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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미달 님의 서재입니다.

라이칸슬로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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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다미달
작품등록일 :
2022.08.01 22:22
최근연재일 :
2023.03.28 22:20
연재수 :
134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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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503
추천수 :
514
글자수 :
1,060,207

작성
22.08.31 2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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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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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20쪽

달빛 손톱 (3)

DUMMY

그레로는 강에 들어가지 않을 수 없었다. 축제 기간이라 그런지 강물은 전보다 훨씬 오염되어 있었지만 그레로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아무리 오염되었다 한들 하수구 안쪽보다 더러울 리는 없었다. 냄새나는 옷을 훌훌 벗은 그레로는 망설임 없이 물에 뛰어들었다.


수심이 제법 되는 편이었기에 수면과 달리 강바닥은 깨끗했다.


강바닥 흙을 한 움큼 움켜쥔 그레로는 몸을 벅벅 닦았다. 그러자 바위나 물풀에 숨어 있던 물고기들이 황급히 뛰쳐나왔다.


그레로는 숨을 참을 수 있을 때까지 참은 다음, 수면 밖으로 얼굴을 뺐다.


"푸우!"


그레로는 이보다 만족할 수 없다는 얼굴로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과연 별들도 축제 행렬에 동참하고 싶은 건지 평소보다 더욱 반짝이고 있었다. 이에 질 수 없다는 듯 꼬리별이 쉬지 않고 밤하늘을 질주했다.


그레로는 반쯤 누운 채로 고개를 돌렸다. 하나의 거대한 장작불처럼 타오르는 도시가 서 있었다. 그 앞에는 기다란 띠처럼 형성된 마을이 있었다.


원래 이 시간이면 마을에는 불빛이 거의 없다. 도시와 달리 마을은 기름을 되도록이면 적게 쓰는 편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도시 못지 않게 밝은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다들 경쟁적으로 횃불과 등화를 피어올리고 있었다.


앞으로 일주일 동안, 꼬리별 도시와 마을에서 어둠이 있을 곳은 별로 없었다. 하늘에는 창연히 빛나는 달과 별이, 땅에는 사람이 피어올린 불빛 때문이었다.


갈 곳 잃은 어둠은 자신을 받아줄 곳이 어디 있는지 찾아다녔다. 그 결과 어둠은 불빛 한 점 없는 숲과 강물에 정착하게 되었다.


그레로는 주변이 더 어두워진 것 같은 착각을 느꼈다. 이러다 그레로 본인도 어둠에 녹아들지도 몰랐다. 멱을 감은 그레로는 밖으로 기어나왔다.


"다 했나?"


그레로는 갑자기 기분이 안 좋아졌다. 그레로는 옷에 묻은 흙덩이를 털며 투덜거렸다.


"이제 좀 쉬자고. 대장한테 맞자마자 바로 하수구로 들어갔는데 또 시키냐? 젠장, 술병 하나 숨겼다고 이렇게까지 당해야···."

"맞아?"


그레로는 의아함에 고개를 들었다. 어둠이 안심하고 몸을 숨길 만한 공간이 강과 숲 말고도 또 있었다. 그건 한 남자의 그림자였다.


남자는 어둠이 일렁이는 것 같은 그늘진 얼굴로 그레로를 보고 있었다.


"아저씨?"


아간은 그레로의 얼굴에 난 상처를 유심히 보았다. 약간 눈살을 찌푸린 아간은, 그러나 별 거 아니라는 어조로 말했다.


"조금 까진 수준이네."

"예, 제 피부가 워낙 단단해서 말이죠. 이 정도는 간지럼 밖에 안 돼죠."

"간지럼 더 태워줄까?"

"돌덩이로 간지럼 태우는 사람도 있습니까?"


아간은 돌덩이 같은 손으로 그레로의 머리에 붙은 진흙을 떼어주었다. 그레로는 한숨을 쉬었다.


"어차피 여기저기 묻어 있어요. 알아서 떼지겠죠. 그보다 내가 여기 있는 거 어떻게 알았어요?"

"···감."


아간은 순간 냄새라고 말할 뻔했다.


"와, 거짓말 진짜 못하는군요. 그냥 솔직하게 말하시죠. 수소문해서 왔다고. 근데, 잠시만. 그 녀석들이 공짜로 알려주진 않았을 텐데."

"묻지 않았어. 정말로 감을 따랐을 뿐이야."

"어련하겠습니까."


대꾸한 그레로는 강가에 앉아 옷을 빨았다. 비누풀은 바라지도 않았다. 그레로는 하다 못해 잿물이라도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간은 그레로를 방해하지 않았다. 뒤에 앉아서 잠자코 기다리기로 했다.


"저번에 말없이 떠나서 미안해요. 정신 차리고 보니 제가 아저씨네 집에서 자고 있더라고요."


그레로는 옷이 찢어지지 않게 조심스레 문지르고 있었다.


"인사하자니 아저씨도 자고 있어서 그냥 나왔어요. 오래 자리를 비우면 다리 고자가 지랄하기도 하고요."

"다리 고자?"

"거지촌 대장인데 한쪽 다리가 없거든요. 자기 말로는 산적 열댓 명과 싸우다가 그랬다는데 개뿔. 그것도 상황에 따라 말이 다 달라요. 맹수를 사냥하다가 그랬다는 둥, 동굴에 사는 괴물과 싸우다가 그랬다는 둥. 제가 보기엔 분명 헛짓거리 하다가 그리 된 걸 거예요. 산비탈에서 굴러 넘어졌다던지 해서 말이죠."


옷을 팡팡 두드린 그레로는 냄새를 맡았다. 그리고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옷을 내던졌다. 무두장이가 입는 옷도 이렇게까지 냄새가 나진 않을 것이다.


그레로는 오늘 밤은 알몸으로 자기로 마음먹었다. 현재 계절이 여름인 게 천만다행이었다.


"그런데 왜 계속 여기서 지내는 거지?"


아간이 물었다. 그레로는 헛웃음을 지었다.


"무엇 하나 할 줄 모르는 놈이 갈 데가 어디 있겠어요. 어쨌든 여긴 잘 데도 있고 먹을 것도 있잖아요."

"그런 건 문제가 안 돼. 저기 목축장에서 일만 해도 여기보다는 사정이 나을 거야."

"이봐요, 아저씨. 꼽추 새끼를 누가 써요? 됐어요. 어차피 내 성미에 안 맞아요. 거긴 정해진 대로 움직여야 하잖아요. 게다가 하루 종일 똥냄새 나는 곳에서 일도 하고 밥도 먹고 잠도 자야 하죠. 차라리 여기가 나아요."

"다리 고자가 밖에 오래 못 있게 한다며. 여기도 만만찮게 답답한 곳 같은데."


그레고가 아간을 노려보았다. 아간은 덤덤한 얼굴로 마주보았다. 그레로는 약간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이더니 말했다.


"뭐예요, 언제는 귀찮다는 듯이 굴더니만 오늘은 왜 이렇게 살가워요? 막상 떨어지니까 서운해요? 이상하네, 그리 오래 붙어 있지도 않았는데."

"너야말로 까칠한데. 간지럼 몇 번 당했다고 감정이 상한 건가?"

"젠장, 돌려 말했다고 진짜 그렇게 받아들이면 어떡해요. 이게 간지럼으로 보여요? 폭행이지!"


그레로는 입술을 꾹 깨물더니 손등으로 눈가를 닦았다. 알몸으로 그러고 있으니 궁상맞기 그지 없었다.


아간은 떨어진 옷을 줍고는 그레로에게 돌려주었다. 그레로는 제 나름대로 멀리 던졌다고 생각했겠지만 실은 근처에 떨어져 있었다.


"똥냄새 나는 옷 입기 싫어요."

"안 입어도 나잖아."


그렇긴 하네. 그레로는 싱겁게 수긍하는 자신이 싫었다. 아간은 그레로가 옷을 받자 제자리에 쪼그리고 앉았다.


"예전에 퉁명스레 굴었던 건 사과하지. 동료가 부상 당한 뒤로 이런저런 안 좋은 일이 겹치는 바람에 기분이 좋지 않을 때였어."


그레로가 고개를 돌렸다.


"그럼 지금은 괜찮다는 말이에요?"

"그때보다는."

"그런 것 같네요. 전보다 얼굴이 펴진 걸 보면."


그렇게 말한 그레로는 혼자서 피식 웃었다. 분명 다른 사람이 들었다면 '저게?' 라는 얼굴로 쳐다봤을 것이다. 아간은 무뚝뚝한 얼굴로 말했다.


"그리고 나도 얼굴이나 보자고 온 건 아냐. 할 얘기가 있어서 온 거지."

"무슨 얘긴데요?"

"전에 네가 그랬지. 돈이 필요하다고 말이야. 그 때문에 날 꼬드겼었고."

"그리고 아저씨는 가차없이 거절했었죠. 예, 그런데요? 혹시 참가하겠다는 소리는 아니죠?"

"맞아."


아간은 그레로가 기뻐할 거라 생각했다. 반은 맞았다.


그레로는 잠깐이지만 기뻐하내는 내색을 보였다. 그러나 곧바로 어이가 없다는 얼굴로 쳐다보았다.


"이제 와서?"

"이제 와서라니?"

"일주일, 아니, 닷새 전이었다면 당장 참가하자고 난리쳤을 거예요. 그때는 개나 소나 참가가 가능했으니까. 하지만 이젠 아니에요."

"판돈도 올라가고 보는 사람도 많아진 바람에 지금은 실력이 뒷받침 되는 사람만 올라갈 수 있다는 말이지?"

"어디서 듣긴 하셨나 보네요. 예, 맞아요. 그렇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에요."

"그러면?"

"생각해봐요. 제가 예전에 로바라는 녀석이 연전연승을 하고 있다고 그랬죠. 그렇다 보니 로바를 확 꺾을 수 있는 상대가 과연 누굴지 다들 관심을 갖고 있었다고 했죠.


아간은 기억이 잘 나지 않았지만 맞장구 쳐주기로 했다.


"그렇었지."

"그 말은, 당연히 로바가 출전하는 경기에 돈이 많이 걸릴 수밖에 없다는 말이죠."

"듣기로 어떤 경기에선 판돈이 금편 단위까지 올라갔다고 하던데."

"예, 그건 최고조였죠. 솔직히 그날은 그럴 만했어요. 상대도 보통내기가 아니었거든요. 과연 센이 솜씨 좋은 용병 상대로도 이길 수 있을 것인가. 단순히 우물 안 개구리 수준이었던 건 아닐까. 여러모로 기대되는 승부였죠."


그레로는 잠시 말을 멈췄다. 그날의 일을 회상하는 듯했다. 아간은 충분히 기다린 뒤에 말했다.


"그리고 상대가 이겼다고 했지. 그 자는 약 금편 열 닢을 받았고."

"그건 선수 개인이 받는 상금이고요. 내기꾼들에게 돌아가는 돈까지 다 합치면 훨씬 넘죠."

"얼마나?"

"저도 자세히는 몰라요. 하지만 열 닢은 훌쩍 넘겠죠. 듣기로는 스무 닢도 넘었다고 하던 걸요."


아간은 작게 신음을 흘리며 미간을 좁혔다.


"근데 지금 경기들 중에 화제성이 있는 경기가 별로 없어요. 전체적인 관심도나 판돈을 보면 당연히 그때보다는 평균적으로 많긴 하지만 한 번에 벌어들이는 양이 적다는 거죠. 예전에 전 그걸 노렸던 거라고요!"

"하지만 내가 그때 참여했다고 한들 상금이 금편까지 올라갈 거라고 생각하진 않는데. 그 금액까지 올라갔던 건 상대도 어쨌든 이름값이 있어서 그런 거 아냐."

"이름값이야 올리면 되죠."


그레로는 어리둥절하는 아간을 보고 탄식했다.


"그때 센 말고도 연전연승 하는 사람이 있었으면 어땠을 것 같아요?"


왜 이런 생각을 하지 못하는 걸까. 간단히 머리를 굴리면 되는 일인 것을. 자신이 한심하다고 생각하던 아간은, 그러나 곧 회의감에 젖은 어조로 물었다.


"그래도 금액이 그 정도까지 올라갔을까?"

"당연히 올라가죠. 거기 싸움판에 심판과 해설을 도맡아하는 사람 있죠? 그 사람은 아무래도 이런 일에 잔뼈가 굵은 것 같아요. 만약 아저씨가 그때 나갔다면 해설자는 최대한 센과 아저씨를 붙이지 않았을 거예요. 사람들이 성을 내고 돈을 마구 뿌릴 지경이 되어서야 붙였을 거예요. 어쩌면 금편 열 닢은 성에 안 찰 만큼 무지막지한 상금이 붙었을 수도 있어요."


그제야 아간은 왜 그레로가 필사적으로 자신을 꼬시려고 했는지 알게 되었다. 하지만 아깝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때 참여했다면 아간은 제 감정을 억누르지 못했을 것이다. 필시 어떤 방식으로든 사고가 벌어졌을 게 분명했다.


그레로는 바지를 꾹 짜며 말했다.


"이제 와서 그러면 뭐하겠어요, 이미 끝났는걸. 나중에 만나면 술이나 다시 마셔요. 성소원 술은 말고요. 그건 너무 쎄더라고요. 제가 약한 게 아니라요. 아, 그때는 아저씨가 쏴요. 알았죠?"


아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다만 바로는 말고."

"날짜는 상관없어요. 잊지만 않으면 돼죠."

"일주일 후에 살게. 그때 축제 막바지지?"

"좋아요. 근데 왜 일주일 후인지 물어봐도 돼요?"

"싸움판은 축제 끝날 때까지만 하잖아."

"그런데요."

"그때까지 최대한 이름값을 올려야겠군. 판돈을 올려야 하니까."


그레로는 멍한 얼굴로 아간을 쳐다보았다. 아간은 가볍게 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난 내기판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몰라. 누구랑 싸워야 이름값이 높아지는지도 모르고. 그러니 네가 도와줘. 상금은 어떻게 나누면 좋을까. 너한테 삼 할 정도 주면 되려나. 그 정도면 될 것 같은데?"


그레로는 여전히 말을 못하고 있었다. 아간이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도통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레로는 아간의 얼굴에서 장난기나 웃음기가 섞여 있는지 확인해보았다. 조금이라도 보였다면 그레로는 썰렁한 농담 그만하라고 외쳤을 것이다.


그러나 그레로는 암만 살펴봐도 아간에게서 진지함 말고는 아무것도 발견할 수 없었다.


마침내 그레로는 더듬거리며 말했다.


"지, 진심이에요?"

"뭐가?"

"참가, 그, 싸움판, 아니···잠시만요. 그니까 제 말은, 아저씨 실력이 그 정도로 대단하냐는 거예요. 싸움꾼들 실력 제대로 본 적 있어요, 혹시?"

"아까 낮에 봤어."

"오늘은 내가 못 봐서 할 말이 없네요. 하지만 참가하겠다는 헛소리를 하는 걸 보니 오늘 올라온 선수들 실력이 그저 그랬나본데요."


아간은 인상을 조금 찌푸렸다.

"네가 저번에 그랬잖아. 내가 싸우는 걸 보고 감탄했다고."

"그땐 그때죠.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많이 달라졌잖아요. 아저씨가 센을 이긴 그 검은 갈퀴보다 강해요? 아니면 손가락 하나로 곰도 쓰러뜨렸다는 쇠검지보다 강해요?"

"별명들이 다 왜 그래?"

"그럴 만한 실력들을 갖고 있으니까 그런 거예요. 아저씨, 포기하세요. 지금 싸움판은 초창기에 비하면 전체적으로 질이 높아졌어요. 판이 생각보다 커져버린 거죠. 이게 다 귀족 때문이에요. 판돈이 쓸데없이 커지는 바람에 실력자들이 모여드는 괴상한 현상이···."


주절주절 말하던 그레로는 입을 다물었다. 아간의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기 때문이다. 네가 뭐라고 말하던 뜻을 굽힐 생각이 없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그레로는 아간의 굳건한 태도를 보자 묘한 확신이 들었다. 그리고 그런 자신에게 불가사의를 느꼈다.


"정말 잘할 자신 있어요?"


그레로가 마지막으로 확인하듯 물었다.


아간은 잠시 허공을 바라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뭔가 찾는 듯 주변을 둘러보던 아간은 갑자기 강물에 뛰어들었다. 그레로는 놀라움과 당혹감이 섞인 얼굴로 수면을 바라보았다.


아간을 삼킨 강물은 시치미 뗀 얼굴로 밤하늘만 바라보았다.


그때 수면이 위로 치솟았다. 아간이 수초를 머리에 잔뜩 인 채 육지로 걸어나왔다. 그레로는 하마터면 물귀신이 나타났다고 외칠 뻔했다.


"뭐, 뭐, 뭐, 뭐예요?"

"싸움꾼들이 이 정도 힘을 갖고 있지 않다면."


아간은 중얼거리더니 품에 들고 있는 커다란 물돌을 보였다. 그건 거의 바윗덩이라고 봐도 좋았다. 물이끼가 덕지덕지 묻어 있어 표면은 잔뜩 미끄러워보였다.


하지만 아간은 거뜬하게 바위를 들고 있었다. 갈고리처럼 구부린 손가락이 바위 안에 깊이 파고들어가 있었다.


아간은 무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충분히 이길 수 있어."


그레로는 너털웃음을 지었다.


"아저씨 사람 맞죠?"

"아니. 괴물이야."

"진지하게 말하지 마요. 정말로 믿을 것 같으니까."


아간은 말없이 그레로를 쳐다보다가 바위를 옆으로 던졌다. 너무 가볍게 던진지라 그레로는 바위가 조약돌처럼 통통 튕길 거라 예상했다.


쿵! 예상은 예상일 뿐이었다. 바위는 큰소리를 내며 바닥에 박혔다.


생각해보니 그레로 입장에서는 굳이 반대해야 할 이유가 없었다. 딱히 불이익을 받을 일이 없기 때문이다.


어차피 앞에 나서는 건 아간이었다. 그레로는 아간 뒤에 숨어서 떡고물만 받아먹으면 그만이었다.


물론 맨입으로 먹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아간 말대로 그레로는 내기판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만약 아간이 상대가 누구든 이길 수 있는 실력을 갖고 있다면 이름값을 올리는 건 문제도 아니었다.


그레로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품고 씩 웃었다.


"알았어요. 까짓 거 한번 해보죠. 아저씨가 최선을 다한다면 저도 열성을 다해 도울게요. 삼할이랬죠?"

"그래."

"좋아요."


아간과 그레로는 악수를 했다. 그레로는 신난다는 얼굴로 말했다.


"이렇게 된 거 별명도 만들죠."

"안 돼."

"있어 봐요. 그게 있어야 사람들도 아저씨를 기억하기 쉽죠. 이름값을 올리는 데에도 도움이 된다고요."

"이봐, 나는···."


그레로는 불타오르는 눈으로 말했다.


"기대해도 좋아요. 싸움판뿐만 아니라 이번 꼬리별 축제 최고의 유명 인사로 만들어드릴게요."

"절대 하지 마. 알겠어? 그냥 본래 이름으로 할 거니까 그리 알아."


아간은 여러 차례 거부했지만 그레로는 이미 자기만의 생각에 빠져 있었다.


도시와 마을로부터 축제의 열기가 이어졌지만 그레로에게서 나오는 열기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레로는 흡족한 미소를 피어올리고 있었다.



******



다음 날, 오후. 자격 심사를 통과한 아간은 싸움판 뒷편에 대기하고 있었다. 아간은 경기장에서 싸움꾼 두 명이 서로 투닥거리고 있는 걸 지켜보았다.


그때 한 명이 아간에게 다가오더니 어깨를 툭 건드렸다. 고개를 돌린 아간은 상대가 불량한 미소를 짓고 있는 걸 발견했다.


"좋은 승부해보자고, 형씨."


상대가 손을 내밀었다. 아간은 가볍게 악수를 한 뒤 놓았다.


"힘이 고작 이거 밖에 안 돼?"


상대가 비웃고는 반대편으로 걸어갔다. 아간은 멀뚱히 바라보기만 했다.


"자, 그럼 이어서 다음 경기를 보겠습니다!"


해설자가 아간과 상대에게 눈을 맞췄다. 준비됐느냐는 신호였다. 두 사람은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해설자는 우스꽝스럽게 팔을 휘젓더니 상대 선수를 호명했다.


'아귀손?'


아간은 참으로 괴상한 별명이라고 생각했다.


상대는 군중에게 손가락을 쫙 펼쳐보였다. 손가락은 울퉁불퉁했는데 굳은살이 잔뜩 배긴 것 같았다.


나름 이름을 날리고 있었던지 군중들은 적절한 환호를 보내주었다.


신난 아귀손은 장작 패는 시늉을 보였다. 아간은 왜 상대의 손에 굳은살이 덕지덕지 붙어 있는지 알게 되었다.


"자, 그럼 다음 싸움꾼을 부르···기 전에! 이 싸움꾼은 이번이 처음이라는군요. 이래서야 꾼이라는 말을 붙이기가 민망하지 않습니까?"


웃음소리가 물결치듯 지나갔다. 해설자는 가엽다는 얼굴로 청중을 둘러보았다.


"그것만이 아닙니다. 첫 싸움판에 올라와서 붙는 첫 상대가 무려 아귀손이라니. 아, 오해하지 마십시오. 제가 억지로 붙인 게 아닙니다. 본인이 아귀손과 붙고 싶다고 청한 것 뿐입니다!"


군중들이 야유와 환호를 동시에 보냈다. 아간은 해설자의 말을 정정해주고 싶었다. 엄밀히 말하자면 본인이 아니라 그레로가 신청한 것이었다.


"이 경기를 그저 지켜봐야만 하는 제가 싫어지는군요. 손가락이 뽀각뽀각 분질러지는 소리가 벌써부터 들리는데요."


해설자는 눈가를 닦는 시늉을 보였다.


"그래도 이 싸움꾼, 별명만큼은 멋스럽군요. 도대체 손톱이 어떻게 생겼길래 이런 별명을 붙였던 걸까요. 얼른 보고 싶군요."


별명?


아간은 분명 별명 같은 거 없다고 말했었다. 도대체 누가 멋대로 별명을···.


아간은 군중들 틈에 섞여 미소 짓고 있는 한 인물을 발견했다. 그는 박수를 치거나 손을 번쩍 들어 흔들지 않았다.


그저 여유롭게 한쪽 눈을 찡긋하고는 엄지를 치켜들 뿐이었다.


'허튼 짓을!'


아간이 그 사람을 매섭게 노려보는 가운데 해설자가 큰소리로 외쳤다.


"박수로 맞이해주시기 바랍니다. 달빛 손톱!"


아간은 뭐 씹은 얼굴로 싸움판 위에 올라섰다. 추레하고 때 묻은 옷을 입은 채 등장한 아간의 모습에 일순 정적이 일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폭소와 야유가 터져나왔다. 썩은 야채와 과일이 눈부신 궤적을 흩뿌리며 날아다녔다. 이럴 때를 위해서 특별히 준비해놓은 것 같았다.


곰팡이가 피어오른 토마토가 볼 옆을 스치고 지나갔지만 아간은 피하지 않았다. 여전히 한 인물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때 해설자가 신호를 주었다. 아간이 다른 곳을 보고 있는 사이 경기가 시작한 것이다.


해설자는 아귀손이 아간의 손가락을 마구 부러뜨리길 원했던 것이 틀림없다.


평소보다 은밀하고 신속히 시작 신호를 알린 해설자는 아귀손에게 눈빛을 보냈다. 아귀손은 씨익 웃더니 아간에게 달려들었다.


"끝나고 보자."


짓씹듯 중얼거린 아간은 바로 앞까지 다가온 아귀손에게 시선을 돌렸다. 아귀손과 아간이 동시에 팔을 뻗었다.


서로의 급소를 노리는 네 개의 팔과 손이 허공에서 얽히는 순간.


관중들 사이로 충격과 경악이 울려퍼졌다.


이번 정적은 아까와 달랐다. 아까는 폭소를 터뜨리기 전, 숨고르기에 가까운 정적이었다면 지금은 찬물을 끼얹은 것 같았다.


따갑게 내리쬐는 햇살 속에 매미 우는 소리만이 들릴 무렵. 아간이 그토록 노려보던 인물이 높게 팔을 뻗으며 환호성을 질렀다.


"달빛 손톱! 멋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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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달빛 손톱과 검은 갈퀴 (3) 22.09.13 57 3 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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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피로 물든 강물 (2) 22.09.09 51 4 1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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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선전 포고 22.09.07 53 4 22쪽
35 엇갈림 (3) 22.09.06 53 4 18쪽
34 엇갈림 (2) 22.09.05 49 3 13쪽
33 엇갈림 (1) 22.09.04 51 3 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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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달빛 손톱 (4) +1 22.09.01 52 4 14쪽
» 달빛 손톱 (3) 22.08.31 55 4 2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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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잠든 야수 (3) 22.08.25 61 4 17쪽
22 잠든 야수 (2) 22.08.24 58 4 17쪽
21 잠든 야수 (1) 22.08.23 64 4 20쪽
20 피 냄새 (7) 22.08.22 68 4 13쪽
19 피 냄새 (6) 22.08.21 59 4 17쪽
18 피 냄새 (5) 22.08.20 65 4 18쪽
17 피 냄새 (4) 22.08.19 71 4 15쪽
16 피 냄새 (3) 22.08.18 74 3 16쪽
15 피 냄새 (2) 22.08.17 82 5 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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