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난의시대(56)
18. 경천교의 추격자.
산속을 바람같이 달렸다. 빽빽이 들어차있는 나무들이 어떠한 장애가 되지 않았다. 내리막길도 오르막길도 계곡도 장애가 되지 않았다. 호흡하나 흐트러지지 않은 체 산속을 달리고 또 달렸다.
하월과 간지가 과거 비무장지대로 불렸던 곳을 걷고 있었다. 통일이 된 후에도 비무장지대는 자연보호구역으로 묶여 개발이 제한되었다. 국립공원도 개발이 되는 상황에서 비무장지대가 자연보호구역으로 묶여 개발이 되지 않은 이유는 지뢰 때문이었다. 워낙 많은 지뢰들이 백년이 넘도록 방치되었고 어디에 지뢰를 설치했는지 서로 까먹은 상태에서 재차 지뢰가 설치되어 비무장지대는 그냥 자연보호라는 명목으로 사실상 방치되고 있었다.
하월은 최고의 퇴마술사중의 한사람이었지만 지뢰를 밟으면 하월도 어쩔 수 없었다. 그럼에도 하월은 비무장지대를 걷는데 있어 두려워하지도 않았고 머뭇거리지도 않았다. 간지는 바닥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하월이 지나간 길로만 따라갔다.
“하월님은 지뢰가 보이나요?”
“보인다기보다 느낌으로 알 수 있습니다. 땅속의 지뢰가 이질적인 느낌을 주거든요.”
“대단하십니다.”
“수련을 열심히 하다보면 생각지도 못한 능력을 얻기도 합니다.”
“저도 열심히 하면 하월님같은 수준에 다다를 수 있을까요?”
열심히 한다고 다 되는 것은 아니었다. 하월은 간지가 아무리 열심히 해도 퇴마 술사로서 높은 경지에 이르지 못할 것을 알고 있었지만 차마 얘기해 줄 수는 없었다. 보통 사람은 아무리 열심히 해도 열심히 하는 천재를 따라 잡을 수 없는 법이다. 무극회의 퇴마술사들은 재능 있는 사람들만 골라 훈련을 통해 술사로 키우고 있었다. 누구보다 더 타고난 재능을 중요하게 여기는 곳이 바로 무극회였다.
“결과를 떠나서 노력은 필수입니다.”
간지는 자신이 퇴마술에 소질이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훈련학교에서 간지의 성적은 최하위 권이었다. 거의 개인교습을 받다시피 했음에도 다른 동기들에 비해 성적이 낮았다. 그래도 양노선인이 후계자로 지명한 탓에 누구하나 대놓고 뭐라 하지 못했지만 자신을 보는 시선으로 많은 것을 알 수 있었다. 어떻게 보면 하월과 같이 다니는 퇴마여행이 간지에게는 더 편했다. 동기들의 시샘과 질투. 그리고 부담이 덜했다. 간지는 나름 열심히 한다고 하지만 결과가 그리 좋지 않았다. 자신은 언제나 최선을 다했다.
하월과 같이 있으면서 열심히 듣고 생각하고 연습했다.
간지는 정신을 집중해 땅속의 지뢰를 감지하려고 애썼다. 그러나 하루를 꼬박 걸었어도 알 수가 없었다. 아직 비무장지대를 벗어나지 못한 체 하월과 간지는 노숙을 하게 되었다. 간지가 아는 나무는 버드나무 밖에 없었는데 이들이 노숙을 준비하는 나무 밑은 버드나무가 아니었다. 노숙을 하기 위해선 주변에 결계를 쳐야 했다. 잡귀와 벌레들이 접근을 못하게 하는 결계를 먼저 친 뒤 하월같은 경우엔 앉아서 명상으로 잠을 대체했다. 하월은 일주일에 한번 정도 누워서 잠을 잤고 그 외에는 명상으로 대신했다. 그에 비해 간지는 4시간 정도 숙면을 취했다. 비닐처럼 얇은 두 겹으로 된 침낭을 깔고 자는데 날이 추울 때는 그 안에 들어가서 잠을 잔다. 얇지만 신소재의 침낭인데다 한국의 겨울이 예전만큼 춥지 않아 얼어 죽지는 않는다.
간지가 누워서 문득 하늘을 보니 우중충한 흐린 날씨다. 내일은 비가 올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눈을 감았다. 비가 오면 간지는 깔고 있는 침낭을 뒤집어쓰고 앉아 명상으로 잠을 대체해야 한다.
간지의 눈에 검은 구름 사이로 붉은 빛이 군데군데 물들어 있는 게 보였다. 덮다.
간지는 전에도 이런 꿈을 꿨다는 기억을 해냈다. 용암이 강물처럼 흐르고 뾰족한 바위와 자갈들로 세상이 뒤덮여 있다.
‘제길...’
저번에 꿨던 꿈의 기억으로 자신이 길을 찾아 해매도 개고생만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간지는 그저 꿈이 깨기를 기다리며 그냥 자리에 주저앉았다.
간지는 이것이 꿈이라고 생각했지만 환술일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누군가 자신의 꿈을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옆에는 하월이 있으니 제시간에 일어나지 못하면 하월이 해결해 줄 것으로 믿었다. 그래서 간지는 자신의 꿈을 지배하는 대상을 기다렸다. 지루한 시간이 이어졌다.
간지는 조용히 눈을 감고 명상을 했다. 한순간도 허투루 보낼 수 없었다. 간지는 배워야 할 게 너무 많았다.
간지는 누군가 자신을 보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조용히 눈을 떠 보니 온 몸에 검은 오라를 두르고 있는 발가벗은 남자가 공중에 떠 있었다. 근육질의 몸에 각진 얼굴로 강인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열심이구나.”
간지는 이 남자가 결코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 들지 않았다. 예전 훈련학교의 교육대장인 ‘진청’의 말로는 환술로 만들어진 환세계는 술사의 본성을 나타낸다고 했다. 본성이 착한 사람이 만들어낸 환세계는 따뜻하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표현되고 본성이 나쁜 사람이 만든 환세계는 그에 맞게 거칠고 어두운 모습으로 표현되는 것이다. 지금 이곳은 지옥이라고 해도 믿을 만큼 어둡고 척박한 곳이었다. 따라서 이 환세계를 만들었을 것으로 보이는 저 남자는 악당일 것이라 생각했다.
“무슨 일이오?”
“허허허”
남자는 간지를 내려다보며 웃었다. 간지 입장에서는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러나 밖으로 자신의 감정을 내색하지 않았다. 적의 환세계에 갇힌 이상 꼬투리를 잡히거나 빈틈을 보여서는 안됐다.
“나한테 무슨 볼일이라도 있소?”
간지는 남자의 시선을 똑바로 쳐다봤다. 순간 ‘아차’싶었다.
술사로서 능력이 약한 자신이 상대와 눈을 마주쳐 어떤 낭패를 당할지 몰랐기 때문이었다.
남자는 간지의 걱정처럼 눈을 통해 간지의 내면을 샅샅이 훑어 봤다.
“너에게 운명을 건 이유를 알겠다. 그러나 너희들 뜻대로 되지는 않을 것이다. 꼬마. 내가 세상에 두 발을 디딜 때까지 부지런히 갈고 닦아라. 그때까지 네가 살아있다면 너의 목숨은 내가 직접 끊어주마.”
간지는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이 남자가 뭔 소리를 하는지 잘 모르겠지만 결국 자신을 죽이겠다고 선언한 것이지 않은가.
‘무슨 내가 동네북인가.’
간지는 대꾸를 하지 않았다.
남자는 간지를 보며 미소를 짓고 사라졌다. 남자가 사라지자 간지는 잠에서 깨어났다.
언제부터 내렸는지 이슬비로 옷이 젖어 있었다. 그나마 얼굴은 나뭇잎들이 막아줘서 비를 맞지는 않은 상태였다. 간지는 환술에 걸렸다 풀려 잠에서 깨고 나니 다시 자고 싶은 마음이 없어졌다.
몇 시간을 잤는지 모르겠지만 하월이 아직도 명상중인 것으로 보아 그리 오래 잠을 잤던 것은 아니라 생각했다. 간지와 다르게 하월은 온 몸이 비에 젖어 있었다. 나무 안쪽에 간지가 자고 있었고 바깥쪽에 하월이 명상하고 있었던 탓이었다. 간지는 대충 자리를 잡고 명상 자세를 취했다.
깊게 숨을 들이마시고 내뱉기를 몇 차례 한 뒤 호흡을 천천히 고르게 했다. 그리고 눈을 감으려고 했는데 앞쪽에서 엄청난 기운이 해일처럼 덮쳐왔다. 간지는 자기도 모르게 눈을 부릅떴다.
약 50미터 전방에 두 개의 커다란 도깨비불 같은 것이 눈에 들어왔다.
“후욱 훅 후욱”
거친 숨소리가 여기까지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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