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난의시대(87)
간지의 터져버린 오른쪽 배가 빠르게 복구되며 제 모습으로 돌아갔다.
이 상황을 이해 못하는 건 외국인이나 간지나 마찬가지였다.
하월은 암살을 시도한 이가 요괴가 아닌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일말의 동정심이나 망설임도 없었다.
하월이 외국인 남자의 명치를 찔렀던 손을 허공에서 꽉 쥐었다.
페더슨은 심장이 멎는 것을 느꼈다. 비명소리 한번 지르지 못하고 정신의 사고 작용이 그대로 멈춰버렸다.
하월이 뒤를 돌아보았다. 멍하니 서있는 간지와 그 옆으로 날아가고 있는 4개의 총탄이 보였다.
총탄은 아주 느린 속도로 날아가고 있었는데 하월이 앉아 있던 자리를 향해 있었다.
하월은 간지 옆으로 다가갔다.
“위험한 상황이었는데 잘 해내셨습니다.”
하월은 간지가 이렇게 훌륭히 환술을 시전하리라고 상상도 못했다. 하월은 간지에게 환술을 가르친 적이 없었고. 환술은 훈련학교에서도 고급 과정에 속했다. 간지는 훈련학교의 고급과정을 이수하지 못하고 퇴마 여행 중이었다.
“지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진 거죠?”
간지가 당황해 내 뱉은 말에 하월이 인상을 썼다.
“간지님이 암살자를 환술로 가둔 것이 아닙니까?”
“저는 환술을 할 줄 모르는데요.”
그제야, 하월이 간지의 환세계를 살펴보았다. 끝도 없이 넓게 펼쳐진 색색의 야생화가 피어있는 벌판이었다. 하늘은 맑고 햇볕은 따사로웠다.
듣도 보도 못한 순수한 환세계였다.
보통 환세계는 환술자의 정신세계를 반영했다. 착하고 순수한 사람은 환세계도 밝고 따듯하며, 악한 마음을 가진 나쁜 사람은 환세계도 어둡고 혼돈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이곳처럼 따뜻하고 밝으며 꽃들이 만발한 환세계는 하월에게 처음이었다.
“그럼 이곳은 뭔가요?”
간지는 우물쭈물 말을 못하고 있었다.
“전에도 이런 일이 있었습니까?”
간지는 훈련학교를 나올 때 교육 대장이었던 진청과의 대련에서 이런 곳으로 넘어간 사실을 이야기해주었다.
간지의 이야기를 듣고 하월이 말했다.
“양노선인께서 간지님에게 주문을 걸어 놓은 것 아닌가 싶습니다. 목숨이 위급한 상황에서 자동으로 발동되는 그런 주문을요.”
“그런게 가능합니까?”
“저는 못하지만 양노선인은 가능하시나 봅니다. 옛날부터 그런 술법이 있다는 것을 들은 적이 있었습니다. 실제로 본 것은 이번이 처음입니다.”
하월은 말은 그렇게 했지만 속으로 무척 놀랐다.
‘죽음의 위기에서 자동으로 환술이 발동되는 술법이라니. 양노선인의 도력이 이정도로 높지는 않을 텐데…….’
하월은 의심스러웠지만 그 외에 다른 방법은 생각이 미치지 못했다. 양노선인은 자신이 범접하지 못할 정말 높은 곳에 위치해 있다는 것을 하월은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하월은 양노선인 다음가는 실력자로 통했다. 정말로 그 정도의 실력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스승의 제자 출신이 아닌 승려들에게 하월은 큰 자랑이었다. 훈련학교 출신도 이렇게 훌륭한 술사가 될 수 있다는 믿음, 자랑…….
하월은 양노선인을 생각하며 기분이 좀 상했다. 자신과의 격차가 좁혀지기는커녕 감히 비교대상이 아니라는 것을 비웃듯 보여주는 것 같았다.
“이제 환술을 풀어 버리세요. 환술 유지는 영력의 소모가 큽니다.”
“그런데, 어떻게 푸는 것이죠?”
간지는 환술을 거는 방법을 모르듯 푸는 법도 몰랐다.
“정신을 집중해 원래 있던 장소를 떠올려 보십시오.”
어느새 하월과 간지가 원래 있던 곳으로 되돌아왔다.
“말로만 듣던 암살자와 마주치다니, 좀 더 주의해야겠습니다.”
중국으로 넘어오자 그동안 들었던 드론을 이용한 폭탄테러나 홍콩에서 벌어졌던 암살사건 등 무극회 승려들을 노리는 일들이 몸에 확 와 닿았다.
“간지님, 그냥 비행기로 이동하겠습니다.”
하월은 결국 복잡한 베이징역을 포기하고 베이징 국제공항으로 택시를 통해 이동했다.
그리고 하월과 간지는 비행기로 ‘인촨시’로 이동했다.
인촨시는 확장된 고비사막의 변두리에 위치한 대도시 중의 하나로 무극회에서 마왕의 부활로 인해 승려들은 집중시킨 곳 중의 하나였다.
마왕의 마기에 영향을 받아 요괴들이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는 중국 해안가 쪽으로 퍼져 나갔는데 이를 막는 최전방이기도 했다. 그래서 이곳엔 임시로 무극회 중국지부가 설치되었다.
이곳을 중심으로 요괴들이 출몰하는 곳으로 승려들을 파견했다.
하월이 인촨시로 온다는 소식은 임시 중국지부의 많은 승려들의 사기를 크게 올렸다. 하월은 비 제자 출신의 최고 퇴마 술사였고 대마괴를 가장 많이 잡은 승려였으며 훈련학교 출신 승려들의 우상이었다.
하월이 간지와 함께 인촨시 공항에 내렸을 때 하월을 반기는 승려들이 30명이나 나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어서 오십시오.”
인촨시는 요괴를 막는 최전방의 도시답게 일반 주민들이 모두 피난 간 상태였다. 도시에 머물고 있는 사람들은 도시의 유지를 위한 최소한의 행정 공무원들과 군인들. 그리고 무극회 승려들이었다. 거리엔 오가는 사람이 없었고 도로엔 오가는 자동차 한 대 없었다.
유령도시나 다름없었는데 상당히 큰 도시다보니 이게 꿈이냐 싶을 정도로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인촨시 중앙 광장을 끼고 있는 시청을 군부대가 사용했고 광장엔 각종 군장비들이 차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주변의 건물들을 군인들이 숙소로 사용했는데 원래 호텔이었던 건물 중에서 가장 좋은 것을 무극회에서 임시 중국지부로 사용했다.
인촨시의 무극회 임시 중국지부는 대부분 미국지부에서 온 승려들로 구성돼 있었다. 상대적으로 마기의 영향을 적게 받는 미국 지부의 인원들을 중국지부로 보낸 것인데. 원래 중국지부의 승려들이 테러로 대부분 죽는 바람에 벌어진 일이었다. 그 외에 중국과 동남아 쪽의 퇴마 여행자들을 이곳에 고정 배치한 상태였다.
하월과 간지가 임시 중국지부에 도착했을 때 이들을 맞은 승려는 미국지부의 훈련대장을 맡고 있는 ‘영월’승려와 공격대장을 맡고 있는 ‘영승’승려였다. 미국지부의 3대 대장이 모두 중국으로 파견 나왔다가 얼마 전 호법대장인 ‘영지’승려가 대마괴를 잡기 위한 척살단을 꾸려 싸우다 인체변형술의 부작용으로 지금은 치료하기 위해 한국지부에서 요양을 하는 중이라 빠진 상태였다.
“오랜만에 뵙는군요.”
“건강해 보이십니다.”
하월과 미국지부의 훈련대장 영월은 과거 몇 번 본 사이었다. 하월이 퇴마여행에 집중하지 않았다면 하월도 한 지부의 3대 대장 중 한자리는 차지했을 터였다. 그래서 스승님의 제자가 아니고서 하월을 하대할 사람은 무극회 내에서 거의 없었다.
영월과 영승은 하월 옆의 간지와 눈이 마주쳤다.
간지는 양노선인의 적전제자였고 이를 두 승려가 잘 알고 있었다. 최근엔 무태선인이 간지를 9번째 제자로 받아들인 상태였으니 스승의 제자이며 후계자이며 차기 종정이 눈앞에 있는 것이었다. 영월과 영승이 미국지부의 3대 대장 중 한명이라고 해도 일반 승려일 뿐 간지와 비교할 바가 아니었다.
탐탁지 않아 하는 생각이 얼굴에 그대로 드러났지만 예를 갖추지 않을 수도 없었다.
“간지님 처음 뵙겠습니다.”
영월과 영승이 허리를 숙여 깊은 인사를 했다.
원래대로라면 스승의 후계자는 ‘선인’호칭을 달아야 했는데 간지는 이와 관련해 아직 정식적으로 후계자 책봉식을 치루지 않아 일반 승려들이 간지에게 선인 호칭을 붙이지는 않았다.
간지는 이런 상황이 참 난처했다.
나이도 훨씬 많고 높은 직책을 가지고 있으며 술법의 수준도 높은 분들이 자신에게 깍듯이 대하는 것이 아주 불편했다. 젊은 승려들은 일부러 간지의 눈을 피함으로써 예를 지키지 않았지만 나이 먹은 승려들은 예외 없이 속으로 불만을 품으면서도 겉으로 예를 갖췄다.
많은 승려들의 시선이 간지에게 쏠렸다. 이들 중에는 간지를 처음 보는 승려들이 많았다.
다들 허접쓰레기가 후계자로 뽑혔다는 것은 잘 알고 있었지만 직접 보기는 처음이라 그들의 시선을 더욱 따갑게 느끼는 간지였다.
간지가 슬쩍 하월을 쳐다보았지만 하월 역시 머리를 숙이고 있었다.
둘이 있을 때는 몰라도 사람들이 많은 곳에서는 하월도 간지에게 예를 갖추지 않을 수 없었다.
도움을 청하고 싶었지만 하월이 저러고 있으니 간지는 이 상황을 어떻게든 벗어나기 위해 아무 말이나 내뱉었다.
“일단 좀 쉬고 싶습니다. 좀 피곤하군요.”
“물론이지요. 이쪽으로 오십시오.”
영월이 직접 간지를 안내해 숙소로 모셨다.
많은 승려들이 속으로 간지를 욕했다.
‘고생하는 우리보다 지가 더 힘드나?’
간지는 어색한 자리를 벗어나고 싶어 한 말이었지만 일반 승려들의 입장에서는 불만으로 쌓였다.
최전방에서 목숨을 내걸고 싸우는 승려들에게 고생한다고 위로 한마디 하지 않은 차기 스승님이 못마땅했고 그동안 소문으로 돌았던 내용들이 모두 진실처럼 들렸다.
Comment '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