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난의시대(98)
슬우는 수송 비행기 안에서 옆자리의 영수에게 물었다.
슬우는 나이 어린 꼬마의 외형이었지만 실제로 무척 나이가 많았다. 그렇다고 마왕이 활동하던 세대는 아니었다.
“이들은 우리를 좋아하지 않는 것 같은데?”
“우리 일에만 신경 써. 일만 잘 처리하면 다시는 화평곡에 갇혀 살지 않아도 된다잖아.”
“난 화평곡도 나쁘지 않은데.”
“그건 나도 그래.”
도깨비 중에 나이가 젊은. 화평곡에서 나고 자란 도깨비들은 화평곡이 고향이었고 그 생활에 불편함을 느끼지 못했다. 화평곡 이전 세대의 도깨비들이나 원래의 고향 같은 인간계의 숲 속을 그리워할 뿐이었고 도깨비들 최대의 소원으로 삼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젊은 도깨비들은 알지도 못하는 과거 마왕의 부하들인 요괴들과의 이번 싸움에 열의가 부족했다.
수송기는 산 밑에 착륙해 사람들을 내려놓았다.
특별히 대마괴가 발견된 것은 아니었고 이 지역에서 약하나마 요기가 감지돼 이곳에 척살조원들을 내려놓은 것이다. 사실 한두 마리의 일반 요괴 정도로 척살조가 출동할 일은 없었다. 그런데 도깨비들의 환영식을 피하려고 일단 출동시키다 보니 수송기는 목적 없이 날아가다 약한 요기를 감지하고 착륙한 것이다.
“대단한 놈들이 아니니 저희가 가서 처리하고 오겠습니다.”
척살조에 포함된 도깨비는 총 4명이었다. 이들은 수송기가 자신들을 내려놓은 곳에 그냥 있었다. 수송기는 이들을 내리고 일단 안전지역으로 철수했다.
“심심한 데 따라가서 구경이라도 할까?”
“여기서 기다리라고 했으니 기다리고 있자. 한뫼 대왕이 인간들하고 마찰을 일으키지 말고 시키는 대로 잘 따르라고 했잖아.”
이들은 새로운 도깨비 서식지가 된 묘향산에서 한뫼에게 그런 이야기를 들었다.
인간들을 도와 요괴 사냥을 하기 위해 떠나는 도깨비들을 상대로 한뫼는 몇 가지 주의사항을 일러주었다. 그중 하나가 나서지 말고 인간들이 시키는 대로 잘 따르라는 것이었다.
요괴 척살은 인간이 주도하고 도깨비는 그를 도와 보조하는 관계로 맺어져 있었다.
도깨비들은 저녁때가 되어 수송기를 타고 인촨시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런데 그 수송기에는 무극회 승려들이 타고 있지 않았다. 오직 도깨비들을 싣고 돌아오기 위한 수송기였고 호텔로 돌아왔을 때 같이 타고 갔던 승려들이 이미 호텔에 도착해 있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아직 돌아오지 못한 도깨비들이 많다는 것도 알았다. 무극회 승려들은 모두 임무를 마치고 돌아와 있었다.
다른 도깨비들과 다르게 인간이었던 영수는 무극회 승려들의 처사에 화가 끓어올랐다.
잊어버리고 있었지만, 자신이 화평곡에 들어가기 전에 무극회 승려들에 쫓겨 다녔던 기억이 떠올랐다.
호텔 로비에 있던 승려들이 영수가 뿜어내는 엄청난 양의 사기를 감지하고 놀라서 쳐다봤다.
영수의 몸은 아주 시뻘건 색으로 변해 있었다.
“이곳 책임자가 간지라고 했던가?”
폭풍 같은 영수의 사기가 1층 호텔 로비에서 시작해 건물을 타고 위로 뻗어 올라갔다.
1층에 있던 무극회 승려들은 호흡이 곤란할 정도로 심한 사기에 대응할 엄두를 못 냈다. 대마괴를 능가하는 사기가 승려들을 얼어붙게 한 것이다.
“영수 왜 그래?”
놀란 것은 무극회 승려들만이 아니었다.
도깨비들 역시 놀라서 영수를 바라보며 또는 말리고 있었다.
영수의 분노는 쉽게 사그라지지 않았고 옅은 붉은색의 연기가 바닥과 벽 천장까지 약 5cm 두께로 뒤덮었다. 무극회 승려들은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전혀 모르고 있었고 도깨비들이 놀라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다.
“이곳에서는 사기를 낮춰 주시지요.”
제일 먼저 달려온 이는 하월이었다.
간지는 하월을 노려보며 말했다.
“우리가 당신들을 돕는 것에 대해 불만이 있소?”
하월은 도깨비들이 분노한 이유는 알지 못했지만 지금 이 도깨비가 무척 화가 나 있고 대단히 위험한 상태라는 것은 알았다. 그리고 지금 이곳. 호텔 로비는 마치 집단 환술에 빠진 것처럼 저 도깨비의 손아귀에 들어가 있음을 깨달았다.
“감사할 일이지 불만을 가질 일은 아니지 않습니까?”
하월은 도깨비가 비웃는 듯한 표정을 짓는 것을 보았다.
“동물들 세계에서 왕따라는 게 있지. 하지만 도깨비들 세계에선 왕따라는 게 없어. 앞으로 요괴 퇴치는 인간들은 인간들끼리 하시오. 도깨비는 도깨비들끼리 할 테니. 혹시 우리 얼굴 보는 게 마음에 안 들면 말씀하시오. 언제든 이 도시를 떠나 주겠소.”
하월은 대충 이 도깨비가 분노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다시는 그런 일이 없을 겁니다. 아직 서로 익숙지 않아 생긴 것 같으니 화를 거두시기 바랍니다.”
영수는 때마침 내려온 간지를 향해 강하게 노려봤다.
영수는 도깨비의 힘을 가지고 암살자로 활동하다 화평곡에서 한뫼 대왕의 보호 아래 도깨비로 살아가고 있었다. 세상 물정 모르던 과거의 암살자가 아니라 도깨비로서 힘을 자각한 아주 드문 인간과 도깨비의 합성체였다.
영수는 간지가 무극회의 최고 권력자인 무태선인의 후계자인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이곳의 총 책임자라고 알고 있었다. 영수는 간지가 원했든 아니든 관리자에게 책임이 있다고 보았다.
영수는 사기를 거둬들였다. 1층 로비에 퍼져 있던 옅은 붉은빛 연기가 먼 곳에서부터 영수 쪽으로 줄어들어 갔다.
“자자자자자자짜자짜작”
도마 위에서 야채를 칼로 다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벽과 천정이 무수히 많은 칼로 난도질당하고 있었다. 콘크리트 건물이 다져지고 작은 돌가루들과 먼지가 호텔 로비를 가득 메웠다.
본의 아니게 무극회 승려들은 눈사람처럼 먼지를 뒤집어써야 했다.
도깨비의 소심한 복수라고 하기엔 살 떨리는 공포의 순간이었다. 만약 바닥까지 난도질했다면 그 위를 밟고 서 있는 승려들도 다져졌을지 모를 일이었다.
영수는 도깨비들을 데리고 호텔 밖으로 나갔다. 아직도 어딘가에서 수송기를 기다리고 있을 동료들을 찾을 생각으로 몸의 농도를 낮췄다.
“이 도시는 빈 건물이 많으니 우리가 머물만한 곳을 알아봐.”
“한뫼가 싫어할 건데.”
“한뫼는 인간들을 도와 요괴를 잡으라고 했지 꼭 우리가 그들하고 같이 살라고 하지는 않았다.”
“그래도…….”
“내가 좀 전에 느낀 건데 쟤들은 우리보다 약해. 몇 명을 제외하고 우리가 얼마 전에 묘향산에서 만났던 요괴 놈보다 약해. 우리끼리 사냥하는 게 더 안전해. 분산되어 저들과 함께하면 우리도 위험하단 말이야.”
슬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영수는 그 자리에서 사라지듯 몸이 연기가 되어 날아갔다.
“이게 무슨 일입니까?”
영문을 모르는 간지가 하월에게 물었다.
호텔 로비에는 수십 명의 무극회 승려들이 있었는데 하나같이 먼지를 뒤집어쓴 체였다.
하월은 승려들을 쭉 훑어봤다. 그리고 깊은 한숨을 내쉬고 몸을 돌렸다.
영문을 모르는 승려들이 많았지만, 도깨비가 보여준 무력시위에 다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간지는 하월을 따라 승강기에 올랐다.
“그런데 아까 그 도깨비는 왜 신체를 가지고 있지 않은 것입니까?”
“그 도깨비는 바람 도깨비일 겁니다. 원래 바람 도깨비는 몸을 기체화시키는 재주를 가지고 있기는 한데 저 도깨비처럼 항상 기체 상태로 유지하지는 않죠. 어떤 특별한 힘을 가진 바람 도깨비 같습니다.”
“그런데 왜 화를 내고 있는 것이죠?”
하월은 생각할수록 자신이 부끄러웠다.
“아마도 저희가 도깨비들을 왕따 시켰던 것 같습니다.”
간지는 더 묻지 못했다. 도깨비들이 온 뒤로 분위기만으로 간지도 어느 정도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간지 본인도 아직 이곳의 승려들에게 왕따 비슷하게 당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간지에게 왕따는 일반적인 일이라 그런 쪽으로 느끼는 것이 빨랐다.
“도깨비들이 생각보다 영력이 높았습니다. 잘만 활용하면 좋을 텐데.”
최근 들어 요괴들의 출현빈도가 낮았고 하월이 이끌던 척살조의 승려들이 많이 죽는 바람에 새로운 승려들로 척살조를 꾸리는 과정에 있어 시간이 오래 걸리고 있었다. 그 덕에 하월과 간지는 호텔에 오래도록 머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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