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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미달 님의 서재입니다.

라이칸슬로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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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다미달
작품등록일 :
2022.08.01 22:22
최근연재일 :
2023.03.28 22:20
연재수 :
134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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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598
추천수 :
514
글자수 :
1,060,207

작성
22.08.29 2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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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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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20쪽

달빛 손톱 (1)

DUMMY

아침에 일어났을 때 그레로는 자리에 없었다. 오랜만에 깊은 잠이 든 아간은 그레로가 떠나는 것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아간은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혹여 여기서 계속 지내고 싶다고 말했다면 곤란했을 것이다. 밖에 나와도 그레로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아간은 안심했다.


그래도 밖에 지나가다가 마주치면 인사 정도는 나눌 생각이었다.


아간은 활기차게 일을 시작했다. 간만에 잠을 잘 자서 그런 걸까. 예민했던 감정이 한층 누그러져 있었다.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갈수록 도시를 찾아오는 외지인들이 많아졌다. 꼬리별 축제를 즐기기 위함도 있었지만 싸움판의 명성을 듣고 찾아온 자들도 적지 않았다.


로바의 연전연승은 옛적에 끝이 났다. 하루에도 최강자 자리가 몇 번이나 바뀌었다. 이 때문에 판돈은 밀물 썰물처럼 이리저리 쓸려다녔다.


하지만 사람이 아무리 많아져도 무두장이가 사는 곳에는 누구도 얼씬하지 않았다. 마을로부터 멀찍이 떨어져 있음에도 사람들은 냄새가 난다는 듯 행세했다.


덕분에 홀로 있는 시간은 많았다. 피혁상이나 가죽 공예사와 같은, 가죽으로 밥벌이를 해야 하는 사람 말고는 아간을 보러오는 사람은 없었다.


아간은 강에 발을 담근 채 하늘을 보고 있었다.


밤과 달리 낮의 하늘은 편안했다. 특히 오늘처럼 커다란 구름이 느릿하게 흘러가는 날이면 포근해지는 기분마저 들었다.


구름 따라 시선을 옮기던 아간은 문득 다른 곳을 바라봤다. 미리내 산이었다. 그리고 주술사가 사는 곳이기도 했다.


아간은 조만간 주술사를 만나러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어쨌든 라이트도 고비를 넘긴 상태다. 가지 않을 이유는 없었다.


아간은 주술사와 맺은 약속이 여전히 유효한지 궁금했다. 그때 말다툼 한 이후로 아예 연이 끊어진 건 아닐까.


아무런 소식도 없는 걸 보면 그럴 가능성도 있었다.


'그래도 후회는 없다. 만약 그때 당시로 돌아간다 해도 난 똑같은 행동을 했을 거야. 내가 저지른 일이니까.'


아간이 속으로 중얼거리고 있을 때였다.


"이봐!"


아간은 누군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를 들었다. 고개를 돌린 아간은 멀리 서 있는 사람을 발견했다.


그는 심부름꾼이었다. 심부름꾼은 차마 다가가지 못하겠는지 손가락으로 코를 막고서 외쳤다.


"그쪽이 무두장이 아간 맞나?"

"맞소만."

"타솃 선생께서 그쪽을 부르셨어. 얼른 성소원으로 가봐."

"타솃?"

"뭐야, 글자만 모르는 줄 알았더니 사람 이름도 못 알아먹는 건가?"


알고 보니 타솃은 의원의 이름이었다. 아간은 멍하니 있다가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



"다 씹었어요? 줄까요?"


아간이 물었다. 라이트는 약하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입을 살짝 벌렸다. 아간은 숟가락으로 보리죽을 떠서 넣어주었다.


라이트는 힘없이 오물거렸다. 그러다 잔뜩 얼굴을 찌푸리며 신음을 흘렸다. 고통이 밀려오는 모양이었다.


"약 줄게요."


아간은 약제사가 이전에 만들어놓은 진통제를 건네주었다. 은백색을 띄고 있는 진통제는 망둑어 알처럼 작고 동그랬다.


라이트는 팔을 들어 받으려 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왼팔이 없었기 때문이다.


라이트는 절망 어린 눈으로 왼팔이 있던 곳을 바라보았다. 아간은 손을 뻗어 라이트의 오른손 위에 얹어주었다. 라이트는 손가락으로 약을 굴렸다.


라이트가 깨어난지 이틀이 흘렀다.


막 정신을 차렸을 때, 라이트는 여기가 어디냐고 묻지 않았다. 대신 아간이 어디 있느냐고 물었다.


의원은 곧바로 심부름꾼을 불러 아간에게 소식을전해주었다. 헐레벌떡 뛰어온 아간은 안도에 찬 라이트의 얼굴을 마주했다.


아간은 한동안 울었다. 복합적인 감정이 아간의 눈가를 두드리고 또 두드렸다. 라이트는 그런 아간의 등을 토닥여주었다.


간만에 느껴보는 사람의 손길에, 그것도 다른 누구도 아닌 라이트의 손길에 아간은 더욱 울었다.


하지만 그 이후 라이트는 말을 하지 않았다. 디아프의 경우와는 달랐다. 디아프는 말은 안 하는 건 물론이고 반응도 잘 보이지 않았다면 라이트는 그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눈도 마주치기도 했고 경우에 따라서 대답도 했다. 그러나 예전 모습에 비한다면 말을 안 하는 것과 같았다.


라이트는 멍한 눈으로 잃어버린 제 팔을 바라보거나 다리와 허리를 매만졌다. 특히 허리에 감각이 잘 느껴지지 않는지 자주 손가락으로 콕콕 찔렀다.


여섯 번째인가 일곱 번째인가. 어쩌면 그 이상 찔러봤을 라이트의 모습을 보여 아간은 고개를 숙였다.


"혹시 그때 상황에 기억 나는 게 있어요?"


아간이 물었다. 라이트는 별다른 대답 없이 진통제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라이트가 처했던 일에 대해 궁금해 하는 사람은 한두 명이 아니었다. 의원은 물론이고 사냥꾼 롬도 궁금증을 풀기 위해 직접 찾아올 정도였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전에 만났던 조사대원도 라이트를 찾아왔었다. 대원의 날카로운 눈빛을 본 아간은 그가 로이벤이라는 이름을 갖고 있다는 걸 떠올렸다.


로이벤은 최대한 심기를 건드리지 않겠다는 어조로 물었다. 그러나 라이트는 변변찮은 답만 내놓았다.


누구한테 당했는가? 기억이 잘 안 난다.

상황이 어떻게 흘러갔는지는 기억이 나는가? 무척 다급했던 것만 기억난다.

어디서 당했는지는 알고 있는가? 잘 모르겠다. 아마 숲인 것 같다.


로이벤은 실망하지 않고 자세히 기억해보라고 추궁했다. 중요한 장면 하나만 기억하는 순간 그와 연관된 기억이 연쇄적으로 떠오를 거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로이벤은 곧바로 포기해야 했다. 라이트가 머리를 부둥켜안고 울부짖었기 때문이다.


옆에 서 있던 의원이 단호한 얼굴로 고개를 흔들었다.


설령 라이트를 추궁하는 사람이 영주라 한들 의원은 환자를 보호해야 할 의무가 있었다.


의원의 강경한 제지로 인해 로이벤은 이쯤에서 그만두기로 했다.


"나중에라도 기억나길 바라겠소. 그럼 푹 쉬시오."


아간은 자신의 마음을 뭐라 규정해야 할지 몰랐다. 기억이 안 난다는 건 어쨌든 아간에게 좋은 일이므로 기뻐하는 게 맞았다.


그러나 이전과 같은 모습이 아닌 생기를 잃은 라이트를 보니 혼란스러워졌다. 불안한 듯 바라보는 아간에게, 의원은 특별할 게 없다고 말해주었다.


"아직 회복이 덜 되어서 그런 거요. 당연하지. 이렇게 큰 상처를 입었으니. 당분간은 안정을 취해야 할 거요."

"그럼 그때까지는 계속 진통제를 먹어야 합니까?"

"안 그러면 끔찍한 고통에 몸부림 칠 거요. 물론 연고도 발라줘야 하고. 내가 준 거 있지 않소? 틈만 나면 발라줘야 되니 잊지 마시오."


아간은 의원이 주었던 약을 떠올리며 그러겠노라고 답했다. 아간은 짐이 든 배낭을 앞에 메고 등에는 라이트를 업었다.


의식을 찾은 이상 병동에 더 있을 수는 없었다. 사람이 많이 사는 도시이니만큼 그에 따라 새로운 환자는 언제나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중에는 라이트 못지 않게 심한 상처를 입은 자도 있었다. 이제 라이트는 그를 위해 방을 비워줄 필요가 생겼다.


의원은 한시름 덜었다는 얼굴로 말했다.


"얼른 가시오. 혹 필요한 약품이 있으면 약제사를 찾아가면 될 거요.

"예. 그동안 정말 감사했습니다. 꼭 사례하겠습니다."


아간은 고개를 숙이고 뒤로 돌았다.


"잠시만."


의원이 멈춰세웠다. 의원은 웬 주머니를 건네주었다.


"이것도 들고 갈 수 있을지는 모르겠군. 정 무거우면 다음에 와도 좋소."

"이게 뭡니까?"

"먹을거리지. 많은 건 아니요. 치즈 반 덩어리와 육포 한 묶음, 포도주 두 병, 마른 과일 서너 개를 넣었소."


아간은 잠시 말없이 의원을 바라보았다. 의원은 어깨를 으쓱였다.


"별 거 아니오. 신의 기적을 눈앞에서 본 보답이니. 또 개인적으로 환자에게 고마움을 느끼기도 했고."


"고맙다뇨?"

"보다시피 난 사람을 살리는 일을 하고 있소. 그러나 이 일을 하다보면 사람 죽는 꼴을 더 많이 보게 되더군. 내 능력으로도 해결할 수 없는, 큰 질병이나 상처를 짊어진 환자들 같은 경우는 더욱 그랬지."


의원은 라이트를 쳐다보았다. 라이트는 반쯤 감은 눈을 하고서 숨을 새액새액 쉬고 있었다.


"나는 살기 어려울 것 같은 환자를 보면 마음을 다잡곤 하지. 그래야 죽음에 둔감해질 수 있기 때문이오. 하지만 그건 착각이었소. 아닌 척 할 뿐이지 실상은 누구보다도 죽음에 예민하게 반응하고 있었던 거요."


문득 라이트가 시선을 들었다. 가라앉은 눈으로 자신을 보는 의원의 모습에 라이트도 묵묵히 마주보았다.


"그런 나에게 아직 희망은 존재한다고 이 자가 말해주었소. 좌절하기엔 이르다고 해주었던 거지. 그래서 내 나름대로 소소한 보답을 한 거요. 단지 그뿐이오."


의원은 약간 헛기침을 해보였다. 평상시 말을 많이 하지 않아서인지 어색해보였다. 아간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고맙습니다."


라이트가 말했다.


아간과 의원은 놀라서 라이트를 바라보았다. 라이트는 약을 먹어서인지 몽롱해보였다. 그렇지만 고맙다는 말을 연신 반복하고 있었다.


의원은 라이트의 손을 살짝 잡아주었다.


"주십시오."


아간은 말과 함께 입을 벌려보였다. 의원은 머뭇거리다가 괜찮냐고 물었다. 아간은 다시 한 번 고개를 끄덕였다. 의원은 아간의 입에 주머니 입구를 물려주었다.


목례를 한 아간은 지체없이 자리를 떴다.



******



세상에도 아직 깨끗함과 아름다움이 존재한다는 걸 증명하고 싶을 때 사람들은 성소원을 바라본다.


세심하고 정교하게 지어진 건물과 잔잔하고 부드러운 미소를 피어올리는 수사의 조화는 아름다움을 넘어서 성스러움마저 느끼게 해준다.


일상의 고단함에서 겪는 사소한 죄악도 신의 손길 앞에서는 무용지물일지니, 사람들이 주말마다 이곳을 찾는 것도 본인을 정결케 하기 위함이 틀림없다.


그러나 떠오르는 것이 있다면 가라앉는 것도 있는 법이다. 온 세상을 밝히는 빛이 하늘에 떠 있다면 지상에 어둠이 드리우는 건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렇다면 성소원이 하늘에 떠 있는 빛이라면 거지촌은 필시 지상에 드리운 어둠일 것이다.


하수구 입구 주변에 자리 잡은 거지촌은 위치 특성상 고약한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도시의 온갖 부정한 것이 몰려드는 하수구 안에는 언제나 새로운 쓰레기와 오물이 흘러가고 있었다.


이 오물은 최종적으로 밖에 흘러가는 강가로 이동한다. 때문에 강물은 비가 내리지 않는 날씨 이외에는 항상 비릿하고 시큼한 냄새를 풍겼다.


하지만 강물이 받아들이는 건 쓰레기와 오물만이 아니었다. 때로는 붉은 피를 받아들일 때도 있었다.


강물의 식성이 어떤지는 세상이 멸망할 때까지 알 수 없는 일이겠지만 아마 피를 좋아하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여기, 덩치 큰 남자에게 얻어맞고 있는 청년의 피가 강물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청년은 어이없다는 얼굴로 강물을 쳐다보았다. 강물은 더 많은 피를 달라는 듯 수면에 작은 맴돌이를 일으키고 있었다.


'여기서 더 흘리면 내가 죽어, 임마.'


"정신 안 차려!"


덩치 큰 남자가 소리질렀다. 그는 거지꼴을 하고 있는 것치고는 꽤나 살집이 있었다. 아마 왕초인 듯싶었다.


청년은 퉁퉁 부은 얼굴로 고개를 올렸다. 왕초는 뭐가 그리 화났는지 잔뜩 붉어져 있었다.


"먹여주고 재워준 사람에게 은혜를 갚지는 못할 망정 감히 거짓말을 해? 그레로!"


그레로는 시시하다고 생각했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그렇게 생각하고 싶었다.


그레로는 최대한 태연함을 가장하고 싶었지만 몸이 벌벌 떨리는 걸 막을 수 없었다.


그럴수록 왕초는 흉포해졌다. 귀신처럼 일그러진 얼굴은 당장이라도 네 목덜미를 물어뜯어버리겠다고 외치고 있었다.


"돈 어디 있어. 지금이라도 말하면 덜 아프게 때려주마."

"드렸잖아요. 그게 다예요."

"천만에! 내 귀가 거짓이라고 속삭이고 있어. 네가 다른 곳에 돈을 숨기고 있다고 말이야!"


말도 안 되는 이야기다. 그레로는 왕초가 힘도 세고 제법 영악하다는 것도 인정했지만 독심술마저 갖고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분명 누군가 왕초에게 이른 게 틀림없었다. 그레로는 갑자기 제 할 일을 찾아 떠나는 동료들을 쳐다보았다. 그들의 귀는 남자와 그레로에게 향하고 있었지만 적어도 눈은 아니었다.


바닥에 돈이라도 떨어졌는지 다들 뚫어지게 밑을 샅샅이 훑어보고 있었다.


그레로는 하는 수없이 밝혔다.


"알았어요. 솔직히 말할게요. 뭔가 숨겨 놓긴 했어요. 하지만 절대 돈은 아니에요. 사실은 그게···."


그레로는 입을 다물었다. 뺨을 세게 때린 왕초는 그레로를 바닥에 내팽겨쳤다.


"안내해."


비틀거리며 일어난 그레로는 왕초를 안내했다. 왕초는 팔짱을 낀 채 뒤따라갔다. 딴에는 위엄을 보이고 싶었을 테지만 걸음은 오리가 걷는 것처럼 뒤뚱거렸다.


수족을 껴서 그런지 걷는 게 영 불편해보였다. 그 바람에 위엄이 살기는커녕 좀 우스꽝스러워보였다. 거지들은 심각한 분위기 속에서도 다들 웃음을 참기 위해 입을 가렸다.


이윽고 그레로가 한 지점에 멈춰섰다. 그곳은 강가였다.


"여기예요."


왕초는 말없이 한쪽 눈썹을 올렸다. 그레로는 상처로 얼룩진 손으로 땅을 벅벅 팠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한 물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왕초는 그레로를 옆으로 밀어낸 뒤 그것을 꺼냈다.


그건 성소원에서 이번에 만든 술이었다.


왕초는 입매를 비틀었다.

"그리고?"

"없어요."

"그리고!"

"진짜 없어요. 이게 끝이에요."

"내 귀는 아니라고 속삭이는데?"


'귀가 입이냐, 다리 고자야!'


간신히 속마음을 삼킨 그레로는 혼신을 다해 고개를 흔들었다.


"정말이에요. 단지 전 대장에게 선물로 하려고 했어요. 대장도 알잖아요, 지금 이맘때 저 술이 얼마나 값이 나갈지. 비록 한 병이어도 치즈 두 덩이는 살 수 있을 정도로 값이 나가죠."


왕초는 술과 그레로를 번갈아봤다. 그러다 술병 마개를 따더니 냄새를 킁킁 맡았다. 왕초는 술을 그레로에게 들이밀었다.


"마셔 봐."


그레로는 술병을 건네받았다. 왕초는 눈을 부릅 떴다.


"조금 마셔야 해. 이만큼, 아니 요만큼만."


왕초가 검지와 엄지를 구부려보였다. 두 손가락 간격은 거의 맞닿을 듯했다. 그레로는 정말 입술만 축일 정도로 마셨다.


쩝쩝거리는 그레로를 유심히 보던 왕초는 병을 빼앗았다. 그리고 한 모금 시원하게 머금었다. 왕초는 술로 입안을 세척하려는 것처럼 볼을 부풀렸다.


꿀꺽. 왕초는 흡족한 얼굴로 말했다.


"그레로야."


부드러운 목소리다. 그레로는 황급히 자세를 바로했다.


"이런 게 있으면 바로 내놔야지."

"예, 그래도 특별한 일이 있을 때 내놓는 게 좋지 않겠어요? 그래서.."


왕초는 그레로의 뺨을 쳤다. 머리가 휙 돌아갈 만큼 힘이 실렸지만 아까보다는 훨씬 약했다. 왕초는 흥얼거리더니 말했다.


"다음부터는 이런 거 있으면 바로 내놔. 괜히 숨겨서 오해만 샀잖아."

"예, 그럴게요."

"그리고 외박할 거면 말을 해. 저번에 밤이 되서도 안 나타나길래 영영 떠난 줄 알았잖냐."


왕초는 목에 걸고 있는 장식품을 톡톡 건드렸다. 그레로의 동공이 흔들렸다.


"물론 그러면 나야 좋지. 이 값비싼 거 팔아서 좋으니까."

"아뇨, 아뇨. 제가 무턱대고 떠날 일이 있나요. 여기 말고 갈 데가 어디 있다고. 절 거둬주셔서 언제나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는데요."


왕초는 벙긋 웃고는 집으로 돌아갔다. 그레로는 왕초가 사라질 때까지 지켜보았다.


곧 모습이 보이지 않자 긴 한숨을 쉬었다. 그레로는 파헤친 땅을 보았다.


자세히 보니 가죽 주머니가 파묻혀 있었다. 술병 밑에 있었던 듯했다.


그레로는 남몰래 가죽 주머니를 열어 돈을 확인했다. 다행히도 그대로였다. 그레로는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는 얼른 뽑아들었다.


다른 곳에 숨길 필요가 있었다. 그레로는 주변을 둘러보다가 들기 어려워보이는 돌을 발견했다. 낑낑대며 간신히 들어올린 그레로는 돌 밑에 돈 주머니를 넣었다.


이 정도 무게의 돌이면 왕초도 쉬이 들진 못할 것이다. 그레로는 땀을 닦으며 자리에 앉았다.


무더운 날씨다. 오물로 뒤덮인 강물에 지체않고 뛰어들고 싶을 정도로.


그레로는 옷으로 얼굴을 닦았다. 상처 때문에 따가웠다. 땀과 때로 얼룩진 옷은 빨래를 한다 해도 깨끗해지지 않을 것 같았다.


그레로는 되도로이면 후회를 하지 않는 성격이었다. 언제고 지난 날을 회고하며 술로 하루를 달래는 자들을 못났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왕초의 목에 걸린 목걸이를 바라볼 때면 그레로는 극심한 좌절과 후회를 느꼈다. 과거의 자신에게 환멸감까지 들 정도였다.


그레로는 자신이 왜 저딴 사람에게 목걸이를 갖다바쳤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아무리 춥고 배고프다고 해도 저 소중한 걸 건네주다니. 그레로는 강하게 제 머리를 때렸다.


"그레로."


한 사람이 그를 불렀다. 엉거주춤 자리에서 일어난 그레로는 얼굴을 잔뜩 구겼다. 왕초의 딸랑이. 좀 더 노골적으로 표현한다면 왕초의 개라고 할 수 있겠다.


그레로는 상대의 이름을 어렵잖게 떠올릴 수 있었지만 부르고 싶지 않았다. 어쨌든 톤이라는 이름보다 왕초의 개가 더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다.


물론 입밖으로 꺼냈다간 어떤 일을 당할지 모르니 직접적으로 얘기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오늘은 네 차례야. 갔다 와."


톤이 엄지 손가락을 들더니 뒤를 가리켰다. 그레로는 어디를 가리키는지 알고 있었기에 굳이 보려고 하지 않았다. 대신 여전히 얼굴을 구긴 채 말했다.


"그저께 갔다 왔잖아."

"대장 말 못 들었어? 허락없이 밤에 나갔다 온 벌이라고 하셨잖아."


그런 말은 꺼내지도 않았다. 그리고 벌은 이미 실컷 받았다. 그레로는 제 얼굴을 가리키며 이게 벌이 아니면 뭐냐는 듯이 굴었다. 톤은 히죽 웃었다.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고. 대장이 좋아하는 말이잖아?"


톤은 얼른 갔다오라고 말하고는 손을 가볍게 흔들었다.


그레로는 톤이 제멋대로 시킨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아마 왕초는 그레로가 쓰레기 뒤질 거라고는 생각도 안 하고 있을 것이다.


마치 자신이 왕초처럼 행세하는 톤의 모습에, 그레로는 마냥 두고 보기 힘들었다.


"야, 톤. 자꾸 그러면 이번에는 진짜 혀가 뽑히는 수가 있어. 조심해."


톤은 식겁한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저번에 당했던 일이 어지간히도 뇌리에 남았던지 입을 가리기까지 했다.


그러나 톤은 무두장이가 사는 곳은 여기서 멀리 떨어져 있다는 걸 깨달았다. 톤은 뒤늦게 분노하며 그레로의 목덜미를 잡아올렸다.


"착각하나본대 그 거지 같은 무두장이가 힘이 있는 거지 네가 있는 게 아냐. 뭣하면 지금이라도 뽑아줄까?"


그레로는 후회했다. 잠깐의 복수심을 느껴보겠다고 더한 화를 불러 일으키다니. 그레로는 톤이 손가락을 위협스럽게 꼼지락거리는 걸 보았다.


"윽!"


그러나 톤은 혀를 뽑는 대신 복부에 주먹을 꽂았다. 그레로는 헛구역질을 했다.


"잔말 말고 하수구에나 갔다 와."


그레로는 이 어린애 장난 같은 일에 분개했지만 곧 힘이 빠졌다.


그레로는 천막 안으로 들어가서 도구를 챙겼다. 쓸만한 쓰레기를 담을 자루와 집게였다.


마지막으로 걸레로 코와 입을 막은 그레로는 하수구 안으로 들어갔다.


그와 동시에 축제의 시작을 알리는 환호성이 도시에 울려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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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선전 포고 22.09.07 54 4 2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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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엇갈림 (2) 22.09.05 50 3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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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달빛 손톱 (4) +1 22.09.01 54 4 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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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달빛 손톱 (2) 22.08.30 54 4 13쪽
» 달빛 손톱 (1) 22.08.29 58 4 20쪽
26 잠든 야수 (6) 22.08.28 61 4 16쪽
25 잠든 야수 (5) 22.08.27 55 5 18쪽
24 잠든 야수 (4) 22.08.26 54 3 19쪽
23 잠든 야수 (3) 22.08.25 61 4 17쪽
22 잠든 야수 (2) 22.08.24 58 4 17쪽
21 잠든 야수 (1) 22.08.23 65 4 20쪽
20 피 냄새 (7) 22.08.22 71 4 13쪽
19 피 냄새 (6) 22.08.21 60 4 17쪽
18 피 냄새 (5) 22.08.20 66 4 18쪽
17 피 냄새 (4) 22.08.19 72 4 15쪽
16 피 냄새 (3) 22.08.18 76 3 16쪽
15 피 냄새 (2) 22.08.17 83 5 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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