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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ferior Strugg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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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개
작품등록일 :
2013.01.31 09:36
최근연재일 :
2021.11.10 22:29
연재수 :
226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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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6,4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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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1,513,8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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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2.10 05: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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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글자
18쪽

8. 등하불명(燈下不明) (5)

DUMMY

“저, 저, 저.....”


육대종이 나와 천의검문의 소문주로 보이는 사내를 번갈아서 쳐다보며 말을 더듬었다. 나조차도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는 분명 천의검문의 소문주, 도군이었다. 나와 무척 비슷한 외모를 가졌다는 것이 우습기만 한 증거였다.


“실망이로군.”


위엄이 한껏 서려 있는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더불어 고고한 한 마리 학처럼 우리를 내려다 보는 사내의 모습이 좌중을 압도했다. 다음으로 이어질 말을 꺼내기 전엔 그 누구도 제대로 숨을 내쉬지 못할, 그런 위압감이 객잔을 짓누른다. 아아, 그렇구나. 저것이 천하에 이름이 쟁쟁한, 그야말로 최고의 후기지수다.


“심가에서 준비한 곳이라 하여 그래도 기대를 걸어 보았건만 이토록 소란한 곳을 내주었을 줄이야.”


고고한 풍모에 나조차도 잠시나마 눈앞에 서 있는 사내야말로 소천검이라고 착각을 하고 말았다. 그렇지만 오히려 너무나도 완벽한 풍모를 지녔기에 가까스로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현실이 아니라 서화를 보는 기분이 들어서였다.


“송구하옵니다. 하오나 이곳은 중원에서도 벽지로 치부되는 곳인지라 이런 누추한 곳을 마련하는 것이 한계였나이다. 부디 심가가 아니라 소녀를 벌해 주시지요.”


터무니없이 자신을 낮추는 모습에 나도 모르게 심하령에게 시선이 갔다. 심하령도 어느새 내게 시선을 주고 있었다. 시선이 마주친 우리는 서로의 이 상황에 대해 짚이는 것이 없음을 다시 한 번 확신했다.


“너, 너는 누구냐!”


육대종이 길길이 날뛰며 천의검문의 소문주인지 아닌지 모를 자를 가리켰다. 이에 펄쩍 뛴 것은 오히려 주위 사람들이었다. 풍파를 예상한 이들이 하나둘 객잔을 박차고 나가기 시작했다. 고작 숨 한번 내쉴 시간 만에 고요가 찾아들었다.


“이제 조금 조용하구나. 과연 이리되니 이곳도 꽤 쓸만한 잠자리가 아닐까 싶소. 물론 소란하다 하여 그대나 심가를 핍박하는 일은 없었을 겁니다. 하하하.”


딱 이야기 속에 나오는 대협 같은 모습이다. 사람들은 이야기 속에 나오는, 그렇기에 더욱 친숙한 영웅의 모습에 한 치의 의심도 품지 못하겠지. 물론 나도 당사자가 아니었다면 저자가 소천검이라 생각했을 것 같지만.


“내, 내 말을 무시하는 거냐! 검노! 저놈들을....”


철컥.


검노가 나서려던 순간이었다. 폭풍 같은 기세가 순식간에 가짜 소천검 쪽에서 휘몰아쳤다. 저들의 정체야 당연히 거짓일 테지만 이 기세는 진짜였다.


“큭!”


검노가 이를 갈며 뒷걸음질 쳤다. 검노의 움직임과 함께 어느새 반쯤 뽑혀 나온 검이 그를 막아서고 있었다. 소천검이 아니다. 검노를 막아선 것은 거의 폐인이 되었을 한상염이었다.


“목숨이 아깝다면 물러나라.”


한상염이 나지막하게 검노를 위협했다. 검노는 물러서기 전에 힐끗 우리 쪽을 바라보았다. 그도 당혹스럽기는 마찬가지였는지 눈빛이 흔들리고 있었다.

검노도 어찌어찌 성취를 보았다지만 철검무룡은 천의검문의 검객 중 일절인 고수다. 그 정체를 두고 섣불리 도박을 걸 만큼 호락호락한 상대는 아니다. 결국, 검노는 한껏 뒤로 물러나 육대종 앞을 막아섰다.


“그, 그래!”


그때 육대종이 냅다 소리를 지르며 검노를 밀치고 가짜 소천검을 가리켰다. 무언가 묘수라도 떠올렸는지 얼굴에는 다시 자신감이 가득 차 있었다.


“너. 너는 가짜야! 소천검이 나를 몰라볼 리 없잖아? 말해 봐라. 넌 그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겠지!”


“흥, 설마 내가 그 수모를 잊어버려서 네놈들을 살려두었다고 생각하느냐? 진천이라는 이름이 더러워질까 검을 거두었거늘 참으로 불쾌하기 짝이 없구나.”


소천검을 자처하는 사내가 한껏 인상을 찌푸리며 소매로 입과 코를 가린 채 말을 이었다. 육대종을 정말로 불쾌하게 여기는 그 모습에 육대종의 얼굴이 한없이 달아올랐다.


“어, 어디서 개수작을 부리는 거냐! 네놈들은 가짜야. 우리 쪽이 진짜다!”


“흥, 기왕이면 저런 거렁뱅이보다는 좀 더 그럴듯한 자들을 내세워보는 게 더 좋았겠군. 저들이 어딜 봐서 천의검문 사람이란 말이지?”


자신만만하게 말을 내뱉던 육대종도 우리 몰골과 2층에 서 있는 자들의 풍모를 비교하니 할 말이 나오지 않는 모양이다. 그때 객잔 바깥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이들의 목소리마저 들려왔다. 대체로 육대종을 미치광이 취급하는 목소리가 많았음은 말할 필요도 없었다.


“아까부터 무슨 정신병이 도졌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렇다고 네놈을 벌해 봐야 천의검문의 이름이 더러워질 테니 마지막으로 아량을 베풀어주지. 자, 말해 보아라. 저들이 진짜고 나는 소천검의 이름을 훔친 가짜라는 말이냐?”


“그, 그건....”


근거가 있을 리가. 소천검 본인인 나도 내가 누구인지 의심스러울 정도인데 육대종이 대답이나 할 수 있을까? 육대종이 흔들리며 간신히 자리를 지키고 있던 사파 무인들마저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소천검이 가볍게 손뼉을 치며 주의를 끌었다.


“뭐, 좋소이다. 저들이 진짜라고 해 보겠소. 그런데 보아하니 저자가 천의검문의 소문주라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대체 저 몰골은 어찌 된 영문이오?”


“그러니까.....”


“일기당천을 거꾸러트린 자가 저 지경이 되었다. 이거 파천마제라도 나타난 모양이외다? 큰일이로군. 내 즉시 무림맹을 소집하겠소. 육 대공자 그대는 파천마제에게서 소천검을 구해 온 공이 크니 무림맹주를 맡아 주시겠소?”


사방에서 킥킥대는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아니, 얼마 지나지 않아 웃음소리는 실소로, 그리고 박장대소로 번져갔다. 육대종이 급기야 분통이 터져서 애꿎은 사파 무인을 걷어차고는 고함을 내질렀다.


“아니야! 우리가 소천검을 잡았다! 소천검은 주화입마로 무공이 격감해 있었다고!”


“하, 좋소. 슬슬 그만합시다. 도저히 같은 공기를 마신 자가 뱉은 말이라고 받아들이고 싶지 않으니 말입니다.”


소천검이 버러지를 피한다는 느낌을 풀풀 풍기며 몸을 돌렸다. 그리고 그 뒤를 이어 의가제일과 철검무룡이 몸을 돌렸다. 검노가 남몰래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그 와중에도 육대종은 연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이, 이건 개수작이로구나! 그래, 심가장이 꾸민 짓이야. 거래는 끝이다! 천금화와 의가제일의 목숨은 없다!”


그 말에 마지막으로 몸을 돌리려던 천금화가 멈칫했다. 그리고 곧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 모습에 오히려 당황한 것은 육대종이다. 천금화가 천천히 층계를 내려온다. 이에 육대종은 물론이고 사파 무인들마저 엉덩방아를 찧는 둥 허둥지둥 위로 물러섰다.

천금화가 1층에 내려오자 군중 속에서 이따금 깊은 감탄이 터져 나왔다. 가까이서 보니 더 확실하다. 저건 천금화가 아니다. 하지만 그녀와 비견될 만큼 미모가 출중한 것은 분명해 보이긴 마찬가지였다.


“육 공자.”


“뭐냐?”


“당신의 말이 전부 사실이라고 치겠습니다. 그렇다면 천금화. 그러니까 저를 핍박하여 저런 몰골로 만들었고 소천검을 납치하기까지 했단 말씀이신가요?”


“그래! 그러니까 너희는 가짜잖아?”


분위기가 묘하게 흘러갔다. 어리석은 놈. 숨겨도 모자랄 판에 그 사실을 드러내다니. 육대종도 뒤늦게 흥분이 가라앉아 그만 안색이 퍼렇게 질리고 말했다. 그 모습을 잠자코 바라보던 천금화가 우리 쪽을 바라본다.


“윽...”


천금화의 시선이 나를 샅샅이 훑어보는 것 같다. 차마 그 시선을 마주하지 못하고 고개를 돌려 버렸다. 저 쪽 소천검과 나 사이에 당치도 않은 간극이 있어서다. 비교 자체가 우스운 일이지. 육대종의 말에 오히려 내가 다 부끄럽군.


“정말이지.....”


처음에는 나를 바라보던 시선은 이내 심하령 쪽을 향했다. 두 천금화의 시선이 마주친다. 그런데 어떤 일에도 동요하지 않을 것 같던 심하령의 시선이 먼저 흔들리며 그녀는 황급히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하기야 나도 소천검이라는 자를 온전히 볼 자신이 없긴 하지.


“어떤 사정으로 그런 거짓말을 늘어놓는지는 모르지만 그게 거짓이라는 것에 감사해야 할 겁니다. 천의검문과 심가장의 후계자를 이 지경으로 만들었다면요.”


“아, 아니. 그렇긴 한데 그래도 너희가 가짜....”


“네. 머릿속 생각까지는 자유이니 간섭하지 않겠어요.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는 게 어떨까요? 사실 제가 진짜 천금화고, 당신들이 데리고 있는 게 가짜일 가능성이 크지 않을까요?”


“뭐라고?”


“사실이 그렇지 않을까요? 형편 좋게 소천검이 주화입마에 들어 무공이 급감하고 여차여차해서 손쉽게 천금화까지 사로잡았다니. 그리고도 아직 천의검문과 심가장이 이 사실에 손을 놓고 있다는 것에 한 번도 의구심을 품지 않았었나요?”


“그거야 내 술책이 기발하고....”


퍼억!


육대종이 나가떨어지고 검노가 간신히 허공으로 떠오른 그를 받아낸다. 무슨 일인지는 그 직후에야 명백하게 드러났다. 천금화가 육대종이 안면에 주먹을 내지른 것이다. 육대종은 얼마나 세게 얻어맞았는지 코피를 줄줄 흘리면서 정신을 잃고 있었다.


“지금까지의 무례는 이것으로 용서하지요. 하지만 다시 한 번 허튼소리를 한다면 정식으로 공자의 가문에 탄원하겠습니다. 그러니 부디 서악에 누가 되지 않도록 육 공자께서는 행동거지를 다스리시기를.”


천금화는 손수건으로 피가 묻은 주먹을 슥 닦고는 그것을 휙 던지면서 다시 2층으로 올라갔다. 침묵이 주위를 지배했다. 검노는 정신을 잃은 육대종을 업고 무인들을 독촉해서 멍하니 서 있는 우리를 데리고 황급히 객잔을 나섰다. 우리를 비웃는 목소리가 메아리처럼 퍼져나오고, 우리는 그것을 피하려는 것처럼 더욱 바삐 움직여 그 자리를 떠났다.




“개자식들! 개자식들!”


새로운 객잔에 자리를 잡은 다음 육대종이 가장 먼저 한 일은 애먼 나를 걷어차며 욕설을 퍼붓는 일이었다. 힘없이 얻어맞는 척 하고는 있지만 사실 그동안 이골이 날 정도로 맞아왔던 터라 급소를 얻어맞는 일은 없었다. 더욱이 육대종과 같은 하수에게 맞는 일이라면 한 시진 내내 맞는 것도 해봄 직하다.


“허억, 허억, 빌어먹을 연놈들. 제깟 것들이 뭐라고......”


육대종이 코가 시큰대는지 붕대를 둘둘 감은 코를 만지작대면서 씩씩거렸다. 그러다가 문득 심하령에게 시선을 주었다. 느낌이 심상치 않다. 천금화에게 맞은 분풀이라도 하려는 것일까? 육대종이 한걸음 심하령에게 다가간 순간 어떻게 해야 할지 만감이 교차했다. 다리라고 잡고 매달릴까?


“힉!”


걱정은 기우였다. 덜그럭거리는 수갑 소리를 듣고서 육대종이 흠칫 놀라서 뒤로 물러섰다. 그러나 곧 이상한 표정을 짓더니 검노를 바라보았다. 그 시선의 의미를 알아차린 검노는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저 늙은이의 무공은 심가장의 독문공이 틀림없습니다.”


“빌어먹을! 뭐야 그럼? 곧 심가 새끼들하고 접촉할 텐데 그땐 뭐라고 할 거야? 사실 우리가 잡은 게 진짜고 저놈들이 가짜라고? 젠장할! 저 노인네가 노망이 나서 저 연놈들을 데리고 있었다고 해도 소용이 없단 말야!”


“저기, 그럼 우리 돈은.....”


“야 이 미친놈아! 지금 돈이 문제야? 우리가 잡은 것들이 아무 가치도 없으면 우린 다 죽어!”


육대종이 머리카락을 쥐어뜯으며 길길이 날뛰는 것을 지켜보다가 슬그머니 몸을 일으켰다. 그러면서 순간 엄한을 비롯한 이들과 눈이 마주쳤지만 이제 저들도 이전처럼 흉흉하게 기세를 내보이지는 않았다.

어떻게 된 건진 모르지만 잘 됐군. 지금은 저들과 실랑이할 생각이 전혀 없으니 말이다. 저들을 내버려두고 나는 한동안 말도 제대로 붙이지 못한 심하령과 심유환에게 다가갔다. 이 상황에 대해 알고 있으리라는 생각은 접어 두고서라도 조금이나마 이야기를 나누며 생각을 정리하고 싶었다.


“그래, 가짜 소천검께서 오셨구만.”


심유환이 넉살을 부리며 나를 맞아준다. 육대종이 전전긍긍하는 꼴에 꽤 기분이 나아진 모양이다. 그건 심하령도 마찬가지였는지 딱딱한 표정도 이전보다는 털끝만치는 좋아진 느낌이 들었다.


“무슨 영문인지는 모르겠군요, 어르신께서는 짐작 가는 바가 있으십니까?”


“나야 한 가지는 확실하지. 그 늙은이는 절대 내가 아니라는 점 말일세.”


“그렇습니까?”


내가 아니라는 구절에 흠칫 놀라면서도 그것을 내색하지 않으며 반문해 보았다. 반쯤 농담처럼 꺼낸 말인 것 같지만 의외로 심유환의 말투는 진지했다. 심유환은 조심스레 입술을 달싹여 심하령과 내게만 들릴 정도로 작은 소리로 말했다.


“다른 이들은 미처 보지 못했지만 나를 흉내 낸 이는 겉모습만 비슷하지, 실상은 아무것도 아닌 허깨비야.”


“허깨비라고요?”


“놈에게선 무공이 전혀 느껴지지 않아. 모르긴 해도 머리카락 뿌리까지 하얗게 센 걸 보니 아마 아무 노인네나 잘 씻기고 입혀서 앞에 내세운 것 같구나. 얼굴이야 인피면구를 쓰면 그만일 테고.”


꽤 위험한 짓을 하는군. 가만히 생각해보면 우리를 흉내내서 좋을 것은 하나도 없었다. 천의검문이나 심가장의 분노를 사는 것은 물론이고, 암중에 숨어 있는 우리의 적이 그들을 가만히 두지 않을 것이다.


“위험천만하게 저희를 흉내내면서 심가장까지 속였다니. 아무래도 저들 뒤에 누군가 있지 않겠습니까?”


답답한 마음을 담아 화제를 돌릴 겸 해서 새로운 이야기를 꺼내 보았다. 심유환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다시 육대종 일행의 눈치를 살피고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렇게 볼 수도 있겠지. 무엇보다도 천금화나 철검무룡을 자처하는 이들은 어느 정도 실력이 있는 고수야. 굳이 이름을 훔치지 않아도 잘 먹고 잘살 자들인데 왜 굳이 이런 짓을 벌이는지 모르겠구나.”


“우리가 알 수 없는 사정이 있을지도 모르지요. 소저는 어찌 생각하십니까?”


재녀로 이름 높은 그녀라면 무언가 알아낸 바가 있지 않을까 싶어 꺼낸 말이다. 물론 그녀에게서 답을 기대하지는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까지 답을 내는 건 인간의 영역에선 불가능한 일이다. 천의. 그러니까 궁극에 도달한 자라면 모를까.


“저들은..... 아니, 아무것도 아녜요. 아직은...”


그런데 심하령의 반응이 이상하다. 뭔가에 데인 상처를 보는 듯 떨떠름한 표정으로 그녀답지 않게 애매모호한 대답만 늘어놓고 있다. 딴생각이라도 하고 있던 것일까?

그때, 심하령이 잽싸게 주위를 살피다가 흙바닥에 글자를 썼다가 지워버렸다. 다른 이들은 못 보았겠지. 긴 여정도 끝에 와 있고, 지금 상황에 다들 혼란스러워하고 있었으니까. 그야말로 절묘한 시점에 심하령이 써내려간 그 글자 하나는 바로...


“검!”


누군가의 외마디 외침이 울려 퍼졌다. 그 주인은 다름 아닌 육대종이다. 영문모를 외침을 내뱉은 육대종은 사파 무인들이 지키고 있는 짐 더미를 헤집어 그 안에서 한 자루 검을 끄집어냈다. 그리고는 그것을 내 코앞에 들이밀고는 윽박지르듯 물었다.


“이건 천의검문의 후계자만이 가지고 있는 신물이지! 그렇지 않나?”


육대종이 꺼내든 것은 본래 내가 지니고 있던 검이다. 신물이라기에는 너무 볼품없는 검이지만 저만한 검을 찾아보기란 쉽지 않을뿐더러 검집에 천의검문의 문양이 새겨져 있으니 굳이 따지자면 천의검문의 후계자만이 가지고 있는 검은 맞다.


“그래, 이거야. 저놈들에겐 이 검이 없지. 크큭, 검노. 심상에 서신을 전할 사람을 구해라. 거래는 차질 없이 진행하겠다.”


고작 검 한 자루로 내가 소천검임을 납득시키겠다? 원래 멍청한 것인지 황당한 상황 속에서 믿고 싶은 것만 믿는 것인지 모르겠다. 만약 내가 모조품을 가지고 남을 속여먹는 자였다면 어땠을까? 그 상상을 하니 절로 웃음이 나올 것 같다.


“크큭, 감히 나를 물 먹였겠다? 검노. 팔산에서 누가 우릴 돕기로 했었지?”


“나찰편(羅刹鞭)이 팔산이 있고, 멀지 않은 곳에 흑호단(黑虎團)이 매복해 있습니다.”


“휘유, 그럼 나찰편을 이쪽으로 부르고 흑호단은 거래 직전에 난동을 부리라고 신호를 보내. 거래는 내일 밤이다.”


“나찰편! 그리고 흑호단까지! 파천성(破天城)의 주구들이 아직도 살아 있었을 줄이야. 대체 어떻게 그런 자들까지.....”


같은 사파인인 엄한마저 경악하며 대경실색한다. 상당히 악독한 이들인가? 내가 고개를 갸웃하는 것을 보았는지 심유환이 조용히 그들에 대한 설명을 덧붙였다.


“나찰편은 기문외병을 사용하는 고수지. 사람이 고통스러워하는 걸 밥 먹기보다 좋아하는 미친 계집이라고 보면 될 게다. 그리고 흑호단은 이름은 그럴 듯 하지만 금수처럼 사람을 덮치는 산적떼인데......”


잠시 뜸을 들였다가 좀 더 작은 목소리로 심유환이 속삭였다.


“사람을 잡아먹는다는 말이 있지.”


“식인을 한단 말입니까?”


미쳤군. 지금까지 보아왔던 이들이 심성이 고약한 무인이었다면 새로이 언급된 이들은 그야말로 악의 끝에 서 있을 망종들이다.


“흥, 심상이 허튼짓할 게 뻔하니 고용한 거지. 그런 놈들이 팔산 근처에 나타난 이상, 심상도 함부로 움직이지 못하겠지. 하여튼 꼭 정파 나부랭이는 늘 허튼짓을 한다니까.”


낭패다. 심하령이 써내려간 말은 구(救). 모르긴 해도 심상이 우리를 구한다는 말이 아니었을까? 하지만 육대종이 이 정도까지 준비를 해 둔 이상 그 계획도 어렵게 되었다.

더욱이 팔산은 상당한 벽지여서 변변한 고수가 없는 곳. 파천이라는 이름에 대응할 수 있는 곳은 여기선 심상뿐이다. 즉, 우리를 구하려 했던 계획이 어그러질 수도 있다는 의미다.


“소저, 이제 어떻게.....”


어떻게 알았는지 심상의 계획을 말해 준 심하령도 지금은 꽤 당황했으리라 여겼다. 그렇지만 이상하게도 심하령의 신색은 태연했다. 설마 나만 모르고 있는 것인가 해서 심유환을 바라보니 불행인지 다행인지 심유환도 당혹해 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걱정하지 마세요.”


심하령이 시끌벅적한 육대종 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유약해 보이지만 그 속내는 짐작할 수 없이 단단한 그녀는 확신에 찬 얼굴로 말을 이었다.


“우리는 무사할 수밖에 없으니까요.”




감상이나 비평은 언제나 환영합니다.


작가의말

오랜만에 글을 썼습니다. 격월연재가 버릇이 되었나... 좀 더 노력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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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3 9. 넘고 넘어서, 돌고 돌아서 (5) +3 16.12.18 872 14 2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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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 9. 넘고 넘어서, 돌고 돌아서 (2) +7 16.09.12 832 11 3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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