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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승의 왕과 붉은 무녀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라이트노벨

영업이
작품등록일 :
2022.11.12 03:01
최근연재일 :
2022.12.28 20:05
연재수 :
26 회
조회수 :
339
추천수 :
30
글자수 :
140,646

작성
22.12.16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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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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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0쪽

4절 - 방어전 : 베라른 (7)

DUMMY

“그러냐. 아렌하고는 만나지 못했다고.”


“네...가능하면 함께 싸우고 싶었지만...”



불타는 마을을 뒤로한 채,

짐승과 소녀는 불길이 닿지 않는 숲속을 거닐었다.



렉스의 품에 안겨 있는 나오미는 눈을 질끈 감았으나,

짐승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아쉬워할 필요가 어디 있냐.

아렌은 실력자였다.

마을이 초토화된 상황에서 요정의 대다수를 데리고 피난시켰지.



녀석은 자기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고,

그 뒤를 쫓은 너나 나도 각자가 할 수 있는 일을 다 했다.



단지 그뿐인 거야.”



기습이나 다름없는 공세에 대항하여.

금발의 무녀는 다수의 요정들을 데리고 피신했다.



렉스는 인간들의 본대가 숲을 장악하는 걸 막았으며,

나오미는 대정령을 완전히 없애려던 인간들을 저지해냈다.



비록 마을은 초토화되어,

수많은 희생을 낳았다 하더라도.


분명히 구해 낸 목숨은 있는 것이다.



“그럼 분해할 필요는 없지.

여기까지 해낸 걸로도 충분해.


특히 넌 더럽게 약해빠졌으니까.

용케 버텼다.”



“하지만...아렌씨하고는 제대로 인사를 못 해서...”



“확실히. 그건 좀 찝찝하군.”



나오미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리자,

렉스는 담담하게 긍정했다.



그 말을 듣고,

나오미는 화들짝 놀라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여느 때와 다를 바 없이 무뚝뚝한,

밤의 어둠과 뒤섞여 으스스하게 보이는 사자의 얼굴.



항상 이쪽이 무슨 말을 해도 시큰둥하게 반응하던 옆모습이,

지금은 무척이나 평온하게 보여서.



“사자---렉스씨, 뭔가 상냥해졌네요.”



본심으로부터 우러나오는 감상이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짐승은 잠시 눈을 휘둥그레 뜨더니,

이내 평소와 다름없이 눈가를 찌푸려보였다.



“개소리 마. 난 원래 이랬다.

네놈이나 그 여자나,

나한테 있어선 별 볼일 없던 타인이라 신경을 안 썼던 것뿐이지.”



“타인... 그럼 지금은요?”



“지금은---”



약간 상기된 얼굴로 묻는 나오미의 물음에,

렉스는 미간을 모아 골똘히 생각하고서.



천천히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이름 정도는 기억하게 됐군.

그것뿐이다만.”



처음으로 ‘칵칵’ 입을 벌려 웃는 짐승을 보고,

만신창이인 소녀 또한 따라 웃었다.



이 사람이 기억하게 된 건,

‘그녀’만이 아니구나하고 알게 되어서.



마음 한구석으로 안도하며,

지쳐 있는 몸에 온기가 돌아온다.



“...아렌씨하고 다시 만날 수 있을까요.”


“글쎄다.

냄새로 쫓고 싶다만 숲의 반절이 타고 있으니 그것도 어렵군.


뭐...저 녀석에게 물어보면 되겠지.”



묵묵히 밤의 숲을 거닐던 렉스는,

그 자리에 도달해 발을 멈추었다.



숲이 대규모 화재에 뒤덮여 있는 와중,

이곳에 불길이 닿지 않는 건 숲의 주인인 '존재'의 위광 덕분일까.


그도 아니면 그 압도적인 크기 탓에,

미처 불의 손길이 닿기에는 시간이 걸릴 뿐일까.



진상이 무엇이든,

3주 만에 찾아온 장소는 처음 왔을 때하고는 인상이 뒤바뀌어 있었다.



[---와주었군요. 시조의 아이.

그리고 그녀를 지키는 등지기여.]



“오냐. 네놈은---꽤 시들었군.

당장에라도 말라 뒤질 것 같잖나. 그 인간들 탓인가.”



렉스는 대수롭지 않게 말하나,

그 눈은 적의에 가득 찼던 3주 전과 달리 연민으로 얼룩져 있다.



품에 안겨 있는 나오미도,

너무나 달라진 대정령의 거목을 보고 차마 말을 잇지 못하면서.



모조리 썩어 문드러진 나무들 사이로,

나홀로 서 있는 거목은 미세하게 흔들렸다.


바람은 전혀 불지 않았음에도.

풀잎 하나 남지 않는 나뭇가지가 흔들리는 모습은,


마치 나무 그 자체가 고개를 끄덕인 것처럼 보였다.



[필연이지요.

본래 제 수명은 아득히 먼 옛날에 끝나 있었습니다.


그저 새로운 천명의 아이를 위해 물러나야 할 자리에 억지로 머물러있었을 뿐.

그러한 억지도,

신의 흔적을 사용한 인간들에 의해 부릴 수 없게 되었습니다만.]



“그런...!

대정령님이 여기서 사라져 버린다면, 이 숲은...!”



[네. 이 베라른은 멸망할 테지요.

조용히, 시간이 지남에 따라 서서히.


후계를 이을 요정도.

이를 유지할 무녀도 없게 된 숲은 황야로 변해갈 터입니다.


하지만 그건 당신이 염려할 일이 아니랍니다, 상냥한 아이.]



품속에서 털을 움켜잡은 나오미의 손에 더욱 힘이 가해지면서,

그런 그녀를 짐승은 묵묵히 내려다보았다.




당장에라도 울어버릴 것만 같은 표정.



[...자아, 이것을.

당신들에게 이걸 건네주기 위해 억지로 깨어 있었습니다.


부디 받아주시지요.

당신들은 이걸 받을 자격이 있습니다.]



“이건...”



“횃불인가?”



거목으로부터 한 줄기의 나뭇가지가 내려와

한쪽 끝에 새하얀 불꽃이 일어났다.



하얀 불꽃은 나뭇가지를 황금빛으로 칠하면서,

바람결에 나풀거리며 나오미의 품속으로 날아들었다.



[그 증표야말로 당신에 대한 신뢰의 증거.

당신을 '후계자'로서 인정한다는 뜻입니다.


시조의 아이, 현재를 살아가는 소녀여.]



“그런...! 그건---!”



[자격이 없다고는 말하지 마세요.

당신이 무엇을 번민하고, 고뇌하는지는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모든 걸 감안 해,

이 숲을 대표해서 말하지요.


---나오미. 당신을 인정하겠습니다.

요정들을 사랑하고, 숲을 아끼었던,


무엇보다도 제 자식인 무녀와 어울려주었던 당신은 충분히 그러한 자격이 있다고.

설사 당신 자신이 그 사실을 부정하고, 깎아내지른다 하더라도.]



대정령과 소녀가 무슨 이야기하는 건지,

렉스로서는 알 도리가 없었다.



다만 둘의 표정과 목소리.

그리고 감정이 실린 냄새로 미루어보았을 때.



숲의 대표자는 눈앞에 소녀를,

마음속 깊이 인정하고 있다고 느꼈다.



정작 당사자인 소녀는 혼란과 당혹에 빠져,

새하얀 횃불과 거목을 번갈아 바라볼 뿐이지만.



[...그리고 당신에게는 사과하게 해주십시오, 등지기여.]



“음?”



나오미를 내려다보던 렉스는,

화제가 자신에게로 향하자 고개를 갸웃했다.



[이런 식으로 밖에 당신을 위로하지 못 하는 무력함을 달래고자,

당신을 위해서라는 명목으로 무례한 말을 범하고 말았습니다.


그로 인해 당신이 격정한 것도 당연할 테지요.

숲을 위하여 헌신해준 그 관대함에 답하지 못함이 유일한 미련이로군요.]



“그딴 건 필요 없어.

네놈한테 뭔가 받아도 내 기분만 잡칠 뿐이니까.


그것보다 아렌은 어디 갔나.

네놈이라면 알 거 같아서 왔다만.”



바람이 일었다.


저 멀리서 마을이 불타오르고 있단 걸 느끼게 만드는 뜨거운 바람이.



재와 살이 짓이겨지는 냄새를 풍기며 북쪽으로,

더욱더 북쪽으로 새로운 공기를 맞이해 뒤바뀌어 가는 바람.




거목을 이루고 있는

나무껍질과 나뭇가지들이 우수수 공중으로 흩뿌려지면서.


숲을 지탱해 오던 거목은,

마지막으로 커다란 한숨을 토해내듯이 크게 흔들렸다.



[이미 이곳에서의 여로는 끝났습니다.

남은 건 길고 긴 탐색을 위한 순례가 이어질 뿐.


2대째 무녀, 아렌니우스와의 이야기는 여기가 끝인 겁니다.]



“...!”



[부디 당신들의 발걸음이 마지막 순간까지 힘차기를.



비록 과거의 허상에 불과하다 할지라도,

내 아이와 친구가 되어 준 미래의 아이들에게 축복이 있기를.




이 기록의 파수꾼으로서 절실히 기원하는바입니다.]



“잠깐...!”



렉스가 다급하게 입을 열었으나,

이미 그 또한 알고 있었다.






거목에서 더는 생기가 느껴지지 않는 것이다.




나뭇가지가 으스러져,

곳곳의 껍질이 떨어져 나가면서.




은빛으로 빛나는 밤하늘을 배경으로,

몇천 년을 지탱해온 숲의 상징은 숨을 거두어갔다.



그 뒤에 남은 건.



죽어 버린 나무를 앞에 두고.

망연자실하게 서 있는 짐승과 그 품에 안긴 소녀뿐.



“왜들 그렇게 멍때리고 있어?

이걸로 이 기록은 끝.


짧고도 긴 추체험을 끝냈으니,

달성감으로 기뻐해야 할 장면이라 생각하는데.”



렉스의 몸이 절로 소리가 들린 방향을 향해 돌려졌다.




황금빛 동공이 가늘어져,

위협적으로 으르렁거리면서.



그런 그와 마찬가지인 심정으로,

나오미 또한 잔뜩 긴장하며 소리가 들린 쪽을 바라보았다.





숲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이는 한 명의 청년이었다.




허리까지 내려오는 새하얀 백발.

어딘가 요사스럽게 느껴지는 초록빛 눈동자.






하얀 로브로 호리호리한 몸을 두르고 있는 청년은,

사뿐사뿐 썩은 나뭇가지를 밟으며 밝게 웃어 보였다.



“안녕~! 이렇게 직접 얼굴을 마주하는 건 처음이려나?

그쪽의 멍멍이 씨하고는 믹틀란에서 자주 보긴 했는데.”



“당신은...”



환하게 웃어 보이는 새하얀 청년을 보고,

나오미는 아연실색했다.




청년을 보고 노골적으로 불쾌한 표정을 짓는 짐승과 달리,

그녀는 갑작스러운 사태를 이해하지 못해 혼란스러워하며.



그런 그녀의 심정을 눈치챈 듯,

한창 싱글벙글거리던 청년은 멋쩍게 볼을 긁적였다.



“어라, 역시 한번 말을 건 정도로는 누군지 기억을 못 하나.

뭐, 그렇긴 하지.



창에 마구 찔려서 비몽사몽할 때,

두 마디 정도 말을 건 것뿐이니.”



그 말을 듣고 소녀는 숨을 들이켰다.




3주 전.

요정 사냥꾼들에 의해 죽기 직전까지 갔을 때.


지금 저 청년과 같은 목소리를 들었던 걸 떠올렸다.




“내 이름은 나우갈.



응. 사실 진짜 이름은 아니고,

죽어 버린 얘들 중에 적당히 느낌 있는 걸 고른 거지만.

부디 그리 불러줬음 해.



나도 마음 편하게 나오미랑 렉스라고 부를 테니까.

아아, 그도 아니면 역시---”



거기서 순백의 청년,

나우갈은 슬며시 말을 낮추었다.



친근하면서도 살갑게,

그러면서도 거리감이 뒤섞인 미소를 띄우며.



청년은 사근사근한 목소리로 말을 건다.



“격식을 차려서 이렇게 부르는 편이 좋을까?

14대째 천 명의 무녀님?”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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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6절 - 재앙과 영웅 (2) 22.12.28 6 0 13쪽
25 6절 - 재앙과 영웅 (1) 22.12.26 7 0 7쪽
24 5절 - 수도 테오티우아칸 (5) 22.12.25 11 1 15쪽
23 5절 - 수도 테오티우아칸 (4) 22.12.23 13 1 12쪽
22 5절 - 수도 테오티우아칸 (3) 22.12.21 10 1 12쪽
21 5절 - 수도 테오티우아칸 (2) 22.12.19 10 1 10쪽
20 5절 - 수도 테오티우아칸 (1) 22.12.18 10 1 11쪽
» 4절 - 방어전 : 베라른 (7) 22.12.16 11 1 10쪽
18 4절 - 방어전 : 베라른 (6) 22.12.14 11 1 8쪽
17 4절 - 방어전 : 베라른 (5) 22.12.12 10 1 14쪽
16 4절 - 방어전 : 베라른 (4) 22.12.11 15 1 13쪽
15 4절 - 방어전 : 베라른 (3) 22.12.07 10 1 11쪽
14 4절 - 방어전 : 베라른 (2) 22.12.05 10 1 11쪽
13 4절 - 방어전 : 베라른 (1) 22.12.04 9 1 9쪽
12 3절 - 동화의 끝 (4) 22.12.02 10 1 13쪽
11 3절 - 동화의 끝 (3) 22.11.30 9 1 16쪽
10 3절 - 동화의 끝 (2) 22.11.28 10 1 13쪽
9 3절 - 동화의 끝 (1) 22.11.27 12 1 12쪽
8 2절 - 요정 사냥 (4) 22.11.25 10 1 16쪽
7 2절 - 요정 사냥 (3) 22.11.21 12 1 11쪽
6 2절 - 요정 사냥 (2) 22.11.20 12 1 16쪽
5 2절 - 요정 사냥 (1) 22.11.18 16 1 14쪽
4 1절 - 천명의 무녀(3) 22.11.16 15 2 13쪽
3 1절 - 천명의 무녀(2) 22.11.14 20 2 12쪽
2 1절 - 천명의 무녀(1) 22.11.14 24 3 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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