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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승의 왕과 붉은 무녀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라이트노벨

영업이
작품등록일 :
2022.11.12 03:01
최근연재일 :
2022.12.28 20:05
연재수 :
26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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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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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글자수 :
140,646

작성
22.12.05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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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쪽

4절 - 방어전 : 베라른 (2)

DUMMY

불타오르는 숲을 내달린다.




지난 한 달간 익숙해졌었던 길을 지나,

수풀을 헤쳐,

짧은 다리를 있는 힘껏 움직인다.



“하아...하아...”



숨이 차 토해 버리고 싶었지만,

그럴 틈따위는 존재치 않다.




지금도 멀리서 들려오는 파열음과,

코를 자극하는 탄내가 소녀의 마음을 채찍질하기에.



몇 번이고 걸려 넘어졌던 나무뿌리를 뛰어넘어,



몇 번이고 요정들과 놀았던 나무 그루터기를 지나,



눈을 감고서도 달릴 수 있을 비탈길을 내려가서.







그렇게,



나오미는 몇십 번이고 봐 왔던 마을의 정경이 뒤바뀐 걸 목도했다.



“하아...! ...하아...!”



불타고 있다.


눈에 들어오는 모든 것들이,

새빨갛게 일렁이는 화염에 집어삼켜 으스라져간다.



요정들의 안식터가 되어 주었던 거목들,

웃고 떠들면서 놀았던 광장,

검은 짐승과 함께 지냈었던 보금자리마저.






모든 것이 불길에 휩싸여 검게 그을린 채로,

소리 없이 화장되고 있었다.



“하아...!! 하아...!!”



머리가 생각하기에 앞서,

발이 먼저 움직였다.



도저히 이해하지 못할 참상에 눈에 눈물마저 고이며,

소녀는 정처 없이 내달렸다.



“요정 놈들을 찾아!

아직 좀 더 있을 거다!! 남김없이 수확해!”



"피를! 녀석들의 피를 모아 둬!!

되도록 살아 있는 상태에서 목을 쳐 내!!”



"하하하하하하, 완전히 노다지가 다름없구만!

이것보라고! 돈 놓고 돈 먹기 잖아"



불길에 휩싸여가는 마을을 뒤덮는 건 함성과 고함.

뭔가 부드러운 걸 찢어발기는 소리뿐.




살아 있는 요정들은 보이지 않는다.


눈에 띄는 요정이라고는,


바닥에 쓰러져 반으로 갈라진 시체들 뿐.



“하아...!!! 하아...!!!”



붉은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소녀는 불타오르는 거리를 내달렸다.




팔뚝으로 거세게 눈가를 비비며 발을 움직인다.


어떻게든 살아남은 요정들을 찾으면서.


먼저 이 참상을 봤을 무녀를 찾아 정처 없이 헤맨다.




어째서 눈물이 나는 건지는 그녀 자신도 알 수 없었다.



그저 이러한 참상이 이해가 가지 않아서.


도저히 납득할 수 없어서.


어째서 저들은 저토록 즐겁게 웃고 있는지 알 수 없어서.






소리 없이 오열하며.

붉은 소녀는 ’그곳‘에 도달했다.



“아아앗, 네년은...!?”



그곳은 대정령이 있는 곳으로 들어서는 경계선이었다.



요정들조차 침입이 허락되지 않는 곳.

천명의 무녀인 아렌이 허락한 이들만 출입하는 입구에 ‘그것’은 있었다.



“...어째서...”



검은 탑이 있다.

목가적이고 신비로운 요정의 마을과 너무나도 동떨어진 모습.




각종 부품과 기계로 이루어져,

귀에 거슬리는 구동음을 내며 은은한 푸른빛을 뿜어내는 첨탑이 있다.






"왜 '저게' 여기에----"




낯익은 탑을 보고,

붉은 소녀는 숨을 들이키고 만다.





저게 왜 이곳에 있는가 하는 의문.

저것이 눈앞에 있다는 공포가 마구 뒤섞여,


가만히 숨만 헐떡이던 때였다.







“저 자인가? 천명의 무녀를 자칭한다는 여자는.”





처음 듣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주변을 가득 채운 고함 소리와 불길에도 불구하고,

그 모든 것들을 잊게 할 만큼 싸하기 그지없는 목소리.




본능적으로 몸을 떨면서,

나오미는 첨탑의 밑으로 시선을 옮겼다.



기계로 이루어진 탑 밑에는 5명의 인간이 모여 있었다.



아마 요정 사냥꾼들이겠지.

걔 중에 한 명은 나오미도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3주 전.

검은 짐승에게 호되게 당했던 안경잡이 남자다.



“아닙니다요, 각하!

저년은 그 똘마니입니다!



그 미친 여자랑 괴물 뒤에 숨어서,

쫄래쫄래 따라다니는 이상한 년입죠!”



안경잡이 남자가 누군가를 향해 말하며 아부를 떤다.

주변에 다른 사냥꾼들도 그와 비슷하게 비굴한 미소를 띠고 있다.



명백하게 중앙에 있는 누군가를 의식한 언동들.



대체 누구에게 말을 거는가 싶어,

나오미는 남자들의 중앙에 있는 인물을 바라보고.




“...무녀가 아니다?”



눈이 마주친 순간.


심장이 조이는 느낌과 함께,

순식간에 전신의 핏기가 빠져나갔다.




주변 일대가 불타올라 뜨겁기 그지없건만,

저 남자를 보자 몸속의 온기가 모조리 빠져나가는 것만 같다.



“아무래도 어지간히 기대했던 모양이군.

무녀의 신력이 느껴져서 설마 진짜인가 싶었건만.


막상 와 보니 무녀를 자칭하는 여자는 도망쳐,

이런 어린아이를 무녀로 착각할 줄은.”




올백머리를 한 혈색 나쁜 남자는,

뒷걸음질 치는 나오미를 보며 고개를 내리저었다.



그걸로 그는 나오미에게 신경을 꺼버린 듯했으나,

정작 나오미는 그 말을 듣고 퍼뜩 제정신을 차렸다.



(무녀가 도망쳤다... 아렌 씨는 벌써 피신했다...?)




잘 생각해 보면,

마을에 쓰러진 시체들은 평소 요정들의 숫자보다 적었던 것 같다.



어쩌면 아렌이 대부분을 데리고 피신한 게 아닐까?



“나는 먼저 가도록 하지.

군대가 도착하거든 가일에게 현장 지휘를 맡기도록.”



“알겠습니다! 그럼 저 계집년은...”



“알아서 해라.”



"잠깐만요...!"



올백머리의 남자가 자리를 벗어나려는 순간.

나오미는 서둘러 그를 불러세웠다.



남자가 뒤돌아 가려는 방향은 '대정령'이 있는 방향이다.

이런 상황에서 저 남자를 대정령과 만나게 하는 건 위험하다고 느꼈다.



“어째서...!!

어째서 당신들이 ‘그걸’ 가지고 있는 거죠!?”



“미친! 야, 이분이 누군질 알고서 말을 거는 거냐!?

너 같은 년은 임마, 원래 말 한마디도---”



“대답해요! 그건 천명의 무녀가 다루어야 하는 것...!

신들이 무녀를 위해 남기신 예장이잖아요!


인간을 감싸고 요정을 수호하는 물건을 왜 이런...!”



‘이런 일에 쓰는 거냐’고,

나오미는 말을 차마 잇지 못한 채 입술을 깨물었다.





열락에 겨운 웃음소리.

미처 도망치지 못한 요정들의 시체가 즐비한 광경.


그동안 지내 왔던 집, 마을, 이웃들이 불타는 탄내.

이들을 모조리 불사르는 화염까지.



그 모든 것들이 너무나 생생하기 그지없어서,

작은 소녀는 주먹을 쥔 채로 윽박지르고 만다.



“요정들이 대체 뭘 했다고 이러는 건데요!

그저 ‘태어났다’는 것만으로 그게 그렇게 잘못됐다는 건가요?!”



“잘 알고 있군.”



떠나가던 남자가 발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불타오르는 정경 속.

무미건조한 검은 눈이 눈앞에 소녀를 응시했다.



“그대가 어째서 이 ‘병기’를 알고 있는지는 모르겠다만,

방금의 말에는 어폐가 있다.”



“어폐...?”



나오미의 중얼거림에 남자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고,

푸른빛을 뿜어내는 첨탑을 올려다보았다.



“이건 그저 물건이다.

의도도 무엇도 없어.


신은 추락하고, 지배자는 사라졌다.

그 뒤에 남는 건 오로지 옛 영화를 상징하는 잔해 뿐이지.


이를 어찌 활용하는지는 순전히 소유자의 몫.

거기에 멋대로 선악을 정의하는 건 무슨 논리인가.”



“..."



그 말을 듣고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한 명의 여인이었다.



'빛의 창'이라 불리는 탑을 앞에 두고 서 있는 그녀.



무녀가 되겠다고 선언한 후.

온갖 재앙과 악마를 물리치며 힘을 증명해 보인 그녀.



책임의 무거움을 담담히 감수하면서.

어떤 부조리와 박해에도 굴하지 않았던 뒷모습을 떠올린다.



"...그건, 사람을 지키는 도구입니다.

천명의 무녀만이 사용할 수 있는 예장이예요."



"내 말을 듣지 못했나, 여자.

이건---"



"---지키기 위해 쓰는 겁니다.

절대 이런 일에 쓰는 병기 따위가 아니야."



천명의 무녀로서 살아가기로 마음먹어.

그녀는 인간으로서의 행복과 존엄을 전부 저버렸다.



‘천사의 무기’를 비롯한 각종 병기조차,

그녀는 '모든 이를 지키기 위한 것’이라 역설해 온갖 질타에도 굴하지 않았다.



그 모습을 얼마나 동경해왔던가.

그 모습과 동떨어진 자신을 얼마나 저주했던가.



그녀가 가진 재능.

그녀가 가진 신념.

그녀가 내보였던 일생이 눈부실 정도로 숭고했기에.


그녀보다 못한 자신을 용납할 수 없었다.






그런 자신을 인정할 수 없어서,

필사적으로 애를 쓰며 증명하려 했다.



그리고 그 끝에,

자신은 '실패자'란 걸 깨달아 포기하고 도망쳤다.



수도로 도망쳐, 뒷골목을 전전해.

도망치고 또 도망친 끝에 지금에 이르렀다.



---그래.

나오미라는 인물에게 있어 '그녀'는 트라우마나 다름없다.






자신은 절대 가까이 할 수 없는,

뛰어넘기는커녕 다가갈 수조차 없는 인물.



그치만.

그러므로.



오히려 다른 누구보다도 선망하고 동경했던.

자랑스럽기 그지없던 사람.



“...당신의 눈에 이 마을은 대체 뭐로 보였나요?”



어느샌가 몸의 떨림은 멎어 있었다.


갑작스러운 충격과 당황.

그리고 정체 모를 남자에 대한 두려움은 순식간에 잦아들어.



그 자리를 단 하나의 감정이 대신하고 있다.



“이곳에서 죄를 범한 요정들은 아무도 없었어요.



대정령님도, 무녀인 아렌씨도.

누구 하나 당신들에게 해를 끼친 적은 없었어요.





그런데도 당신들은 무자비하게 이 마을을 불살라, 짓밟고 있습니다.

당신에게 이곳이 어떻게 비쳤기에?”



품속에서 지팡이를 꺼내 든다.


호두나무로 만들어진 지팡이를 꼭 쥔 채,

소녀는 묵묵히 대답을 기다린다.



“...벌레들이 모여 있는 곳은 모조리 구제해야 마땅하다 본다만.

무슨 문제라도 있나.”



“알겠습니다.”



지팡이에서 하얀 빛이 뿜어져 나왔다.


그와 함께 갑작스레 검은 탑 주변으로 돌풍이 일어나며,

작게 일어난 바람이 회오리치듯 첨탑을 둘러싸기 시작했다.



“뭐, 뭐야 이건!?”



“형님! 이 탑 같은 거 갑자기 멈춰버렸는뎁쇼?!”





첨탑에서 내뿜어지는 푸른빛이 약해져 간다.



그 여파로 마을 주변에 새롭게 안개가 끼기 시작하면서,

그걸 보는 남자의 얼굴에 놀라움이 일었다.



“정령술...

그것도 이 병기의 구조를 이해해야 가능한 정지 명령을...”



돌풍으로 인해 검은 망토를 흩날리며,

남자의 시선은 절로 붉은 소녀에게로 향했다.



조그마한 손으로 지팡이를 꼭 쥔 채,

명확한 적의로 노려보는 소녀를.



“...그렇군.

그래서, 혼자 뭘 하겠다는 거지?”



“정해져 있죠.”



지팡이를 쥔 손을 들어 올린다.

노리는 것은 다름 아닌 저 검은 탑과 이를 둘러싼 침략자들.



올백머리의 남자가 눈을 가늘게 하고,

건달들이 어안이 벙벙해진 가운데.





붉은 머리칼의 소녀는 선언했다.



이 마을의 무녀인 아렌을 대신하여,

다른 누구도 아닌 기억 속 '그녀'의 신념을 따라.



“2대째 천명의 무녀 아렌니우스의 제자로서.

그리고 14대째 천명의 무녀 베아트리스의 대리인으로서.


이 이상, 신의 유품을 악용하도록 두지 않겠습니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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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6절 - 재앙과 영웅 (1) 22.12.26 6 0 7쪽
24 5절 - 수도 테오티우아칸 (5) 22.12.25 10 1 15쪽
23 5절 - 수도 테오티우아칸 (4) 22.12.23 13 1 12쪽
22 5절 - 수도 테오티우아칸 (3) 22.12.21 9 1 12쪽
21 5절 - 수도 테오티우아칸 (2) 22.12.19 9 1 10쪽
20 5절 - 수도 테오티우아칸 (1) 22.12.18 10 1 11쪽
19 4절 - 방어전 : 베라른 (7) 22.12.16 10 1 10쪽
18 4절 - 방어전 : 베라른 (6) 22.12.14 10 1 8쪽
17 4절 - 방어전 : 베라른 (5) 22.12.12 10 1 14쪽
16 4절 - 방어전 : 베라른 (4) 22.12.11 15 1 13쪽
15 4절 - 방어전 : 베라른 (3) 22.12.07 9 1 11쪽
» 4절 - 방어전 : 베라른 (2) 22.12.05 10 1 11쪽
13 4절 - 방어전 : 베라른 (1) 22.12.04 9 1 9쪽
12 3절 - 동화의 끝 (4) 22.12.02 10 1 13쪽
11 3절 - 동화의 끝 (3) 22.11.30 9 1 16쪽
10 3절 - 동화의 끝 (2) 22.11.28 9 1 13쪽
9 3절 - 동화의 끝 (1) 22.11.27 12 1 12쪽
8 2절 - 요정 사냥 (4) 22.11.25 9 1 16쪽
7 2절 - 요정 사냥 (3) 22.11.21 12 1 11쪽
6 2절 - 요정 사냥 (2) 22.11.20 12 1 16쪽
5 2절 - 요정 사냥 (1) 22.11.18 16 1 14쪽
4 1절 - 천명의 무녀(3) 22.11.16 15 2 13쪽
3 1절 - 천명의 무녀(2) 22.11.14 20 2 12쪽
2 1절 - 천명의 무녀(1) 22.11.14 24 3 14쪽
1 프롤로그 22.11.14 46 3 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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