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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승의 왕과 붉은 무녀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라이트노벨

영업이
작품등록일 :
2022.11.12 03:01
최근연재일 :
2022.12.28 20:05
연재수 :
26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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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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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글자수 :
140,6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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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1.30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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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쪽

3절 - 동화의 끝 (3)

DUMMY

“이름이라고?”



마을과 북쪽으로 3km 이상 떨어진 절벽.


밤을 맞이해 검푸르게 물든 하늘 아래.

드넓게 펼쳐진 숲이 밤바람으로 흔들리는 광경이 펼쳐진다.


보이는 것은 저 지평선 너머를 경계선으로 삼아,

위아래로 나눠진 하늘과 광활한 수해.



그 절경을 내려다볼 수 있는 절벽 끝에,

검은 짐승은 나홀로 앉아 있었다.



“네, 이게 저와 아렌씨가 생각한---”



“갑자기 찾아와서 무슨 말을 하나 했더니.

그런 걸 생각할 시간에 돌아갈 방법이나 찾는 게 어떠냐, 꼬맹이.”



나오미의 말은 듣는 척도 안 하며,

짐승은 절경 쪽을 향해 시선을 돌려 버렸다.



검은 짐승을 찾아 나선 뒤로 수 시간.


밤이 되고 나서야 찾아내서 말을 걸었지만,

예상대로 짐승의 반응은 퉁명스럽다.



“저기, 아렌씨...?”



나오미는 내심 침울해지면서도,

옆에 서 있는 여성이 신경 쓰여 참을 수 없었다.



평소 분위기를 파악한다거나,

상대의 눈치를 보는데 자신이 있던 나오미다.



당연히 어느 정도 짐승의 반응을 예상해서,

단칼에 거절당해도 '아, 역시 그렇구나' 정도의 감상이지만.



"아."



아니나 다를까.


침착한 첫인상과 달리,

살짝 아이 같은 구석이 있는 무녀님이 양 볼을 부풀리고 있다.




방금 전, 검은 짐승을 발견하고.

환하게 기뻐하던 모습은 어디로 간 건지.


손이 움찔거리면서 은근슬쩍 허리춤의 칼로 향하는 걸 보고,

나오미는 서둘러 밝게 웃으면서 아렌의 어깨를 붙들었다.



"스승님! 사자씨는 많이 바쁘신 모양이고, 밤이니까.

이제 슬슬 돌아가---



“진짜 어린애 같네요, 당신.”



팍하고 소녀의 손을 쳐 내면서,

금발의 무녀가 짐승을 쏘아 보았다.



“갑자기 왜 또 시비냐, 넌.”



“시비도 뭣도 아니라 사실이죠.

당신은 타인의 감정이나 기분을 이해하지 못할 만큼 아둔하지 않아요.


그런데도 이쪽의 호의는 무시하고, 타인의 말은 들은 체도 하지 않죠.

게다가 사사건건 말하는 태도도 거슬려.


뭔가요, 그건.

자아 도취하면서 자기가 세상 멋진 줄 아는 어린애인가요?”



“저, 저기...스승님?

사자씨는 그, 여러모로 복잡한 사정이니...”



"복잡이고 나발이고,

그런 건 사람을 무시할 이유는 되지 않아, 나오미!


너는 분하지도 않아?!

그렇게 열심히 찾아다녔으면서!"



서둘러 아렌을 말리려던 나오미는 반대로 멱살을 잡히면서,

정면으로 다그치는 아렌의 얼굴과 마주했다.



얼마나 화가 난 건지.

볼이 벌게지면서 눈에 눈물마저 맺혀 있는 얼굴과.



“그, 그건...

그야, 좀 슬프긴 하지만...”



그를 찾기로 마음먹은 뒤로, 수 시간.


해가 져서 땅거미가 지고,

밤이 될 때까지 줄곧 찾아나선 것이다.



짐승병에 걸려 인간이 아니게 된 사람.

기억을 잃고 자기 존재를 잃어,

이름조차도 떠올릴 수 없게 된 이.



그런데도 지난 한 달간,

묵묵히 싸워주었던 노고와 헌신에 감사를 표하면서.


무엇보다도 그 앞길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길 바라며,

소녀는 무녀와 함께 그의 이름을 생각했다.



저 인물(짐승)에게 축복이 있기를.



그러한 소원을 담아 생각해낸 선물을,

검은 짐승은 단칼에 필요 없다고 일축해 버린 것이다.



슬프지 않냐고 묻는다면야, 당연히 슬픈 게 사실이다.

하지만---



“...그래도 그. 사자씨는 사자씨대로 고민이 있는 것 같으니.

너무 저희 생각만 밀어붙이면 폐가 되지는 않을까---”



"큭...! 아, 진짜!!"



살아남으면서 익힌 버릇은 어디 가지 않은 채.

재차 짐승의 눈치를 보고 말 때였다.



그런 나오미를 보고 더욱 표정을 구기면서.

아렌은 짐승 쪽을 향해 시선을 옮겼다.



“대체 뭔데! 사람이 말을 걸면 무시하고!

항상 쓸데없이 '그러냐', '어쨌냐', 틱틱거려!


그런 주제에 괜히 우리 얘들이랑은 사이좋게 지내질 않나!

착한 건지 나쁜 건지 모르겠어!”



"왜 또 갑자기 칭찬이야.

조울증이냐."



"욕하는 거야!! 정말 눈치 없기는...!


...왜 하필 이런 사람이 숲의 손님이 된 건데.

모처럼 친구가 생긴다면 책에서 읽었던 것처럼 상냥한 사람이..."



화를 내다가 지친 듯.

무녀는 아예 자리에서 주저앉아 무릎에 얼굴을 파묻어 버렸다.


그런 그녀를 나오미는 뒤통수를 맞은 듯 멍하니 바라보았다.

설마 하니 그녀의 입에서 '친구'라는 단어가 나올 줄 예상치 못했다.



검은 짐승조차도 무녀 쪽을 향해 고개를 돌리면서.

'훌쩍' 코를 먹는 소리와 함께 무녀의 몸이 살짝 흔들렸다.



"어... 저기, 사자씨?"



"나도 알아. 계속 들었으니까."



지금까지 무녀로서 거창한 태도를 취해왔지만,

아렌이라는 여성은 그 나름대로 계속 고민하면서 친해지려 했다.



그렇다면 당사자인 짐승이,

뭔가 상냥하게 위로해 줘야 하지 않을까.



그런 의미에서 나오미가 말을 걸자,

짐승은 전부 이해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고.



이내 진지하게 조언해주었다.



“걱정하지 마라.

성격이 파탄나고, 친구 하나 없는 왕따라도 사는 데는 지장 없다.”



----'챙'하고,

쇳소리와 함께 칼이 바닥에 나뒹굴었다.



간발의 차이로 날아온 칼을 쳐 내버린 뒤.

당황하는 검은 짐승을 노려보며 무녀가 중얼거렸다.



"다음에 또 헛소리 하면 죽일 거야, 당신."



“괘, 괜찮아요, 아렌씨! 제가 있잖아요!”



울고 싶은걸 참아 애써 웃으며,

나오미는 서둘러 아렌의 등을 쓰다듬었다.



“...아뇨, 나오미는 제 제자니까요.

기왕이면 첫 제자란 타이틀도 포기할 수 없는지라.”



(와 개귀찮네)



---아무래도 이 스승님의 안에서,

친구랑 제자는 절대 병행하지 못할 존재인 모양이라고.


나오미는 쓴웃음을 지으며 생각을 달리했다.

이 무녀님은 어쩌면 상상 이상으로 어린애 같은 성격일지 모른다.



“전부터 생각하던 건데,

이 숲에 인간은 네놈밖에 없는 건가?”



“...”



아렌은 볼을 부풀린 채 홱 하니 고개를 돌려 버렸다.





삐진 모양이다.

나오미는 속으로 그리 판단해 짐승을 대신해 질문했다.


그녀 자신도 이 ‘천명의 무녀’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그 내력은 전혀 모르는 것이다.


즉,

순수하게 호기심이 일었다.



“아렌씨는 여기서 줄곧 지냈던 거죠?

시튼님에게 몇십 년이고 정령술을 배울만큼 오랫동안.”



“...뭐, 그렇죠.

대충 200년 정도인가.”



“이백...!?”



“이백인데 그런 성격이라니.

네놈도 저주 받았냐?”



---두 번째로 '챙'하고,

칼이 짐승의 미간을 향해 날아가다 추락했다.



이번엔 당황도 하지 않은 채.

짐승이 태연하게 꼬리를 흔들거리면서.

아렌도 말없이 정령술로 단검 몇 자루를 생성하자.



참다못한 나오미가 짐승에게 윽박질렀다.





"사자씨는 잠깐 입 다물고 계세요!"




짐승은 그 말에 미간을 찌푸리면서도 어깨를 으쓱한 채 침묵.


나오미가 재차 이야기를 재촉하듯 아렌을 보자,

그녀는 살짝 놀란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네, 뭐.

저는 ‘반인반요’였으니까요. 인간의 기준에서는 꽤 장수하는 편이죠.


그때문인지.

철이 들 무렵에는 이미 인간들의 사회에서 쫓겨났지만.”



“반요... 설마 요정과 인간 사이에...”



들어본 적 없는 이야기에,

나오미는 멍하니 입을 벌렸다.


선선하게 불어오는 밤바람에 머리칼이 나부껴지면서,

아렌은 새하얀 손가락으로 머리를 정돈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보니 고향이 어디인지, 부모가 누구인지.

그런 건 알지 못합니다.


원래 이름조차도.”



“그건---”



무심코,

나오미의 시선이 짐승 쪽으로 향했다.


아렌의 그 말은 기묘하게도,

근처에 있는 괴물과 일맥상통하는 말이었기에.



“지금도 기억하는 건.

처음 이 숲으로 도망쳐왔던 날 정도네요.”



이제 와서 다시 떠올리려 해도,

생각나는 건 오로지 괴롭다는 사실 뿐.



누구의 손에 이끌리는지도 모른 채,

자신을 죽이려 드는 인간들에게서 도망쳤다.



누구의 말이 가슴에 박혔는지도 모른 채,

너는 살아야만 한다는 유언에 따라 살아남으려 애를 썼다.



자신을 감싸던 이들은 피를 흘리며 죽어 나가고.

자신을 돌보았던 이들은 기도와 신앙을 바치며 살해당했다.



[...가엾게도.

평화를 위해 태어나, 영화를 위해 내쫓길 줄은.]



장대비가 쏟아지던 어느 날.


결국.

걸을 힘도 남지 않아 숲에서 쓰러지고 난 뒤,

그 목소리를 들었다.



[괜찮단다. 이곳은 너를 박해하지 않아.

너를 무의미하다고 정의하지 않는단다.


믿음의 아이. 아직 어린 ‘천명의 무녀’야.

안심하고 잠드려무나. 이곳이 곧 너의 고향이란다.]



숲이 머리칼을 어루만지며 자장가를 들려준다.

반딧불들이 몸을 감싸 안아,

풀숲이 상처 입은 몸을 보듬아 주었다.



그것이 200년 전의 일.


어째서 내쫓겼는지도 모른 채,

정처 없이 헤매인 끝에 가족들(요정들)의 품으로 도달한 날의 일.



“그리고 대정령은 제게 이름을 주셨어요.

‘아렌니우스’라고.


이름은 곧 그 사람의 인생을 증명하는 말.

결코 없어서는 안 될, 앞날을 위한 지침이라면서.”



옛 일을 회상하며 숲을 내려다보는 무녀,

아렌니우스의 표정은 결연했다.


이 끝없이 펼쳐진 수해야말로 그녀의 고향.

이곳에서 살아 숨 쉬고 있는 생물과 요정들이야말로 그녀의 가족.




그렇기에 그녀는 200년 동안 지켜온 것이다.


자신을 내쫓아,

겨우 생긴 가족마저 해하려 하는 인간으로부터.


‘천명의 무녀’라 직함을 부여받아.

옛날에 함께 지냈던 동족이기도 한 이들과 싸워왔다.



“---”



검은 짐승은 잠시 침묵했다.



이름에 대해 진지하게 말하는 무녀의 모습이.

방금 전, '이름을 생각해 왔다'며 밝게 웃어 보였던 모습과 겹쳐 보여서.



“...하지만 설사 그렇다 해도,

나한테 그런 건 필요 없는 거다.”



흘려 버리듯이 중얼거린 그 말에.

나오미와 아렌은 짐승 쪽을 바라보았다.



“네놈의 사정은 대충 알았어.

200년간 인간 친구 하나 못 사귀어서 쓸쓸해 죽는 줄 알았단 거군.”



“!! 알긴 뭘 알았다고!?

왜 당신은 항상 악의적으로 해석하는 건데!”



“사실이잖나.

네놈은 이 숲에서 계속 싸워왔지만,

그래도 완전히 사람에게 정을 끊은 것도 아니야.


어쩐지 인간을 죽이는 걸 꺼려한다 싶더니만.”



나오미의 시선이 아렌 쪽으로 향했다.


금발의 무녀는 얼굴이 새빨개지면서도,

그 발언에 적잖이 놀란 듯 멍하니 짐승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걸 눈치채고---”



“그야 몇십 번이고 같이 행동했으니까.

싫어도 알게 되지.”



3주 간.

요정 사냥꾼이 숲에 모습을 드러낼 때마다 검은 짐승은 무녀와 함께 이를 요격한 것이다.



그녀가 입으로는 인간들을 원망하면서도,

직접 죽이는 건 꺼려한다는 사실은 처음부터 눈치채고 있었다.



내심 이상하게 여겼으나,

이제야 그 이유를 알게 되어 속이 풀리기까지 한다.



“그렇지만 나한테 있어 중요한 건 그런 것들이 아니야.

친구니, 이름이니.

그런 것보다 더 중요한 게 있는 거다.



그게 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앞의 말에 반론하려던 아렌이 쓴 표정으로 말을 삼켰다.



절벽 밑을 내려다보는 짐승의 옆모습은,

왜인지 어딘가 쓸쓸해 보였다.



“...그, 잊어 버리신 건가요?”



조심스레 꺼낸 나오미의 물음에,

짐승은 나직이 고개를 끄덕였다.



“오냐. 분명 나한테는 뭔가 해야 할 일이 남아 있었을 텐데.

무슨 일이 있어도 이뤄야 할 게 있었을 텐데.


정작 그게 뭔지 떠오르질 않아.

아마도 이게 네놈들이 말하는 병이니 저주의 영향일 테지.”



검은 괴물은 자기 손을 내려다보았다.



도저히 인간이라고는 말할 수 없는 거대한 손.

예리하기 그지없는 손톱과,

으스스한 보랏빛 털에 둘러싸여 있는 불길한 형태를.



“하지만 그렇다 해서 포기할 생각은 없어.

잊어버렸다니 뭐니 하는 변명으로 멈춘다니 말도 안 되지.


그러니 돌아가지 않으면.

다시 한번 그곳으로 돌아가서, 이번에야말로 더욱 ‘깊숙한 곳’에...”



자신이 누구인지도 잊어버린 채,

인간에서 괴물로 전락했음에도.


짐승은 더더욱 자신을 몰아세우며, 불타오른다.



잊어버렸다면 다시 찾아내면 된다고.





자신을 잊고.


이름을 잊고.




모든 걸 잊었다 해도 단 하나,




꿈에 대한 열망만큼은 잊지 않았기에.



초조하면서도 열정적으로 보이는 그 모습을 보면서.

붉은 소녀는 '실망'하고 말았다.



‘...뭐야.’



실망했다.

마음속 깊이 절망한 채, 질투하고 말았다.



사람에서 괴물이 된 짐승.

사회에서 패배자로 낙인찍혀 구렁텅이로 떨어진 이.



환경과 처우는 틀림없이 비슷하건만.

눈치를 보며 뭐든지 간에 포기하고 도망쳐왔던 자신과 달리.


저 '사람'은 이 순간까지도,

포기하지 않은 채 불타오르고 있어서.



‘...나 같은 거랑은 달랐구나.’



그를 속으로 동류라 생각했던 자신에 대한 혐오감과.

괴물이 되어도 망설임 없는 그가 부럽기 그지없어서.


붉은 소녀는 남몰래 주먹을 쥐었다.




그래서였겠지.


그런 짐승에게 진심 어린 말을 한 것은 같은 시대에서 온 소녀가 아닌,

이곳에서 살아가던 무녀였다.



“그럼 더더욱 당신은 이름을 가져야 해.”



“뭐?”



눈가를 찌푸리는 검은 짐승을 보고서도,

아렌은 한 치도 물러서지 않았다.



그를 똑바로 마주 보면서,

그녀 본연의 말로 마주하다.



“‘미련에 지배당하지 말라’고, 시튼님이 말한 걸 기억해?

그 말뜻을 이제야 알았어.


너는 한 번쯤 머리를 식혀야 한다고 생각해.

그렇지 않으면 돌이킬 수 없게 될 테니까.

그럴 거 같다는 느낌이긴 하지만 그래야만 해.”



“......”



3주 전.

대정령에게 들었던 말을 떠올리고 짐승은 생각에 잠겼다.


그런 그를 향해 무녀는 천천히 다가가,

어깨를 붙잡고 상냥하게 말을 걸었다.



“새로 이름을 만들어. 친구도 사귀고.

다른 이들과 함께 지내서, 새롭게 삶을 살아가도록 해.

모처럼 자아가 남아 있잖아.



혹시 몰라?

열심히 살아가다 보면 잊어 버렸던 꿈을 떠올릴 수도 있고,

그와 맞먹을 만한 걸 찾을 수 있을지도.”



“---그건.”



“불가능하다고 말하지 마.

실제로 내가 그랬는걸.


만약 불가능하다 생각하면 그건 그거대로 좋아.

그때는 내가 널 도와줄 테니까.”



그렇게 말하며,

자신 있게 미소 지어 보이는 무녀는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정말로 마음을 툭 까놓고 열어 보였기에 보이는 표정이라고.

옆에서 지켜보던 소녀마저 이해할 표정.



그걸 보고 잠시 말을 잃었던 짐승은,

이내 콧김을 내뿜으며 시선을 돌렸다.



“결국 친구로 삼으려고 그럴듯한 말이나 하는 거잖나.

쓸쓸하다못해 사기꾼 기질까지 발휘하다니, 대단하군 그래.”



"무슨...!?”



“그러니까.”



다시금 아렌의 얼굴이 새빨갛게 물들며 반론하려던 때였다.


그것보다도 먼저,

짐승의 낮은 목소리가 바람에 섞여 들었다.



“대가를 말해라.

값을 치른다면야 그걸로 빚은 없는 셈이니.


친구비를 낸다면야, 대충이나마 친구인 척은 해 주마.”



친구비라는 듣도 보도 못한 단어에 잠시 멍해진 것도 잠시뿐.


아렌은 숨을 죽여 웃으면서.

눈가에 난 눈물을 손가락으로 훔쳐 냈다.



“그럼 나중에 내가 곤란해지면 도와주는 걸로.

그런 거라면야 너도 만족하지?”



간략하게 고개만 끄덕이는 짐승을 보고서,

아렌은 어딘가 후련한 듯 더욱 밝게 웃어 보였다.



그 순간.

낮뜨거울지라도 저 두 사람은 친구라 부를 사이가 되었다고.



둘을 지켜보던 붉은 소녀는 그리 확신하고 말아서.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돌려 버렸다.




이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그리 느껴버린 것이다.






저 짐승과 친해지려고 한 건 내 쪽이었는데,

그렇게 아렌을 질투하는 스스로가.




저 괴물이라면 내 사정을 이해하고 공감해 줄지도,

그렇게 멋대로 기대해 버린 스스로가.






그리고 무엇보다도.

두 사람을 응원하지 못하는 자신이 혐오스러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저 둘을 똑바로 보지 못하고 외면했기에.

그 ‘이변’을 가장 먼저 눈치챈 건 나오미였다.



“...저건?”



나직이 웃고 있던 짐승과 무녀가 나오미 쪽을 바라보았다.





무슨 일인가 싶어 그녀가 보는 방향을 따라보고.

굳어졌다.



“마을인가?”



“!!”



그 자리에 모인 3명은 동시에 이해했다.



밤하늘 아래.

먹물로 칠해진 스케치북에 물감을 끼얹은 것처럼 선명하게 빛나는 홍염.





숲을 불태워 버릴 기세로 불타오르는 화염이,

어디에서 일어나는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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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5절 - 수도 테오티우아칸 (3) 22.12.21 9 1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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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5절 - 수도 테오티우아칸 (1) 22.12.18 9 1 11쪽
19 4절 - 방어전 : 베라른 (7) 22.12.16 10 1 10쪽
18 4절 - 방어전 : 베라른 (6) 22.12.14 10 1 8쪽
17 4절 - 방어전 : 베라른 (5) 22.12.12 10 1 14쪽
16 4절 - 방어전 : 베라른 (4) 22.12.11 14 1 13쪽
15 4절 - 방어전 : 베라른 (3) 22.12.07 9 1 11쪽
14 4절 - 방어전 : 베라른 (2) 22.12.05 9 1 11쪽
13 4절 - 방어전 : 베라른 (1) 22.12.04 9 1 9쪽
12 3절 - 동화의 끝 (4) 22.12.02 10 1 13쪽
» 3절 - 동화의 끝 (3) 22.11.30 9 1 16쪽
10 3절 - 동화의 끝 (2) 22.11.28 9 1 13쪽
9 3절 - 동화의 끝 (1) 22.11.27 12 1 12쪽
8 2절 - 요정 사냥 (4) 22.11.25 9 1 16쪽
7 2절 - 요정 사냥 (3) 22.11.21 11 1 11쪽
6 2절 - 요정 사냥 (2) 22.11.20 12 1 16쪽
5 2절 - 요정 사냥 (1) 22.11.18 16 1 14쪽
4 1절 - 천명의 무녀(3) 22.11.16 14 2 13쪽
3 1절 - 천명의 무녀(2) 22.11.14 19 2 12쪽
2 1절 - 천명의 무녀(1) 22.11.14 24 3 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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