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3 팝콘은 새싹한테 대책을 호소해 보았다
![DUMMY](http://cdn1.munpia.com/blank.png)
#043 팝콘은 새싹한테 대책을 호소해 보았다
수로 건설을 우선해야 한다고 결정하긴 했어도 온종일 거기에 매달리는 건 아니다.
우리에게는 집 만들고, 밭의 돌 고르고, 장작으로 쓸 나무 베고, 덫에 작은 짐승이 걸렸는지 확인하는 등 할 일이 산적해 있었다.
그런 걸 등한시하고 수로 건설에 매달리면 생활이 불가능하다.
지구에서는 모든 것이 분업화되어 자기가 할 것만 하면 되지만, 이 척박한 마을에서는 농부에 건설업자, 사냥꾼, 만능 박사가 되어야 했다.
앞으로는 토끼 덫을 더 설치해 가죽도 부지런히 모아야 한다.
그 털로 옷을 만든다고 들었다.
벌써부터 겨울에 대비해 이것저것 신경 써야 하는 모양이다.
마을 회의에서 말이 나오기 시작했다.
이 세상 일을 거기에서 배운다.
마을 회의는 다른 사람들에게도 이로운 일이지만, 내게도 정말 많은 도움이 된다.
누구나 아는 일이라고 생각해서 아무도 말하지 않고 넘어가는 걸 회의에서 알게 되는 경우가 허다했다.
이 사람들은 내가 촌장이 되어 다행이라고 하지만, 내 입장에서는 우연히 대장을 만나 이런 마을에 오게 된 게 행운이다.
잘못하면 노예 상인 대열에 합류할 수도 있었는데, 정말 운이 좋았다.
다른 사람이 풀 베는 가운데 나는 수레에 돌을 담아 그 길에 뿌렸다.
풀 베는 것보다 이쪽이 내게 더 잘 맞는다.
지구에서는 힘쓰는 일이 장점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는데, 이곳에 와서 체질이 바뀐 건지, 아니면 정령을 낳는 몸이 되어 그렇게 된 건지 힘이 좋아진 느낌이다.
아니, 힘 자체가 좋아졌다기보다 공기가 나를 돕는다는 느낌인가.
덕분에 살기가 조금 수월해졌다.
익숙하지 않은 생활에 힘까지 모자랐으면 정말 힘들었을 거다.
뿌린 돌을 골고루 펼쳐놓으니, 도로는 이제 막 시작이지만 왠지 그럴싸해졌다.
주위가 풀과 나무로 둘러싸인 예쁜 산책길 같다.
저게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우리 손으로만 만든 거라고 생각하니 마음이 뿌듯해진다.
"모두 수고하셨습니다. 오늘은 작업을 마무리하고 내일 다시 하죠."
내 말에 마을 남자들이 이마의 땀을 훔치며 몸을 일으켰다.
"아이고, 허리야."
"촌장님, 수고하셨습니다."
사람들이 자기 허리를 툭툭 치거나 기지개 켜면서 한마디씩 한다.
이 사람들도 허리가 아프기는 했구나.
허리를 펴는 일조차 하지 않아서 전혀 아프지 않은 줄 알았다.
내 마음이 표정에 나타났는지 사람들이 큰 소리로 웃었다.
이 사람들은 자주 웃는다.
수로 작업에 심부름꾼으로 동원된 꼬마 둘이 힘든 척하며 허리를 구부정하게 한 채 걸어 다녔다.
"아이고, 허리야."
"허리가 꼬부라져서 안 펴지네."
아이들 행동에 또 웃음이 터졌다.
"진짜예요."
"나, 허리 부러진 것 같아요. 엄청 아파."
어른들이 믿어주지 않는 것 같자 아이들이 볼멘소리를 했다.
"뭐, 확실히 오늘은 열심히 했구나."
나는 웃으며 아이들에게 빈 수레를 들이밀었다.
"좋아, 여기에 타라."
"좋았어!"
"신난다!"
아이들이 소란스럽게 떠들며 수레에 올라탔다.
데굴데굴 바퀴가 굴러갈 때마다 아이들 몸도 조금씩 흔들린다.
그게 재미있었는지 처음에는 쪼그려 앉아 있던 놈들이 벌떡 일어나 팔을 올리며 소란스럽게 떠들었다.
한 녀석은 아예 수레에서 춤을 춘다.
"떨어지겠다."
내가 주의 주자 아이들이 깔깔 웃으며 수레에 주저앉았다.
그렇지만 금세 다시 일어난다.
이번에는 두 녀석 모두 타이타닉 영화처럼 팔을 양쪽으로 뻗은 채 바람을 맞았다.
마침 선선한 바람이 불어와 땀을 식혔다.
마을에 도착하자 다른 아이 둘이 달려왔다.
"선생님, 나도 타고 싶어요."
"타도 돼요?"
내가 허락하자 좁은 수레에 아이 둘이 더 올라가, 수레 안은 복작복작 비좁아졌다.
"밀지 마!"
"나 죽어!"
아이들이 비명을 지르고 서로 자리다툼 하느라 수레가 들썩들썩한다.
우리를 본 마을 여자가 들고 있던 쇠국자를 허공에 흔들었다.
"이 녀석들! 촌장님 힘들게 뭔 짓을 하고 있는 거야. 수레 망가지면 어쩌려고 그래!"
이런.
내가 어깨를 움찔하자 남자들 웃음소리가 더 커졌다.
"으악! 마귀 할망구다!"
"할망구라고 하지 마! 우리 엄마야!"
"그럼 뭐라고 해!"
"마귀라고 해!"
아이들이 외치며 수레에서 뛰어내렸다.
할망구보다 마귀가 더 심한 거 아니냐. 물론 할망구도 정말 심하긴 한데.
아이들 소리를 들었는지, 마을 여자가 쇠국자를 든 채 도망치는 아이들을 쫓아갔다.
"이놈들! 누가 마귀 할망구야!"
메뚜기 새끼처럼 아이들이 사방으로 흩어진다.
마을 여자는 아이들을 따라 조금 뛰다 지쳤는지 그 자리에 멈췄다.
"나중에 두고 보자! 이 녀석들!"
아이들 모습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돼지 멱따는 소리로 외치는 마을 여자만 혼자 남았다.
"오늘도 우리 마을은 평화롭군요."
내가 중얼거리자 마을 남자들이 배를 움켜쥐며 웃기 시작했다.
아니, 진심으로 하는 소리였는데 왜 웃어.
식사까지는 아직 시간이 좀 남았다.
그 사이 돌이나 조금 골라낼까 하고 밭으로 가자, 조금 전에 뭔가를 다짐하고 가버린 팝콘이 돌아와 있었다.
"피피 피피피피피 피피피...."
새싹을 향해 뭔가 호소하고 있다.
품에 소중히 안고 있는 건 아마 내 땀방울일 거다.
아직도 버리지 않은 모양이다.
한데 분위기가 왠지 심각하다.
마치 일생의 중대사가 걸린 것처럼 진지한 얼굴이었다.
팝콘 옆에는 웬일로 푸딩이 있다.
평소에는 다른 밭에 가 있는데 오늘은 일찍 돌아온 모양이다.
팝콘 옆에서 푸딩도 심각한 얼굴로 새싹을 보고 있었다.
"...."
내 귀에는 들리지 않지만 팝콘과 푸딩, 새싹 사이에서는 뭔가 대화가 오가는 걸까.
분위기가 너무 진지해서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설마 전혀 이야기가 통하지 않는데 셋이 저렇게 심각한 표정으로 모여 있는 건 아니겠지.
탄생도 이상하고 보기에도 왠지 하찮은 감은 있지만 팝콘은 정령이다.
그러니 새싹과 대화할 가능성도 있겠지.
어쨌든 식물도 살아있는 생물이니까.
내가 가만히 보고 있는데, 푸딩이 푸르푸르 몸을 흔들기 시작했다.
꼭 신들린 무당 같다.
"피?"
팝콘이 뭔가 기대하는 것처럼 푸딩을 보았다.
거기에 답하는 것처럼 푸딩이 몸을 길게 늘였다.
'오, 뭔가 하려는 모양이네.'
새싹하고 어떤 교류가 있었는지 나도 조금 궁금하다.
푸딩은 달팽이 눈처럼 몸을 길쭉하게 뽑아 새싹을 잡았다.
순식간에 본체가 손 있는 방향으로 이동한다.
새싹에 찰싹 달라붙은 푸딩의 몸이 푸르푸르 흔들리더니 부풀어, 다음 순간 덥석 새싹을 집어삼켰다.
뭔가 이상하네.
저게 대화의 결과인가.
그렇게 생각한 순간, 팝콘이 요란하게 울었다.
"피피핏!"
번개처럼 날아올라 발길질한다.
새싹을 몸으로 뒤덮었던 푸딩은 소시지 껍질 벗겨지듯 밀려 바닥에 떨어졌다.
"... 꾸르... 꾸르...."
억울하다는 듯 푸딩이 꿈틀거렸지만, 팝콘은 용서 없이 다시 한번 발길질했다.
뭔가 대화가 오간 것 같다고 생각한 건 내 착각이었던 모양이다.
그제야 나를 발견했는지, 팝콘이 내 땀방울을 소중히 안은 채 두 팔을 내밀었다.
"... 피... 피이...."
"오렌지를 못 찾았니?"
내 말에 팝콘이 구슬프게 울며 날아온다.
또 비극의 여주인공 흉내인 것 같다.
곧바로 날아오지 않고 이리저리 비틀비틀하며 슬피 울었다.
"그래, 그래, 슬프구나. 일이 잘 안 풀리면 누구나 슬프지."
"피... 피...."
뭔가 해결책을 바라는 것처럼 불쌍한 눈으로 나를 올려다본다.
뭐라도 조언을 해줘야 할 것 같아서 나는 대충 말했다.
"내가 예전에 본 책에서는 새도 냄새를 맡는다고 하던데, 너도 한번 해보면 어떠니? 오렌지 냄새를 따라가 보렴."
"... 피이?"
팝콘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리고 조금씩 고개가 원래대로 돌아온다.
꽃이 서서히 피는 모습을 보는 것 같다.
물론 얘는 팝콘 모양이지만.
"핏!"
뭔가 알았다는 듯이 팝콘이 튀는 것처럼 위로 떠올랐다.
파닥파닥, 이제 조금 보이게 된 날개가 열심히 움직였다.
"피핏!"
또다시 뭔가 다짐하며 팝콘이 빙글 몸을 돌렸다.
쏜살같이 날아간다.
"...."
아니, 이제 오후인데.
몇 시간 뒤면 밤이 될 거야.
언제 돌아오려고 지금 나가는 거냐.
'오늘은 집에 안 올지도 모르겠네.'
다른 때와 달리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늦게 나가면 늦게 들어오는 건 당연한 일이니까.
"... 꾸르... 꾸르...."
바닥에서는 푸딩이 아까 넘어진 그 자세 그대로 누운 채 울고 있었다.
내 시선을 끌고 싶은 모양이다.
"이 녀석, 이번엔 네가 잘못한 거야."
팝콘이 그만큼 소중히 가꾸는 새싹을 먹으려고 했으니 화내는 것도 당연하다.
그래도 꾸르 꾸르 우는 푸딩을 그냥 놔두지 못하고 집어 들자, 녀석은 온몸으로 내 손을 감싼 채 계속 울었다.
꾸르 꾸르.
새싹을 먹지 못한 게 굉장히 슬펐던 것 같다.
* * *
마차는 말을 위해 쉬는 것 외에는 거의 멈추지 않았다.
병사들은 가끔 마부석에 앉아 쉬고, 말은 마차에 묶어 혼자 달리게 했다.
보통 귀족 영양이었다면 버티기 힘들었을 거다.
마그리트는 원래 평민과 다름없는 생활을 했기 때문에 견딜 수 있었다.
그래도 마차 안에서 거의 온종일 있는 건 힘들었다.
귀족용과 달리 이 마차는 쿠션이 깔리지 않아 조금만 있어도 엉덩이가 아프다.
마차 안과 지붕에는 가는 동안 먹을 물과 식량 등 물건이 실려 있어 더욱 힘들었다.
오라버니가 준 가방에는 건포도가 약간 있어 가끔 그걸 입에 넣었다.
큰 마을에도 한 번 들렀지만 아직 해가 지려면 멀어 그런지 그곳에 오래 머물지 않았다.
병사들은 그곳에서 드레스를 처분한 것 같다.
'도시에서 판매하면 가격을 더 높게 쳐줄 텐데.'
마그리트는 병사들 손에서 드레스가 없어진 걸 보고 조금 아깝게 생각했다.
친가에 있을 때 어머니는 가끔 드레스나 장식품을 팔았다.
그럴 때는 귀족이라는 게 드러나지 않도록 평민처럼 옷을 입고, 마그리트와 함께 큰 도시에 가곤 했다.
[물건을 팔 때는 첫 번째 가게에서 판매해서는 안 돼. 적어도 세 곳 이상 둘러보는 거야.]
어린 마그리트한테 어머니는 그렇게 말했다.
가게에 들어가면 어머니는 귀족의 사용인인 것처럼 행동했다.
아버지의 명예를 위해서였을 것이다.
어머니는 너무 친절하게 웃으며 다가오는 가게 주인도 경계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때는 무슨 뜻인지 몰랐지만 아마 몸을 요구하는 가게 주인도 있었을 것이다.
어머니는 얼굴에 검댕을 묻혀 미모를 가려도 아름다웠다.
한번은 왜 마그리트를 가게에 꼭 데려가는지 물어본 적이 있다.
어머니는 어린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너는 돈 걱정 없는 집안에 보내고 싶지만, 그래도 앞일은 모르는 거니까.]
그때 어머니의 말씀대로 정말 앞일은 모른다.
마그리트는 작게 한숨 쉬고 덧창을 조금 더 밀었다.
도시나 마을이 없는 곳에서는 이제 마차 덧창을 열어도 된다.
오라버니가 뇌물을 준 덕분인지 병사들 태도가 한결 부드러워졌다.
마그리트는 멍하니 창밖을 보다 눈을 깜박였다.
하늘에서 아주 작은 점 같은 게 다가오고 있었다.
'혹시 정령일까.'
아니, 다른 것 같다.
정령은 하얀색이고 반짝이지만, 저건 그냥 점처럼 보였다.
그래도 혹시 정령이라면.
정령이 그녀를 따라왔다면 병사 눈에 보이는 건 좋지 않다.
왕에게 보고가 올라갈지도 모른다.
'그러면 분명 정령을 잡기 위해 뭔가 할 거야.'
왕가는 정령을 잡기 위해서라면 뭐든 할 거다.
마그리트는 주위를 살폈다.
병사들은 앞을 보고 있어 눈치채지 못했다.
마그리트는 창을 조금 더 열었다.
가만히 점을 바라보던 마그리트의 눈이 동그래졌다.
'아... 저건....'
새다.
정령과 함께 왔던 작은 새.
그 새가 엄청난 속도로 그녀를 향해 날아오고 있었다.
정령이 그녀를 쫓아온 걸까.
마그리트의 심장이 기쁘게 두근거렸다.
Comment '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