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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승의 왕과 붉은 무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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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업이
작품등록일 :
2022.11.12 03:01
최근연재일 :
2022.12.28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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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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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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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글자수 :
140,6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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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1.27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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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쪽

3절 - 동화의 끝 (1)

DUMMY

“나오미씨, 정말 괜찮아요?

아까부터 안색이 좋지 않은데.”


“지, 진짜 괜찮아요!

상처도 아렌씨 덕분에 거의 아물었고...!”



요정 사냥꾼들과의 교전으로부터 약 3시간 후.



간신히 살려낸 요정들을 마을로 옮긴 뒤,

짐승과 나오미는 아렌을 따라 숲의 안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혹시나 따로 원하는 건 없나요?

살아남은 얘들한테 나오미씨가 어떻게 싸웠는지 다 들었으니까요.


요정들을 위해 그리 힘써 주셨으니 뭔가 따로 답례라도---”



“아뇨, 아뇨! 대정령님께 소개해주신단 것만으로 얼마나 감사한데요!

제가 살던 시대는 살아계신 분이 워낙 적으셔서...!"



“저희 시대?”



“아, 그러니까 그게---”


앞장서서 걸으면서 대화하는 두 여성을 뒤따르며,

검은 짐승은 눈을 반쯤 감은 채 생각에 잠겼다.



‘과거의 세계’라고.

붉은 머리칼의 소녀, 나오미는 그리 말했다.



어떠한 원리로 그런 일이 가능한 건지는 모르겠으나.

적어도 저 소녀와 무녀 사이에는 인식의 차이가 있는 게 확실하다.



둘의 대화를 묵묵히 들으면서,

짐승은 그리 결론을 내렸다.




어쩌면 저 꼬맹이의 말은 마냥 허언은 아닐지도 모른다고.



하지만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이봐. 헛소리들은 그쯤하고, 언제쯤 도착하는 거냐?

대정령이니 뭐니 하는 것의 냄새는 느껴지지 않는다만.”



“헛소리라니... 당신은 나오미 씨의 상태가 걱정되지 않나요?

상처투성이인 걸 보고 그리 화냈으면서.”



화제가 짐승 쪽으로 향하며,

나오미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뒤돌아보았다.


아까 그리 신랄하게 말했다.

어딘가 안절부절하면서도 은근슬쩍 기대하는 심정이 눈빛에 담겨 있어,

검은 짐승은 거세게 콧김을 내뿜었다.



"제멋대로 한 착각을 사실인 마냥 떠들어 대지 마라.

난 네놈의 부탁대로 그 인간들을 쳐 죽였을 뿐이야."



"하지만 그런 것치고 당신은 분명,

나오미 씨의 상태를 보고서 평소보다 더 사납게---


....아아, 흐응~."



“뭐냐, 기분 나쁘게.”



아렌의 눈빛이 왜인지 웃음기를 머금고 있는 게 느껴져,

짐승의 눈가가 찌푸려졌다.



불편한 기색이 역력한 짐승과는 반대로.

아렌은 옅은 미소마저 지은 채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아뇨, 그냥.

이렇게 보니 당신도 꽤 귀여운 구석이 있구나 싶어지네요.”



“잘은 모르겠다만 한 판 붙어보자는 건가?”



“...왜 이야기가 그렇게 되는데요.

뭐든지 힘으로 해결하려 들지 마세요.


쓸데없이 부끄러워하는 것도 그렇고,

어린애인가요?”



“미안 하게 됐군.

네놈 말대로 철없는 어린이인지라 어른답게 대응해주겠나?”



손가락 관절이 뿌드득 거리면서 짐승이 이를 갈자,

아렌은 싱긋 웃어 보이며 칼집 위에 슬쩍 손을 얹었다.


순식간에 칼부림을 일으키려 임전 태세를 갖추는 가운데,

나오미가 서둘러 둘 사이를 비집고 들어왔다.



“자아, 자아! 사이좋아진 건 다행이지만 농담들이 지나치네요!?

대정령님과 만나는 거니 일단 길을 서두르죠! 네?!”



"누가 사이좋단 거냐, 꼬맹이.

눈씻고 이 년을 잘 봐라.


사사건건 덤비라고 도발해 오고 있잖냐."



"절 무슨 싸움에 미친년처럼 말하지 마세요!

그보다 당신은 나오미 씨의 배려가 느껴지지 않는 건가요?

모처럼---"





조금 사이가 가까워진 것처럼 느껴진 건 착각이었을까.



짐승과 무녀 사이에 끼여 있던 나오미가,

반쯤 포기하여 울상을 지을 무렵이었다.





강한 돌풍이 3명을 휩쓸었다.





"꺄악?!"



"....!"





나오미가 서둘러 펄럭이는 치마를 누르면서,

짐승의 동공이 급격히 수축하는 사이.



금발의 무녀는 제정신을 차린 듯 바람이 불어온 쪽을 응시했다.





"...아무래도 너무 흥분한 것 같네요.

설마 시튼님한테 꾸지람을 들을 줄은..."



"네? 그럼 이건---"





돌풍이 잦아들어,

간신히 옷매무새를 가다듬던 나오미가 화들짝 되물었다.



그런 그녀의 물음에 나직이 고개를 끄덕인 뒤,

무녀는 두 명의 방문자를 향해 몸을 틀었다.



“소개하도록 하죠.

저희를 보살펴주시는 대정령, 시튼님을.”



“하, 하지만...”



나오미가 당황하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녀는 말을 다 하지 않았으나, 짐승도 나오미가 무슨 말을 하려 했는지 알 수 있었다.



주변에는 아무것도 없다.


대정령이라 부를 만한 뭔가도, 기척도 느껴지지 않는다.




있는 거라고는 지금까지와 다를 것 없는 수풀과 나무,

그리고 이끼 낀 바위들 뿐.



“잊었나요?

저희 요정의 마을이 특수한 안개에 의해 은폐되어 있던 걸.



시튼님도 마찬가지예요.

그분은 베라른의 숲 그 자체.

두 다리만 있다면 누구나 도달할 수 있지만, 허락하지 않는 한 절대 만날 수 없는 존재죠.





즉---”



“!!”



세상이 변한다.






주변을 둘러싼 수해와 지면이 갑작스레 허상으로 이루어진 듯,

현실감과 동떨어진다.




질감과 냄새를 뿜어내던 사실이,

종이에 그려진 것처럼 이질감에 둘러싸여 무산된다.



“여러분은 이미 그분의 ‘손 위’에 있다는 겁니다.”



그 말과 동시에 ‘그것’은 나타났다.

이제까지 봐 왔던 거목과는 비교도 못할 만큼 거대한 나무가.






아니.

그걸 과연 나무라고 부르는 건 정확한 표현일까.



두께는 산의 절벽을 보듯이 끝없이 펼쳐져 있으며,

크기는 200M조차 넘어 하늘을 꿰뚫을 기세로 솟아나 있다.






새파랗던 하늘은 무한대로 펼쳐진 나뭇가지와 나뭇잎으로 뒤덮여,

순식간에 숲 전체가 어두워져 버린 채.



틈바구니 사이로 비치는 얼마 없는 빛줄기만이,

숲의 생물에게 허락된 유일한 햇빛이었다.





"이분이----"





언제부터 여기 있던 걸까.


언제부터 이곳에 뿌리내렸던 걸까.



연식도, 역사도, 규모마저도 일반적인 상식을 아득히 뛰어넘는 거목은,

그야말로 이 숲이 살아온 세월 그 자체라 할 수 있다.






그렇기에.

‘신’과 나란히 하는 존재인 '대정령'이 자기 분신으로 삼을 만한 성물인 거라고.




현재를 살아가는 소녀는 그리 직감하여 감탄하면서.



문득,

그 소리를 들었다.



“크르르르르르르.....”



“...사자씨?”



검은 짐승이 거목을 올려다보며 으르렁거리고 있다.




황금빛 눈은 잔뜩 충혈되어,

온몸의 털을 쭈뼛 세운 채로,

지금 당장에라도 미쳐 날뛸 것처럼 온몸에서 살의가 솟구치고 있다.




그 모습을 보고 나오미와 아렌의 몸이 경직되었다.





그건 일주일 전,

처음 만났을 무렵 짐승이 '폭주'했던 모습과 비슷했기에.




[괜찮습니다. 진정하시지요, 등지기여.]



파사삭.

무수한 나뭇잎이 흔들려 숨 쉬는 소리와 함께,

압도적인 목소리가 주변 일대를 뒤덮었다.






'안심하라'는 듯,

누군가 어깨를 토닥이는 느낌이 들어 나오미가 당황할 때였다.






검은 짐승의 안색이 어두워지면서,

거의 주저앉듯이 한쪽 무릎을 꿇고 말았다.



[이곳에 당신의 적은 없습니다.

당신이 싸워야 할 존재, 당신이 죽여야 할 대상은 본래 존재치 않는 것입니다.



부디 그 망설이는 마음에 안식을.

천천히 숨을 고르고, 자기 기원을 되짚어보세요.



축복에 범해지고 나서도,

여전히 그 기원을 포기하지 않겠다고 주장할 거라면.]



“네놈은...”



자그마한 반짝임들이 일었다.



반딧불과 같은 빛들은 천천히 짐승을 향해 날아가 온몸을 둘러싸면서.

짐승의 눈에서 얼핏 엿보였던 광기가 옅어져간다.



“시튼님, 이건...!”



[괜찮습니다.

그를 좀먹은 권능이 조금 반응했을 뿐, 완전히 눈을 뜨진 않았으니까요.





본래 그 축복은 우리와 세계를 향해 겨누어진 것.

설사 거짓된 존재, 과거의 기억이라 한들,

저와 마주한 순간에 반응하는 건 당연한 겁니다.]



“과거의 기억...”



나오미가 움찔하며 그 단어를 중얼거렸다.




당장에라도 뭔가 물어보고 싶은 간절함이 솟구치지만,

압도적인 존재감에 위축되어 차마 입술을 움직이지 못한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감사를 표하지요.



이 숲의 아이들을 위해 피를 흘려,

마음을 다해준 헌신과 상냥함에 경의를 표합니다. 시조의 아이여.]



“!!”



나오미의 얼굴에서 순식간에 핏기가 가셨다.


‘이분은 전부 알고 있다’고,

그 한 마디로 그녀는 모든 것을 깨닫고 만다.



줄곧 숨겨 왔던 추악한 자신을 들킨 느낌을 받아,

창피와 두려움으로 무심코 뒷걸음질 칠 때였다.





한쪽 무릎을 꿇은 채 숨을 고르던 짐승이 이를 갈며 고개를 쳐들었다.



“네놈...”



[무리하지 않는 게 좋습니다, 등지기여.

숲의 아이들을 위해 용감히 맞서 싸워준 보답까지는 못 되더라도, 조금이나마 진정을--]



“그딴 건 아무래도 좋아...!

지금, 이 개 같은 ‘소음’도 뭣도 아무 상관 없어...!



내가 네놈에게 묻고 싶은 건 하나뿐이다.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가려면 어찌해야 하나...!”



아렌과 나오미가 눈을 휘둥그레 뜬 채로 짐승을 보았다.






식은땀을 흘리며,

갈기가 휘날릴 정도로 거칠게 다그치는 짐승은,

여태까지 본 적이 없을 만큼 절박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네놈이 요정들의 왕이란 거겠지.

즉, 이곳을 다스리는 실질적인 우두머리란 거다.


그렇다면 대답해!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갈 방법은 뭐냐!”



[돌아가야 할 이유조차 잊었음에도 말입니까.]



“!!”



황금빛 동공이 수축한다.

거목을 향해 울부짖던 짐승은 말문이 막혀 굳어져 버렸다.



금발의 무녀도, 붉은 머리칼의 소녀도.

갑작스러운 짐승과 대정령의 대화를 듣고 당황하는 도중.




오로지 대정령의 목소리만이,

고요함을 품은 채로 주변에 울려 퍼져간다.



[미련을 혼동하지 마십시오.



고해해도 좋습니다. 세상을 저주해도 좋습니다.

삶을 구가하는 이들에게 분노를 품어도 좋습니다.



그러나 그 미련만큼은,

결코 충동에 지배당해서는 안 됩니다.



당신이 마지막 순간까지 당신으로서 있고 싶다면.]



“...무슨.”



[그건 그러한 축복인 겁니다.



가엾은 자.

영혼을 버리고, 존엄을 버려,

자기 자신조차 저버렸음에도 그 꿈만큼은 버릴 수 없었던 등지기여.



그분의 권능은 미천한 저로서도 어찌할 수 없으나,

적어도 그 메마른 마음에 조금이나마 안식이 있기를.]



짐승의 눈가를 눈싸라기와 같은 빛들이 어루만졌다.




나풀거리며 휘날리는 빛들은 어딘가 짐승을 위로하는 것만 같다고.

그 광경을 보는 나오미는 그런 감상을 품으면서.






"....!!"



카득.

주먹을 쥔 짐승의 팔이 거칠게 빛들을 후려쳐 떨쳐 냈다.




빛을 무산시킨 채.

거목으로 불어오는 온풍조차 거부한 채로.



검은 짐승은 대정령인 거목을 강하게 쏘아본 뒤.

뒤돌아서서 걸어왔던 길을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나오미도, 아렌도 그런 그를 불러세우지 않았다.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으나,

방금 그 일련의 동작으로 깨달은 것이다.





검은 짐승은 대정령 시튼과 대화하기를 거부한 거라고.




[등지기여.

숲의 아이들을 위해 싸워준 답례로서 이 말을 남기는 걸 허락해주시지요.]



짐승의 발이 잠시 멈추었다.


뒤는 돌아보지 않으나,

가만히 발을 멈춰 선 한 마리의 괴물을 향해 대정령의 목소리는 상냥하게 고했다.



[축복에 범해졌음에도 의식이 남아 있다는 것.

그것은 기적이면서, 동시에 더할 나위 없이 끔찍한 선고일 테지요.



어떤 결말을 맞이한다 하더라도, 그 끝에 한 점의 후회가 없기를.

‘짐승의 왕’으로 전락하는 것이 아닌, 당신만의 결과를 맞이하기를 빌겠습니다.]



“......하나 떠올린 게 있다.”



짐승의 몸이 비스듬하게 움직여 거목을 향해 곁눈질한다.




침착하면서도 조용한,

하지만 분명히 '적의'로 가득 찬 시선.



“난 그딴 식으로 뭔가를 기도한다니, 도와달라는 둥.

빌기만 하는 놈들이 가장 싫다.


그렇게 백날을 빌어 봤자, 결국 이뤄지는 건 아무것도 없어.

그렇지 않으면 ‘내’가 이렇게 됐을 리 없다고, 그리 느껴지는군.


그렇잖나?”



대답은 없었다.




대정령은 무겁게 침묵하고,

검은 짐승도 답 따위 기대하지 않았다는 듯, 다시 갈 길을 가기 시작했다.





두 번 다시 뒤쪽을 보지 않은 채 떠나버린 뒤.



결국.

대정령과의 만남이 끝날 때까지도.




짐승이 그 자리에 돌아오는 일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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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6절 - 재앙과 영웅 (1) 22.12.26 6 0 7쪽
24 5절 - 수도 테오티우아칸 (5) 22.12.25 10 1 15쪽
23 5절 - 수도 테오티우아칸 (4) 22.12.23 12 1 12쪽
22 5절 - 수도 테오티우아칸 (3) 22.12.21 9 1 12쪽
21 5절 - 수도 테오티우아칸 (2) 22.12.19 9 1 10쪽
20 5절 - 수도 테오티우아칸 (1) 22.12.18 9 1 11쪽
19 4절 - 방어전 : 베라른 (7) 22.12.16 10 1 10쪽
18 4절 - 방어전 : 베라른 (6) 22.12.14 10 1 8쪽
17 4절 - 방어전 : 베라른 (5) 22.12.12 10 1 14쪽
16 4절 - 방어전 : 베라른 (4) 22.12.11 14 1 13쪽
15 4절 - 방어전 : 베라른 (3) 22.12.07 9 1 11쪽
14 4절 - 방어전 : 베라른 (2) 22.12.05 9 1 11쪽
13 4절 - 방어전 : 베라른 (1) 22.12.04 9 1 9쪽
12 3절 - 동화의 끝 (4) 22.12.02 9 1 13쪽
11 3절 - 동화의 끝 (3) 22.11.30 8 1 16쪽
10 3절 - 동화의 끝 (2) 22.11.28 9 1 13쪽
» 3절 - 동화의 끝 (1) 22.11.27 12 1 12쪽
8 2절 - 요정 사냥 (4) 22.11.25 9 1 16쪽
7 2절 - 요정 사냥 (3) 22.11.21 11 1 11쪽
6 2절 - 요정 사냥 (2) 22.11.20 11 1 16쪽
5 2절 - 요정 사냥 (1) 22.11.18 16 1 14쪽
4 1절 - 천명의 무녀(3) 22.11.16 14 2 13쪽
3 1절 - 천명의 무녀(2) 22.11.14 19 2 12쪽
2 1절 - 천명의 무녀(1) 22.11.14 23 3 14쪽
1 프롤로그 22.11.14 46 3 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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