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다미달 님의 서재입니다.

라이칸슬로프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완결

다미달
작품등록일 :
2022.08.01 22:22
최근연재일 :
2023.03.28 22:20
연재수 :
134 회
조회수 :
10,599
추천수 :
514
글자수 :
1,060,207

작성
22.09.02 22:55
조회
54
추천
5
글자
26쪽

달빛 손톱 (5)

DUMMY

"이 등 구부러진 놈하고 말도 섞지 마시오. 순 사기꾼이니까. 괜히 엮였다간 돈이고 뭐고 다 털릴 거요."


콧대가 높은 남자가 의자에 앉아 있는 그레로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그러자 주변에 있는 구경꾼들이 동조의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레로는 한껏 성난 얼굴로 손을 뿌리쳤다.


"이제 댁하고 용무 끝났으니 좀 가지? 동업자끼리 할 얘기가 있거든."

"동업자라!"


사람들이 낄낄거리며 웃었다. 그레로는 제멋대로 머리를 헝클어뜨리는 손길들을 온몸으로 거부했다.


"달빛 손톱이란 별명을 누가 지었는지 알겠군. 거 보시오. 내가 뭐라고 했소? 엮이지 말라고 했잖소."


콧대 높은 남자는 물러나는 순간까지 입을 멈추지 않았다.


"아. 그렇다고 이제 와서 별명을 바꾸진 마시오. 오히려 그 덕분에 당신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생겼으니까. 달빛 손톱. 내일도 기대하겠소!"


사람들은 아간의 어깨를 두드리려고 했다. 그러나 날카롭게 쏘아보는 눈빛에 그럴 수 없었다.


그들은 원래부터 그럴 생각이었다는 듯 애꿎은 그레로만 마구 쓰다듬었다.


그레로는 한참 동안 씩씩거렸다. 이래서 남자는 외모가 흉악해야 한다는 둥, 덩치가 있어야 안 건드린다는 둥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젠장. 여기!"


그레로가 급사를 불렀다. 급사는 다가오는 대신 고개만 돌렸다. 한창 바빠 죽겠으니 거기서 말하라는 뜻이었다.


그레로는 손가락 세 개를 펼쳐보이고는 외쳤다.


"삶은 달걀이랑 야채죽! 빵이랑 치즈 한 덩이도!"


급사는 알아들었다는 신호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옆 식탁에 음식을 내려놓고는 주방 쪽으로 달려갔다.


제대로 들었는지 의심이 가는 모습이지만 그레로는 불안하지 않았다. 생긴 건 바보같아도 머리는 꽤 비상한 편이었다.


어느 테이블에 있는 어느 사람이 어느 음식을 시켰는지 다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제가 살 테니 부담없이 먹어요. 도둑 잡아준 보상이에요."


그레로가 말했다. 아간은 말없이 주변을 훑어보다가 그레로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왜 여기서 만나자고 한 거야?"

"좋잖아요. 시끌벅적하고 요란하고. 이보다 대화하기 좋은 곳이 또 어디 있겠어요?"


말 끝나기 무섭게 뭔가 박살나는 소리가 들렸다. 실제로는 탁자를 주먹으로 내려친 것에 불과했다. 어떤 일인지는 모르지만 분위기가 험악했다. 어쩌면 드잡이질까지 벌일 것 같았다.


그러나 워낙 주변이 시끄러워서 그런지 누구와 싸우는 것 가지고는 이목이 끌리지 않았다. 그것보다 사람들은 아간에게 더 눈길을 보내고 있었다.


싸움판에서 활약한지 고작 이틀 밖에 되지 않았는데도 알아보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


노골적으로 쳐다보는 시선에 아간은 기분이 언짢아졌다. 술집에 들어올 때부터 불길한 예감이 들었던 참이었다.


아간은 깍지를 낀 채 연신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당연하게 받아들여요. 5연승 정도 했으면 싫어도 주목 받을 수밖에 없죠."

"차라리 가면이라도 쓸 걸 그랬어."

"그러면 싸움판에 올라가지도 못하죠. 얼굴도 모르는 싸움꾼에게 돈을 걸고 싶은 사람은 없을 테니까."


아간은 못마땅한 얼굴로 말했다.


"그래서 그런 쓸데없는 별명을 붙인 건가?"

"쓸데없다뇨? 아무리 유치한 별명이어도 있는 게 좋다구요. 아까도 봐요. 덕분에 기억에 남는다고 한 사람도 있잖아요."

"비꼬는 거겠지."

"절 믿어요. 없는 것보다 훨씬 나으니까."


그레로는 기분 좋은 얼굴로 땅콩을 씹어먹었다. 아간은 팔짱을 꼈다.


"그보다 별명은 왜 그렇게 지은 거야?"

"아저씨가 했던 말이 떠올라서요."

"무슨 말?"

"달 찢어버리고 싶다고 했잖아요. 이런 시늉을 보이면서 말이죠."


그레로는 짐승 흉내를 내었다. 누렇게 변색된 치아를 드러내며 손을 구부렸다. 그리고 양옆으로 확 찢는 모습을 선보였다.


아간은 어이가 없었다.


"내가 언제 그랬어?"

"저번에 같이 술 마실 때."

"그런 적 없어."

"다른 건 몰라도 저 기억 하나는 기똥찬 편이에요."

"아닌 것 같은데."

"맞아요."


아간은 한숨을 쉬었다.


"했다고 쳐. 그런다고 그렇게 지으면 어떡해?"

"그럼 좋은 별명 있어요? 해봐요."


침묵하는 아간을 보며 그레로는 웃음을 흘렸다.


급사가 겹겹이 쌓인 인파를 뚫고 두 사람에게로 다가왔다. 그는 그레로보다 몇 살 더 어려보였다.


술 세 잔과 음식이 식탁 위에 놓이자 그레로는 손가락을 튕겼다.


"고생하네."


급사는 공중에 날아오른 동편을 잡아챘다. 그리고 보지도 않고 주머니에 쑤셔넣고는 퉁명스레 대꾸했다.


"그러면 더 주던가. 꼽추야."

"뭘 더 줘, 더 주긴. 이미 받을 만큼 받았으면서. 벌써부터 돈 욕심 들면 안 돼. 그거 못 고쳐."


그레로는 가보라는 듯 손을 휘휘 흔들었다. 급사는 얼굴을 구기다가 눈길을 돌렸다. 아간이 무심한 눈으로 치즈를 먹고 있었다.


"달빛 손톱, 맞죠? 일 하느라 제대로 못 봤지만 실력이 꽤 좋다는 소리는 많이 들어왔어요."

"별로 좋진 않아."

"그러면 곤란한데요. 조만간 당신에게 걸 생각이었는데."


아간이 급사를 쳐다봤다. 솜털 같은 털이 턱과 인중 주변에 자리 잡고 있었다. 이제 막 자라나고 있는 듯했다.


급사는 다소 건들거리게 말했다. 어른으로 대접 받고 싶은 건지 목소리도 일부러 걸걸하게 냈다.


"계속 돈을 모으고 있다고요. 한 번에 확 벌어들이려고. 그러니 지지 말고 쭉 이겨줘요. 당신도 그 편이 더 좋잖아요?"


그레로가 황당하다는 어조로 말했다.


"네가 뭔데 아저씨에게 이래라저래라 야."

"근데 얼추 재미만 볼 생각이라면 적당히 하고 빠져요. 검은 갈퀴 만나서 호되게 두드려 맞기 싫으면 말이죠."


급사는 그레로가 뭐라고 하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레로는 짜증이 났다.


"아직 겨뤄보지도 않았는데 누가 이길지 어떻게 안다고? 됐어요, 아저씨. 신경 쓰지 말고 술이나 마셔요."


아간은 같이 술잔을 들어올리는 대신 생각에 잠겼다. 그러고 보니 전에도 들어본 바가 있었다.


아간이 급사에게 물었다.


"검은 갈퀴가 누구길래 그러지? 그도 유명한 용병인가?"

"용병일을 했다는 말이 돌긴 해요. 하지만 그게 검은 갈퀴의 압도적인 무력을 설명해주진 않죠. 직접 봐서 알 거 아녜요?"


그렇지 않았다. 아간은 검은 갈퀴가 싸우는 모습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보러 가려거든 얼마든지 그럴 수 있었다. 하지만 아간은 별로 마음이 동하지 않았다. 관심이 없기도 했거니와 라이트를 홀로 둘 수 없었기 때문이다.


"북부에서 나고 자랐다는 말도 있고 야르칸드에게서 훈련을 받았다는 말도 있죠. 어느 것 하나 뚜렷하진 않지만 한 가지는 분명하게 가리키고 있어요. 바로 힘이 무척 세다는 것."

"얼마나 세길래?"

"집게 손가락으로 팔꿈치 뼈를 작살냈다고 하니까요. 그 정도면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알잖아요?"


급사가 불현듯 고개를 들어올렸다. 귀가 먹먹할 정도로 심한 소음 속에서도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를 용케 들은 모양이었다.


급사는 아간의 어깨를 툭 건드리고는 명쾌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니 몸 성히 끝내고 싶으면 이쯤에서 그만두는 것도 방법이죠. 아, 그렇다고 바로 그만두진 말고. 내일도 싸움판에 올라가죠? 그때 걸 테니까 적어도 내일까지는 그만두지 마요!"


말을 마친 급사는 유연한 동작을 선보이며 자리에서 벗어났다. 그레로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더니 콧방귀를 뀌었다.


"지가 뭐라도 되는 양 말하기는. 신경 쓰지 마요, 아저씨. 그냥 하는 소리니까."


그레로의 말과 달리 아간은 애초에 염두에 두지 않고 있었다.


"너도 전에 검은 갈퀴라는 자에 대해 말하긴 했었지. 그 자가 그리 강한가?"


아간이 말했다. 그레로는 술을 한 모금 마셨다.


"약하진 않죠. 어쨌든 그 센을 거꾸러뜨린 사람이니까요."

"그 금편 열 닢?"


그레로가 고개를 끄덕였다.


"전적은 어떻게 되지?"

"8전 8승. 무패죠."

"생각보다 경기를 많이 안 치뤘군."

"자기가 마음에 드는 상대하고만 싸운대요. 돈도 벌었겠다, 굳이 용쓸 필요가 없는가봐요."

"근데 왜 그렇게 유명하지? 단지 센이라는 자를 이겨서?"

"그것도 있긴 한데."


그레로는 잠시 말을 멈추고 손을 비볐다. 오래간만에 먹는 진수성찬이라 그런지 앞에 놓인 음식을 가만두지 못했다.


하얗게 반짝반짝 빛나는 달걀을 한 입에 넣은 그레로는 야채죽이 담긴 그릇을 째로 들어 마셨다.


아간은 사흘 굶은 거지를 데려다 앉혀도 저렇게 먹진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

"싸우는 모습이 정말 재밌단 말이죠. 보는 사람의 눈도 여러 번 속일 정도로 기가 막힌 손놀림과 재주를 선보이거든요."


입가에 음식이 덕지덕지 묻었지만 그레로는 닦을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아간은 알려줄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얼마 안 가 또 묻을 게 뻔했다.


"어지간한 상대가 아니고서는 검은 갈퀴는 싸움판에 올라오지도 않아요. 싸움판에서 두각을 드러낸 상대가 있을 때만 모습을 드러내죠. 그러니 검은 갈퀴가 무대에 나타나는 순간, 이미 그 경기는 흥행이 보장되었다고 해도 무리가 아니에요."

"그럼 사람들은 검은 갈퀴가 경기장에 올라가면 다 그쪽에 다 돈을 걸겠네."

"예. 그래서 오히려 손해만 보는 실정이에요. 상대도 적당히 실력 있으면 모르겠지만 검은 갈퀴만한 실력을 가진 자는 하나도 없거든요."


술을 연신 들이켠 그레로는 눈을 찬찬히 깜빡였다. 이내 거나한 트림이 흘러나왔다. 고약한 냄새가 풍겼다.


아간이 얼굴을 잔뜩 찌푸리자 그레로는 미안하다는 듯 손을 들어보였다.


"뭐, 그건 그렇고. 돈은 좀 짭짤하게 벌었어요? 돈주머니 가져왔으면 보여줘요. 한번 구경이나 해보게."

"별로 많지 않아. 그리고 사람들 많은 데서 돈자랑 하는 건 바보 같은 짓이야."

"무슨 상관이에요. 상대가 달빛 손톱인데! 감히 누가 눈독을 들인다고 그래요?"


그레로가 일부러 끝말을 크게 외쳤다.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그레로와 아간을 힐끗 쳐다봤다. 아간은 다가오는 시선을 전부 물리친 뒤 낮게 으르렁거렸다.


"목소리 죽여. 얼마나 관심을 끌고 싶은 거야?"

"이미 얼굴 팔릴 대로 팔렸으면서. 이제 알 만한 사람은 다 안다고요. 제가 말했죠? 이번 축제 최고의 유명인으로 만들어주겠다고."

"불필요한 관심은 원하지 않아."

"그럼 애초에 올라가지 말았어야죠. 거기 올라온 이상 싫든 좋든 유명해진다고요."


아간은 탐탁잖은 표정을 지었다. 돈을 버는 건 좋은데 왠지 구경거리가 된 것만 같았다.


"받아들이 기왕 시작한 거 끝까지 가봐야죠. 설마 은편 몇 푼 벌고 끝낼 생각이었어요? 저 냄새나고 더러운 곳에서 빨리 벗어나야죠."


그레로가 무두질 작업장이 있는 방향을 가리켰다. 아간은 불편한 기색을 감추지 않았다. 특별히 일을 사랑해서 그런 건 아니었다.


저 냄새나고 더러운 곳을 그 어느 것보다 소중히 여기는 사람도 있다는 걸 떠올렸기 때문이다.


"동료분 치료비 때문이라도 열심히 일해야 하잖아요? 아무리 못해도 금편은 만져봐야죠."


"그럼 빨리 수를 써보던가. 네가 싸우라는 사람과 계속 싸워 이겼는데도 받는 돈이 별로 크지 않잖아."

"실력 검증 제대로 안 된 사람에게 걸어야 얼마나 걸겠어요?"

"5연승 정도면 충분히 되지 않았나?"

"예. 이제야 된 셈이죠. 관중들에게도, 브랜디에게도."


그레로는 치즈를 떼어내더니 한 입 크게 베어물었다. 쿰쿰한 냄새가 그레로의 입에서 풍기자 아간은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아간이 미간을 좁혔다.


"무슨 말이지?"

"브랜디의 눈에 아저씨가 들어왔다는 소리죠. 분명 속으로 '오호, 이 놈 실력 좀 있는 놈이구나. 판 깔아주면 알아서 날뛸 녀석이겠는걸.' 하고 중얼거릴 걸요?"

"브랜디?"

"해설자 겸 심판을 맡고 있는 작자 말이에요. 싸움판에 올라가서 온갖 추임새 넣으며 경기 분위기를 무르익게 만드는 양반. 그 양반 이름이죠."


아간은 브랜디란 자에 대해 떠올렸다. 관중들에게 어떻게 보일지 몰라도 아간에게는 영 신경 거슬리게 하는 사람이었다.


뭐만 하면 꽥꽥 소리를 지르는 판에 싸움에 집중을 할 수가 없었다. 특히 남보다 예리한 감각을 갖고 있는 아간에게는 더욱 정신 사나웠다.


"혼자 맡은 역할이 많더군. 어쩔 때는 주선도 하는 것 같던데."

"여기가 도시에서 직접 운영하는 대형 싸움판도 아니니까요. 그냥 싸우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얼렁뚱땅 만든 판인데요. 뭐, 그래도 예전보다 커진 건 사실이지만."


그레로는 어디서 줏어왔는지 모를 석필을 꺼내더니 탁자 위에 무언가를 슥슥 그렸다.


주인이 안다면 버럭 화를 내도 이상하지 않겠지만 지금 당장은 그럴 걱정은 할 필요가 없어보였다.


안 그래도 요란스러운 판국이었다. 주인은 자기 얼굴로 날아오는 술잔을 잡아채고는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싸움판이 이렇게 많은 사람에게 관심을 받게 된 건 브랜디 역할이 컸어요. 브랜디가 하는 해설이 아니면 경기를 안 보겠다는 사람도 많은걸요. 입김이 안 셀 리가 없죠."


그레로는 하품을 늘어지게 하며 기지개를 켰다. 눈이 꿈뻑거리는 걸 보면 슬슬 취기가 올라오는 것 같았다. 그레로는 석필 끝을 혀로 문질렀다. 입가에 회백색 가루가 묻었다.


아간은 탁자 한편에 그레로가 그린 그림을 발견했다. 그건 싸움판을 묘사한 그림이었다.


"됐어요.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에요. 중요한 건 브랜디가 이제 아저씨의 실력을 어느 정도 파악했을 거라는 거죠."


그레로는 거의 엎드리듯이 눕고는 웅얼거렸다. 아간이 물었다.


"내 실력?"

"다는 아니에요. 어디까지나 짐작일 뿐이겠죠. 하지만 브랜디는 아저씨의 실력을 정확히 알고 싶을 거예요. 관중의 눈을 즐겁게 해줄 실력자인가, 아니면 어중이떠중이에 불과했던 건가."

"그럼 이때까지 날 탐색하고 있었단 말이야?"

"그럴 거예요."


아간은 눈살을 찌푸렸다. 누군가에게 자신의 성향이 파악 당하는 건 별로 유쾌한 경험이 아니었다.


그레로는 가볍게 딸꾹질을 한 다음 말했다.


"그래도 아저씨는 제가 지정한 상대와 싸우는 게 좋을 거예요. 지금 당장은 적게 버는 것 같겠지만 다 계획대로 하고 있는 거라고요. 그러니까 브랜디가 접근해오면 그냥 무시하세요. 알겠죠?"

"귀찮게 하면?"

"새삼스럽게 뭘 물어요. 이미 알아서 잘 쫓아내시더만."


그레로는 아간이 무섭게 노려보는 흉내를 내었다. 아간은 자기가 저렇게 못생겼다면 참 인생이 암담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나저나 묻고 싶은 게 있는데."


아간이 말했다.


"대답 안 해도 돼. 궁금해서 묻는 거니까. 돈을 벌면 뭘 할 거야?"

"떠나야죠. 당연히."

"어디로 갈 건데?"

"글쎄요."


그레로는 한쪽 팔을 뻗어 탁자 위에 올렸다. 그리고 베개 삼아 머리를 얹었다.


"사실 몰라요. 어디로 가야 할지. 딱히 정해두진 않았으니까. 그래도 이왕 가는 거 제대로 된 곳이 좋긴 하겠네. 음. 생각해보니 크시포스에 가보고 싶네요. 어쨌든 수도니까 볼거리도 먹을거리도 많겠죠."

"혼자서?"

"혼자 떠나야죠. 뭐예요, 동행하려고요? 칙칙한 아저씨랑 같이 다니기 싫은데."


농담조로 얘기해도 아간은 반응이 없었다. 그레로는 반쯤 성질을 부렸다.


"가만 있지 말고 받아치던가 아니면 웃던가 좀 해요. 답답해서 못 살겠네."

"미안해. 정말 가족이 없을 줄은 몰랐어."


그레로는 입을 다물었다. 이윽고 팔에서 머리를 뗀 그레로는 퉁명스레 말했다.


"아저씨는요. 있어요?"

"아들이 있어."

"몇 살?"

"어려. 너보다."

"그야 그렇겠죠."


그레로는 흥미가 돋은 얼굴로 말했다.


"근데 아들은 어디 있어요? 집에는 없던데."

"다른 곳에 있어. 안전한 곳이야."

"설마 따로 살아요? 아내는 어딨고요?"


아간은 술을 마셨다. 그레로는 손으로 입을 찰싹 때렸다.


"미안해요. 내가 이렇게 눈치 없는 성격은 아닌데."


그레로가 술잔을 들어 건배를 권했다. 아간은 팔을 뻗었다. 잔이 허공에 부딪쳤다.


"그래도 아들은 아빠라도 있으니 다행이네요. 부모 모두 없는 녀석이 즐비한데 말이죠. 나처럼."

"외동이야?"

"지금은요."


아간은 예전에도 이와 비슷한 얘기를 주고 받았던 걸 떠올렸다. 상대가 다르다는 것만 제외하면.


"묻지 말아줘요. 물으면 엉엉 울 거예요."

"안 물을 거야."

"좋아요."


잠시 후, 그레로는 은근슬쩍 물었다.


"정말 안 궁금해요?"


아간은 묵묵히 치즈를 뜯어 먹었다. 그레로는 음식 대신 석필을 잘근잘근 씹었다. 텁텁한 맛이 느껴졌다.


"사실 별 거 아니에요. 그냥 누나가 있었는데 나만 남기고 훌쩍 세상을 떠났다, 라는 거죠. 참 이기적이죠? 동생 챙길 거면 끝까지 챙기던가. 목걸이만 주고 떠나버리고."

"울어도 돼."

"됐어요. 눈물도 안 나요, 이젠. 아니. 안 나는 건 아닌데 지금은 안 나요. 이런 데서 눈물 흘리는 건 꼴사납죠. 목걸이라도 있다면 펑펑 울 텐데 그것도 다리 병신한테 뺏긴···."


그레로의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스치고 지나갔다.


​ "개인적인 일이에요. 잊어줘요."

"그러고 보니 돌려받아야 할 게 있다고 말했었지."

"내가 그랬어요?"

"전에 말했잖아."

"언제요? 전혀 기억 안 나는데."

"기억 하나는 기똥차다며?"


그레로는 할 말을 잃었다. 그레로는 겨우 목소리를 쥐어짜내 몇 마디 내뱉었다.


"말꼬리 잡을 줄도 알고. 이제 보니 말 잘하시네요."

"캐낼 생각은 없어. 생각이 났을 뿐이야."

"예. 알아요."


그레로가 탁자에 또다른 그림을 그렸다. 아까와는 달리 오래 걸리지도 않았다. 동그라미 하나와 그보다 작은 네모난 선을 그렸을 뿐이었다.


"다리 병신이 갖고 있는 거예요. 돈이 있어야 이걸 가져갈 수 있죠."

"얼마나?"

"금편 열 다섯 닢."

"···원래 그 정도 가격인가?"

"금편 두 닢이요."


아간은 티를 내지 않으려 했지만 한숨이 나오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레로는 손가락에 침을 묻히고는 그림을 문질렀다.


"그래도 그동안 많이 모았어요. 이번만 잘 벌어들이면 바로 되찾을 수 있어요. 그러니 끝까지 지지 말고 이겨줘요, 달빛 손톱. 믿고 있으니까."

"돈도 돈이지만 문제는 그게 아닌 것 같은데. 그 자가 정말 약속을 지키느냐가 문제지."

"무슨 소리예요? 당연히 지키죠."​​

"확실해?"

"설마 내가 그때까지 돈 못 모을 것 같아요? 잘못 봐도 한참 잘못 봤어요. 한다면 하는 사람이라고요, 나는."


아간이 그레로를 빤히 쳐다봤다. 그레로가 물었다.


"왜요?"

"돌려받는 거. 확실해?"


그레로는 뒤늦게 답했다.


"그럼요."

"어떻게 장담하지?"

"다리가 병신이지 머리가 병신은 아니거든요. 성격은 괴팍해도 약속은 꼭 지키는 사람이에요."


그레로는 계속 그림을 지워나갔다. 이미 그림은 지워진지 오래였다. 그럼에도 그레로는 손가락으로 힘있게 탁자를 문질렀다. 벅벅벅.​​


"알아요. 내가 멍청하게 보이는 거. 하지만 이 방법 밖에 없어요. 한쪽 다리가 없어도 난 그 사람 절대 못 이겨요. 언제는 자고 있을 때 몰래 가져가려고 했는데 들켰던 적이 있죠. 그땐 정말 죽는 줄 알았어요."


아간은 탁자를 쳐다봤다.


"그거 알아요? 처음에는 다섯 닢이었어요. 근데 도중에 몇 번 뺏으려고 달려드니까 그때마다 한 닢씩 올리더군요. 그래서 열 다섯 닢이 된 거예요. 웃기죠?"

"그레로."

"이러다간 백 닢까지 올라가는 것도 시간 문제겠더라고요. 그래서 이제라도 돈을 마련하려는 거예요. 좀 늦긴 했지만 손만 빨고 있는 것보단 나으니까요."

"그레로. 이제 됐어."


그레로가 행동을 멈췄다. 탁자에 그림이 사라진 대신 손끝이 하얘졌다. 그레로는 얼굴을 찌푸렸다. 손가락이 따끔거렸다.


알고 보니 살갗이 밀려나 벗겨져 있었다. 겉살이 흰 껍데기처럼 일어나 있었다. 안에 있던 붉은 속살이 바깥으로 드러났다.


"집에 연고 있어. 돌아가는 길에 바르도록 해."

"아뇨. 괜찮아요. 이 정도야, 뭐."


그레로는 별 거 아니라는 듯 손을 탁탁 털었다.


"아무튼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 신경 꺼요. 그보다 내일 언제 나올 거예요? 이건 제 생각인데 내일은 평소보다 일찍 나왔으면 해요. 유독 약한 상대만 노리는 비열한 녀석이 있는데 정오에만 나타나거든요. 마침 사람들도 점점 그 녀석에게 정이 떨어진 참이니 이 기회에 무지막지한 힘을 보여서 쓰러뜨리는 것도···."

"내일은 안 돼. 약속이 있어."

"무슨 약속인지 물어도 돼요?"

"아들과 만나야 해. 같이 축제 즐기기로 했어."

"아."


그레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아간은 남은 음식이 얼마나 있는지 확인했다. 얼추 다 먹은 듯했다. 값을 치루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아간은 그레로가 여전히 앉아 있는 걸 발견했다.


"일어나자. 가야지."

"예. 가야죠."


말만 그렇게 하고 그레로는 일어나지 않았다. 아간은 고개를 갸웃하더니 그레로에게 손을 뻗으려고 했다.


그레로는 손을 맞잡는 대신 아간에게 말했다.


"저기, 아저씨. 부탁이 있는데요. 약속 조금만 미루면 안 돼요? 생각해보니까 돈이 좀 빠듯할 것 같아서요. 내일 한 경기만이라도 참가해줘요. 방금 말했던 녀석 말고 좀 더 쉬운 놈 골라줄게요."

"미안하지만 안 되겠어."

"아저씨 아들은 살아 있잖아요. 나중에 언제든지 만날 수 있잖아요. 전 아니거든요. 만나고 싶어도 그럴 수 없죠. 그래서 하루라도 빨리 목걸이를 되찾고 싶어요. 도와주면 안될까요?"

"그레로. 그만 얘기하자. 많이 취했어."

"하나도 안 취했어요. 저기요, 아저씨. 저도 맨입으로 하는 말이 아니에요. 허리는 구부러졌지만 양심은 똑바르게 서 있다고요. 사례는 반드시 할게요."

"그레로."


​ 아간이 말했다.


"너무 가까이 왔어. 물러나."


어느새 그레로는 반쯤 몸을 앞으로 기울이고 있었다. 그레로는 본인의 모습을 확인했지만 자세를 바꾸거나 하진 않았다.


"대답이나 해줘요. 왜 안 되는데요?"

"아직 사 일이란 시간이 남아 있으니까. 오늘 빼면 삼 일이군. 어쨌든 내일 당장 끝나는 게 아니야."

"그리고 내일 빼면 이틀이죠. 이것 봐요. 남아 있는 시간이 얼마 없잖아요. 이 소리 안 들리세요? 시간이 쿵쿵 땅을 짓밟으며 달려오고 있는 이 소리가?"

"어차피 지금 당장 뭘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잖아. 진정해."

"원래부터 진정하고 있었어요."

"안 그런 것 같은데."

"젠장! 자꾸 신경을 긁잖아요, 당신이. 내가 어려운 부탁한 것도 아닌데 자꾸 거절하잖아요."

"내일만 있는 게 아니잖아. 그 다음 날 올라가도 문제 없어."

"그럼 그쪽도 그 다음 날에 아들 만나면 되잖아요. 내일 바로 축제가 끝나는 것도 아닌데!"


그레로가 탁자를 세게 내리치며 일어났다. 서서히 차오르던 분노가 마침내 폭발한 것 같았다.


하지만 아간은 싸늘한 얼굴로 그레로를 쳐다보고 있었다.


"당신, 아내도 잃어봤다면서. 그럼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을 때 그 고통이 얼마나 큰지 알 거 아냐. 그거 아는 사람이 이거 못 도와줘?"

"그레로. 네가 목걸이를 소중히 여기듯 나 또한 아들과의 시간을 소중히 하고 있어. 그러니 고집 그만 부려."


그레로는 벌게진 눈으로 아간을 노려보았다. 손에 들린 술잔이 바르르 떨렸다. 아간은 당장 내려놓으라고 일갈하는 대신 그레로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이봐. 그쯤 해둬."


그때 한 사람이 그레로 곁으로 다가왔다.


"뭐가 됐든 서로 피 볼 일은 만들지 말라고."


사내가 그레로의 손등에 자신의 손을 올려놨다. 그레로는 자신을 막은 사람을 노려보았다.


"당신은···."


그레로가 말을 흐렸다. 사내는 나무라는 듯한 얼굴을 지었다.


"내려 놔."


그레로는 술잔을 놓았다.


사실 홧김에 집어들긴 했지만 정말로 휘두를 생각은 하지 않았다. 물론 휘두르기도 전에 그레로가 아간에게 맞아 쓰러질 게 뻔했다.


그러나 그걸 차치하고서라도, 그레로는 스스로가 그런 짓을 하는 게 용납되지 않았다.


"돈은 내가 내죠."


그레로는 뿌리듯이 돈을 탁자에 던지고는 밖으로 나갔다. 동편들이 팽이처럼 빙글빙글 돌다가 가라앉았다.


아간은 지친 기색을 보이며 잔에 남아 있는 술을 마셨다.


"혈기 넘치는 청년이로군. 너무 상심하지 말라고, 형씨."


그레로를 말렸던 사내는 아간에게 손을 뻗으며 친근한 어조로 말했다. 하지만 아간은 매정히 뿌리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이쿠."


사내가 뒤로 몇 걸음 물러났다. 그러자 손에 들고 있던 무언가를 바닥에 떨어뜨렸다.


그건 육포였다. 사내는 입으로 후후 불면서 육포에 묻은 먼지를 털어냈다.


"이거 참. 아무리 그래도 너무 까칠한 거 아닌가."


사내는 여유로운 미소를 보이며 육포를 뜯어먹었다. 그럼에도 아간이 말없이 노려보기만 하자 사내는 손을 내저으며 자리를 떴다.


가라앉았던 술집 분위기가 조금씩 되살아났다. 웅성거림은 곧 소란으로 바뀌었다.


아간은 주변에서 오는 눈길을 애써 무시하며 창밖을 보았다. 이미 떠났는지 그레로는 보이지 않았다.


남몰래 한숨을 내쉬던 아간은 충격에 빠진 듯 갑자기 몸이 굳었다.


있어서는 안 될 일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다가오는 걸 왜 몰랐지?'


아간은 제자리를 찾아가는 사내의 뒷모습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이유는 모르나 사내에게서 냄새가 잘 느껴지지 않았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라이칸슬로프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44 변화 (1) 22.09.15 61 4 23쪽
43 달빛 손톱과 검은 갈퀴 (4) 22.09.14 56 4 18쪽
42 달빛 손톱과 검은 갈퀴 (3) 22.09.13 58 3 16쪽
41 달빛 손톱과 검은 갈퀴 (2) 22.09.12 59 4 20쪽
40 달빛 손톱과 검은 갈퀴 (1) 22.09.11 60 4 19쪽
39 피로 물든 강물 (3) 22.09.10 55 4 15쪽
38 피로 물든 강물 (2) 22.09.09 51 4 19쪽
37 피로 물든 강물 (1) 22.09.08 53 4 17쪽
36 선전 포고 22.09.07 54 4 22쪽
35 엇갈림 (3) 22.09.06 53 4 18쪽
34 엇갈림 (2) 22.09.05 50 3 13쪽
33 엇갈림 (1) 22.09.04 52 3 14쪽
32 검은 갈퀴 22.09.03 58 4 20쪽
» 달빛 손톱 (5) 22.09.02 55 5 26쪽
30 달빛 손톱 (4) +1 22.09.01 54 4 14쪽
29 달빛 손톱 (3) 22.08.31 56 4 20쪽
28 달빛 손톱 (2) 22.08.30 54 4 13쪽
27 달빛 손톱 (1) 22.08.29 58 4 20쪽
26 잠든 야수 (6) 22.08.28 61 4 16쪽
25 잠든 야수 (5) 22.08.27 55 5 18쪽
24 잠든 야수 (4) 22.08.26 54 3 19쪽
23 잠든 야수 (3) 22.08.25 61 4 17쪽
22 잠든 야수 (2) 22.08.24 58 4 17쪽
21 잠든 야수 (1) 22.08.23 65 4 20쪽
20 피 냄새 (7) 22.08.22 71 4 13쪽
19 피 냄새 (6) 22.08.21 60 4 17쪽
18 피 냄새 (5) 22.08.20 66 4 18쪽
17 피 냄새 (4) 22.08.19 72 4 15쪽
16 피 냄새 (3) 22.08.18 76 3 16쪽
15 피 냄새 (2) 22.08.17 83 5 15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