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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ferior Strugg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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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개
작품등록일 :
2013.01.31 09:36
최근연재일 :
2021.11.10 22:29
연재수 :
226 회
조회수 :
586,420
추천수 :
10,871
글자수 :
1,513,856

작성
16.03.29 00:15
조회
784
추천
10
글자
24쪽

8. 등하불명(燈下不明) (7)

DUMMY

비가 추적추적 내리기 시작하며 거침없이 이어지던 추적은 한순간에 굼벵이처럼 느려졌다. 문영이 난감하다는 듯 반쯤 젖어 버린 머리를 털어내며 말했다.


“으, 거의 다 따라잡았는데 흔적이 많이 흐려져서 방향을 종잡기 어려운데요? 지금 흔적은 서악이 아니라 엉뚱한 곳으로 가고 있다고 나와요. 이게 확실하다면 따라갈텐데 그것도 아니고요.”


낭패다. 가랑비로 시작됐던 비는 점점 굵어지고 있다. 하늘은 시커먼 먹구름이 껴서 조금 전까지 우리를 돕던 달빛마저 보이지 않았다. 저 멀리 은은하게 울려 퍼지는 천둥소리에 시선을 주었던 종리혜는 완연하게 젖어 있는 옷을 툭툭 쳐서 물기를 털어내며 품속에서 잘 말린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죄송하지만 저 먼저 이걸 좀 쓸게요.”


꼼꼼하게 말려 있던 것은 기름을 먹인 우의였다. 다 젖은 마당에 무슨 우의냐고 할 것도 없이, 그녀가 입고 있던 옷은 온통 젖어 몸의 굴곡이 드러나고 살갗이 비쳐 보였다. 명가의 여식이 여태까지 참은 것도 용할 따름이다. 아마 우의를 입는 건 추태를 면하기 위함이겠지.


“하나 더 없나요?”


문영이 넉살 좋게 농을 던지며 육대종의 흔적을 찾으려 두리번거렸다. 종리혜는 싱긋 웃으며 몸을 가리고 있던 우의의 자락을 살짝 벌리며 손짓했다.


“정 여기 들어오겠다면 말리진 않겠어요.”


“저기요, 그랬다간 동평에서 제 사지가 찢겨나갈 겁니다. 거기 높으신 분께서 남녀의 유별함엔 좀 깐깐하시거든요.”


“네, 그러시라고 해본 말이에요.”


오랜 시간을 달리며 체력은 소진됐고 마음도 급했지만, 두 사람은 아직도 농담을 주고받을 기력이 넘쳐 보였다. 대단하군. 나는 숨을 고르는 것도 힘겹기만 한데.


“자, 그럼 이제 어떻게 할까요?”


문영이 물었다. 그 물음에 머리가 텅 비어버린다. 육대종을 쫓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았던 탓이다. 아니, 너무 지쳐서 다른 생각을 할 겨를도 없었지. 아무튼, 나는 대답을 주지 못했고, 이에 종리혜가 조목조목 방법을 제시해 주었다.


“놓칠 것을 감수하고 추적을 계속하거나, 아니면 추적이 아닌 다른 방법으로 뚱땡이를 잡으면 될 것 같아요.”


무모하게 폭우 속에서 헤매는 것보다는 한걸음 물러서서 숨을 고르는 것이 맞겠지. 그렇지만 한편으론 알 수 없는 불안함이 관자놀이를 쿡쿡 찔러온다. 이대로 육대종을 놔줘도 될까? 다음번에 더 큰 위협으로 돌아오면 나는 그 상황을 이겨낼 수 있을까?

육대종을 쫓겠다는 욕심과 그동안 내 고집이 만들어 냈던 일들이 소용돌이치며 속내를 쉴 새 없이 찢어발겼다. 가슴은 미친 듯이 뛰고 시간이 점점 천천히 흐르는 기분이다.

양 측 모두 달갑지만은 않은 방도라는 것이 너무 괴롭다. 선택지는 두 개일 뿐이지만 비교할 것은 훨씬 많았다. 육대종을 쫓는 것의 득과 실. 그리고 포기하는 쪽의 득과 실. 각각의 득실을 가늠하고 견주며 남는 것은 혼란과 불안뿐. 무엇이 가장 훌륭한 선택인지 하늘은 알까?


“윽.....”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천의결의 구결이 제멋대로 머릿속에 떠오른다. 억지로 그 위에 두꺼운 장막을 쳐 보지만 어찌 된 영문인지 천하제일의 둔재는 나는 그 찰나의 순간에 천의결을 다시 떠올리고 그것에 휘둘리기 시작했다.

안개가 걷히려는 것이 두렵다. 천의결에 휘둘리다가 내가 원치 않은 상황에 접어드는 것이 싫다. 잠에서 깬 다음 천의결을 버렸던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옳지 않은 길이다. 나와는 상관없는, 그저 천의를 읽어낼 뿐인 힘이다.

종국에 가서야 깨달았다. 천의는 토리나의 목숨을 빼앗았고 내 힘마저 앗아갔다. 그런데 대체 무엇이 옳다고 천의결에 목을 매야 할까? 어디서부터가 내게 해가 되는 천의이며 그렇지 않은지 분간할 줄도 모르면서 그런 무지막지한 주마(走馬)에 오를까.


“어엇, 왜 그래요?”


침음이 흘러나오니 문영과 종리혜가 깜짝 놀라며 나를 부축했다. 그것을 기다렸다는 듯 몸에서 힘이 빠진다. 천의결의 구결이 회오리치는 와중에 나는 의식을 다잡으며 둔해 빠진 머릿속을 채찍질했다.

생각해라. 천의를 깨닫기 전에 길을 닦아라. 두 사람의 팔이 나를 끌어올린다. 천천히 그 힘에 이끌리는 순간, 무언가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설명할 수 없는 묘한 방법으로 나는 새로운 방법을 떠올렸다.


“양자 모두를 취하면....”


“네?”


“추격은 그만두되 그만두지 않겠습니다.”


머리가 차츰 맑아진다. 천의결은 온데간데없이 심상 너머로 침잠한 뒤였다. 그 사실에 안도하며 두 사람의 부축을 벗어난 나는 천천히 생각을 정리하며 말을 이어갔다.


“뒤만 쫓아서는 영원히 따라잡을 수 없을 테니 뒤를 쫓는 대신 앞을 쫓아야 합니다.”


“아, 그 말씀은....”


“어차피 우리 검문과 심가장을 건드린 자입니다. 남해는 물론이고 동평도 그들을 받아주지 않을 테고, 그렇다고 마물의 소굴인 황도나 북해로 가봐야 명을 재촉하겠지요.”


거듭된 정벌을 통해 많이 안정되었다고는 하나, 황도와 북해는 마물의 소굴이나 다름없는 땅이다. 운 나쁘게 흉악한 마물과 마주치면 절정고수라도 목숨을 걸어야 하는 땅에 제 발로 걸어들어갈 사람은 중원 천지에 아무도 없었다.


“가만, 문 소협. 여기서 서악으로 가려면 어디로 가야 하죠?”


“음, 잠깐만요 일단 우리가 있는 곳이 팔산에서 이렇게 저렇게 왔으니까....... 저쪽이 이상한 쪽으로 간 덕분에 추종술 없이 막 달리면 우리가 먼저 가겠는데요?”


“저쪽이 이상한 방향으로 간 게 걸리는데 그 방향에는 뭐가 있죠?”


종리혜가 조심스레 이견을 제시했다. 그 말도 맞군. 조금 생각해볼 필요가 있어. 종리혜의 물음에 문영은 머리를 긁적이다가 영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끄응, 글쎄요. 저긴 별것 없어요. 끽해야 촌락이 몇 개 있었으면 모를까, 계속 저쪽으로 내려가면 남해가 나오긴 하죠.”


남해왕이 개척한 해로를 제외하곤 마물이며 해적이 횡행하니 해로를 통해 탈출할 리도 없겠군.


“상처와 피로 때문에 촌락으로 갈 수는 있겠지만 결국 저들이 도착할 곳은 서악 뿐입니다. 갈곳을 정했으니 서두릅시다.”


우리는 방향을 틀어 곧장 서악 유일의 관문으로 향했다. 한편으론 불안했지만 이젠 모든 걸 하늘에 맡기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반 시진 가량을 움직인 끝에, 마침내 종리혜가 육대종 일행을 발견했다.


“놈들이에요.”


종리혜가 조심스레 저 멀리 보이는 불빛을 가리켰다. 고작 반시진만에 따라잡았군. 용케도 불이 붙어 있는 횃불 좌우로 두 개의 그림자가 보였다. 하나는 힘에 부친 듯 뒤뚱대면서 다리를 놀리고 있었고, 다른 한쪽은 어딘가 불편한 듯 느릿느릿 달리고 있었다.


“둘 다 정상은 아니네요.”


“우리도 별로 좋은 상태는 아닙니다만 지금이 적기인 것 같군요.”


그 말을 시작으로 먼저 종리혜가, 그다음으로 문영이 앞서 달려나갔다. 이제 나와 속도를 맞출 필요도, 체력을 아낄 필요도 없었기에 벌어진 상황이다. 새삼 내 처지에 안타까움을 느끼며 피로에 늘어지려는 몸을 다독여 힘겹게 언덕을 따라 달렸다.

비 때문에 미끄럽기 짝이 없는 언덕에서 구를 뻔하기를 수차례, 오래지 않아 격전의 틈새에 머리를 들이밀자 날카롭게 공기가 갈라지는 소리가 선명하게 들렸다. 나찰편이 채찍으로 비와 잡초를 갈가리 찢어발기며 종리혜를 떨쳐내려 하고 있었다.


“이 거지 같은 계집이!”


“내가 왜 거지 같다는 거예요? 아줌마 지금 화장 다 망가진 거 알면서 그렇게 잘난 체 하는 알아요?”


확실히 나찰편의 얼굴은 폭우로 엉망이 돼서 우스꽝스럽게 변해 있었다. 나찰편은 무심코 자신의 얼굴을 쓸어내리더니 이내 더욱 격분해서 거칠게 채찍을 휘둘렀다. 이에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단순한 격장지계에 넘어가다니. 종리혜는 더욱 매섭게 채찍 사이로 파고 들어가며 거리를 좁히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금방 승부가 날 것만 같았다.


“죽어어!”


그런 흐름에 훼방을 놓은 것은 육대종이었다. 품속에서 무언가를 꺼내 종리혜의 발치에 집어 던졌다. 날카롭게 빛나는 철질려다. 모르긴 해도 독이라도 바른 물건이겠지. 당황한 나머지 해결할 힘도 없는 주제에 검병에 손을 얹었다. 그렇지만 육대종의 수작이 금세 파훼되어 나는 다시 검에서 손을 뗐다.


“어허, 이분 또 이러시네.”


문영이 가볍게 손을 휘젓자 바닥에 깔려있던 철질려가 무슨 낙엽처럼 팔랑대며 언덕 너머로 날려갔다. 육대종이 이를 박박 갈며 분통을 터트렸다.


“이건 또 무슨 사술이냐!”


“에휴, 그게 사파인이 할 소린 아니잖아요. 그런 건 원래 수염만 길어서 꼬장꼬장해 보이는 정파 노친네들이 하는 대사거든요.”


문영은 반쯤 장난스럽게 육대종을 농락하고 있었다. 이렇게 되니 내가 쫓아온 것이 괜한 짓만 같았다. 어쩌면 나 없이 저들을 쫓았으면 더 빨리 잡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마저 든다. 물론 내가 없었다면 저 둘이 육대종을 쫓을 일도 없었을 테니 사실 본말전도이긴 하다.


“애비 뒈진 년! 그 새끼한테 당하지만 않았어도 네년은 가랑이부터 찢어버렸다!”


“야! 너 방금 뭐라고 했어? 우리 아빠가 뭐 어째?”


종리혜가 날카롭게 소리를 지르며 냉큼 채찍을 쳐내며 달려들었다. 종리혜가 너무 급했다. 채찍이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바싹 움직임을 봉했다. 이거 도리어 격장지계에 빠지면 어쩌자는 거야?


“돕겠습니다.”


비에 젖는 풀숲을 미끄러지듯 달려가 나찰편의 후위를 점하고 섰다. 그러면서 두말할 것도 없이 몰아치는 채찍의 비를 간신히 쳐내며 숨을 가쁘게 몰아쉬었다. 나찰편이 온전한 상태였다면 벌써 목이 달아났겠군. 흉악한 성정만큼이나 어중이떠중이 무인은 아닐 성 싶다.


“너 내가 가만히 안 둬! 우리 집을 들먹이고 목이 무사한 게 세상에 둘 있는데 하나는 반병신이고 다른 하나는 완전 병신이거든?”


“진정하십시오, 소저.”


길길이 날뛰는 종리혜를 진정시키려 애쓰며 일단 종리혜의 팔을 붙잡고 채찍의 범위 밖으로 벗어났다. 종리혜와 채찍을 동시에 상대하기엔 내 실력이 너무 부족했다.


“크으.... 소천검 너도 날 놀리는 거냐? 조금 귀엽다고 봐줬더니....”


나찰편이 공연히 허공에 채찍을 휘두르며 별안간 화를 내기 시작했다. 내가 뭘 어쨌다고 저러는 걸까? 아무튼 나찰편이 날 어찌 여기든 상관없는 일이니만큼 우선 상황부터 정리해 볼까?


“그럼 이만 둘 다 항복하시는 건 어떻습니까?”


“아, 도 공자님. 이 육중한 분은 이미 잡았어요. 저분만 좀 진정하면 됩니다.”


어느새 문영은 육대종을 제압한 뒤였다. 육대종은 허공에 떠서 허우적대고 있었고 허리에 찬 단검이며 품속에 들어있던 것들이 짤랑대며 바닥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놔, 놔라!”


쿠웅!


육대종이 외치자마자 문영이 그를 내동댕이치듯 내려놓았다. 아니, 잘 내려놓았는데 그가 혼자 허우적대다가 얼굴부터 떨어진 거라고 해야 할까?

육대종이 붙잡힌 다음부터는 나찰편도 채찍을 내려놓고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포기한 걸까? 그런 나찰편의 혈도를 단숨에 점하며 종리혜가 처음으로 싸늘한 태도로 나찰편을 노려보았다.


“아줌마. 아줌마는 끝나도 끝난 게 아닌 거 알지? 나 속 좁은 여자야.”


무섭군. 종리혜가 약간 천방지축인 감이 없잖아 있는 만큼 실로 두렵기 그지없는 경고였다. 그러나 나찰편은 조금 창백해졌을 뿐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하기야, 종리혜가 설마 나찰편을 죽이기야 할까. 아마 그런 맥락에서 나찰편도 체념한 게 아닐까 싶다.


“우리를 어쩔 셈이냐?”


두 사람을 단단히 포박하자마자 육대종이 쏘아붙이듯 물었다. 점점 가늘어지는 빗줄기를 의식하며 나는 잠시 고심하다가 대답했다.


“죽거나 크게 다치지는 않을 겁니다. 하지만 신변을 구속하지 않겠다는 보장은 할 수 없겠군요.”


“흥, 물러터진 놈. 네가 그러니까 무공까지 잃고 그 꼴이 된 거다.”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렇다고 굳이 목숨까지 빼앗는 악수를 둘 필요는 없으리라. 나도 원한이 없는 것은 아니니 감시자를 붙여 산속에 처박아 두거나 뇌옥에 가두는 것까지는 생각해 두고 있었다. 그 정도로도 육대종에겐 충분한 제약일 것이다.


“자, 그럼 이 짐 덩이들은 제가 들고 갈게요.”


문영이 빙그레 웃으며 손짓만으로 두 사람을 들어 올렸다. 어느새 비는 그치고 먹구름이 걷히고 있었다. 저 멀리서는 달이 은은하게 빛나고 있었고 그 반대편에서는 붉은 기운이 올라오고 있다. 어느새 날이 밝아오는 모양이다.


“킥.”


다 끝났다는 안도감이 듦과 함께 어딘가에서 비웃음이 분명한 소리가 들려왔다. 누가? 어디서? 잘못 들었으리라 여기고 시선을 달빛이 내리비치는 쪽을 바라보았다. 차라리 보지 않았으면 어땠을까? 여명이 만들어낸 붉은 기운을 뒤로하고 마주한 창백한 달빛은 석양만큼이나 붉게 물들어 있었다.


“아하하.... 뭐죠 이건?”


문영이 가볍게 웃으며 가슴에 손을 댔다. 붉은 피가 손가락 사이를 타고 흐르고 있었다. 둥실 떠올랐던 두 사람이 천천히 아래로 내려간다. 두 사람이 떠오르며 만들어졌던 그람자에서 뻗어온 삐죽한 무언가가 그와 함께 연기처럼 사라졌다.


“문 소협!”


“죽여!”


문영을 해친 것이 무엇일까? 그림자가 어떻게 사람을 해한단 말인가? 그것에 대해 생각할 겨를도 없이 나는 본능적으로 검을 뽑아들고 짓쳐드는 철봉을 받아치며 이를 악물었다. 검게 물든 범이 시커먼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범의 가죽을 뒤집어쓴 기묘한 사내들이 종리혜와 나를 노리고 있었다.


“흑호단!”


종리혜가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저들의 정체를 알려주고 격전에 빠져들었다. 흑호단. 제길, 나찰편 외에도 흑호단이 있었지. 그들은 어디 있었을까? 분명 팔산에서는 없었다. 그렇다면.....


“우리가 도망치는 줄 알았겠지? 천만에. 흑호단을 설득하고 있었지.”


포박에서 풀려난 육대종이 코를 훌쩍이면서 가쁘게 숨을 내쉬고 나를 비웃었다.


“그러니까 날 보자마자 죽이랬잖아. 멍청아. 돈 줄 사람이 없으면 흑호단도 그냥 집에 갔을 텐데 크큭. 아, 그 계집은 다 썼으니까 죽여.”


흑호단 사내가 나찰편을 풀어주려던 찰나, 육대종이 대수롭지 않게 나찰편의 죽음을 명했다. 토사구팽도 이런 경우가 있을까? 나찰편이 뭐라 소리를 지르기도 전에 목이 뎅강 잘려나간다.

그 광경에 경악하며 나는 재차 날아드는 대감도를 받아내며 오만상을 찌푸렸다. 육대종의 악행을 꾸짖을 시간조차 낼 수 없다. 제기랄, 이건 대체 무슨 상황일까? 다시금 혼란이 나를 집어삼켰다.


“봐. 이렇게 했어야 한다니까. 어쨌든, 이런 한적한 곳을 무덤으로 삼으려 한 건 칭찬해 줄게. 덕분에 편하게 널 죽일 수 있을 거 같아.”


“꺄악!”


출중한 실력을 자랑하던 종리혜의 비명에 정신이 번쩍 든다. 생각보다 종리혜의 움직임이 나쁘다. 그동안 체력이 많이 떨어져서일까? 흑호단의 사이한 수법에 당한 걸지도 모르지.


“크윽!”


뜨끈한 것이 옆구리를 훑고 지나갔다. 뜨끈한 것이 달궈놓은 것 같은 뭔가가 허리를 타고 이슬이 맺힌 풀밭을 붉게 물들인다. 마치 새빨간 달이 빛나는 것처럼 사방은 어느새 붉은 달빛에 젖어들고 있었다.


“하아, 하아....”


내 옆구리에 철조(鐵爪)를 휘둘렀던 사내가 잔뜩 흥분한 채 철조에 박혀 있는 무언가를 냉큼 입가에 가져댄다. 범 가죽이 피에 물드는 것을 아랑곳하지 않고 그 사내는 그것을 입에 넣고 오물거렸다. 나도 모르게 옆구리에 손이 간다. 옆구리살이 한움쿰 사라져 있었다. 몸과 마음이 싸늘하게 식는다. 격전 속에서 잊고 있던 격통과 본능적인 역겨움이 몰려왔다.


“크아악!”


옆구리를 움켜쥐고 바닥에 웅크렸다. 흑호단의 흉명이 떠오르고 그 사실을 말해 준 심유환의 얼굴이 소용돌이치다가 이내 사라진다. 덜덜 떨리는 와중에도 용케 쥐고 있는 검을 지팡이 삼아 일어섰다. 그러나 투지는 점점 무뎌지고 있었다. 피가 너무 많이 쏟아진다. 경험상 이런 상태로는 일각도 채 버티지 못한다.


“저 계집은 면죄부로 삼아야 하니까 못 먹지만 너는 얼마든지 먹으라고 전해 뒀어. 이왕이면 최대한 고통스럽게 해달라고도 했지.”


잔악무도한 놈. 한순간만이라도 기회를 준다면 반드시 육대종의 목을 날리리라. 그렇게 다짐하고 나는 다시 검을 쥐고 일어섰다. 그러나 이번에는 두 합을 버티는 것이 고작이었다. 집요하게 파고든 무언가가 다시 한 번 옆구리 살을 잡아 뜯었다.


“커헉...”


살을 뜯어간 여력에 몸이 빙그르르 돌며 비틀거리고 동시에 힘없는 비명이 터져 나온다. 종리혜의 목소리가 들려오지만 그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우연찮게 시선에 닿은 문영은 미동도 하지 않고 있었다. 문영을 해친 알 수 없는 것이 잠시 떠올랐다가 곧 지워진다. 당장 고통 때문에 다른 일을 헤아릴 수 없었다.


“.....지 마요!”


이게 내 길인가? 천의를 버리고 선택한 길의 끝은 한없는 절망이란 낭떠러지다. 이게 내 한계였다. 끝에 파국이 가다리고 있었어도 천의를 따라 가는 편이 내 명줄을 보전하는 데 더 도움이 되리라는 사실이 허탈하기만 하다.


“포.......”


아득한 외침을 흘려넘기며 나는 오히려 웃었다. 허탈해서. 하지만 후회가 가득하지는 않아서다. 그 끝이 비참하든 평온하든 나는 분명 나를 뛰어넘기 위해 노력했고 또 노력했다. 그래서 후회는 없었다. 일기당천과의 싸움. 그리고 연달아 펼쳐진 격전 속에서 나는 내 힘과 변화를 보았고 그것을 끝까지 고집했다.


“.......라고요!”


아아, 그렇다. 슬퍼할 필요는 없다. 여기서 끝난다 해도 이 세상은 온전히 돌아간다. 폰테일과 볼마르그를 비롯한 영웅들은 결국 파천마제를 물리치고 빙룡이란 재앙을 막아내리라. 어쩌면 심하령이 무림의 힘을 결집해서 서역의 영웅과 힘을 합칠지도 모르지. 만약 그게 된다면 역사에 남을만한 일일테니 그걸 보지 못하는 건 아쉽다.


“일......나!”


종리혜의 기척이 가까워진다. 어찌어찌 내게 가까워진 모양이다. 땀내 사이로 묘한 향내가 나는 여인의 품에 안겨 쓰러지며 이런 최후도 나쁘지 않으리라는 생각을 해 본다. 그때도 소렌의 품 안에서 죽었는데, 어쩌면 나는 여인의 품에서 죽을 팔자려나?


“일어나라고요!”


귓가에 천둥처럼 몰아치는 외침에 거진 감겨 있던 눈이 반쯤 떠진다. 이상하게 정신이 또렷하다. 옆구리에 다시 뜨끈한 것이 파고드는 것 같더니 이내 차갑게 식어버렸다. 이 느낌은 마치 끈적한 얼음을 상처에 집어넣는 것 같다. 익숙한 느낌. 심하령이 준 고약을 바르면 이런 느낌이...


“심 소저....?”


나를 품에 안고 있는 여인은 종리혜가 아니었다. 환하게 분간되기 시작한 그 모습은 땀과 빗물에 젖어 있는 심하령이었다.


“다 쓸어버려욧!”


심하령이 주위를 향해 사자후를 내지른다. 이토록 그녀가 언성을 높인 적이 있을까? 앞으로도 그럴 날이 없을 것처럼 심하령은 힘껏 소리를 높여 누군가에게 그리 외쳤다. 그와 함께 들려온 우렁한 목소리. 한없이 낯설며 낯익은 그 목소리에 나는 나도 모르게 눈물이 솟아올랐다.


“천검대.....”


천의검문의 일대제자로 이루어진 천의검문의 일익(一翼). 무림 최고의 검대(劍隊)를 논하자면 그 이름을 절대 빼놓을 수 없는 최강의 무력집단. 그게 바로 천검대다. 심하령. 그리고 천검대. 그렇구나. 천의검문도 나를 구하기 위해 움직이고 있었어!


이상하게 기력이 샘솟는다. 내공 하나 없는데 내공이 있는 것처럼 체력과 정신력이 온전해지는 느낌이 든다. 죽지 직전의 회광반조(回光返照)일까 하는 씁쓸한 추측을 잠시 한 뒤에, 나는 처음으로 소문주의 권위를 빌어 그들의 위에서 소리쳤다.


“천검대! 적을 멸하라!”


“존명!”


더 무슨 설명이 필요하랴? 어지간한 문파 하나를 하루 안에 멸문시킬 수 이들 앞에서 흑호대 따위의 사도(邪徒)는 상대가 될 수 없었다. 일검에 하나씩 목이 달아나는 것은 물론이고, 그들의 병장기와 새까만 범 가죽도 무수한 검기 아래 동강 났다.


“끝... 났다고? 하하핫! 이게 뭐야!”


숨 몇 번 내쉴 사이에 흑호대는 전멸했다. 그 한가운데서 육대종이 황망한 시선으로 무릎을 꿇은 채 실실 웃고 있었다. 가자. 육대종을 향해 몸을 움직였다. 심하령의 손길을 뿌리치고 일방적인 학살이 자행되었던 전장을 넘어 육대종에게 느리지만 분명하게 가까워졌다.


“길을 열어라!”


천검대가 그렇게 외치며 나란히 서서 육대종으로 향하는 검의 길을 만들어낸다. 웅장한 그 광경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 것이 조금은 안타깝다. 세상에서 가장 긍지 높은 검객들을 뒤로하고 나는 육대종 앞에 섰다.


“충고 고맙다.”


무심코 허리를 뒤졌지만, 허리에는 검이 없다. 이런, 어딘가에 빠트린 걸까? 그러나 그때 누군가가 내 손에 꼭 익은, 천의검문의 소문주만이 쥘 수 있는 검을 양손으로 들어서 내게 바쳤다. 공손히 무릎을 꿇고 있는 사내는, 붕대로 온몸을 감싼 해 머리를 숙이고 있는 그는, 바로 천검대주 한상염이었다.


“불초 상염, 감히 소문주를 위해 돌아왔나이다.”


빙그레 미소가 지어진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나는 차갑게 입을 꾹 다물고 육대종을 내려다보았다.


“유언은 듣지 않겠다.”


슈욱!


육대종의 목이 잘려나갔다. 피조차 묻지 않을 정도로 정교하게 베어져 나갔다. 육대종의 웃음소리가 뚝 끊긴 것을 확인하고 나는 검을 집어넣고 앞에 부복해 있는 한상염을 일으켜 세웠다.


“수고했습니다. 천검대주. ”


“다음은 제 차례인 줄 아옵니다.”


죽여달란 말이군. 나는 서슴없이 그의 어깨 즈음에 검을 들이밀었다. 그러나 그 누구도 동요치 않았다. 심지어 그를 대주로 모시는 천검대마저도.


“아니.”


나는 검을 다시 치켜들었다가 다시 반대편 어깨로 향했다. 무심코 어깨에 검을 가져댔다가 취한 행동이다. 영문을 알 수 없는 행동에 일순간 주위가 술렁였다. 모를 만도 하지. 이건 서역의 관습이니까.


“목숨을 구원받았으니, 대주께서 생각하시는 그 죄에 더는 의미가 없습니다.”


팔자에도 없는 위엄을 떨었지만 어째 익숙할뿐더러 어색해 보이지도 않았다. 아, 그래. 서역에서 이렇게 당당했던 적이 있었지. 그 덕인지 누구도, 한상염 본인도 내 말에 이의를 표하지 않는다. 이런 기분도 나쁘진 않군.


“큭.....”


뒤늦게 격통이 찾아온다. 검을 떨어트리고 흘러내리듯 쓰러지는 나를 한상염이 가까스로 받아낸다. 이어서 천검대 중 일인이 나를 대신 부축하고 또 다른 누군가가 한상염을 부축했다.


“나는 괜찮습니다. 그보다 문 소협을....”


저 멀리 쓰러져 있는 문영을 가리키며 그렇게 말했다. 그러나 그 순간 지끈거리는 두퉁과 함께 꺼림칙한 느낌이 들었다. 문영을 해친 그건 무엇이었을까? 오랜만에 궁극에 경지로 돌아온 기분을 내서인지, 어렵지 않게 그것의 정체를 확신할 수 있었다.


“물러서!”


어디서 그런 힘이 났는지, 나를 부축하는 이들을 단숨에 뿌리치고 문영을 향해 다가가는 천검대원을 덮쳐 쓰러트렸다. 엉망진창으로 나와 천검대원이 나동그라졌다. 그와 함께 문영의 몸이 만들어낸 그림자에서 삐죽한 무언가가 본래 천검대원의 미간이 있던 자리까지 뻗어 나왔다가 연기처럼 사라졌다.


“저건 대체....”


천검대가 처음으로 크게 술렁인다. 그들 중에서도 저 날카로운 무언가에서 사이함을 느낀 이는 적지 않으리라.


“저건....”


토리나와 함께 황무지에 배치되었다가 나는 사기를 다루는 마법사들. 네크로멘서와 맞닥뜨렸다. 그리고는 두 번 다시 그들에게 당하지 않도록 그들에 대해 공부했지. 그림자에서 솟아난 저것은 분명 그들의 힘, 흑마법이었다.


“크르르....”


이어서 들려오는 흡사 짐승의 것을 닮은 울음소리. 예상이 들어 맞았다. 나는 없는 힘을 짜내서 힘껏 소리를 질렀다.


“사령술이다! 시신으로부터 떨어져라!”




감상이나 비평은 언제나 환영합니다.


작가의말

오랜만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네요. 연중인 줄 아셨던 분도 많았으리라 생각합니다.


이제 8장도 슬슬 막바지에 접어들었습니다. 이번 장의 제목인 등하불명은 참 많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등하불명이라는 떡밥이 8장 곳곳에 녹아들도록 글을 써냈는데 잘 되었는지 모르겠네요. 물론 가장 큰 것은 아직 안 나왔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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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5 11. 남해(南海) (2) +5 19.11.26 370 11 11쪽
224 11. 남해(南海) (1) +6 19.01.30 336 11 11쪽
223 10. 운칠기삼(運七技三) (10) +5 18.10.30 362 9 17쪽
222 10. 운칠기삼(運七技三) (9) +4 18.05.25 425 5 17쪽
221 10. 운칠기삼(運七技三) (8) +3 18.01.17 400 10 15쪽
220 10. 운칠기삼(運七技三) (7) +4 17.12.31 410 5 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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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8 10. 운칠기삼(運七技三) (5) +2 17.10.17 395 6 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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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6 10. 운칠기삼(運七技三) (3) +1 17.06.13 473 5 15쪽
215 10. 운칠기삼(運七技三) (2) +5 17.03.20 587 10 19쪽
214 10. 운칠기삼(運七技三) (1) +6 17.01.15 741 10 17쪽
213 9. 넘고 넘어서, 돌고 돌아서 (5) +3 16.12.18 871 14 20쪽
212 9. 넘고 넘어서, 돌고 돌아서 (4) +6 16.12.03 682 13 25쪽
211 9. 넘고 넘어서, 돌고 돌아서 (3) +5 16.11.02 1,006 10 25쪽
210 9. 넘고 넘어서, 돌고 돌아서 (2) +7 16.09.12 829 11 36쪽
209 9. 넘고 넘어서, 돌고 돌아서 (1) +5 16.06.13 923 10 22쪽
208 8. 등하불명(燈下不明) (9) +2 16.06.14 871 10 21쪽
207 8. 등하불명(燈下不明) (8) +8 16.05.11 918 17 31쪽
» 8. 등하불명(燈下不明) (7) +6 16.03.29 785 10 24쪽
205 8. 등하불명(燈下不明) (6) +4 16.02.14 836 14 28쪽
204 8. 등하불명(燈下不明) (5) +3 16.02.10 916 14 1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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