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난의시대(101)
간지는 당황해 어찌할 줄 모른 체 하월을 쳐다봤다. 간지는 자신의 앞에 무릎을 꿇은 이가 도깨비 대왕 한뫼라는 것을 처음부터 알아봤다. 전진기지인 인촨시에서 영수를 비롯한 많은 도깨비가 자신의 대왕 한뫼에 대해 이야기를 많이 했었고 이 단상 위에서 가운데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면 그가 한뫼 대왕일 거란 것은 누가 봐도 뻔한 이치이기도 했다.
그런데 그런 높은 존재가 왜 자신한테 무릎을 꿇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간지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몰라 망설이다 에라 모르겠다 싶은 심정으로 한뫼 앞에 같이 무릎을 꿇었다.
한뫼는 그제야 자신의 행동이 많은 사람을 당혹게 하는 것을 알았다.
‘뭐야, 아무도 몰랐던 거야?’
“어흠.”
한뫼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간지에게 손을 내밀었다. 한뫼의 손은 붕대로 감겨 있었는데 간지가 그 손을 잡고 일어섰다.
10년이 지났는데도 한뫼의 두 팔을 완전히 회복되지 않고 있었다.
“이쪽으로 앉으십시오.”
한뫼는 자신의 오른편 자리로 간지를 안내했다. 이곳에 온 무극회 승려 중에 간지가 서열이 가장 높았기에 그 자리에 앉는 것이 이상할 것은 없었다.
그러나 한뫼의 돌출 행동으로 분위기가 한순간에 싸해진 상태였다. 그런데 이 상황을 몰고 온 한뫼가 입을 다물고 있으니 다른 사람들도 어찌할 수 없었다.
‘허허허. 이럴 수가 있나. 정녕 아무도 모르고 있었단 말인가. 그러면서 후계자로 삼았던 것인가?’
한뫼는 곁눈질로 간지를 훔쳐봤다. 어처구니없어 헛웃음만 계속 나왔다.
다시 만추절을 맞아 손님 접대 준비가 시작되었다. 손님들이 자리에 하나둘 앉기 시작했다. 아직 오고 있는 사람들도 많았는데 화평곡에 초대된 손님들은 대부분 무극회 승려들과 경천교 일부 도사들이었다. 만추절 축제에 일반인은 제외된 것이다.
사람들이 속속 모여들자 영수가 한뫼 대왕에게 사람들을 소개했다.
무태선인의 9명 제자 중에 양노선인과 무태선인의 비서나 다름없는 법명과 그 외 바쁜 제자를 제외하고 6명이 와 있었다. 그리고 대마병단 단장이기도 한 사중과 고위급 승려들이 다수 왔다.
화평곡을 구경한다는 점에서 서로 오려고 난리였다.
경천교 쪽에서는 일지선사와 열두 제자들 그 외에 간부급 도사들이 왔다.
도깨비들 입장에서 요괴를 잡는 영적인 힘을 가진 동료들만 초대한 것이다.
화평곡 안은 낮과 밤, 날씨는 인위적이었다. 한뫼에 의해서 조절되었는데 화평곡 밖은 해가 저물고 있었지만 화평곡 안은 한낮이었다. 점차 빈자리가 사람들에 의해 채워지고 있었다.
전 세계에서 손님들이 오다 보니 제시간을 딱 맞추지 못하고 있어서 준비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고 있었지만 누구 하나 짜증 내거나 싫은 기색을 보이는 사람은 없었다.
이렇게 많은 사람을 보는 도깨비들도 신기해했고 도깨비 나라에 온 사람들도 신기해했다.
귀빈석이라고 할 수 있는 단상 위의 의자들이 모두 채워지자 한뫼가 만추절의 시작을 알리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섰다. 단상 아래쪽 공터의 중앙에 사람들이 있었고 그 주변으로 도깨비들이 있었다. 부끄러워 모습을 드러내지 않던 도깨비들까지 지금은 모든 공간을 차지하고 있었다.
만추절의 개회식이 있는 이 순간. 아마도 화평곡의 모든 도깨비이 이곳에 와 있으리라.
한뫼는 감회가 새로웠다. 화평곡에 갇혀 살다시피 한 기나긴 세월이 이제는 꿈처럼 멀게 느껴졌다. 마왕과 적을 두게 됐지만 화평곡을 제자리에 돌려놓은 것이 한뫼는 얼마나 자랑스러운지 몰랐다. 게다가 다시는 꽃과 열매를 맺지 못할 것으로 본 신성수가 어느 때보다 더 다양한 꽃과 짙은 단내를 뿜는 과일을 맺었다. 용맥의 기운으로 생장하는 신성수가 이렇게 좋은 꽃과 열매를 맺을 수 있다는 것은 용맥의 회복을 의미한다고 보았다.
한뫼가 기분 좋은 이유는 이것 때문이었다. 세상을 뒤덮던 마기가 약해졌다.
그리고 도깨비들의 역사 이래 이처럼 많은 사람과 한자리에 모인 적이 없었다. 인간들과 이렇게 가깝게 지냈던 적이 없었다.
이번 만추절은 많은 면에서 뜻깊은 날이었다.
시원한 바람이 한차례 불어왔다. 뜻깊은 날. 조금은 긴장한 한뫼가 입을 열려고 하는데 앞쪽의 일부 사람들이 하늘을 쳐다보는 것이 보였다. 한뫼도 그 시선을 따라 하늘을 올려다봤다.
한뫼가 하늘로 시선을 돌리자 모두 그 시선을 따랐다. 다들 한뫼에 집중해 있었던 탓이다.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하늘은 해가 없었다. 화평곡 안에서의 해나 달은 장식품으로의 의미일 뿐이었다. 해 때문에 날씨가 따뜻하거나 낮이 되거나 하지는 않았다. 따라서 해가 없다고 해서 도깨비들이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해와 달이 동시에 떠 있는 경우도 있었고 낮에 달만 떠 있는 경우도 많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의 하늘은 평소와 많이 달랐다. 마치 파란 바닷물이 소용돌이치는 것 같았다.
사람들은 처음 보는 광경이었지만 화평곡은 원래 이런 곳으로 생각했고 도깨비들은 생전 처음 보는 광경에 놀라고 있었다.
한뫼가 버럭 화를 내며 큰소리로 외쳤다.
“이런 썩을 놈의 새끼. 남의 잔칫날에 깽판을 치느냐?”
한뫼의 목소리는 귀청을 찢을 듯 우렁찼다. 그리고 한뫼의 외침으로 다들 무언가 잘못된 것을 알았다.
한뫼는 붕대에 감긴 두 팔을 올려 하늘을 향해 욕을 해댔다.
화평곡의 문을 열며 소실된 두 팔은 재생이 되고 있기는 했지만, 아직 완전하지 않아서 손가락들이 자리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팔에 붕대를 감고 있었는데 1, 2년은 더 지나야 완전해질 것으로 생각했다. 원래 한뫼는 부상의 회복이 무척 빨랐지만, 이번 부상은 아주 더디게 회복되고 있었다.
하늘의 소용돌이는 점점 커졌고 가운데는 마치 구멍이 난 것처럼 짙은 검은색 공간이 형성되어갔다. 화평곡 안에 부는 바람이 점점 거세어지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물론 도깨비들까지 영문을 모르고 당황해 하는 가운데 마치 태풍이라도 몰아친 것처럼 바람과 함께 나무에 피웠던 꽃들과 열매들이 떨어져 나갔고 식탁 위에 차려져 있던 음식들이 바닥으로 흘러 내렸다.
일부 겁 많은 도깨비들은 나무 위로 올라가 몸을 숨겼다.
화평곡의 나무들은 도깨비들에게 집이었고 식량고였다. 공포를 느낀 도깨비들은 나무속으로 숨어들었다. 공터에는 어쩔 줄 몰라 하는 초대받은 사람들과 일부 도깨비들만 남아 있었고 한뫼는 계속 욕을 해대고 있었다. 이 상황을 풀 능력이 한뫼에게 없었다.
하늘의 검은 구멍이 일정수준에 다다르자 더는 커지지 않았다. 하지만 화평곡 안의 바람은 갈수록 거세어지고 있었다. 마치 화평곡을 집어삼키는 태풍 같았다. 나무들이 하나둘씩 바람을 못 이기고 쓰러져 나갈 때 하늘의 검은 구멍에서 거대한 물방울 같은 것이 하나 떨어져 나왔다.
“수마 장군.”
“배신자.”
거대한 물방울이 말을 했다.
물방울이 말을 하자 한뫼는 아직 제대로 형성되지 않은 두 손을 꽉 쥐었다. 분노하고 있었다.
“주인님을 배신하고 저 혼자 잘 먹고 잘살았군.”
“완전하게 부활한 것 같군.”
한뫼는 상대가 누군지 알자 화를 삭이고 이성을 회복해 나갔다.
“이대로 주인님이 부활할 때까지 참으려고 했는데 너희 하는 꼬락서니가 마음에 안 들어 이렇게 나섰다. 이제 너희는 각오해야 할 것이야.”
한뫼는 왜 그동안 요괴들이 잠잠했는지 비로소 알 것 같았다. 한뫼는 자신의 예상이 맞는다면 큰일이라고 생각했다.
“어쩌라고?”
적으로 돌아선 이상 한뫼는 최선을 다해 싸울 수밖에 없었다. 한번 배신했고 적으로 돌아선 이상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상대가 마왕군의 장군이라고 해도 이제는 어쩔 수 없게 된 것이다.
‘수마 장군이 살아있었을 줄이야. 그렇다면 다른 장군들도 살아 있을 수 있겠군.’
한뫼는 겉으로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깊은 한숨이 나왔다.
“우우후후후후훗. 살아 있다는 것이 고통과 악몽이 될 것이다. 실컷 즐겨라.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을 이 순간에 감사해라. 이제 곧 너희 모두는 우리의 양분이 될 터이니 자신의 나약함을 원망하고 괴로워하거라. 지옥에 들어온 것을 환영한다.”
수마 장군의 마지막 말이 화평곡에 메아리쳤다. 그리고 거대한 그 물방울이 바닥으로 곧장 떨어졌다. 한뫼가 공터 가운데로 뛰어가서 하늘을 향해 두 팔을 벌렸다. 물방울의 떨어지는 속도가 점점 느려지는 가운데 화평곡안을 뒤흔들던 태풍 같은 바람이 땅에서 하늘 쪽으로 방향을 바꿨다.
한뫼의 몸이 점점 거대해져 가고 있었다. 피부색이 변하고 외형이 변해갔다. 한눈에 봐도 화가 나 있고 무시무시한 모습으로 떨어지는 물방울을 떠받치는 모습을 하고 있었는데 바람에 날린 나뭇잎과 꽃들이 하늘로 솟구치면서 물방울에 달라붙었다. 다들 저 물방울이 일반 물방울이 아닌 큰 피해를 줄 것이란 걸 느낌으로 알 수 있었지만, 꽃과 나뭇잎으로 뒤덮이고 나니 한편으로 화평곡에 잘 어울린다는 생각을 했다.
물방울은 천천히 바닥으로 내려왔다. 그리고 공터의 절반 이상을 차지한 체 자리를 잡았다. 마치 바위처럼 물방울은 굳어서 꽃과 나뭇잎을 뒤집어쓴 체 그렇게 자리를 잡았다.
화평곡은 산이나 바위, 계곡 같은 것이 없는 평평한 숲이었는데 이 거대한 물방울이 굳으면서 화평곡 안의 새로운 상징물이 되었다.
한뫼는 원래의 모습으로 되돌리면서 도깨비와 사람들에게 말했다.
“아무래도 이번 만추절은 취소해야겠습니다. 다음 만추절에는 제대로 된 축제가 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마왕의 부활이 3년도 안 남았는데 다음 만추절이 열릴지 알 수 없었으나 한뫼는 희망했지만, 목소리에는 힘이 없었다.
Comment '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