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난의시대(93)
비공정은 덕소의 농장으로 위장된 퓨쳐홀릭의 사이보그 연구소에 착륙했다. 원래 농작물을 키워내야 하는 거대한 공장 건물엔 영화 세트장 같은 설비가 설치돼 있었다.
노인은 평소에 점검을 받던 곳과 다른 이곳에서 간단한 검사를 한 뒤 가벼운 옷으로 갈아입었다.
“일반 대련장은 아닌 것 같군.”
“어르신께서 상대해야 할 사이보그들은 군인들입니다. 그들을 위한 테스트이기 때문에 실제와 같은 현실의 세트를 만들어 놓은 겁니다. 그들은 저쪽 끝에서 이쪽으로 올 것이고 어르신은 이쪽에서 저쪽 끝으로 가시면 됩니다. 그들은 자기 자신 이외에 만나는 모든 대상은 적이니 싸우라고 지시를 내렸습니다. 어르신도 저쪽 끝으로 가는 도중에 마주치는 사람은 무조건 적이라 생각하시고 그들과 싸우든지 피하시든지 해서 저쪽 끝으로 가시기만 하면 됩니다.”
“규칙은 간단하군.”
김태호는 미소를 지었다.
“그런데 사이보그들끼리 싸우면 몹시 위험한 거 아닌가?”
“뇌가 다치지 않으면 어떤 부상도 상관은 없습니다. 부속을 새로 교환하면 되는 거니까요.”
노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 역시 뇌를 제외한 모든 신체 장기가 인공장기 기계 몸이었으니까.
김태호가 한마디 더 했다.
“최선을 다하셔야 할 겁니다. 저들은 모두 특수 훈련을 받은 군인들이고 이번 실험은 스포츠가 아닙니다. 실제 전투 상황이라고 생각하십시오.”
“무슨 말인지 알겠네.”
노인은 김태호에게 물어볼 것이 없었다. 김태호도 특별히 말해줄 것이 없는 듯하자 몸을 돌려 마을 안으로 들어갔다.
실험이 시작된 것이다.
김태호는 상황실에서 모니터에 집중했다. 이번 실험은 사실 노인을 위한 실험이었다.
풀사이보그에 대한 것은 아직 무극회의 사중도 모르고 있었다. 김태호는 법일과 사중 모두 믿지를 않았다. 어떤 분야든 성공한 사람의 안목은 무시 못 하는 법이다.
김태호는 법일과 사중의 눈에서 야망을 읽었다. 그들은 정치인의 눈빛을 가지고 있었다.
김태호의 퓨쳐홀릭은 무극회의 비술을 과학에 융합시키고 있었는데 그들에게 모든 패를 함부로 보여주기는 아직 때가 아니라 보고 있었다.
사이보그는 김태호의 숨겨둔 패와 같았다. 사이보그의 움직임은 요괴에 뒤처지지 않았다. 그리고 사이보그의 시력은 그런 움직임을 놓치지 않았다.
김태호는 마왕이 완전히 부활해 인류를 말살시킨다면 마지막으로 죽을 사람은 노인이기를 바랐다. 자신이 가장 아끼고 사랑하고 존경하는 사람이니 오래 살기를 바랐고 그러기 위해 노인이 힘을 갖고 있기를 바랐다. 이번 실험은 사이보그 병사들의 테스트가 아니라 노인이 다수의 요괴와 싸워 이길 수 있는가를 보고 문제점을 알아보기 위한 실험이었다. 물론 이것을 아는 것은 김태호밖에 없었다. 이 실험과 관련된 모든 사람이 사이보그 병사들을 테스트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노인은 길을 따라 걸으며 마을 안으로 들어갔다.
2,3층 건물들이 대부분인 소도시라고 할 수 있었다. 이런 형식의 도시에 노인은 아주 익숙했다. 가상현실 게임인 ‘패자의시대’ 속에 나오는 많은 도시가 이런 구조였다. 게임 속에서 노인은 시가전을 벌일 때 도로보다는 지붕 위를 뛰어다녔다. 노인은 게임 속의 자신과 현실 속의 자신의 공통점을 빠르게 정리했다. 현실에서 게임 속 캐릭터의 능력을 갖춘 몸을 가지고 있으니 현실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일상생활을 하는 것이라면 이렇게 느끼지 않았겠지만 지금 상황은 실제 전투 상황이지 않은가. 빨리 게임 속의 자신과 현실 속의 자신을 일체화시킬 필요를 느끼고 있었다.
박성범 중사는 사이보그가 된 자신의 몸이 놀라웠다. 원래 자신의 몸이었던 것처럼 완벽히 통제되었다. 감각은 훨씬 더 발달해 있었고 통증은 없었다. 감각은 있으나 통증이 없다는 것이 무엇보다 신기했다. 이대로 전장에 나간다면 무기가 따로 필요 없었다. 사이보그가 돌멩이를 던지면 그것이 어지간한 총탄보다 위력이 좋았다. 명중률 역시 절대 떨어지지 않았다. 손에 잡히는 모든 것이 무기가 될 수 있었고. 두 다리가 그 무엇보다도 더 훌륭한 이동 수단이 되었다.
‘이건 완벽한 몸이야.’
박성범 중사는 동료 사이보그들과 많은 훈련을 했다. 오늘은 실제와 똑같은 세트에서 실전 전투 훈련을 하는 첫날이었다. 많이 기대되고 흥분되었다.
그동안 같이 훈련했던 동료 사이보그들이 아닌 다른 사이보그가 투입되니 확실하게 눌러버려 우리 부대가 최고의 사이보그 부대라는 것을 증명하라는 특별 지시를 받았다.
박성범 중사가 한 건물의 2층 창가에 서서 밖을 내다봤다. 피부까지 완벽하게 갖춘 사이보그 하나가 마을 안으로 걸어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아마 피부를 씌우고 안 씌우고의 차이로 아군과 적군을 구별할 생각인가 보군.’
박성범 중사가 속한 부대의 사이보그들은 모두 인공 피부를 쓰고 있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보기에도 딱 사이보그처럼 보였다. 그런데 지금 밖에서 돌아다니고 있는 사이보그는 완벽한 인공 피부로 보통 사람과 전혀 구분이 안 되었다.
상대도 무기는 들고 있지 않았다. 간도 크게 마을 중심 도로의 인도를 따라 민간인 복장을 한 남자가 천천히 걸어들어오고 있었다.
‘대단한 자신감이군. 대놓고 그냥 걸어 들어오네.’
남자가 박성범이 있는 건물 앞을 지나고 있었다. 남자가 갑자기 이곳을 향해 고개를 돌린다.
‘뭐야, 들킨 거야?’
그러나 남자는 고개만 돌려 보았을 뿐 이내 가던 길을 계속 갔다.
남자는 등을 보이고 계속 걸어갔다. 박성범 중사는 자신이 머물고 있던 곳에서 슬슬 빠져나왔다.
풀사이보그의 시력은 현재 시대의 병사들이 사용하는 전자 망원경으로 사물을 보는 것과 같다. 먼 거리를 보는 능력뿐만 아니라 사물에 대한 정보와 어둠 속에서 보는 야시경 기능, 그리고 열 감지 기능까지 갖고 있었다. 청력 또한 인간의 한계를 벗어나 있었고 특히 선택한 곳만 집중적으로 청력을 올릴 수 있어서 도청 능력도 있었다.
노인은 감각을 세워 자신의 주변에 대해 레이더로 감지하듯 감지하고 있었다. 건물 안에 사이보그가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이 사이보그가 자신을 공격하지 않으면 내버려 둘 생각이었다.
저쪽 끝으로만 가면 된다니 안 싸우고 갈 수 있으면 안 싸우고 가려고 했다. 게임 속의 자신 캐릭터처럼 은신 기능이 없다는 게 많이 아쉬웠다.
‘역시 싸우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구나.’
상대방도 사이보그라면 서로 보지 않아도 감지할 터였다.
노인은 뒤에서 사이보그가 따라오는 것을 알고 망설였다. 적이라 할 수 있는 상대가 그렇게 적극적이지 않았다. 그리고 마음을 결정했다.
노인은 뛰었다. 뒤따르던 적도 같이 뛰는 게 느껴졌다. 노인은 오른쪽 2층 건물 위로 뛰어 올라가 건물 위를 깡충깡충 뛰며 달렸다. 이 실험장의 도시 세트는 생각보다 거대했고 높은 건물이 없어 건물 위를 달리는데 어렵지 않았다.
노인과 뒤따르던 적과의 거리가 서서히 좁혀지고 있었다. 노인은 앞쪽에 다른 건물들과 다른 4층짜리 건물의 옥상이 아닌 건물 안으로 뛰어들었다. 사이보그인 노인의 몸이 벽을 뚫고 들어갔다. 벽을 뚫고 건물 안으로 들어감으로써 시야를 통한 다른 감지 기능을 무효화시켰다.
청각에 의존하며 박성범이 앞선 노인이 뚫은 구멍으로 몸을 날렸다. 먼지와 각종 기자재와 파편이 날리며 앞을 볼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소리로 앞쪽의 벽이 부서지는 것을 들을 수 있었다. 벽을 뚫고 달리는 사람보다 뚫어놓은 길을 달리는 사람이 더 빠른 법이다. 거리가 순식간에 좁혀졌다.
노인은 마지막 남은 앞쪽의 벽을 부수지 않고 몸을 날려 두 발로 밟고 그 반동을 이용해 뒤로 쏘아지듯 날아갔다. 노인의 오른 주먹이 뒤따르고 있던 박성범의 얼굴에 그대로 맞았다.
“빵”
쇠와 쇠가 부딪히는 거대한 소리와 함께 박성범이 뒤로 날아갔다. 노인이 재차 공격하기 위해 박성범에게 달려갔을 때 박성범은 기절해 있었다.
‘뇌를 장갑이 보호할 수 있을까?’
보기에 머리가 부서지거나 찌그러져 있지는 않았지만, 충격으로 속의 뇌가 죽은 건 아닌지 의심스러웠다. 노인은 괜찮을 거라 자위하면서 박성범의 양쪽 발목을 비틀어 뜯어냈다. 정신을 차리더라도 자신을 쫓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노인은 건물 밖으로 나와 달렸다. 사이보그의 감지 능력을 피할 수 없을 것이고 빨리 이 시험을 마치고 싶었다.
“죽었습니다.”
“그렇군.”
김태호는 무덤덤하게 대답했다. 사이보그 간의 싸움에서 목숨이 온전하리라고는 애초에 생각하지 않았다. 사이보그의 장갑은 특수 합금이다. 미사일을 맞는다고 해도 뚫리지 않는다. 관절이나 이음새가 떨어져 나가지 장갑 자체는 파손되지 않았다. 그런데 몸속의 인공 장기들이나 특히 뇌가 받는 충격은 어쩔 수 없었다. 총탄의 충격으로 뇌가 파손되지는 않지만, 로켓탄 정도를 머리에 맞게 되면 속의 뇌가 그 충격으로 으깨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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