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난의시대(17)
하월이라고 잡술을 쓰고 싶지는 않았다. 무극종은 천인술을 사용하는 유일한 퇴마술사 집단인데 잡술로 겨룬다는 것은 자존심 상하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하월이 잡술을 사용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살기 위해서였다. 양노선인에게 천인술도 제대로 못하면서 잡술을 사용하다 창피를 당했지만 원래 무극종은 숨은 도인들이나 도술사 들과의 교류를 통해 수많은 잡술을 받아들여 개량했고 이를 정규과목으로 훈련학교에서는 가르치고 있기도 했다.
하월은 이것에 자신이 퇴마여행을 통해 습득한 잡술도 여럿 알고 있었다.
하월이 몸을 추스르고 있을 때 아침부터 소란스러운 싸움을 인해 지부에 근무하던 승려들이 몰려나와 하월을 감싸고 있었다.
“무슨 일인가?”
하월은 난처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제자가 양노선인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허허.”
세종시에 있는 한국 지부를 맡고 있는 사람은 무태선인의 둘째 제자인 ‘법승’이었다.
그러나 지금 하월에게 묻고 있는 사람은 한국 지부의 살림을 맡고 있는 ‘장주’였다.
하월의 입에서 양노선인에 대한 말이 나오자 다들 주변을 살펴봤다. 양노선인은 이미 사라진지 오래였다.
오후가 되어 하월은 ‘법승’의 부름을 받았다.
양노선인한테 맞아 생긴 상처를 치유하느라 치유술을 받고 있는 중이었다. 무극회의 승려들은 신체가 떨어져 나가 훼손되지 않는 이상 부러지거나 찢기는 상처 정도는 치유술을 통해 빠르게 회복시킬 수 있었다. 하지만 치유술도 시전자의 능력이나 입은 상처에 따라 회복되는 시간이 달랐다. 지금 하월의 경우 양노선인한테 당한 상처보다 인체변형술의 부작용으로 고생하고 있었다.
인체변형술은 종류가 많았는데 하월이 사용한 변형술은 신체를 강하게 만들어 외부의 공격을 막아내는 술법이었다. 원래 하월이 사용한 인체변형술은 본인이 직접 풀었어도 몇 주는 부작용으로 고생해야 하는 위험한 술법이었다. 정말 위급할 때 아니면 사용하기 힘든 술법이었는데 양노선인에게 깨지며 그나마 인체의 각 조직들이 겪는 부담이 짧아서 덜 고생하는 편이었다. 다만 두 배로 커진 몸이 갑자기 원래의 몸으로 되돌아오면서 온 몸의 피부가 깊은 주름으로 뒤덮여 누군지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외모가 변해 있었다.
“양노가 너를 많이 생각해 줬구나.”
법승은 하월의 모습을 보고 위로의 말을 건넸다.
“제자가 모자란 탓입니다.”
“퇴마여행 보고식은 네 몸이 완쾌되면 하는 게 좋겠구나.”
“그러도록 하겠습니다.”
퇴마여행을 끝마치면 한국 지부에서 보고식을 하게 돼 있었다. 퇴마여행 동안 겪은 것들을 기록으로 남겨 정보를 공유하는 의미도 있었고 특정 지부로 발령을 받아 새로운 임무를 받는.
끝과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자리였다.
그러나 하월의 보고식은 끝내 이뤄지지 않았다.
‘양노선인...’
하월은 다시 한 번 간지를 돌아봤다. 간지는 지하철 안에서 졸고 있었다.
하월은 고개를 저었다.
자신이 유일하게 인정하는 술사가 양노선인 이었다.
지부의 장들이나 관리들 선생들 중 양노선인 만한 술사는 없다고 생각했다. 아니, 자신보다 더 나은 술사는 양노선인이 유일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다른 지부장들이나 관리들과 직접 겨뤄보지 않았지만 하월은 자신하고 있었다.
과거 자신이 양노선인과 처음 겨뤘을 때와 지금은 많이 달랐다.
그렇기에 자신이 서열은 낮아도 무태선인의 제자들인 지부장들에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존경심은 없었다.
하지만 양노선인은...
예전에 한번 싸워봤지만. 지금은 세월이 지나 자신이 더 세졌다고 생각했지만 다시 붙는다면 이길 것 같은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았다.
쫓아가려고, 따라가려고 아무리 애써도 그는 항상 저 멀리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런 양노선인의 적전제자가 간지라니......
‘내가 간지와 싸우면 나는 차이가 나와 양노선인과의 차이쯤 되려나?’
하월은 이내 고개를 저었다.
간지와 자신은 달랐다. 간지는 보통사람과 다르지 않았다.
지하철은 서울을 벗어나 달리고 있었다. 어느덧 창밖으로 자연풍경이 보였다.
현재 시대의 지하철은 주로 도심 안에서 운행됐고 열차들이 도시와 도시 사이를 운행했다.
열차는 진공열차와 KTX 단 두 종류 밖에 없었는데. 진공열차는 지하의 진공선로를 따라 운행됐고. KTX는 지상으로 운행됐다. 그리고 진공열차의 등장으로 국내선 비행기는 모두 없어졌다.
비행기는 국제선만 존재했고 나라 안에서의 이동은 진공열차가 비행기보다 빨라서 비행기의 자리를 대체했다.
다만, 자가용비행기를 보유한 일부 부자들만이 비행기를 이용해 비행기는 부자들의 전유물이 되었다.
현재 시대의 자가용 비행기들은 모두 수직이착륙기 형태였고.
국가 간 장거리 운행하는 여객기의 경우만 활주로가 필요했는데 그 크기가 아주 컸다.
도심 안에서만 운행하는 지하철이 서울을 벗어나자 세종시로 한걸음에 달렸다. 세종시가 과거 행정도시인 만큼 서울과 지하철로 연결돼 있었는데 중간에 서는 역이 없이 바로 연결됐고 최근에 수익 문제로 세종시와의 지하철 연결이 중단된다는 얘기가 나오고 있었다.
지하철 안에는 하월과 간지 두 사람만 있었다. 도심에선 보기 힘든 산과 나무, 풀 등 주변으로 가득했고 도시에서 살던 사람들에겐 낯선 풍경이었다.
“하월 선생님. 요괴 퇴치하다 정말로 많이 죽습니까?”
간지가 하월에게 하는 첫 질문 이었다.
하월은 차분하게 대답해주었다.
“많이 죽습니다. 제가 본 것만 해도 수십 명은 될 듯합니다.”
“헉, 그렇게나 많이요?”
“대부분 요괴들을 다루는데 있어 주의하지 않거나 술사들의 능력이 안 돼 죽게 되지요. 능력이 안 돼 죽는 거는 어쩔 수 없지만 집중하지 않고 주의하지 않아 죽는 일은 없어야 할 겁니다.”
“음...”
간지는 고민이 컸다.
훈련학교에서 들은 얘기가 많았다. 대부분 소문이었는데.
훈련학교의 생도들은 헛소문도 진실로 받아들이는 경우가 많았다.
하월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대개 훈련생들은 훈련학교에서의 생활이 무척 힘들다고 생각하지만 이들에 세상에 나와서 요괴들과 대치하게 되는 순간 훈련학교에서 더 많을 것을 더 혹독하게 훈련시키지 않은 것을 뼈저리게 느끼게 됩니다. 그리고 이런 것은 살아남은 선배들이 더욱 더 크게 느끼지요.”
하월이 간지를 보는 눈은 한심함과 안타까움이 섞여 있었다. 술사의 몸을 갖고 타고난 이들도 수시로 죽어나가는데 보통사람의 몸으로 그것도 훈련 성적도 안 좋은데다 정식 졸업도 하지 않은 체 실전에 투입됐으니...
간지를 보호하는 게 자신의 역할인데 요괴와 싸우면서 한편으로 간지를 보호해야 한다는 게 쉽지 않음에 하월은 한숨이 나왔다.
간지는 어쨌든 자신이 퇴마여행을 하게 됐다는 것이 흥분됐다. 겁도 났지만 훈련학교에서의 생활을 벗어난다는 것에 기대심이 컸다. 훈련학교의 밖은 죽음과 연결돼 있지만 훈련학교의 학생들은 모두 다 한결같이 훈련학교를 나서기를 꿈꿨다. 간지는 졸업시험도 치루지 않은 상태에서 퇴마여행을 하게 된 것이고 전설적인 선배 하월과 같이 한다는 것에 대해 안심도 되었다.
퇴마여행중 훈련생들의 생존율이 열에 셋 밖에 안 되는데 간지는 자신이 사망자인 일곱의 반열에 들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않았다.
지하철은 어느덧 세종시로 접어들고 있었다. 높은 건물들이 좀 보이나 싶더니 지하로 내려가 이내 창밖으로 검은 벽만 보이기 시작했다.
간지의 시선은 저절로 지하철 안의 모니터들로 향했다. 모니터 속 화면은 모두 다 가상현실 게임인 패자의시대를 실시간 중계를 하고 있었는데 영화를 능가하는 화려한 전투가 계속되고 있었다.
“저게 가상현실 게임이라는 건가요? 저기 사람 하나하나가 실제로 사람이 직접 움직이는 거라면서요?”
간지는 가상현실 게임을 해본 적이 없었고 훈련학교에서 생도들을 통해 이야기만 들어왔었다. 훈련학교의 원생들은 어린나이에 들어와서 생활했기 때문에 사실 가상현실 게임에 접촉할 일이 거의 없었다. 드물지만 십대 초반에 들어온 이들 중에 가상현실 게임을 조금 해 본 경험이 부풀려져 훈련원생들 간에 퍼졌던 것이다.
“아마도 간지님은 가상현실 게임을 접할 일이 없을 겁니다.”
하월도 지금까지 가상현실 게임을 해본 적이 없었다. 아마도 무극종의 퇴마술사들 중에 가상현실 기기를 사용해본 자가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들에게 그럴 여유가 없었다.
간지는 이런 사정을 모른 체 밖에 나가면 꼭 가상현실 게임을 하고 싶은 마음을 갖고 있었다.
밖에 나가면 이 외에도 하고 싶은 일들이 참 많았다. 이런 새로운 경험과 기대감으로 간지는 퇴마여행을 보통사람들이 말하는 여행의 그것과 같은 것이라 인식하고 있었다.
지하철이 세종시 중앙역에 도착했다.
시간이 이르기는 했지만 지하철을 나오는 사람은 하월과 간지 단 두 사람밖에 없었다. 지하철역 자체에 사람이라곤 이들 둘 밖에 없었다.
하월이 앞장서고 그 뒤를 간지가 따르며 두 사람은 지하철역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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