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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승의 왕과 붉은 무녀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라이트노벨

영업이
작품등록일 :
2022.11.12 03:01
최근연재일 :
2022.12.28 20:05
연재수 :
26 회
조회수 :
331
추천수 :
30
글자수 :
140,646

작성
22.12.14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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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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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8쪽

4절 - 방어전 : 베라른 (6)

DUMMY

“사자...씨...”



모든 것이 불타오르는 마을에서,

정면의 적을 노려보던 짐승은 가느다란 목소리를 듣고 뒤를 응시했다.



“얌전히 있어라, 꼬맹이. 우선 저것들부터---”



“탑...부터...! 저걸 부수지 않으면...!”



짐승의 말보다 먼저,

나오미가 숨을 헐떡이며 말을 토해냈다.



그 말을 듣고 나서야,

짐승은 탑 쪽으로 시선을 옮겨 코를 벌름거리고 눈가를 찌푸렸다.



“확실히 저건 좀 역하군.”



나직한 중얼거림과 함께,

짐승은 주변에 떨어져 있던 창을 주워 내던졌다.



창은 정확히 탑 중심에 위치한 기계 패널에 박혀,

순식간에 탑에서 푸른빛이 옅어져간다.



단 한 번의 투척으로 탑을 부숴 버리는 광경에,

누구나 입을 떡 벌리며 말을 잃은 사이.



검은 짐승은 다시금 나오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보다도 꼬맹이. 렉스다.”



“네...?”



“렉스 아미쿠스. 그게 내 이름이라 하지 않았나.

네놈들이 멋대로 지었으면 책임지고 제대로 불러.”



콧김을 강하게 내뿜으며 고개를 돌려 버리자,

렉스를 보던 나오미는 이내 끅끅 웃어 버리고 말았다.





실컷 웃다가 몸이 아파서 찌푸리고,

다시 웃다가 힘들어서 신음을 흘리는 사이.



렉스는 적들을 향해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히, 히이이이익!?!”



이빨을 드러낸 채 다가오는 짐승을 보고,

건달들은 일제히 앞다투어 도주하기 시작했다.



“야, 야아!! 뭘 도망치는 거냐! 이대로 당하기만 해서---히익?!”



'팍'.



렉스의 발이 지면을 지르밟으며 눈앞에서 멈춰 서자,

안경잡이 건달은 뒷걸음질 치며 몸을 떨었다.



그리고 빠르게 심사숙고.



그는 자기 옆에서 입가에 묻은 피를 닦는 상사와

묵묵히 내려다보는 렉스를 번갈아 보고서는.




뒤도 안 보고 내달렸다.



“두고 봐라, 개새끼들아!

우리 이르바 상회의 영예를 걸고 언젠가 네놈들을 족쳐줄 테다!!”




“---라면서 다 튀었는데,

네놈은 도망치지 않는 거냐?”





이 상황에 이르러서도 꿈쩍도 하지 않는 남자를 내려다본다.



저런 것들은 얼마든지 추적해서 죽일 수 있다.

문제는 눈앞에서 태연하게 주저앉아 있는 올백머리의 남자다.



“...네놈, 정말로 인간인가?”



냄새가 느껴지지 않는다.


아무리 코를 벌름거려보아도,

이 남자로부터 어떠한 냄새도 나지 않는다.



공포에 떠는 감정의 흐름도,

당황에 가득 찬 흔들림도,

죽음을 앞둔 원초적인 반발심도 무엇 하나 느껴지지 않는다.




조금 전.

인간들을 죽이면서 질리도록 맡았던 ‘삶을 추구하는 냄새’가,

이 남자로부터는 무엇 하나 느껴지지 않아서.




눈앞에 있는 이가,

정체를 알 수 없는 무기물처럼 느껴지고 만다.



“......네놈은.”



“내 부하들은 전멸한 건가?”



뭔가를 말하려던 렉스의 말을 끊으며,

남자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망토를 휘날리며 옷에 묻은 풀 쪼가리를 가볍게 털어내는 모습은,

놀라울 만큼 태연자약하다.



그 태도에 뒤에서 지켜보던 나오미가 경악하며,

짐승이 입을 다문 사이.





올백머리의 남자는 피로 물든 짐승의 손을 보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물을 필요도 없었군.

도착이 늦는다 생각했더니만.



가일... 결국 자기 주제에 맞게 순직한 건가.

이제 와선 어찌 되어도 좋은 일이다만.”




남자는 작은 한숨과 함께,

천천히 짐승을 향해 다가 갔다.




반사적으로 렉스는 온몸에 힘을 주어 임전 태세를 갖추지만,

그 눈은 심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적의가 전혀 보이질 않는다.

이쪽을 공격하려는 의도나 감정이 전혀 느껴지지 않아 당황하면서.



그동안에도 조용히 발만 움직이던 남자는,

이윽고 렉스의 눈앞까지 도달하여---






아무렇지도 않게 그의 곁을 지나쳐갔다.



"!?"





600명의 부하와 병기를 부순 괴물에게 관심을 보이지 않으며.



지금까지 줄곧 싸웠던 나오미에게조차 눈길 한 번 주지 않은 채.



남자는 산책이라도 하듯,

유유히 짐승과 소녀를 지나쳐 불로 뒤덮인 마을을 향해 걸어간다.



“어디로...! 어딜 가는 거예요!?

마을을 이 지경으로 만들고...!”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건 나오미였다.



어이가 없어 입을 벌리고 있던 그녀는,

남자가 자기 옆을 지나치자 서둘러 그를 불러세웠다.



그 말을 듣고,

'핫' 숨을 들이킨 렉스는 이빨을 갈며 남자를 노려보면서.



문득.


올백머리의 남자가 뒤돌아보았다.



“이상한 걸 묻는군.

이미 결과는 났으니, 물러가는 게 아닌가.”



“결국 도망친단 소리잖냐, 버러지가!”



그 이상은 들을 필요가 없다.




그리 판단한 렉스가 순식간에 거리를 좁혀,

남자의 가슴을 꿰뚫었다.



완벽하기 그지없는 일격.



심장을 짓이겨,

왈칵 대량의 핏줄기가 불에 물든 하늘을 향해 솟구쳤다.




적나라하기 그지없는 살육에,

나오미는 무심코 눈을 돌리려다가---



“...기묘한 말을 하는군, 그대는.”



믿기지 않는 광경에 입을 손으로 틀어막았다.


렉스도 믿기지 않아 굳어져 버린 채.



올백머리의 남자는 피로 얼룩진 입술을 담담히 움직였다.



“대정령의 수명을 끊어 버릴 ‘말뚝’은 이미 쑤셔 박았다.

요정들의 보금자리였던 개미굴도 불태웠다.



확실히...

무녀를 자칭하는 여자와 일부 요정을 놓친 것.


그리고 일부 병력의 손실과 대정령의 임종을 눈앞에서 지켜보지 못하는 것.


이와 같은 실태와 차질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만.”



심장을 도려낸 것이다.




틀림없이 살을 꿰뚫고, 뼈를 부수어,

그 안에 있는 장기를 가차 없이 낚아채 으스러트렸다.



그런데도 남자는 고통 어린 비명 하나 내지 않는다.



핏기가 가셔 급속도로 창백해지면서도,

표정 하나 바뀌지 않는다.



“부수적인 것들을 놓쳤다 한들,

목표는 이룬 것이다.


목표를 이루고 돌아감은 승리 후의 개선일 터.


이를 두고 패잔병의 도망이라 비난함은,

무슨 농간이란 말인가?”



“네놈...”



“아아, 그러고 보니 찬사의 말을 하는 걸 잊었군.

용케도 내 직속부대를 쓰러트렸다.



천사의 무기는

그대와 같은 오물에게 있어 치명상이었을 것을.



역시 ‘짐승의 왕’...

아니, 아직은 그 후보에 불과한가.”



남자의 얼굴은 하얗다 못해 파랗게 질려 있다.


안 그래도 핼쑥했던 양 볼은,

대량의 피를 토해내 밀랍 인형처럼 쪼그라들어 있다.



그런데도 목소리만큼은 조금도 변함없이 이어져서.



“큭...!”



정체를 알 수 없는 혐오감이 엄습해,

관통시킨 팔을 거두어들일 때였다.




체내에서 ‘무언가’가 짐승의 팔을 둘러싼 채 솟구쳐나왔다.



“뭣?!”



“사슬...?!”



나오미의 중얼거림대로,

그것은 사슬이었다.



남자의 몸속에서 솟구쳐 나온 건,

생물이라면 누구나 가진 오장육부가 아닌.


보랏빛의 사슬.



붉은 피에 적셔진 그것은,

선혈에 지지 않을 만큼 불길한 색조를 뿜으며 맥동하고 있다.



맥동하는 것이다.



렉스에 의해 터져 나간 심장을 대신하기라도 하듯이,

남자의 체내와 이어진 사슬은 위아래로 움직이며 고동치고 있다.



“뭐냐 이건...?!”



반쯤 뒤집어진 목소리로 외치며,

렉스는 서둘러 팔을 옭아맨 사슬을 쥐어뜯었다.



‘차르륵’ 하는 금속음과 함께,

부서져 나간 파편들이 땅바닥에 흩뿌려진다.




사슬의 파편들이 벌레처럼 지면을 펄떡거리고.

아직 남자의 몸과 이어진 사슬은 서서히 몸속으로 돌아가면서.



그 광경을 보고 경악하는 소녀와 짐승을 향해.



남자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말했다.



“그럼, 나는 이만 실례하도록 하지.



왕이 되다 만 짐승, 그리고 무녀의 제자여.

그대들의 얼굴은 확실히 기억해 두었다.



만약 기회가 되거든,

느긋이 차나 한잔 하며 담화를 나눠보지 않겠나.”




그 말만을 남긴 채,

남자는 구태여 불길이 더 거세지는 쪽을 향해 걸어갔다




몸 한가운데에 커다란 구멍이 생겨.

끊임없이 피를 울컥울컥 쏟아 내면서도.



남자는 똑바른 걸음으로 나아간다.



그 뒷모습을 짐승과 소녀는 묵묵히 지켜보았다.



뒤쫓아가서 숨통을 끊거나,

포박할 생각은 일어나지 않았다.



뭐라고 이유는 설명하지 못하겠지만.

이 순간.

둘의 의견은 일치하고 있었다.





아마도.

여기서 무얼 한다 한들,

저 남자를 구속하거나 죽이는 건 불가능하다고.



검은 짐승은 본능에 가까운 직감으로.

붉은 소녀는 괴이를 무수히 봐 왔던 경험으로.


‘인간의 모습을 한 무언가’를 묵묵히 떠나보내면서.





한 달간 지내 왔던 마을의 잔해를,



언제까지고 지켜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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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6절 - 재앙과 영웅 (2) 22.12.28 6 0 13쪽
25 6절 - 재앙과 영웅 (1) 22.12.26 6 0 7쪽
24 5절 - 수도 테오티우아칸 (5) 22.12.25 10 1 15쪽
23 5절 - 수도 테오티우아칸 (4) 22.12.23 13 1 12쪽
22 5절 - 수도 테오티우아칸 (3) 22.12.21 9 1 12쪽
21 5절 - 수도 테오티우아칸 (2) 22.12.19 9 1 10쪽
20 5절 - 수도 테오티우아칸 (1) 22.12.18 10 1 11쪽
19 4절 - 방어전 : 베라른 (7) 22.12.16 10 1 10쪽
» 4절 - 방어전 : 베라른 (6) 22.12.14 11 1 8쪽
17 4절 - 방어전 : 베라른 (5) 22.12.12 10 1 14쪽
16 4절 - 방어전 : 베라른 (4) 22.12.11 15 1 13쪽
15 4절 - 방어전 : 베라른 (3) 22.12.07 9 1 11쪽
14 4절 - 방어전 : 베라른 (2) 22.12.05 10 1 11쪽
13 4절 - 방어전 : 베라른 (1) 22.12.04 9 1 9쪽
12 3절 - 동화의 끝 (4) 22.12.02 10 1 13쪽
11 3절 - 동화의 끝 (3) 22.11.30 9 1 16쪽
10 3절 - 동화의 끝 (2) 22.11.28 9 1 13쪽
9 3절 - 동화의 끝 (1) 22.11.27 12 1 12쪽
8 2절 - 요정 사냥 (4) 22.11.25 9 1 16쪽
7 2절 - 요정 사냥 (3) 22.11.21 12 1 11쪽
6 2절 - 요정 사냥 (2) 22.11.20 12 1 16쪽
5 2절 - 요정 사냥 (1) 22.11.18 16 1 14쪽
4 1절 - 천명의 무녀(3) 22.11.16 15 2 13쪽
3 1절 - 천명의 무녀(2) 22.11.14 20 2 12쪽
2 1절 - 천명의 무녀(1) 22.11.14 24 3 14쪽
1 프롤로그 22.11.14 47 3 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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