달빛 손톱 (5) 22.09.02 54 5 26쪽
30 달빛 손톱 (4) +1 22.09.01 53 4 14쪽
29 달빛 손톱 (3) 22.08.31 56 4 20쪽
28 달빛 손톱 (2) 22.08.30 54 4 13쪽
27 달빛 손톱 (1) 22.08.29 57 4 20쪽
26 잠든 야수 (6) 22.08.28 61 4 16쪽
25 잠든 야수 (5) 22.08.27 54 5 18쪽
24 잠든 야수 (4) 22.08.26 54 3 19쪽
23 잠든 야수 (3) 22.08.25 61 4 17쪽
22 잠든 야수 (2) 22.08.24 58 4 17쪽
21 잠든 야수 (1) 22.08.23 65 4 20쪽
20 피 냄새 (7) 22.08.22 71 4 13쪽
19 피 냄새 (6) 22.08.21 59 4 17쪽
18 피 냄새 (5) 22.08.20 66 4 18쪽
17 피 냄새 (4) 22.08.19 72 4 15쪽
16 피 냄새 (3) 22.08.18 75 3 16쪽
15 피 냄새 (2) 22.08.17 83 5 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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