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난의시대(71)
휘황찬란한 불빛과 함께 시끄러운 음악소리가 메아리치고 있었다. 온갖 자극적인 인간들의 냄새가 코를 찔렀다. 평소 산에서 맡을 수 없는 냄새. 적응이 안 되는 냄새지만 그 속에 섞여 있는 인간의 냄새가 미묘하게 유혹하고 있었다.
우두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주변에 쌓인 눈으로 인해 우두는 백호의 모습이었다. 계절에 따라 우두는 다른 색으로 털갈이를 한다. 눈이 오기 시작하면 우두는 백호가 되는데 이는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으려는 자신의 의지가 반영된 것이다.
인간들이 나무 판때기 위에 서서 빠르게 산을 내려가고 있었다.
‘나무를 다 베어낸다 싶더니 저지랄 하려고 한 것이었군.’
나무들은 아직 많은 잎사귀를 간직하고 있었다. 급격히 추워지고 눈까지 왔지만 침엽수가 많았고 나무들은 아직은 잎들을 더 달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그 덕에 엎드려 있는 우두를 사람들이 구분할 수가 없었다.
우두는 스키장의 슬로프를 따라 설치된 그물과 안전펜스를 따라 위쪽으로 올라갔다. 위로 올라갈수록 사람들은 줄어들었다.
‘언제 저렇게 눈이 많이 왔지?’
스키장은 다른 곳보다 눈이 훨씬 더 많이 쌓여 있었다. 우두는 눈이 스키장에만 많이 내린 것이 신기했다.
산 정상은 아니었지만 큰 건물이 하나 있었고 그 곳을 기점으로 사람들이 산 밑으로 내달리고 있었다. 우두는 배가 고팠지만 사람이 너무 많았다. 먹고는 싶은데 참았다. 그리고 발길을 돌려 산을 돌아 내려갔다. 그곳도 나무 없이 눈이 많이 쌓인 곳이었는데 이곳은 판때기를 타고 달리는 사람들이 한명도 없었다. 우두는 순백의 눈 위를 걸으며 배고픔을 잊었다. 발이 푹푹 빠지는 느낌이 좋았다. 한겨울에 맛보는 느낌을 가을에 느끼고 있었다.
우두는 눈을 맞으며 걷다가 숲에 이르자 눈이 그친 것을 보고 하늘을 올려봤다. 흐린 날씨이긴 했지만 눈은 내리지 않았다. 그런데 저쪽 눈길엔 지금 눈이 내리고 있었다. 우두는 되돌아가서 주변을 살폈다. 눈은 아래에서 위쪽 하늘로 쏘아져 뿌려지고 있었다.
신기한 광경이었다. 눈이 하늘이 아닌 지상에서 뿌려지고 있었다. 우두는 눈을 뿜어대고 있는 곳으로 어슬렁어슬렁 걸음을 옮겼다.
김병규는 스키 시즌을 알리는 강계 스키장의 개장일을 맞추기 위해 길드원들을 속이고 놀러왔다. 요즘 젊은 사람들이 다 그렇듯이 가상현실 게임을 직업으로 하고 있었다. 수입도 좋았다.
거대 길드의 중간간부였고 사냥과 퀘스트로 버는 돈이 꽤 됐다. 무엇보다 길드 간부가 되면서 들어오는 뒷돈이 만만치 않았다. 자신이 속해 있는 길드가 관리하는 사냥터의 좋은 자리를 일반 유저들에게 추가 요금을 받고 배정해 주었는데 이게 아주 짭짤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김병규가 중간 간부가 되어 이제 막 돈을 만지나 싶었는데 엊그제 길마가 ‘까치산호랭이’길드를 도와 ‘신마대전’에 참전하겠다고 선포하면서 돈줄이 막히게 되었다. 중간 간부였기 때문에 길드에서 결정한 것은 무조건 솔선수범 따라야했고 자신이 마계로 가서 전쟁에 참전하게 되면 기존의 사냥과 퀘스트로 버는 돈 까지 막힐 위기에 처해있었다.
김병규는 부모님을 핑계로 어제부터 게임에 접속을 안 하고 있었는데 사실은 전쟁에 참전하기 싫어 여자 친구와 함께 스키장에 놀러온 것이었다. 마냥 접속을 안 할 수는 없지만 일단 놀면서 시간을 끌다가 돌아가는 상황을 볼 참이었다. 스키장엔 한 일주일 머물 생각이었다. 이곳도 가상현실 게임을 하게 도와주는 ‘캡슐방’이 있었지만 돈이 안 되는 일에 뛰어들고 싶지 않았다.
“오빠 이곳은 아직 오픈 안했잖아.”
주혜림. 자신을 게임 개발자라고 속이고 만난 비만 클리닉 운동 강사였다. 갑자기 결정한 스키여행에 혼자가기 심심해 반 강제적으로 데리고 온 애인이었다. 현재 시대의 게임 개발자는 최고의 인기 직업에 속했다. 더군다나 퓨쳐홀릭의 직원으로 속였기 때문에 그 하나만으로 여자들이 오줌지리며 목매었다. 김병규는 게임을 하며 주워들은 지식이 있어 웬만한 여자들 속이는 건 식은 죽 먹기였다. 실제로 김병규가 돈을 잘 벌었고 잘 썼기 때문에 주혜림은 쉽게 속아 넘어왔다.
“괜찮아, 스키 한두 번 타보냐? 벌써 슬로프에 눈을 다 깔았잖아. 이런 곳을 처음 달리는 기분이 아주 짱이야.”
“그래도 될까?”
“어차피, 내일 오픈하기로 한 곳이야. 뭐라고 하면 죄송하다고 하지 뭐.”
강계 스키장은 부분적으로 슬로프를 오픈하고 있었다. 개장일은 13개를 오픈하고 하루에 2개씩 늘려 일주일 안에 모든 슬로프를 오픈한다고 광고해왔었다.
“오빠, 여기 상급 코스 같아.”
“중상 급이야, 겁먹지 말고 천천히 내려가면 돼.”
“나 먼저 가?”
“내가 뒤에서 자세 봐줄게 앞장서.”
김병규는 하루 종일 게임만하는 것에 비해 스키는 잘 탔다. 학교 다닐 때 스키선수로 활동했었는데 스키가 계절 스포츠다 보니 비시즌에 체력 훈련만 하다 게임에 맛 들여 스키를 때려치우고 게임으로 빠진 경우였다.
뒤에서 보는 주혜림은 아주 섹시해보였다. 둘 다 보드가 아닌 스키를 탔는데 몸에 달라붙는 형태의 스키복은 비만클리닉 운동 강사인 주혜림의 몸매를 약간은 과장해 보여주었다. 그렇잖아도 운동으로 단련된 주헤림의 몸매가 빛을 발하고 있었다. 김병규는 주혜림의 엉덩이만 보며 따라 내려갔다.
‘오늘밤은 화끈하게…….크크큭.’
불타는 밤을 꿈꾸며 차가운 눈을 제치며 달렸다. 중상급 코스라 경사가 꽤 있어서 속도가 빨랐다.
주혜림이 굽은 코스를 돌아 나갈 때 양 옆으로 일정한 간격으로 설치돼 제설기에서 인공눈이 뿜어져 나오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아무도 없는 슬로프. 인공눈을 맞으며 달리니 그것도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고글에 인공눈이 붙으며 시야를 가렸기 때문에 주혜림은 크게 턴을 하며 속도를 낮췄다.
“쿵.”
순간 주혜림은 뭔가에 그대로 부딪혔다. 제설기는 아니었을 텐데. 슬로프에 사람도 없었는데.
주혜림은 눈 속에 박혔고 스키가 모두 분리돼 날아갔다. 정신을 차리고 주변을 살펴봤다. 스키도 찾아야 했고 자신과 부딪힌 게 뭔가도 봐야 했고, 뒤따라 내려오는 김병규도 생각했다.
주혜림이 고글에 묻은 눈을 닦아내고 앞을 보니 믿기지 않지만 황소보다 큰 흰색의 멋진 호랑이가 입을 벌리고 있었다.
주혜림의 뜨거운 피가 주변의 인공눈과 섞여 내리며 애써 쌓은 눈을 녹였다. 김병규에게 화끈한 밤을 보내게 해줄 몸뚱이는 호랑이의 입에 물려 반 토막으로 잘렸고 허리 위를 날려먹은 엉덩이는 매력을 상실했다.
김병규도 제설기에서 뿜어져 나오는 인공설 때문에 시야가 가려졌다. 앞쪽으로 어설프게 주혜림이 보였는데 한순간에 주혜림이 시야에서 사라졌다. 김병규가 바닥에 깔린 눈을 날리며 급정거를 했는데 우두가 자신을 향해 눈 벼락을 날리고 있던 김병규를 향해 오른쪽 앞발을 휘둘렀다.
머리와 몸이 분리되며 차가운 흰색 눈에 뜨거운 붉은색 피를 뿌렸다.
우두는 사람을 잡아먹을 생각이 없었다. 전혀 마음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동안 이천년 넘게 참아왔던 사람 고기를 드디어 먹고 말았다.
‘오, 이 부드러움이란…….’
그동안 참아왔던 살의가 폭발했다. 우두는 미친 듯이 여자고기와 남자고기를 삼켰다. 연하고 부드러운 살의 감촉과 따뜻한 피 맛이 조화를 이루며 마치 위장의 바닥을 뚫어 버린 듯 했다. 우두는 더 이상 허기를 참을 수 없었다. 우두는 산 정상 가까이 있던 사람들이 많은 건물 쪽으로 몸을 날렸다.
‘기다려라 내가 간다.’
“어흐흐흐흥”
스키장을 울리는 호랑이의 울부짖음이 메아리쳤다. 그리고 그에 뒤지지 않는 비명소리가 한국의 스키 시즌을 알리는 스키장 개장일을 축하하듯 사방에 울려 퍼졌다.
설원은 피로 덮이고 비명은 세상을 뒤덮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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