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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승의 왕과 붉은 무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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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업이
작품등록일 :
2022.11.12 03:01
최근연재일 :
2022.12.28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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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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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140,6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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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2.21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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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쪽

5절 - 수도 테오티우아칸 (3)

DUMMY

용사의 발언에 가장 먼저 반응한 것은 자하크였다.



폭음과 함께 바닥에 금이 가면서.

용인은 우르크에게 다가가 그를 내려다보았다.



“용사 우르크.


귀공의 언동이 문제가 많다고는 하나,

이를 받아들이는 데도 한계가 있소. ”



“왜? 딱히 틀린 말은 하지 않았다고 보는데.

그렇잖아?”



주변을 둘러보는 용사에게 답하는 이들은 없다.


그러나 그 분위기만으로,

답은 이미 정해져 있는 거나 다름없었다.



문관들은 헛기침과 함께 눈치를 살피면서도.

용의 기사만큼 반발하는 기색이 없이.


각종 대신들, 친위대인 기사,

심지어는 늙은 왕까지도 방금의 그 발언을 나무라지 않는다.



그 무언이 말하는 것이다.

‘방금의 말도 일리가 있는 게 아닌가’하고.



“그런...! 나오미님이 이 건과 무슨 관계가 있단 말인가!



그분은 무녀 후보자라고는 하나, 이렇다 할 힘은 없어!

그렇기에 거의 추방이나 다름없는 대우로 왕궁에서 내쫓았지 않았나!”



몇 년도 더 전에,

나오미라는 소녀는 바깥으로 내쫓겼다.



그녀의 의지를 존중한다는 명목이었으나,

그 뒤쪽에 깔린 멸시와 경멸을 용인은 확실히 알고 있었다.



한 명을 ‘재앙의 근원’이라 낙인찍어,

철저히 짓밟는 풍조가 낳은 결과.



그로 인해,

온갖 모욕과 함께 내쫓기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거늘.



그때와 같은 일이 일어나려 하자,

자하크는 평소보다 목소리를 높여 호소했다.



“듣기로 그분은 여느 시민들이나 다름없이 지냈다고 들었다!


정치나 무녀의 수행에 관여하는 일 없이,

어디까지나 평범히 학업에 힘쓰고 다녔다고!


그런 그분이---”



“그건 아니지.

그런 건 전혀 중요한 게 아니란 걸 아직도 모르겠어?”



자하크의 말을 끊어 버리면서,

용사는 한껏 팔을 펼쳐 보였다.



미남이라 부를 외모에 걸맞은 상쾌한 미소를 보이며,

청년은 알현실에 있는 이들을 둘러보았다.



“직접적인 원인? 실제로 그랬다는 증거?

그딴 게 뭐가 중요한 건데?


자하크.

너도 용의 민족이란 이유로 여러모로 차별을 당해 봐서 알잖아?


벼락의 기사까지 되었는데도 그 취급이라고.

그럼 어지간히 이해해야지.”



문관들이 불편한 기색을 보이며 눈을 피하나,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자하크는 주먹을 꽉 쥔 채로 용사를 내려다보고.

용사는 그런 그를 올려다보며 속삭이듯이 단언했다.



“알겠어? 세상에는 말이야.

그냥 살아 있단 것만으로 ‘죄’가 되는 녀석은 있는 법이라고.”



“!!”



용인의 주둥이가 일그러지면서 송곳니가 드러난다.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우르크는 한껏 크게 웃어젖혔다.



“역사를 보라고, 자하크!

역대 무녀 후보자는 한 명인 경우가 대부분!


그 와중에 눈치 없이 여자애를 두 명이나 낳아서,

후보자가 2명이 된 경우는 무슨 일이 일어났지? 응?”



주변에서 이렇다 하는 제지가 들어오는 일 없이,

청년의 말은 계속해서 이어진다.



모든 이가 용사의 말에 귀 기울이면서.

우르크는 손가락으로 자기 이마를 톡톡 두드렸다.



“으음~ 분명 처음에는 그거였지?



동생 년이 언니를 시기해서 쳐 죽여 버리고,

그대로 정복 전쟁을 걸었다가 쫄딱 망했던가.



그 여파로 무녀가 탄생하지 않는 ‘재의 시대’를 불러일으켰잖아?

그걸로 대륙 전체가 망할 뻔했지 않았던가?”



“그건---”



“그리고 또 그거야.

몇백 년인가 전에도 자매가 태어났다면서.


그때는 바다의 민족이 반란을 일으켰지?

동생 쪽이 정통성 있는 무녀라고 주장하면서 언니를 죽이려고.

그 여파로 각종 재앙도 더 확대되고 말이야.”



자하크는 마땅히 반박할 말을 찾지 못했다.

그것들은 틀림없이 실제로 일어났던 일들이기에.



용인은 이빨을 갈면서,

한 여성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이 불편하기 짝이 없는 화제의 주인공이기도 한 무녀.

베아트리스는 이 와중에도 침묵을 고수하고 있었다.




“자아.

그리고 지금, 이렇게 또다시 자매가 태어났는데...


어이쿠 이게 왠 걸?

이제는 생판 듣도 보도 못한 새로운 재앙이 나타났네?


이게 우연일까?

사악한 신들이 준비한 함정이 아닐까?”



“---확실히.

전례로 미루어 봤을 때.

이렇게 되풀이되는 인과 또한 악신이 무녀에게 건 저주일지도 모르겠구나.”



“폐하!?”



노쇠한 왕이 중얼거린 한 마디에,

자하크가 다급하게 옥좌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이미 걷잡을 수 없는 노릇이었다.



왕의 한 마디는 이 자리에 모인 이들이 생각했던 말인 듯.

이곳저곳에서 문관들이 수군거리며 동조하기 시작했다.



‘용사의 태도는 어쨌든, 말 자체는 맞는 거 같기도...’



‘무녀는 대대손손 한 명에게 계승되는 게 정상이었으니,

자매가 태어날 때마다 이런 일이 일어나는 건 저주인 게?’



“역시 그 여자는 일찌감치 죽여 버리는 게 옳았구려.

무녀의 자식인데도 무능했던 건,

악신이 준비한 재앙이었다고 생각하면 납득가지.”



“지금이라도 늦지 않은 게 아닌지?

얼른 녀석을 찾아내 처형시키면 베라른의 재앙도 사그라들지 모르오.”



처음에는 자그마한 속닥거림이었으나,

차츰 소리가 커지며 이윽고 거리낌 없는 발언으로 변해간다.



의심과 불안이 확신과 동조로 바뀌어 가는 것이다.



자하크가 당황하며,

베아트리스는 조용히 눈을 감고 있는 가운데.



우르크는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참으려 애를 쓰며,

쐐기를 박듯이 두 팔을 활짝 펼쳤다.



“자아!

그럼, 여기서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 보자고!


그래서? 그 나오미란 년은 어디로 갔지?

내 기억이 맞다면 최근 한 달간 행방을 알 수 없다 하지 않았나?!


이봐, 이건 어떻게 된 거냐고!”



“그건 혹시---!”



“역시 그런 거였군!

그 여자가 베라른의 재앙을 불러일으킨 앞잡이인 게요!”



“숭고한 무녀의 아이로 태어났으면서 어찌 잔악무도한...!

역시 천한 아비의 출신은 못 속이는가!”



더 이상 목소리를 숨기려 들지도 않았다.


갑작스러운 위기에 대해 명확한 원인을 알지 못한 채,

공포에 떨고 있던 것이다.


혐오감과 멸시를 자극하는 ‘이유’가 나타나자,

문관들은 일제히 이를 맹신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옳다고.




그것이 틀림없다고.





정당성과 논리를 따지는 것에 앞서,

우선 무조건 믿는 것부터 시작한다.



(바보 같은...!

그런 허무맹랑한 궤변이 옳을 리가 있나...!


그 아이는 아무런 힘도 없어.

재앙의 원인이 될 리 없단 건 조금만 생각하면 명확한 것을...!)



‘찾아내서 죽여야 한다’는 광기 어린 고함 소리가 커지며,

자하크는 재차 베아트리스를 보았다.



은발의 무녀는 여전히 눈을 감은 채 침묵하고 있었다.


동생의 처형이 진지하게 현실화되어가는 와중에서도,

여전히 말을 아끼는 무녀.



그런 그녀를 향해,

우르크가 싱글벙글거리며 다가 갔다.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우리의 고귀하신 무녀님.

댁이야말로 틀림없는 천명의 무녀야.


애초에 정통적인 혈통을 가진 그쪽과 달리,

그 년은 천민의 씨를 받아 태어난 동생이잖아?


어때?

세상을 지키는 천명의 무녀로서,

직접 그 사악한 앞잡이를 단죄하는 건?”



“...!! 네놈!!”



참다못한 자하크가 바닥에 내려놓았던 대검을 쥐어 들었다.


그에 반응해,

우르크도 허리춤에 매어둔 성검을 뽑아 든 순간.








“조용히.”







“!!!”



단 한 마디.



무녀가 입술을 움직여 자아낸 말과 함께,

순식간에 알현실의 공기가 가라앉았다.




공기 자체가 무거워진 듯.


또는 밑에서 끌어당기는 중력이 강해진 듯.



우르크와 자하크,

양쪽 다 강제로 한쪽 무릎을 꿇으면서.



소란을 피우던 문관들이 일제히 개구리처럼 바닥에 엎어져 버렸다.



“소란스럽군요.


이곳은 미래를 논하는 회의의 장.



의견을 제시하는 건 용인하였으나,

탈선시키는 건 허락할 수 없습니다.


용사 우르크.”



“이...씨발 년이...!!”



상쾌한 쾌남과 같던 표정이 일그러지면서,

용사인 청년은 살기 어린 눈빛으로 무녀를 올려다보았다.



무표정.



처음부터 끝까지 표정 하나 변하지 않으며,

은발의 무녀는 어디까지나 침착하게 말을 자아낸다.



“당신도 마찬가지입니다, 자하크.


‘벼락의 기사’는 용신의 저주를 축복으로 바꾸어낸 결의와 노력이 자아낸 칭호.

그 상징으로서 당신은 언제나 냉정함과 굳건함을 유지하여야 할 테지요.


격정에 휩싸이는 것 자체가 대륙 전체의 손실임을 잊지 마시길.”



“...뭐라 드릴 말이 없습니다.”



치욕으로 몸을 떠는 용사와 달리,

용의 기사는 무녀를 향해 고개를 숙여 예를 갖추었다.



그 외에 다른 문관들은 입조차 열기 어려운 듯,

바닥에 엎어져 입에서 침과 신음만 흘리는 가운데.



은발의 무녀는 유일하게 ‘근원’을 걸지 않아,

공포에 떠는 왕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무녀 후보자 나오미에 대한 의혹은 잘 알겠습니다.


폐하께서도 그에 동의하시는 걸로 이해했습니다만,

제가 잘못 받아들인 걸까요?”



“그, 그건---”



"솔직하게 받아들이는 게 좋아 보이는데요, 폐하."




제3의 목소리에 모든 이들의 시선이 문으로 향했다.



알현실의 정문에는,

흰 로브를 입은 신관 2명과 이를 거느린 인물이 한 명.



성인 키의 반에도 안 미칠만큼 자그마한 소년이었다.



“오오...! 카토르 교황, 와주었구려!

어찌 이리 늦었는가...!”



‘교황’이라 불린 앳된 소년은 싱긋 웃어 보였다.


어린이용으로 맞춰진 새하얀 예복과 밝은 금발 머리까지.

얼핏 인형처럼 보일만 한 미소년이었다.



“실례했습니다.

원로원과 하는 회의가 워낙 길어진 탓에.


그보다 정령여왕님께서는 오시지 않은 모양이네요?

모처럼이니 함께 저녁 식사라도 어떨까 했는데, 아쉬워라...”



아이 특유의 볼살이 남아 있는 볼을 손가락으로 톡톡 두들기면서,

소년 교황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 태연자약한 태도에 왕은 얼떨떨한 표정을 짓고,

우르크는 눈가를 찌푸렸다.



두 명의 용자가 무릎 꿇고,

신하들이 모조리 꼴사납게 엎어져 고통스러워하는 것이다.



이를 보고 전혀 놀라는 기색 없이,

태연히 웃어 보이는 소년 교황을 향해.


우르크는 이빨을 드러내며 침을 뱉었다.



“기분 나쁜 새끼가 한 마리 더 추가됐나...


거참...!

이 나라의 녀석들은 죄다 마음에 안 든다니깐...!”



“신음을 흘리면서 웃는 우르크 형에게 듣고 싶지는 않네요.


무녀님은 저희 교회의 상징이기도 하니,

그런 고도의 플레이는 자제해주셨으면 좋겠어요.


그도 아니면,

다른 이들에게 보여져야 흥분하는 성벽이라도 있으신 건가요?”



“좀 닥쳐라, 변태 새끼야...!


안 그래도 지금 기분 존나 개 같으니까...! 흡!”



작은 기합과 함께 우르크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보이지 않는 압박을 풀어내고 일어서자.


베아트리스의 눈썹이 살짝 위로 올라가면서,

카토르 교황이 박수를 쳤다.




“오오! 대단해요!

역시 위대하신 ‘용사 우르크’의 칭호를 이으신 분!


이거라면 중앙정원에 나타난 이들에 대한 대처도 문제 없겠는걸요?”




아이 마냥 기뻐하는 교황을 보고,

우르크가 욕설을 지껄일 때였다.


베아트리스가 교황을 향해 질문했다.



“카토르 교황.

중앙정원에 나타난 이들이란 무슨 소리지요.


왕궁에 침입자라도 생긴 건지?”



“아아... 그러네요.

침입자라고 해야 할까요?


아무래도 또 다른 무녀 후보자이신,

나오미 양이 방문하신 모양이라.”



“뭣!?”



우르크와 자하크가 동시에 당황하면서,

베아트리스의 얼굴이 굳어졌다.



발언을 못할지언정,

알현실에 엎어져 있는 모든 신하들이 경악하는 와중.



자그마한 소년 교황은,

그런 그들의 반응을 즐기듯 싱글벙글거리며 고했다.



“지금 한창 짐승병에 걸린 환자분과 함께 잔뜩 날뛰고 있답니다!


여러분은 나오미 양을 의심하시는 모양이니,

기쁘다면야 기쁜 소식일지도 모르겠군요!”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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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5절 - 수도 테오티우아칸 (5) 22.12.25 10 1 15쪽
23 5절 - 수도 테오티우아칸 (4) 22.12.23 13 1 12쪽
» 5절 - 수도 테오티우아칸 (3) 22.12.21 10 1 12쪽
21 5절 - 수도 테오티우아칸 (2) 22.12.19 9 1 10쪽
20 5절 - 수도 테오티우아칸 (1) 22.12.18 10 1 11쪽
19 4절 - 방어전 : 베라른 (7) 22.12.16 10 1 10쪽
18 4절 - 방어전 : 베라른 (6) 22.12.14 11 1 8쪽
17 4절 - 방어전 : 베라른 (5) 22.12.12 10 1 14쪽
16 4절 - 방어전 : 베라른 (4) 22.12.11 15 1 13쪽
15 4절 - 방어전 : 베라른 (3) 22.12.07 9 1 11쪽
14 4절 - 방어전 : 베라른 (2) 22.12.05 10 1 11쪽
13 4절 - 방어전 : 베라른 (1) 22.12.04 9 1 9쪽
12 3절 - 동화의 끝 (4) 22.12.02 10 1 13쪽
11 3절 - 동화의 끝 (3) 22.11.30 9 1 16쪽
10 3절 - 동화의 끝 (2) 22.11.28 9 1 13쪽
9 3절 - 동화의 끝 (1) 22.11.27 12 1 12쪽
8 2절 - 요정 사냥 (4) 22.11.25 9 1 16쪽
7 2절 - 요정 사냥 (3) 22.11.21 12 1 11쪽
6 2절 - 요정 사냥 (2) 22.11.20 12 1 16쪽
5 2절 - 요정 사냥 (1) 22.11.18 16 1 14쪽
4 1절 - 천명의 무녀(3) 22.11.16 15 2 13쪽
3 1절 - 천명의 무녀(2) 22.11.14 20 2 12쪽
2 1절 - 천명의 무녀(1) 22.11.14 24 3 14쪽
1 프롤로그 22.11.14 47 3 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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