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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ferior Strugg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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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개
작품등록일 :
2013.01.31 09:36
최근연재일 :
2021.11.10 22:29
연재수 :
226 회
조회수 :
586,453
추천수 :
10,871
글자수 :
1,513,856

작성
16.06.13 23:04
조회
923
추천
10
글자
22쪽

9. 넘고 넘어서, 돌고 돌아서 (1)

DUMMY

팔산의 초입에 도착한 것은 해가 완전히 저물어가는 저녁나절이었다. 꼬박 하루 동안 펼쳐진 연전을 위로하듯 돌아가는 길은 평온하기 그지없었다.


“아이고 아가씨! 무사하셨군요.”


팔산에 위치한 심상의 지단에 도착해서 기별을 전하자마자 지단주가 신발도 신지 않고 달려 나와 심하령 앞에 머리를 조아리고 오들오들 떨었다. 무슨 영문인지 모르겠군. 눈앞에 부복한 그를 일으켜 세우며 심하령이 물었다.


“일어나세요, 우 지단주. 무슨 일로 이리 급히 뛰어나오셨나요?”


“하이고, 정말로 큰일 나시는 줄 알았습니다. 아가씨가 막무가내로 뛰쳐나갔을 땐 정말로 어쩌나 싶었는데 이리 무사하시니 정말로 다행입니다.”


“죄송해요. 미처 연락을 드리지 못했네요. 이젠 괜찮아요.”


“아니, 그보다 아가씨. 지금 팔산에 손님이 오셨습니다만 그게 이 우가놈이 처신을 잘못하여.....”


“손님이요?”


갑자기 무슨 말을 할까 싶었는지, 심하령이 고개를 갸우뚱하며 되물었다. 그때, 지단주의 뒤편에서 우렁찬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심후한 내력이 느껴지지는 않았지만, 소리 하나만은 귀를 먹먹하게 할 정도였다.


“에이 놔라! 하령아! 하령아!


저 너머로 매달리는 사람을 뿌리치고 땅이 울릴 정도로 육중한 거구를 요란하게 움직이며 달려오는 이가 보인다. 키는 족히 구척은 되어 보였고, 온몸이 구릿빛 근육으로 뒤덮여 있어 마치 동인(銅人)이 살아 움직이는 것 같았다.


“흑경 아저씨?”


심하령이 보기 드문 미소를 지으며 검은 고래, 흑경(黑鯨)이라는 희한한 이름을 가진 사내를 맞이했다. 봉두난발이나 다름없는 몰골을 하고 있었지만 정작 입은 옷은 심하령의 것 못지않게 값비싼 수실 따위가 달려있어 묘한 인상을 자아내고 있었다.


“그래! 어디 다친 데는 없느냐? 털끝 하나라도 다쳤다면 당장 저 오랑캐들의 소갈머리를 때려 부술 테다!”


역정을 낼 때마다 멋들어지게 수놓은 자리가 울룩불룩 꿈틀거렸다. 일부러 힘을 준 게 아니라 자연스럽게 움직이는 게 저 정도라면 육신을 어마어마한 수준으로 단련한 모양이다.


“그런데 어인 일로 이 먼 곳까지 오셨나요?”


“어떻게라니! 네가 위험에 빠졌다니 당장에 가진 돈을 다 써서 길을 타고 왔지! 아무튼, 무사해서 다행이다! 그딴 놈을 구하려고 또 위험한 데로 갔다고 해서 내가 얼마나 놀랐는지 아느냐?”


정적이 일었다. 그딴 놈이라는 격한 표현이 가리키는 건 바로 나였다. 그와 함께 천검대의 분위기가 싸늘하게 식다 못해 따끔거릴 정도로 날카롭게 변모했다. 특히 흑경과 한 걸음씩 가까워지고 있는 옥천평의 표정은 금방이라도 검을 뽑아들 정도로 무시무시했다.


“그래, 니가 소천검인지 소문주인가 하는...... 어흠, 사람인가?”


흑경이 물었다. 처음에는 적의가 가득해 보였으나 옥천평에게 만만찮은 기세가 흘러나오는 것을 알아차리고 연신 헛기침을 하다가 조금은 수그러든 모습으로 변모한 것이 눈에 띈다. 옥천평은 가만히 그를 바라보다가 이내 한숨을 내쉬었다. 어지간히도 상대하기 싫은 눈치였다.


“상세가 좋지 않은 환자가 있는 상황에 문전에서 드잡이질할 시간이 없으니 무례는 넘어가겠소이다.”


“야, 묻는 말에나 대답하라고!”


흑경이 발끈해서 나서려는 순간, 옥천평의 눈짓에 한상염과 문영을 업은 두 명이 재빨리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 두 사람을 못마땅한 시선으로 보던 흑경이 이내 거진 걸려있다시피 업힌 한상염을 알아보고 침음을 흘렸다.


“철검무룡.... 많이 다쳤군..”


“이만 비켜주시겠소? 당신 때문에 우리가 들어가기 어려우니 말입니다.”


길 한가운데서 버티고 서 있던 흑경을 노려보며 옥천평이 쏘아붙였다. 이에 잠시나마 숙연한 태도를 보였던 흑경이 다시 속이 부글부글 끓는 모양새로 고개를 저었다.


“가긴 어딜 가? 가기 전에 이거 하나만 말해봐라. 대체 뭐가 아쉬워서 우리 하령이를 이렇게 고생시키고....”


“아저씨.”


심하령이 나지막하게 흑경을 불렀다. 한창 열이 오르던 흑경이 단조로운 한마디에 한순간에 꼬리를 내리고 순한 양이 되어 쩔쩔매기 시작한다. 꽤 기묘한 상황이다. 구척 거한이 그보다 훨씬 가냘픈 소저에게 꼼짝 못 하는 상황이라.


“왜, 왜 그러냐?”


“이제 막 돌아왔는데 문전에서 사람을 붙잡고 있는 건 예에 어긋나는 행동이 아닐까요?”


“아니, 그러니까 이건 장주(莊主)도.....”


“흑경 아저씨.”


심하령이 차갑게 그의 이름을 불렀다. 이에 흑경은 채 꺼내던 말도 도로 삼키고는 심하령의 시선을 외면하며 대답했다.


“아, 음... 왜 불렀느냐?”


“다시 말씀드리지 않으셔도 아시겠죠? 제 일은 제가 알아서 한다고 했었는데요.”


“그, 그럼 알다마다.”


“잘 됐군요, 그럼 다들 고단하실 테니 이만 들어가시지요. 지단주께서는 목욕물과 식사를 준비해 주세요.”


“여, 여부가 있겠습니까.”


심상의 지단주나 되는 사람이 땀을 뻘뻘 흘리며 헐레벌떡 지단으로 뛰어들어가고, 그 모습을 본 심하령이 나를 바라본다. 이대로 들어가자는 의미겠지. 하지만 내 생각은 다르다. 애먼 옥천평을 노려보며 이를 박박 가는 모습도 그렇거니와, 그 변명이라는 것에 대해서도 꽤 관심이 갔다.


“부대주께서는 천검대와 함께 여독을 풀도록 하십시오.”


“예.”


기싸움이 한창인 가운데 던진 한마디에 옥천평은 언제 그랬냐는 것처럼 분노를 감추고 천검대를 이끌고 휑하니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멍청한 표정으로 옥천평과 나를 번갈아 보던 흑경이 이내 대경실색하며 고함을 내질렀다.


“뭐!?”


흑경이 그 체구만큼이나 큼직한 입을 쩍 벌리고 나를 내려다보며 이리저리 뜯어보았다. 한참을 그러고 나서도 의문이 풀리지 않았는지 온몸으로 의구심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쪽이 소천검이라고?”


순간 실언을 했음을 자각한 흑경이 슬쩍 심하령의 눈치를 살피고 이내 고개를 휘휘 저은 다음 다시 어렵게 포권을 쥐려 애썼다. 손가락이 워낙에 두꺼워 손가락 사이에 손가락을 끼우는 것도 고역인 듯싶다.


“하하, 제 이름값이 너무 높아서 저도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아, 실례했소이다 어흠, 소문주. 그러니 기왕 무례한 김에 몇 마디 더 하겠소.”


흑경은 불혹을 훌쩍 넘어 보였지만 외양과는 달리 속은 천명을 안다(知天命)는 것과는 거리가 있어 보였다. 한눈에 보아도 정도문파에 속하지는 않은 듯하다. 그렇지만 심상과 연관되었으니 사파에 속했을 리도 없겠지.


“흑 대협.”


“이봐, 그건 내 성이 아니야. 음, 그러니까 내 이름은 흑경이지만 아비가 붙여준 이름도 아니고 성 같은 건 몰라.”


“그럼 간단하게 대협이라 칭하겠습니다. 대협, 죄송하지만 심신이 고단하여 오늘은 이만 들어가 보겠습니다.”


“뭐? 겨우 그런 변명이나 하려고 부른 건가?”


“그럴 리 있겠습니까?”


나는 포권을 쥐어 보이며 애써 미소를 지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나도 조금은 기분이 상한 건지 웃음이 잘 나오지 않았다.


“이른 시일 내 자리를 마련하지요. 대협께서 원하는 걸 그때 모두 들어드릴 수 있을 겁니다.”


문전에서 벌어진 드잡이질은 그렇게 끝이 났다. 거듭 사죄를 구하는 심하령을 떨쳐내고 몸을 씻은 다음 간단히 요기까지 마치고 침소로 돌아오니 절로 몸이 노곤해져 침상에 몸을 던졌다. 하지만 잠은 오지 않았다. 여러 생각이 떠오르고 그중 가장 진하게 드러나 있는 두 가지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흑경, 심가장.”


흑경이 말한 대로 결착을 피하기는 어려우리라. 아니, 피해서는 안된다. 나를 나무랄 때 심가장주를 언급했던 것을 보면, 흑경의 언행이 심가장의 의사를 어느 정도 반영했다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입지를 다지기는커녕 욕만 바가지로 먹고 있다는 소린가.”


이래서야 억지로 무림행을 자처한 의미가 없다. 입지를 충분히 다지고 결국 심가장이 황도를 건드리는 걸 막아야 하는데 정혼자를 위험에 빠트리는 사람의 말을 들어줄 리 만무하다.

머리가 점점 복잡해져 잠이 완전히 달아났다. 매도 먼저 맞는 것이 낫다는 말대로 차라리 그때 흑경과 결착을 지었으면 좋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심가장 말고도 생각할 것들은 너무나도 많다. 나를 해치려 들었던 서악의 행보, 난데없는 흑마법사의 등장, 그리고 갑자기 얻게 된 이 강대한 힘까지. 얽히고 설킨 것들이 머리를 짓누르고 있어 오늘은 도저히 잠을 잘 수가 없을 것 같다.


“누구십니까?”


먹구름에 달빛도 가려진 야심한 시간인데 어딘가에서 큼직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점점 커지는 발소리에 그 주인이 내게 용무가 있다는 걸 깨닫고 먼저 그자에게 말을 걸었다. 그러나 그자는 일언반구 대답도 없이 가까워질 뿐이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발소리가 멎었다. 어슴푸레한 불빛을 받아 문 저편에 옅은 그림자가 떠올랐다. 이어서 문이 덜컥 열렸다.


“도망치진 않았구만.”


부리부리한 고리눈이 대호의 것처럼 형형하게 빛나고 있었다. 담이 작은 자라면 그대로 비명을 질러도 좋을 만큼 흑경의 시선은 무시무시했고 그 체구 또한 짐승의 것에 비할 정도였다.


“일단 들어오시지요.”


“들어갈 필요 있나? 네가 나와라.”


나중에 자리를 만든다 했건만 고작 한나절 걸려서 다시 찾아왔군. 잘 됐다. 나도 여러모로 생각이 복잡해서 우선 간단한 것부터 해소하고 싶었으니까.

그렇게 흑경의 뒤를 따라 나서 도착한 곳은 지단에서 꽤 떨어진 평탄한 숲속이었다. 밤이슬을 밟으며 여러 생각을 했다. 흑경이 무슨 말을 할지, 무엇을 원할지, 그리고 어떻게 매듭을지을지. 여러모로 생각해 보았지만 천의결처럼 명확한 대답은 나오지 않았다. 진일보한 무공도 이럴 때는 아무런 쓸모도 없었다.


“여긴 아무도 없다. 그러니까 말해봐라.”


“말씀드렸을 텐데요.”


“개소리 지껄이기는. 말하기 싫으면 내가 묻는 말에 똑바로 대답해라. 너, 하령이를 뭐라고 생각하는 거냐?”


흑경이 물씬한 살기를 내보였다. 풀벌레 소리가 한순간에 잦아들고 바람 소리마저 멎는다. 먹구름에 가려진 달빛이 서서히 드러나며 흑경의 일그러진 표정을 적나라하게 비춘다. 음영이 진 그 표정은 노골적인 적의를 그리고 있었다.


“심 소저는 제 정혼자입니다.”


단순명료한 대답을 원했던 흑경은 지금 이 순간만은 장황한 대답이라도 원했던 것처럼 표정에 깊은 분노를 새겨넣은 채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흑경이 무슨 대답을 원했었건 이로써 확실해졌다. 아무 일 없이 끝나지는 않으리라. 그것이 바로 이런 곳까지 나를 데리고 온 흑경이 원하는 바일 것이다.


“그런데? 소천검이라는 놈이 결국 어떻게 됐다고? 뭐, 주화입마? 납치? 웃기는 소리 마. 정혼자도 간수 못하는 게 어디서 잘난체야?”


“가타부타 말은 필요치 않겠죠. 무얼 원하십니까?”


이제는 신물이 난다. 나는, 저자는 그리고 이 세상이 결국 희구하는 바는 분명하다. 그것을 굳이 확인하고자 나는 의미 없는 물음을 던졌다. 정파인 특유의 고리타분한 습관일지도 모르지만 확실하게 선을 긋고 싶었다.


“소천검의 면상에 한 방 먹이는 게 소원이라면?”


“어째서 그런 걸 바라는 겁니까?”


“어째서? 하하하하하하하!”


흑경이 파안대소했다. 미친 듯 웃어대던 그를 비추던 달빛이 다시 먹구름에 가려져 갔다. 빛이 완전히 사라지고 어둠 속에서 흑경의 스산한 목소리라 들려왔다.


“하령이는 착한 아이다. 그 아이가 네놈 때문에 얼마나, 언제부터 힘들어 했는지 아냐? 모르겠지. 설마 했는데 척 보니 알겠다. 너는 그런 놈이야. 나처럼 개새끼다.”


“그래서, 제가 속죄하기를 바라는 겁니까?”


“속죄? 그딴 어려운 말 쓰지 마라. 누가 그딴 소리나 늘어놓는 걸 보면 속이 뒤집힌다! 그냥 난 네가 마음에 안 들고 하령이가 멍청하게 따라다니는 꼴도 더는 못 본다. 대체 천의검문이 뭐라고 그 착한 아이가 이런 꼴까지 당해가며 정혼이니 뭐니 시달리는지 모르겠다고!”


이젠 대화가 필요 없다. 그의 말대로 속죄 따위는 없다. 그런 건 불가능하다. 그래서 나는 누군가를 잃었을 때 끝없이 적을 짓밟았으며 자신을 벌했다. 그러나 그 결과가 무엇이었던가? 아무런 의미도 없다. 그래서 깨달았다. 잘못한 것을 알았으면 그만이다. 다시는 우를 범하지 않을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하다.


“아까 소원이 제게 한 방 먹이는 거라고 했었습니까?”


“그래!”


웃음이 나왔다. 이제 흑경이 원하는 바를 명확하게 알 수 있었다. 단순히 나를 때려눕히는 것 이상의 무언가를 말이다.


“능력이 된다면 해보십시오.”


“오냐! 이빨이나 꽉 물어라!”


흑경이 기나긴 기합성을 발하며 선수를 점했다. 눈속임 하나 없는 정직하고도 강맹한 권격이 날아온다. 이것이 진심으로 펼친 전력인지 아니면 시험 삼아 내지른 공격일지 알아보기 위해 눈을 가늘게 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 순간 놀라운 사실을 접하곤 탄성을 내지르다 아차 싶어 뒤늦게 행동을 취했다. 묵직한 주먹을 검면으로 받아내니 두 발이 뒤로 죽 밀려나며 검병이 부르르 떨렸다. 자칫 잘못하면 놓치겠다 싶어 억지로 힘을 주어 충격을 견뎌냈다.


“이것도 막아봐라!”


놀랍게도 흑경이란 사내에게선 비무가 시작되었음에도 내공이 느껴지지 않는다. 이른바 외공의 고수다. 거기에 타고난 신력이 보통이 아니다. 연달아 들이닥치는 구릿빛 주먹이 그려내는 투로 또한 예측하기 어려울 정도로 중구난방이라 오히려 대처하기 어려웠다.


“계집같이 굴지 말고 덤벼!”


만약 조금 더 일찍 흑경과 마주쳤다면 나는 일초지적도 되기 어려웠을 것이다. 흑경의 무공에는 기교가 거의 없었다. 달리 말해서 파고들 틈은 없었다. 오직 힘과 힘의 대결로 밀어낼 수 있을 뿐. 내공이 없었다면 절대 당해낼 수 없는 대적이었다.


비무로 시작되었던 대결은 이제 치열한 접전이 되어가고 있었다. 아니, 접전이라 보기도 어렵다. 나는 여전히 피하고 막기만 하고 있었고 일방적으로 공세를 퍼붓고 있는 건 흑경이었다.


“허억, 허억, 개자식. 무슨 체력 하나만은 기똥차구만.”


“칭찬으로 듣지요.”


“칭찬? 크합!”


그 순간 흑경의 움직임이 족히 세 배를 빨라져 그만 움직임을 놓쳤다. 단순한 투로임을 읽었지만, 몸이 따라주지 않는다. 늦었다. 호쾌하게 차올린 돌기둥 같은 다리가 아슬아슬하게 턱 끝을 스치고 지나갔다.


“큭!”


가까스로 승천보를 펼쳐 찰나의 순간 피해내지 못했다면 턱이 완전히 날아갈 뻔했다. 오싹한 상상에 얼음장에 빠진 것처럼 온몸이 싸늘하게 굳었다. 아예 힘을 줄일 생각이 없군. 무공이 진일보하지 않았다면 그대로 죽었을지도 모른다.


“당신......”


방금 그 일격은 위력은 엄청났지만 명백히 단순무식한, 그야말로 하수에게 펼칠만한 빈틈투성이 공격이었다. 고수간의 대결에서 나타날만한 수는 절대 아니었다. 설령 펼치더라도 저울이 완전히 기울었을 때나 나올법한 초식이었다. 완전히 얕잡아 보았군.


“이 정도도 어찌 못 할 바에야 더 사나운 꼴 보기 전에 내 손에 죽는 게 낫지.”


터무니없는 소리다. 정말로 내가 죽었어도 저런 소리를 늘어놓지 않았을까? 이렇게 비명횡사할 뻔했다는 게 아직도 믿기지 않았고 그래서 화가 치밀었다. 방향을 바꾸었다. 흑경은 내가 수차례나 공격을 흘리고 피한 것 따위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가 원하는 건 그를 완벽히 꺾어버릴 만한 강대한 일격이었다.


“체력만 좋았다... 그리 보이십니까?”


방향을 바꾼다. 느슨하게 쥐었던 검을 재주 좋게 빙글 돌리고 창대를 움켜쥐듯 바짝 고쳐 쥐었다. 그리고 내딛는 일보. 더없이 찬연한 은빛 검광이 섬전처럼 몰아쳤다.


“크억!”


흑경이 뒤늦게 위기를 직감하고 처음으로 팔을 들어 방어를 시도했다. 그렇지만 검이 더 빨랐다. 아니, 더 위력적이었다. 하늘 끝까지 파고들 기세로 찔러 들어간 검이 팔을 통째로 꿰뚫고 심지어 가슴팍에까지 살짝 닿아 있었다. 이마저도 그의 육신이 단단하기 때문이 아니라, 힘을 가감했기 때문임을, 당한 본인은 누구보다 잘 깨달았으리라.


“크으으....”


흑경이 몸을 부르르 떨며 검날을 맨손으로 움켜쥐었다. 그리곤 안간힘을 써서 검을 빼내려 했다. 그러나 검기가 넘실대는 검에 손아귀가 완전히 망가지기 전에 가볍게 검을 빼내니 철탑 같은 팔뚝에서 붉은 피가 봇물처럼 터져 나왔다.


“제기랄, 이런 힘을 갖고도 그런 병신 짓만 하고 있었다고? 역시 넌 개자식이다!”


흑경이 고통에 찌든 한마디를 짜냈다. 그 순간 몸과 마음을 옭아매고 있던 사슬이 느슨해졌다. 아니, 누군가가 풀어버린 것만 같았다. 이런 힘? 그래, 나는 방금 선보인 찌르기처럼 수많은 무리를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쓰질 못했다. 그때와도 같다. 힘을 가질 수 있었음에도 토리나를 죽게 내버려두고 프란츠의 원한을 샀던 그때와 같다.


“그렇습니다.”


오히려 마음이 고요하다. 더없이 냉정한 정신을 바탕으로 수많은 검로와 구결이 머릿속에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랐다. 왜 싸우게 되었으며 싸움이 끝난 다음이 어떨지 하는 과거며 미래가 문드러져 사라졌다. 오직 내가 살아 숨쉬는 현재만이 남아 꿈틀댈 뿐이다.


“그건 제 잘못이고 변명할 생각도 없습니다.”


그때 후회하고 후회다가 결국 절망의 끝에 도달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잖아? 내 곁에 있던 누구도 죽지 않았다. 운이 좋았다는 핀잔이 떠올랐지만, 꼭 그런 것만도 아니다. 지난 삶에서 쌓아온 것이 없었다면 결과는 똑같았을 터.


“하지만 이제는.....”


“뭔 소리냐! 잔말 말고 덤벼!”


머리에 피가 끓어올랐는지 흑경이 마치 생사투를 벌이는 것처럼 소리를 질렀다. 그래. 잔말일 뿐이다. 지금까지는 이러이러했으니 다음부터는 저러저러할 것이다? 아무 의미도 없다. 과거도, 미래도 하나도 중요치 않다. 오로지 살아 숨쉬는 지금 이 순간이 중요할 뿐.


“굳이 꺾여야 납득하겠다면.”


검을 집어넣었다. 의미 모를 행동에 흑경의 시선이 검자루로 향했다. 찰칵 소리와 함께 천의검문의 소문주의 신물이 완전히 모습을 감추었다.

이어서 싸우고자 하는 마음이 검을 쥐지 않은 손을 자연스레 잡아끌었다. 우려하게 펼쳐낸 육합권의 기수식에 흑경이 입을 꾹 다물고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나는 이어서 말했다.


“완전히 꺾어 드려야지요.”


주위가 흐려진다. 내 움직임을 내 눈마저도 따라오지 못한다. 나는 그저 심상에 떠오른 투로에 따라 움직일 뿐. 흑경의 공격이 느껴진다. 그와 함께 수천수만의 경험 속에서 그와 비슷한 것들을 끄집어냈다. 수없이 많은 길 중에서 나는 유독 눈에 띄는 것을 머리에 새기고 움직였다.


부웅!


생각한 대로 흑경의 공격이 모조리 비켜나간다. 서역 최강의 무인이라 칭송받는 드래곤 슬레이어 중, 흑경은 벨스터를 닮아 있었다. 아니, 흑경이 벨스터가 우뚝 선 정상을 향해 올라가고 있다고 해야 할까?


“크으, 또!”


필사적인 일격이 빗나가니 흑경이 반대편 다리를 들어 관자놀이를 노린다. 그것을 왼팔을 들어 막으며 또한 흘려낸 나는 역으로 흑경의 턱을 노렸다. 정확히 정중앙에 파고든 권격. 묵직한 반탄력이 느껴졌다. 정타(正打)다. 하지만 끝이 아니다. 외문의 고수는 강건하고 또한 끈질기다. 아니나 다를까, 흑경은 아무렇지도 않게 턱에 꽂혀있는 팔을 움켜쥐고 반대편 주먹으로 내 안면을 후려갈겼다.


“큭!”


피했지만 늦었다. 육중한 주먹에 맞아 코뼈가 주저앉는 고통이 폭발하며 뒤로 나가떨어졌다. 몇 번이나 바닥에 튕기다가 가까스로 균형을 잡고 천근추의 수법으로 바닥에 착지했다. 바닥을 죽 긁으며 밀려나는 발끝에 알싸한 통증이 느껴졌다.


“킁, 잘난 척 검까지 넣더니 꼴좋다.”


흑경이 벌겋게 부어오른 턱을 툭툭 치면서 비웃었다. 제길, 뒤늦게 더 나은 투로가 떠올랐다. 늦다. 이제야 이러저러한 방도가 떠오르면 무엇할까? 목이 날아간 다음에 투정을 부릴 셈이 아니라면 더 단련할 수밖에.

후회를 뒤로하고 자세를 푼 다음 먼지 묻은 옷을 털었다. 뒷덜미와 이마를 타고 땀이 주르륵 흘러내린다. 흑경이 어안이 벙벙해서 눈을 크게 떴다. 나는 등을 돌리고 그 자리를 벗어나며 말했다.


“코피나 닦고 비웃어 보십시오.”


“뭐라고? 아니 이게.....”


흑경이 주르륵 흘러내리는 코피를 슥 훔치고는 다시 눈을 부릅뜨더니 이내 머리를 감싸 쥐고 비틀댔다. 아무래도 절정의 고수와는 제대로 싸워본 적이 없는 것 같군. 내가중수권에 머리를 맞았으니 겉은 멀쩡해 보여도 속은 상당한 타격을 입었을 것이다. 외문의 고수가 아니었다면 그대로 병신이 되어도 이상할 게 없으리라.


“너, 너....”


흑경의 거체가 쓰러진다. 눈이 하얗게 뒤집히고 현기증을 이기지 못해 그만 거목이 쓰러지듯 그대로 뒤로 나자빠진다. 뒤늦게 한숨이 터져 나왔다. 흑경이 조금만 더 경험이 있었거나 경지가 높았어도 이렇게 쉽게 끝나진 않았을 것이다.


“끄으으..... 기다....”


한 걸음 두 걸음. 조금씩 흑경에게서 멀어지던 나는 흑경의 신음에 문득 걸음을 멈추고 몸을 돌렸다. 흑경이 아직도 성이 차지 않았는지 바닥을 박박 기어서 내게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런 그를 향해 나는 차갑게 쏘아붙였다.


“이 정도로 부족하다면 얼마든지 오십시오. 천의검문의 소문주는 이제 절대 꺾이지 않을 겁니다.”




감상이나 비평은 언제나 환영합니다.


작가의말

첫화부터 치고받고....


몇번이나 갈아엎다보니 많이 늦었네요.

읽는 분 모두가 고개를 끄덕일 수 있는 편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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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6 11. 남해(南海) (3) +7 21.11.10 203 4 14쪽
225 11. 남해(南海) (2) +5 19.11.26 371 11 11쪽
224 11. 남해(南海) (1) +6 19.01.30 337 11 11쪽
223 10. 운칠기삼(運七技三) (10) +5 18.10.30 362 9 17쪽
222 10. 운칠기삼(運七技三) (9) +4 18.05.25 427 5 17쪽
221 10. 운칠기삼(運七技三) (8) +3 18.01.17 400 10 15쪽
220 10. 운칠기삼(運七技三) (7) +4 17.12.31 411 5 14쪽
219 10. 운칠기삼(運七技三) (6) +2 17.12.05 349 6 40쪽
218 10. 운칠기삼(運七技三) (5) +2 17.10.17 396 6 17쪽
217 10. 운칠기삼(運七技三) (4) +5 17.06.13 566 7 11쪽
216 10. 운칠기삼(運七技三) (3) +1 17.06.13 474 5 15쪽
215 10. 운칠기삼(運七技三) (2) +5 17.03.20 589 10 19쪽
214 10. 운칠기삼(運七技三) (1) +6 17.01.15 743 10 17쪽
213 9. 넘고 넘어서, 돌고 돌아서 (5) +3 16.12.18 872 14 20쪽
212 9. 넘고 넘어서, 돌고 돌아서 (4) +6 16.12.03 683 13 25쪽
211 9. 넘고 넘어서, 돌고 돌아서 (3) +5 16.11.02 1,008 10 25쪽
210 9. 넘고 넘어서, 돌고 돌아서 (2) +7 16.09.12 832 11 36쪽
» 9. 넘고 넘어서, 돌고 돌아서 (1) +5 16.06.13 924 10 22쪽
208 8. 등하불명(燈下不明) (9) +2 16.06.14 872 10 21쪽
207 8. 등하불명(燈下不明) (8) +8 16.05.11 919 17 31쪽
206 8. 등하불명(燈下不明) (7) +6 16.03.29 785 10 24쪽
205 8. 등하불명(燈下不明) (6) +4 16.02.14 836 14 28쪽
204 8. 등하불명(燈下不明) (5) +3 16.02.10 917 14 18쪽
203 8. 등하불명(燈下不明) (4) +7 15.12.13 1,073 14 21쪽
202 8. 등하불명(燈下不明) (3) +11 15.10.12 867 20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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