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난의시대(22)
오늘은 평소와 좀 달랐다.
왠지 모르게 가슴이 두근거리고 설렜다. 뭔가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은데 곧 있으면 퇴근 시간이다. 하루가 다 간 시간이니 좋은 일이 생길게 뭐 있겠냐마는 그래도 기분이 매우 좋았다.
병주는 퇴근 시간이 되자 다른 때와는 다르게 서둘러 공장을 나왔다.
가방 공장은 건물 지하에 있었는데 옷을 갈아입고 빠르게 계단을 뛰어 올랐다.
공장은 큰 대로변에 있었고 횡단보도가 공장 앞에 있었는데 이 대로변에 중학교와 고등학교가 공장과 얼마 안 떨어진 곳에 있었다. 그리고 학생들은 공장 앞의 횡단보도를 통해 등하교를 했다. 그래서 학생들의 등하교 시간에는 이 횡단보도가 학생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지금은 고등학생들의 야간 자율학습 시간이 끝나는 시간과 겹쳐서 늦은 저녁이었지만 횡단보도 앞엔 사람들이 많았다.
“있다.”
세상이 붉게 보였다. 왜 그런 건지 궁금하지 않았다. 병주의 눈에는 횡단보도 앞에서 신호를 기다리는 챙 넓은 모자를 쓴 붉은 원피스의 그녀만이 보일 뿐이었다. 교복 입은 많은 여학생들 속에서 유독 눈에 띄는 그녀였다.
심장이 뛴다.
이 대로면 터질 것만 같다. 모든 피가 머리로 몰려 올라오는 것 같다. 숨쉬기가 힘들다.
병주는 조심스럽게 걸음을 내딛었다.
신호들이 파란불로 바뀌며 그 많은 학생들이 횡단보도를 건넌다. 그러나 그녀는 그대로 서 있다. 병주가 한 걸음 더 디뎠을 때 여인이 몸을 틀어 뒤돌아서고 있었다.
병주와 여인의 거리는 다섯 걸음정도. 멀지 않은 거리였는데 얼굴이 잘 안 보인다. 늦은 밤이었고 가로등의 위에서 비추는 빛은 챙이 넓은 그녀의 모자에 그늘을 만들었다.
여전히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그녀를 향해 병주는 발걸음을 옮겼다.
여인이 병주를 향해 두 팔을 벌렸다.
이 거리에서? 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병주는 얼굴이 후끈 달아올랐다. 그러나 충분히 안길 수 있었다. 쪽팔리고 부끄러운 게 대수냐? 그녀의 품이라면 야…….
병주가 한걸음 더 내딛었을 때 작은 방울 소리가 들려왔다.
“딸랑 딸랑”
맑고 경쾌한 방울 소리였다. 요즘 세상에 방울 소리를 듣는다는 건 매우 드문 경험이다.
병주도 초등학생 때 단어 공부할 때 들어봤지 사회에서 본 적도 들은 적도 없었다.
그녀와는 불과 세 걸음.
방울소리가 계속 들려왔고 무척 신경 쓰였다.
병주도 양 손을 들었다. 같이 안을 생각이었다.
“딸랑 딸랑 딸랑.”
그때 방울 소리가 무슨 종소리처럼 크게 들렸다. 병주는 인상을 쓰며 고개를 돌렸다. 두 명의 승려가 빠르게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다시 그녀에게 고개를 돌렸을 때 그녀의 입 꼬리가 올라간 게 웃고 있는 게 분명했다.
한걸음을 남겨두었다. 이제 안기기 직전이었다.
병주와 그녀와의 사이에 나무 막대기 하나가 끼어 들어왔다.
병주도 그녀도 서로를 안을 수 없었다.
병주가 인상을 쓰며 고개를 돌리자 역시 스님 하나가 나무 지팡이인지 막대기인지로 둘 사이를 막고 있었다.
병주가 스님 쪽으로 고개를 돌려 뭐라고 하려고 하는 찰나. 둘 사이를 막고 있던 막대기가 그녀 쪽으로 들어 올려졌다.
“캬아악.”
“탁.”
병주가 돌아보니 그녀의 입이 왼쪽 귀에서 오른쪽 귀까지 벌어져 있었고 마치 톱니처럼 뾰족한 이빨을 번득이고 있었다. 사실은 빨간 원피스를 입은 여인이 병주의 머리를 물어뜯으려고 하는 것을 스님이 막대기로 입을 쳐서 막았던 것이다. 병주는 이것을 보지 못했다.
병주가 그녀를 향해 시선을 돌렸을 때. 그녀의 벌어진 입에서 성인 남자 팔뚝 굵기의 혓바닥이 화살이 시위를 떠나듯 빠르게 스님에게 쏘아졌다.
스님은 막대기로 혓바닥을 쳤다. 그러나 혓바닥은 부드러워서 오히려 막대기를 휘감아 버렸다.
스님의 막대기와 그녀의 혓바닥이 힘자랑을 하듯 줄다리기를 했다.
병주는 현재 이 상황이 전혀 이해가 안 갔다.
평소 통행량이 많은 도로였는데 지금은 다니는 자동차가 단 한 대도 없었고.
그 많던 학생들도 단 한명도 보이지 않았다. 병주의 눈에는 그녀와 스님 두 명 그리고 자신만이 이 넓은 도로와 인도를 차지하고 있을 뿐이었다.
병주가 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데 다른 스님 하나가 병주의 팔을 잡아 당겼다.
병주는 그녀와 떨어진다는 것에 본능적으로 저항했다. 그러나 스님의 손아귀에서 빠져 나올 수 없었다. 그녀와 거리가 점점 멀어졌고 병주는 자신을 잡아당기는 젊은 스님을 화난 얼굴로 노려봤다. 그러나 이 젊은 스님은 무표정한 얼굴로 병주를 이끌고 자리를 피하고 있을 뿐이었다.
하월의 지팡이는 혓바닥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서로 힘을 겨루고 있었기 때문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었다. 하월은 왼손으로 수인을 맺다가 중지를 튕겼다. 그 순간 빨간 원피스의 여자가 팔을 휘둘러 하월의 왼손을 쳐버렸다. 하월이 왼손만 쓸 수 있는데 비해 빨간 원피스의 여자는 두 손이 자유로웠다. 하월이 공격형 수인을 맺지 못하게 막고 있었다.
하월이 지팡이를 잡아당기자 여자는 끌려가지 않으려고 혀를 당겼다. 순간 하월은 오른손에 쥐고 있던 지팡이를 던졌다. 하월의 던지는 힘과 여자의 당기는 힘이 더해져 하월의 지팡이가 여인의 입을 관통해 버렸다.
“끄악.”
빨간 원피스의 여자가 큰 소리로 비명을 질렀다. 둘의 균형이 깨진 것이다. 하월은 무기로 사용하는 지팡이를 놓쳤지만 두 손이 자유롭게 되었다. 빠르게 수인을 맺으며 주문을 외웠다.
여자의 모자와 빨간 원피스가 산산조각 나며 흩어졌다. 하월의 공격에 의해서가 아니라 여자가 형태를 변화 시켜서 생긴 현상이었다. 육감적인 몸매가 한순간에 망가져 버렸다. 지금은 여자도 남자도 아닌 형태가 되어버렸다.
병주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분명 그녀였는데 그녀가 아니었다. 병주의 눈에는 괴물로 보였다.
하월의 주문이 끝나자 반투명한 형태의 사천왕 두 명이 갑자기 나타나더니 괴물을 향해 공격해 들어갔다. 괴물이 양손으로 두 명의 사천왕을 상대하는 사이 하월이 괴물에게 부적을 날렸다. 괴물은 두 명의 사천왕을 상대하면서도 밀리지 않았는데 하월이 던진 부적을 향해 바람을 불어 자신에게 날아들지 않게 했다.
“고작 어린애 하나 잡아먹으려고 이 고생 하냐?”
하월이 던진 부적이 10장을 넘어서고 있었다. 부적은 괴물과 일정거리 떨어진 곳에 둥둥 떠 있었다.
괴물은 하월의 말을 무시하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아쉽다. 다 된 밥이었는데.”
괴물은 다 된 밥을 망가뜨린 하월에 대해 분노가 치솟았다.
“화난다. 화난다.”
괴물이 분노할수록 몸이 점점 커졌다.
“화난다. 화난다.”
괴물은 주문처럼 화난다는 말을 되풀이 했는데 그때마다 몸이 커졌다.
괴물의 몸이 커지자 하월이 불러낸 사천왕들이 밀렸다. 하월이 어디선가 꺼낸 한 움큼의 부적을 부채처럼 펼쳤다. 수십 장은 될 듯한 부적을 양손에 쥐고 양팔을 크게 저으며 하늘에 뿌렸다.
부적은 하월의 주변으로 뿌려졌는데 이 부적들은 바닥에 떨어지지 않고 공중에서 멈췄다. 부적들이 하월을 중심으로 그 주변에 사람형태로 만들어졌다. 하월은 부적이 사람 형태를 갖추자 주먹을 휘둘렀다. 하월 둘레에 부적으로 만들어진 사람 형태의 거인이 하월의 움직임 그대로 주먹을 휘둘렀다. 두 명의 사천왕이 좌우로 비켜서자 부적 거인의 주먹이 괴물을 강타했다. 부적 거인은 괴물보다 두 배 정도 더 컸는데 힘에 밀려서 인지 괴물이 괴성을 지르며 뒤로 자빠졌다.
하월은 멈추지 않고 계속 괴물을 향해 주먹을 날렸다. 아스팔트 바닥에 넘어져 있던 괴물은 부적 거인의 주먹에 살이 짓이겨졌다. 하월이 이번에는 손바닥을 펴고 잡는 시늉을 하자 부적 거인의 손이 괴물을 움켜쥐었다. 괴물은 이미 망신창이가 되어 전투의지를 잃은 상태였다.
그 때. 부적 거인을 이루고 있던 모든 부적들이 바람에 날리듯 괴물을 향해 날아갔다. 그리고 괴물의 몸을 부적들이 빈틈없이 달라붙었다. 부적 거인은 사라지고 온몸에 부적을 붙이고 있는 괴물만 남았다.
하월은 괴물에게 다가가 오른손바닥을 괴물의 몸에 대고 주문을 외웠다.
“끼에애앵”
괴물의 울음소리가 거리에 메아리쳤다. 부적을 온몸에 붙이고 있던 괴물은 어느새 푸른색 불길에 휩싸여 있었다. 하월은 끊임없이 주문을 외우고 있었는데 하월의 손은 불길에 아무런 해를 입지 않았다.
부적이 모두 타서 재가 되어 날아갔을 때 괴물도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리고 없었다.
하월은 이마에 흐르는 땀을 소매로 닦아내고 병주와 간지가 있는 곳으로 다가왔다.
병주는 새파랗게 질려서 말을 못하고 덜덜 떨고만 있었다.
하월은 병주의 머리위에 손을 얹었다. 병주가 지금 본 것들을 지워버리기 위해서였는데...
“음...아쉽구나.”
하월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병주의 머리에서 손을 떼고 병주의 몸을 돌렸다.
“하월님 왜?”
원래 무극회의 승려들이 요괴들과 싸우는 것을 일반 시민들이 보게 되면 그 기억을 지우는 술법을 썼다. 머리에 손을 얹고 주문을 외워 그 사람의 기억을 살펴 본 뒤 필요 없는 기억들을 지웠는데 하월은 그 술법을 사용하려다가 그만둔 것이다.
“저 놈이 왜 이 아이를 노렸는지 이해가 가는군요. 이 아이는 진신의 육체를 가지고 있습니다.”
“진신의 육체라면?”
하월이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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