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난의시대(150)
“스승님, 종교 지도자 대회를 개최해 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스승님의 제자가 아닌 승려였지만 대마병단의 단장으로 이 자리에 와 있던 사중이 조심스럽게 제안했다.
“깨달음은 종교인들의 최종 종착지 아니겠습니까? 인류의 대위기를 맞아 세계 종교 지도자 회의를 열어 그곳에 온 종교 지도자들을 상대로 간지님과 접견을 하도록 한다면 혹시 그분들 중 깨달은 분이 한 분이라도 계시지 않겠습니까?”
모래사장에서 바늘 찾는 여행보다는 그나마 나은 방법처럼 들렸다.
“좋은 방법 같습니다. 그렇게 해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법명이 사중의 말을 받아 무태선인에게 제의했다.
“법일아, 네가 최대한 이른 시일 내에 종교 지도자 회의를 열 수 있도록 추진해 보아라. 그때까지 간지는 치료에 집중하도록 한다. 그럼 다들 물러가거라.”
그런데 무태선인의 말이 끝나자마자 법일이 다 들으라고 큰소리로 외쳤다.
“제자들은 모두 남으시오.”
법일의 갑작스러운 이 발언에 다들 무슨 일인가 싶었다. 한뫼 대왕과 장로들이 눈치껏 자리를 피해주었고 자혜당에 무극회 승려들만 남았다. 사중과 하월은 무태선인의 제자가 아니었기 때문에 자리를 떠나려고 했다. 그런데 법일이 이들에게 말했다.
“너희도 남아 있어라.”
자혜당은 무태선인의 거처이면서 스승과 그 제자들의 회의장 같은 곳이었다.
사중이 대마병단의 단장으로 있고 하월이 유명하다고 하나 이들은 제자가 아닌데 제자들과 같은 자리에 남이 있기는 처음 있는 일이었다. 이를 두고 몇 제자들은 불쾌함을 얼굴에 드러냈다.
무태선인은 법일이 하는 것을 지켜보며 말없이 있었다.
자혜당엔 무태선인과 8명의 제자와 사중과 하월이 남았다.
“스승님, 마왕의 부활은 인류의 위기이자 우리 무극회의 위기입니다. 저는 무극회의 앞날에 관해 이야기해 보고자 이렇게 무례를 범하고 스승님께 자리를 요청한 것입니다.”
무극회는 스승과 제자의 관계가 일방적이었다. 제자는 스승에게 말대꾸도 불만도 거부도 반대도 할 수 없었다. 그런데 법일은 스승인 무태선인에게 반기를 든 것 같은 모습으로 다들 비쳤다.
무태선인은 아무 말도 없었고 스승의 말을 기다렸던 법일은 무태선인이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자 다시 입을 열었다.
“우리 무극회의 후계자는 양노선인에게서 간지로 이어집니다. 그런데 양노선인은 사실상 죽은 것과 같고. 간지는 이렇게 회생 불가능한 불구가 되었습니다. 저는 이곳에서 새로운 후계자가 지명되기를 바랍니다.”
다들 생각을 하고 있었으나 말하지 못하고 있던 것을 법일이 끄집어냈다. 양노선인은 몰라도 간지는 처음부터 다들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그런데 죽은 사람과 다름없는 상태니 새로운 후계자를 뽑는 것은 당연하게 보였다. 그런데 문제는 지금이 후계자를 논할 시기이냐는 것이다.
무태선인은 간지의 망가진 몸을 보고 슬픔에 빠져 있었다. 누가 봐도 그 슬픔을 느낄 수 있었는데 무태선인의 눈물이 마르기도 전에 제자들은 후계자 논의를 하고 있으니…….
법일이 당연한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제자들은 모두 낯뜨거워했다.
“이참에 새로운 후계자를 지명해 쓰러지는 무극회를 다시 세워야 합니다.”
일이 막상 터지자. 다른 제자들도 저마다 한마디씩 하기 시작했다.
“승려들을 지휘하고 요괴들과 싸울 수 있는 분이 후계자가 되어야 마땅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동안 저희는 사실상 선장 없는 배에 탄 것과 같았습니다. 위기 때는 위기를 헤쳐나갈 인물이 필요합니다.”
제자들이 원하는 것은 하나였다.
새로운 후계자를 스승이 지명하고. 그 후계자로 하여금 무극회를 이끌게 하자는 것인데 이것은 간지를 후계자에서 내리자는 것과 대마병단의 역할을 축소 시키던지 후계자가 대마병단까지도 지휘하도록 하자는 뜻이었다.
그동안 제자가 아닌 사중이 대마병단을 지휘하는 것에 제자들은 불만을 가졌다. 지금 요괴와 싸우는 데 있어 주도적인 역할은 대마병단이 하고 있었다. 무극회마저도 대마병단의 지휘를 받고 있었는데 사중이 일반 승려 출신이다 보니 사중의 권력을 뺏으려고 한 것이다. 무극회의 힘은 스승과 제자들에게서 나오는 것이고 오직 스승과 제자만이 가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사중은 올 것이 왔다고 생각했다. 만약 무태선인이 결정하면 사중은 그동안 쌓은 모든 것을 내놓고 물러나야 했다. 지금의 대마병단에서 무극회의 비중은 사실 50%도 되지 않았다. 날이 갈수록 과학으로 무장한 병사들의 역할이 커지고 있었다. 도깨비들 역시 무시할 수 없어서. 막상 대마괴급 이상의 요괴들이 출몰하면 도깨비들만이 싸울 수 있었다. 그만큼 무극회의 입지는 점점 좁아지고 있었다. 그것을 사중도 알고 있었고. 법일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사중은 아쉬웠다.
‘내게 몇 달만 더 시간이 주어졌다면 좋았을 것을….’
사중은 대마병단이 무극회로부터 완전히 독립할 수 있다고 보았다. 몇 달만 지나면….
그런데 법일이 먼저 치고 들어오는 바람에 사중은 대마병단이 무극회로 넘어가게 됐다고 보았다.
아직은 사중은 일개 일반승려일 뿐이었다. 높고 높은 제자들과 스승님의 명령을 거역할 수 없었다.
간지는 끊임없는 고통 속에서 극심한 피로를 느꼈다. 고통 때문에 잠을 자기도 힘들었고 깨어 있는 것도 고통으로 매 순간이 고통의 연속이었다.
간지는 정신이 없는 가운데서 법일이 하는 말을 들었고 가슴을 누르던 큰 짐이 치워진 것 같은 시원함을 느꼈다. 무극회의 적전제자. 후계자란 큰 짐을 벗어나게 된 것이다.
간지는 빨리 다른 사람으로 후계자가 바뀌고 자신은 쉬고 싶었다.
무태선인은 침묵 속에서 제자들이 하는 말과 제자들이 품고 있는 생각들을 모두 읽었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너희의 눈에는 간지가 아무 능력 없는 제자로 보이지?”
무태선인은 오늘 처음으로 웃었다.
“에휴….”
스승님의 한숨이 모든 제자의 가슴을 철렁하게 하였다.
“무극회는 내가 마지막 스승으로 기록될 것이다. 그리고 사중은 새로운 시대를 열게 될 것이다. 너희는 모두 간지와 사중. 심지어 하월보다도 더 그릇이 작다. 애초에 서로 다른 종자였다. 너희는 성장을 다 한 상태고 저 아이들은 앞으로도 계속 성장할 것이다. 그리고 성장의 정점에 섰을 때 너희는 그 그늘에 가려져 하늘을 볼 수 없게 될 것이다.”
제자들은 스승인 무태선인이 화를 내는 것보다 차분히 말하고 있는 이 순간이 더욱더 무서웠다.
그리고 그 말이 너무나 충격이었다.
“저희는 스승님의 제자들입니다.”
“무극회의 스승은 원래 한 명의 제자만을 둔다. 나의 제자는 양노다.”
법일은 억장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앞으로 무극회는 법일이 맡아라. 대마병단은 사중이 맡는다. 하월은 세계 종교 지도자 회의가 끝난 후 간지와 함께 깨달은 사람을 찾아 떠나라. 사중의 대마병단은 무극회에 의지하지 말고 독립해 키워라.”
무태선인은 하월에게 시선을 주며 말했다.
“무극회는 간지를 돕지 않을 것이다. 하월아 간지는 네가 책임져야 한다.”
자혜당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이 동시에 똑같은 생각이 들었다.
‘스승님이 미래를 보았구나.’
무태선인이 미래를 본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었다. 미래를 본 기억을 누에고치에 담아 제자들에게 보여주곤 했다. 무태선인이 미래를 보는 방식은 본인의 의지와 무관하게 일방적으로 보이는 영상이었다. 언제 어떤 미래를 보게 될지 아무도 몰랐다. 무태선인은 오직 보는 사람이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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