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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미달 님의 서재입니다.

라이칸슬로프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완결

다미달
작품등록일 :
2022.08.01 22:22
최근연재일 :
2023.03.28 22:20
연재수 :
134 회
조회수 :
10,587
추천수 :
514
글자수 :
1,060,207

작성
22.08.23 22:35
조회
64
추천
4
글자
20쪽

잠든 야수 (1)

DUMMY

라자살라는 한쪽 눈을 감은 채 톱질을 하고 있었다. 팔을 밀고 당길 때마다 버서석 버서석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라이칸스로프는 허옇게 뜬 눈으로 천장만 바라보았다. 제 팔이 끊어지고 있는데도 라이칸스로프가 보인 반응은 담백하기 그지 없었다.


어쩌다 고개가 살짝 옆으로 돌아가 라자살라를 쳐다볼 때면 '잘 되고 있어?' 하고 묻는 것 같았다. 물론 라자살라는 그 질문에 답하지 않았다.


라자살라는 감은 눈 너머로 보이는 세상에 집중하고 있었다. 원래라면 두 눈을 감았을 것이다. 그게 더 집중하기도 쉽고 보기도 편할 테니까.


하지만 라자살라는 그것 때문에 톱질을 그만두고 싶지 않았다. 두 눈을 감은 채로 톱을 다룰 수는 없었다. 오랜 시간 삶을 관조하며 살아온 자도 보지 않고서 무언가를 작업한다는 건 불편한 일이었다.


라자살라는 이마에 흐르는 땀을 대충 닦아냈다. 신체를 자르는데 있어서 톱은 별로 유용한 도구가 아니었다. 차라리 도끼가 훨씬 나을 것이다. 도끼는 자르고 끊는 데에 일가견이 있기 때문이다.


톱은 아니었다. 톱은 썰고 갉아내는데에 재주가 있지 끊거나 자르는 건 도통 재주가 없었다.


따라서 물컹한 살점으로 이루어져 있는 신체를 톱으로 갉아서 끊어낸다는 건 상당한 힘을 요하는 작업이었다.


그러나 라자살라는 적은 힘만으로 팔을 완전히 잘라내는데 성공했다.


사체는 특수 처리되어 있었다. 바짝 마른 나무와 비교해도 좋을 정도로 생기가 없었다. 덕분에 아래에는 나무 부스러기가 쌓이는 것처럼 살가루와 핏가루가 떨어져 있었다.


라자살라는 잘라낸 팔을 들더니 보자기에 둘둘 감쌌다. 보자리에 감싼 팔을 들고 마당으로 간 라자살라는 땅에 파묻힌 항아리 안에 넣었다. 안에는 독특한 향을 자랑하는 풀이 들어 있었다.


라자살라는 항아리 뚜껑을 닫은 뒤 손을 탁탁 털었다. 그리고 감았던 눈을 떴다.


"라자살라."


라자살라는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이미 감은 눈을 통해 외부인이 이곳으로 올라오는 걸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상대도 라자살라가 자신을 봤을 거라고 짐작한 듯했다.


"들어와."


"아니, 여기서 얘기해."


집안으로 들어가려던 라자살라는 걸음을 멈췄다. 라자살라는 외부인에게 등을 보이고 서 있었다.


"기가 막힌 차가 있어. 대접해주려고 그래. 오랜만에 만났는데 그 정도는 하게 해줘."


"왜 아이들을 따로 보호하지 않는 거지?"


라자살라가 뒤로 돌았다. 한 사람이 지팡이를 짚은 채 서 있었다. 그 또한 라자살라처럼 노인이었다.


비록 등이 굽었다거나 목소리가 떨린다거나 하는, 기력이 쇠한 모습은 보이지 않았지만 얼굴에 주름이 자글자글했다.


라자살라는 옆으로 조금 고개를 기울였다.


"브렌세라. 내가 영 머리가 안 좋아서 묻는 건데. 지금 남의 일에 간섭하는 거야?"


"약속을 어겼으니까."


"그럴 리가. 난 약속을 어긴 적이 없어."


브렌세라는 꼿꼿이 선 채 움직이지 않았다. 똑바려 치켜뜬 눈동자와 위로 솟구친 눈꼬리는 매섭기 그지 없었다.


바라보는 것만으로 상대를 갈기갈기 찢을 수만 있다면 당장이라도 그렇게 할 것 같았다.


"그렇다면 최근에 벌어진 일은 대체 뭐지? 그게 약속을 지키는 행동인가?"


"다른 사람 땅을 훔쳐보는 짓을 할 줄은 몰랐는걸. 그거 안 좋은 취미야. 고쳐."


"라자살라!"


돌을 칼로 내려치는 소리가 둘 사이에서 터졌다. 녹색과 보라색 기운이 한데 합쳐졌다가 사라졌다. 라자살라는 굳은 얼굴로 브렌세라를 노려보았다.


"우리 중 한 명이라도 사라지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까먹었나? 너무 오래 살아서 머리가 회까닥 돌아버린 건가?"


"비꼬지마, 네가 막을 거란 걸 다 알고 한 거니까. 그보다 대답이나 해. 왜 아이들끼리 서로 싸우게 했는지!"


"징그러운 말 좀 그만해. 아이는 무슨. 털로 뒤덮인 짐승 쪼가리들인데. 그리고 그것 또한 치료의 일환이야. 잊었어? 할 수 있는 건 다 해보기로 했잖아."


"아이들의 목숨을 버려가면서까지 하는 건 있을 수 없어!"


"젠장, 들을 때마다 구역질이 나네. 브렌세라. 목표는 같을지언정 나아가는 길은 각자 달라야 해. 다 같은 길로 가다가 해결책을 찾지 못할 수 있으니까. 내가 이런 뻔한 말을 굳이 해야 하나?"


브렌세라는 분노를 감추지 않았다.


"네 방식은 선을 넘어도 한참이나 넘어섰어. 조악한 걸 넘어서 괴팍한 수준이니까. 그러다가 예전으로 돌아갈 수도 있다는 생각은 못해? 서로 다른 아이들이 반목하고 피를 흘리다 죽어가는 사태가 재발할 수도 있다고."


"지극히 당연한 일을 갖고 절망하고 좌절하지마. 꼴 사나우니까. 어차피 인간이나 라이칸스로프나 매한가지야. 둘 다 파괴욕을 갖고 있지. 반목하고 피 흘리는 건 자연스러운 단계야."


"그래. 슬픈 일이지만 그건 사실이야. 그러나 넌 유도적으로 상황을 몰아가고 있어. 그건 잘못 돼도 한참 잘못된 일이야!"


라자살라는 어두운 얼굴로 브렌세라를 쳐다보았다. 브렌세라는 보랏빛으로 넘실거리는 기운을 애써 감추지 않았다.


"네가 예전에도 이와 비슷한 일을 저질렀다는 걸 알아. 나뿐만 아니야. 다른 자들도 알고 있어. 하지만 넘겼지. 네 말대로 할 수 있는 건 다 해봐야 하니까. 그리고 우린 네가 그 일로 인해 힘들어하는 줄 알았어. 피눈물이라도 흘리며 자책하는 줄 알았다고."


브렌세라는 라자살라를 지나쳐 걸어가더니 땅 속에 묻힌 항아리 앞에 섰다. 뚜껑을 연 브렌세라는 슬픔과 분노가 가득 담긴 얼굴로 내용물을 들어올렸다.


라자살라가 잘라낸 라이칸스로프의 팔이었다.


"피 눈물? 아니. 이딴 짓을 아무렇지 않게 저지르는 자가 애도를 느낄 리가 없지. 도대체 뭘 하려고 하길래 이런 끔찍한 일을 저지르는 거야?"


"말했잖아. 라이칸스로프의 저주를 풀기 위해서지. 너와 나, 우리 모두가 하고 있는 일을 말이야."


"그러니까 이런 잔인한 방법으로 어떻게 풀 건지 말해!"


"말 안 하면?"


라자살라는 무미건조한 얼굴로 쳐다보았다. 브렌세라는 이를 갈았다.


"나를 죽이기라도 할 건가? 좋아, 나도 바라던 일이야.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보자고."


"꼭 그런 식으로밖에 생각할 수 없는 거야?"


"그러고 싶지 않다면 그만 일 방해하고 네 자리로 돌아가. 여긴 내 땅이야."


말이 그치자마자 땅이 울렸다. 그들이 있는 곳은 산이니 산이 울렸다고 보는 게 정확할 것이다. 브렌세라는 미리내 산 전체가 라자살라의 주술에 물들어 있다는 걸 알았다.


다른 곳이었다면 모를까 이곳에서는 불리했다. 이곳에 있는 한 라자살라보다 위인 주술사는 없다. 피하기는커녕 막는 것도 벅찰 테니까.


브렌세라는 적의를 거두었다. 대신 호소하듯이 말했다.


"우리가 그때 모여서 나눴던 대화를 떠올려 봐. 나는 물론이고 너도 아이들을 두고 볼 수 없다고 했었어. 진심으로 위해주고 불쌍히 여겼잖아."


"지금도 마찬가지야. 그러니 아직도 이 짓거리를 하고 있는 거겠지."


경멸과 조소로 얼굴을 물들이던 라자살라는 아주 잠깐이지만 씁쓸함을 보였다.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브렌세라는 라자살라의 기분을 읽었다.


시선을 아래로 내리며 입술을 깨문 라자살라는, 그러나 곧 단호한 얼굴로 말했다.


"한 가지를 얻으면 다른 한 가지는 잃게 되지. 라이칸스로프의 저주를 풀기 위해서는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뤄야 해. 선을 넘었다고? 지금으로서는 그렇게 보일 수도 있겠지. 하지만 나중에 모든 게 해결되면 분명 다르게 보일 거야. 과장이 아니야. 이미 어느 정도 성공했으니까."


라자살라는 얼마 전, 어느 라이칸스로프가 스스로 피의 욕구를 이겨내고 원래 모습으로 돌아온 이야기를 말해주었다. 과정에 있어서 유혈 사태가 벌어지긴 했지만 그건 사소한 일이라고 덧붙였다.


"완전히 이겨낸 건 아닐 거야. 고작 그 정도로 욕구가 사라졌다면 진작에 치료가 성공했겠지. 하지만 여기까지 도달한 라이칸스로프는 별로 없었어."


라자살라는 열의에 가득찬 얼굴을 지었다. 이토록 흥분에 찬 모습은, 브렌세라 입장에서도 흔치 않은 광경이었다.


"제멋대로인 면이 있어서 좀 골치 아프긴 하지만 문제없어. 착실히 약을 먹으면 분명 머지않아 나아질 거야. 기대해도 좋아."


"그래서 지금 그 아이는 어디 있는 거지? 말하는 걸 들으면 굉장히 아끼는 것 같은데 왜 진작 곁에 놔두지 않고?"


"말했잖아. 제멋대로인 면이 있다고. 그리고 지금은 좀 서로를 위한 시간이 필요할 때라서."


라자살라가 대강 얼버무렸다. 브렌세라는 탐탁잖은 표정으로 바라보다가 말했다.


"좋아. 그럼 잃는 건 뭐지?"


라자살라는 눈가를 살짝 찌푸릴 뿐 대답하지 않았다.


"네 주술은 한 가지를 얻으면 다른 한 가지는 반드시 잃게 되지. 만약 그렇게 해서 성공한다면 잃게 되는 건 무엇이지?"


"한가한 소리로군. 같은 말 반복하게 하지 마. 무슨 수를 써서라도 성공하기만 하면 돼. 무엇을 잃건 그건 아무 상관없어. 그렇잖아?"


두 주술사는 더 이상 입씨름 하지 않았다. 브렌세라는 라자살레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뒤로 물러났다. 나무 그림자 속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기던 브렌세라는 환상처럼 바스러지기 시작했다.


"그래도 네 방식을 정당화하고 싶진 않아. 남에게 피를 흘리라 강요한 자는 언젠가는 본인에게로 똑같이 돌아올 테니까."


"네 주술은 한 만큼 돌아온다, 였지. 나도 네 방식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 쉽게 한계를 정해버리고 말거든. 그래도 서로 존중해주기는 하자고. 멀리 안 나갈게."


브렌세라는 눈을 감았다. 어디선가 불어온 바람이 브렌세라의 몸을 가루로 만들었다. 가루는 하늘로 올라가더니 이내 모습을 감췄다.


말없이 시선을 올리고 있던 라자살라는 문득 항아리에 뚜껑이 열려 있는 걸 발견했다. 그 안을 확인한 라자살라는 얼굴을 구겼다.


"이 요망한 늙은 구렁이 같으니. 갈 거면 혼자 갈 것이지."


라자살라는 또 톱질을 해야 한다는 생각에 절로 한숨을 쉬었다. 내일 아침에 일어날 때 팔이 저리지 않기만을 바랐다.


까악. 까악.


까마귀가 하늘을 배회하며 울었다. 라자살라가 손을 위로 올렸다. 까마귀는 둥글게 선회하다가 밑으로 급강하했다.


곤두박질 칠듯이 내려오던 까마귀는 라자살라의 손에 앉기 직전 날개를 활짝 펼쳤다. 라자살라의 머리칼이 확 부풀어올랐다가 가라앉았다.


"고생했다."


라자살라는 까마귀 머리를 쓰다듬고는 한쪽 눈을 감았다. 그리고 한탄과 짜증이 묻어나오는 어조로 중얼거렸다.


"망할. 이 똥멍청이는 뭐하고 있는 거야?"



******



아간은 미리내 산으로 눈길을 돌렸다. 라자살라가 자신에게 모욕적인 언사를 내뱉었기 때문은 아니었다.


아무리 예민한 청각을 갖고 있다 한들 산 중턱에 있는 사람의 말을 들을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그러므로 아간이 난데없이 산을 바라본 건 다른 이유에서였다.


"참 슬픈 일이야. 암, 슬프고 말고."


오물꾼은 오물통에 팔꿈치를 척 올리고 중얼거렸다. 무두질 작업장에 막 쏟아붓고 온 터라 통에는 분뇨가 들어 있지 않았다. 그럼에도 통 안쪽에는 찌꺼기가 곰팡이처럼 피어올라 있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가 있단 말인가. 무정한 세상이야. 그토록 밝고 긍정적인 사람을 그 따위로 만들어버리다니."


아간은 겉으로는 덤덤한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속에서는 짜증이 치밀어 오르고 있었다. 오물꾼이 얼른 제 할 일이나 하러 떠났으면 싶었다.


두 사람은 서로 안면을 튼 사이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친한 사이도 아니었다. 대개 오물꾼이 이곳에 오면 라이트와 대화를 나눴지, 아간하고는 눈길만 마주 치는 게 끝이었다.


오물꾼은 무뚝뚝한 아간을 어려워했고 아간은 애초에 오물꾼에게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라이트가 심각한 부상으로 자리를 비우자 오물꾼은 아간에게 살갑게 굴었다.


마치 우리가 언제 친하지 않았던 적이 있었느냐는 것처럼 말했다.


아간은 왜 오물꾼이 이러는지 알았다. 직업 특성상 언제나 더러운 냄새를 풍기는 오물꾼에게 대화 상대가 있을 리 만무했다.


이렇다 보니 이야기가 고픈 오물꾼은 자주 이곳에 찾아올 수밖에 없었다. 어차피 라이트도 반가운 얼굴로 맞이해주니 안 올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라이트는 이제 없었다. 언제 숨이 넘어갈 지도 모른단다. 그러니 이제라도 아간과 친하게 지내보려는 속셈이었다.


물론 라이트는 아간뿐만 아니라 오물꾼에게도 각별한 사람이었다. 슬픈 마음을 공유할 사람이 필요했기에 더욱 아간에게 달라붙는지도 몰랐다.


"라이트는 그 사람은 남들과 달랐지. 누구나 마다하는 이 일을 매일 쉬지 않고 한 것만 봐도 알 수 있지. 이보게, 자네가 없었을 때도 라이트는 혼자서 거뜬히 해내었어. 예전에 말이야. 전 영주님이 계셨을 때의 이야기인데-."


아간은 건조 틀에 가죽을 매달아놓고는 강물로 걸어갔다. 이틀 전에 비가 줄기차게 쏟아져서 그런지 강은 불어나 있었다.


아간은 통으로 물을 채웠다. 그동안에도 오물꾼은 쉬지 않고 말하고 있었다.


"-하나도 남김없이 해치웠단 말이지. 놀라운 게 뭔지 아나? 하나 같이 두꺼운 가죽들이었어. 심지어 그중에는 곰 가죽도 있었단 말이지. 상상해보게. 그 커다란 가죽을 온몸으로 비벼대는 모습을···."


이상했다. 만약 오물꾼이 아닌 라이트가 조잘거린다면 적절하게 대꾸하고 넘겼을 것이다. 하지만 아간은 그럴 수가 없었다.


오물꾼의 말은 도저히 들어주기가 힘들었다.


목소리가 투박해서 그런 걸까. 아니면 관심 없는 내용이어서 그런 걸까. 뭐가 됐든 아간의 심기를 건드린 건 사실이었다.


"라이트 씨는 아직 죽지 않았습니다."


쉴 틈 없이 중얼거리던 오물꾼은 입을 다물었다. 아간이 단호한 얼굴로 말했다. 오물꾼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린가. 당연히 살아 있지."


"그렇게 말하는 것 같지 않아서요."


아간은 통이 물을 벌컥벌컥 마시는 걸 보며 말했다.


"마치 죽은 사람 회상하듯이 말하고 있으니까요."


"생사람 잡지 말게. 누가 그런 소리를 했다고. 라이트가 얼른 낫길 바라는 마음에서라면 몰라도 그런 말은···."


아간이 물통을 힘차게 들어올렸다. 밑에 잠겨 있던 통이 별안간 위로 솟구치자 수면이 고무줄처럼 주욱 늘어났다. 그 바람에 옆에 딱 달라붙어 있던 오물꾼이 흠뻑 젖어버렸다.


"아니! 이게 뭔 짓이야!"


아간은 보지도 않고 뚜벅뚜벅 작업장으로 걸어갔다. 오물꾼은 어이가 없는 얼굴로 바라보았다. 그러다 뛰다시피 걸어가더니 아간의 어깨를 잡았다.


"사과도 않고 어딜 내빼. 이것 봐. 되도 않는 물장난을 한 바람에 옷이 젖어버렸잖아!"


아간이 몸을 크게 꿈틀였다. 뒤로 슬쩍 쳐다본 아간은 차갑게 식은 눈으로 오물꾼을 노려보았다. 오물꾼은 잇새 사이로 침을 찍 뱉더니 같이 쌍심지를 세웠다.


"뭘 잘했다고 눈 크게 뜨고 노려봐? 이거 이제 보니 정신 머리가 글러먹었네."


아간은 오물꾼의 손이 잡고 있는 어깨를 흔들더니 작업장 안으로 들어갔다.


오물꾼은 헛웃음을 지었다. 서서히 분노가 치솟았다. 다른 누구도 아니고 하찮은 무두장이가 자신을 무시하고 모욕하다니.


안 그래도 오물꾼은 아간을 안 좋게 봤었다. 손바닥을 보이며 인사를 해도 고개만 숙여 보이지 않나, 친근하게 말을 붙여도 대답은커녕 쳐다도 안 보지 않나.


오늘만 해도 그랬다. 혹여 상심하고 있을까봐 말동무라도 해줄까 싶어서 왔건만 도리어 성을 내다니. 위로해줘서 고맙다는 소리는 못할 망정 대답이라도 해주면 오죽 좋은가.


오물꾼은 화를 식히려 하지 않았다. 안 그래도 기분 꿀꿀한데 마음 좀 풀어야겠다는 심산이었다.


아간이 작업장 밖으로 나왔다. 오물꾼은 손가락질을 하며 성을 내었다.


"내가 보이지도 않아? 여기 서 있는 거 안 보여? 온몸이 흠뻑 젖어서 물 뚝뚝 떨어뜨리는 거 안 보이느냐고."


아간은 주먹을 쥔 채 오물꾼에게 성큼성큼 다가갔다. 오물꾼은 '오냐, 와라. 쌍코피라도 나봐야 정신 차리지.' 같은 말을 했다.


오물꾼 앞에 우뚝 선 아간은 갑자기 주먹을 내밀었다. 오물꾼은 곧바로 반격을 시도하려다 당황했다. 두 가지 이유에서였다.


첫 번째는 반격이고 자시고 눈 깜빡할 사이에 주먹이 어느새 코앞에 와 있었다는 것이다. 오물꾼은 지금에라도 공격해야 하나 망설였다.


하지만 두 번째 이유로 그럴 수 없었다. 아간은 공격을 하지 않고 있었다. 그저 주먹만 불쑥 내밀고 있었다.


"뭐, 뭐야?"


오물꾼은 이걸 화를 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했다. 그 사이 아간은 주먹을 펼치고는 내용물을 보여주었다. 오물꾼은 내용물이 뭔지 볼 수 없었다. 눈길을 돌리면 아간이 기습적으로 달려들까봐 차마 그럴 수 없었다.


"가져가세요."


아간이 손바닥을 흔들었다. 동편이 서로 부딪치는 소리가 들렸다. 그제야 그게 분뇨 값이라는 걸 알아챈 오물꾼은 뺏듯이 돈을 가져갔다. 오물꾼은 까드득 이를 갈며 아간을 있는 힘껏 노려봤다.


"겁쟁이 같으니. 하! 홀로 있는 게 불쌍해서 기껏 와줬더니만! 이래서 못 배운 것들하고는 상종하지 말아야 해!"


오물꾼은 아간의 가슴팍을 밀어버린 뒤 자리를 떠나려고 했다. 밀리지 않았다. 아간이 자리에서 꿈쩍도 않고 노려보자 오물꾼의 동공이 흔들렸다.


"뭘 그리 야리는···."


아간이 괴성을 지르며 달려들었다. 뒤로 넘어진 오물꾼은 침도 뱉고 주먹도 휘두르고 흙도 던졌다.


하지만 아간은 아랑곳않고 박치기했다. 오물꾼은 이마가 움푹 들어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손으로 이마를 매만지려고 했지만 아간이 그렇게 놔두지 않았다. 점멸하는 빛 속에서 허우적대던 오물꾼은 난데없는 구타에 정신을 못 차렸다. 아간은 주먹으로 얼굴을 때렸다. 한 번, 두 번.


단지 그 뿐이었다. 그럼에도 오물꾼의 얼굴은 피멍과 상처로 얼룩져 있었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오물꾼은 떠나가라 비명을 질렀다.


"으아악! 사람 살려!"


멀리서 소리를 듣고 찾아온 사람들은 처음에는 희희낙락하며 구경만 했다. 거친 환경에서 작업하는 자들이니만큼 싸움 구경을 좋아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아간의 폭력이 멈출 줄 모르자 그들은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았다. 사람들은 헐레벌떡 뛰어와 아간을 뜯어말렸다.


"멈춰! 사람 죽일 일 있어? 이게 뭔 짓이야!"


"아니, 힘이 왜 이리 세?"


"빨리 떨어뜨려!"


장정 세 명이 달려들었는데도 아간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들은 안간힘을 다해 아간을 떨어뜨렸다.


아간은 뒤로 벌렁 넘어졌지만 오물꾼에게 다시 달려들었다. 결국 주변에 구경하고 있던 모든 이들이 다 붙어서야 간신히 아간을 진정시킬 수 있었다.


오물꾼은 사람들에게 부축 받아 자리를 떴다. 얼굴이 퉁퉁 부어올라 있었다. 입가 사이로 피가 뚝뚝 흐르고 있었다.


아간은 떠나는 오물꾼을 바라보지 않았다. 그저 콧잔등을 일그러뜨린 채 바닥을 노려보았다.


주변에서 수군거리고 있던 사람들도 하나둘 자리를 떴다. 어느새 아간만 홀로 남게 되었다.


아간은 한동안 주먹을 쥐고 있었다.


이내 깊은 한숨을 내쉰 아간은 손으로 얼굴을 쓸었다. 격양되었던 감정이 조금이나마 누그러졌다.


언제나 감정이 먼저 가고 물러나는 법이다. 그리고 그 빈 자리에는 이성이 점잖게 다가와 자리에 앉는다.


이성은 머리를 치켜들고 아간을 바라보았다. 아간은 우울한 얼굴로 마주보다가 고개를 들었다.


손질해야 할 가죽이 많았다. 두 사람이 같이 하다가 혼자 하니 시간이 더 오래 걸렸다. 얼른 들어가서 작업을 마저 해야 했다.


아간은 손바닥을 주무르다 멈췄다. 손에 피가 묻어 있었다. 아간은 흙을 한 움큼 집어 손등과 손바닥을 마구 비볐다. 돌조각과 흙 알갱이가 날카롭게 찔러댔다.


강박적으로 피를 닦아낸 아간은 숨을 몰아쉬며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 아간을 어떤 자가 유심히 바라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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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피 냄새 (5) 22.08.20 66 4 18쪽
17 피 냄새 (4) 22.08.19 72 4 15쪽
16 피 냄새 (3) 22.08.18 75 3 16쪽
15 피 냄새 (2) 22.08.17 83 5 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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