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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ferior Struggle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퓨전

요개
작품등록일 :
2013.01.31 09:36
최근연재일 :
2021.11.10 22:29
연재수 :
226 회
조회수 :
586,441
추천수 :
10,871
글자수 :
1,513,856

작성
16.12.18 22:45
조회
871
추천
14
글자
20쪽

9. 넘고 넘어서, 돌고 돌아서 (5)

DUMMY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승산이 있을까 하는 생각이다. 진천검결을 본 순간 저 그림자가 온전히 내 힘을 흉내 내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저건 대체 뭡니까?”


가장 먼저 내 옆에 다다른 장위가 신중하게 도를 겨누며 물었다. 숫기 없는 모습이 아닌 것 보이 장위도 꽤 긴장한 듯 했다. 무어라 해야 할까? 모두의 시선이 집중된 순간 나는 무책임한 한마디를 늘어놓을 수밖에 없었다.


“사술이 아닐까 합니다.”


“사술!.....”


“으음, 아직도 사술을 쓰는 곳이 남아있던 거네요. 잘됐군요. 이 기회에 파마의 속성을 가진 무공을 시험 해봐요, 우리.”


장위를 따라 달려온 종리혜가 생글생글 웃으며 그렇게 말했다. 마치 무거워진 분위기를 일신히려 억지로 웃는 것 같다. 그러나 장위는 고개를 저었다. 그는 저 그림자가 얼마나 터무니없는 괴물인지 눈치채고 있었다.


“그런 여유를 부릴만한 상대가 아닙니다. 저 외양과 검로는 필시 소문주님을 흉내낸 듯 합니다.”


“소천검과 싸워야 한다는 말이군요.”


흑경과 함께 마지막으로 합류한 심하령이 숨을 고르며 침중한 눈으로 나와 그림자 쪽을 바라보았다. 그림자는 인기척 하나 없이 기수식만 취한 채 이쪽을 향하고 있었다. 그런 한편 뒤편에서는 아인델프가 지면에 도형을 그려가며 정체를 짐작할 수 없는 마법진을 만들고 있었다.

잘은 몰라도 시간을 주어서는 안 된다는 느낌이 들었다. 만약 도망쳐서 파천마제에게 나에 대해 소상히 말하기라도 한다면 분명 사달이 나도 보통 사달이 나진 않을 것이다.


“에이, 썅! 그냥 붙어 봐! 그래도 내가 경험자니까 먼저.....”


흑경이 다짜고짜 달려든다. 이런, 나는 황급히 흑경을 말리려 했지만 너무 늦었다. 일검에 흑경이 피를 토하며 뒤로 날려왔다. 가슴팍에 커다란 검상을 입고 피를 울컥 토해내는 흑경에게 심하령이 달려간다. 종리혜가 황당하다는 듯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이, 일초지적이었어요?”


“.........그런 모양입니다.”


손속에 사정을 두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림자는 나보다 강하다고 할 수 있겠지. 어렵게 됐다. 한데 모여 협공을 펼치더라도 흑경이 빠지게 되면 가능성이 급감한다. 하는 수 없다. 설령 지더라도 내가 시간벌이를 하는 수밖에. 그렇게 생각을 굳히고 검을 든 순간, 그림자가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큭!”


강하다. 지금까지 상상만으로 펼친 가상의 비무가 얼마나 안일했는지 알 수 있었다. 무명검객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검압에 사정없이 뒷걸음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당하고만 있을 순 없다. 내가 시간을 버는 틈에...


“소문주님이 시간을 버는 틈에 어서!”


흑경의 상세를 돌보며 심하령이 외쳤다. 장위와 종리혜가 앞으로 달려나갔다. 시의적절하게 시작된 공세였지만 나는 그게 너무 무모하다는 걸 직감하고 소리를 질렀다.


“마법을 조심....!”


아무런 조짐 없이 지면이 폭발했다. 귀를 울리는 폭음과 더불어 종리혜가 나려타곤의 수법으로 간신히 폭발에서 벗어나는 것이 보였다.


“감히!”


한편 장위는 폭발을 돌파해서 어느새 아인델프에게 근접해 있었다. 장위가 패도적인 기세로 도기를 뻗어냈다. 그러나 그 순간 아인델프에게서 거무죽죽한 연기 같은 것이 터져 나와 장위가 재빨리 몸을 날렸다. 검은 연기와 닿은 지면이 시커멓게 물들었다.


“독까지....”


장위가 낭패했다는 듯 중얼거리며 한껏 뒤로 도약해서 거리를 벌렸다. 제길, 흑마법사가 아주 신이 났군. 독이라 해도 별것 아닌 수법들인데도 너무 낯설어서 다들 너무 움츠리고 있었다. 아인델프는 어렵사리 얻어 낸 시간에 연달아 주문을 외고 있었다.


“카모플라쥬(Camouflage)! 포그 오브 포이즌(Fog of Poison)!......”


마법사에게 시간은 금. 순식간에 열 개에 가까운 마법으로 무장한 아인델프는 비릿하게 웃으며 수인을 맺고 있었다. 그 손짓에 따라 사방을 가득 채웠던 음기가 아인델프에게 모여들었다. 탈진해서 안색이 좋지 않았던 아인델프가 서서히 굽은 허리를 펴고 비릿하게 웃기 시작헀다.


“힘을 회복할 틈을 주어서는 안 됩니다!”


그림자의 검세를 막아내며 답답한 마음에 외쳐 보았지만 너무 늦었다. 아인델프는 이제 다시 다크나이트 아머까지 걸치고 하늘 높이 떠오르고 있었다. 이럴 때 모래라도 뿌려서 주문을 방해해야 하건만 다들 두 손 놓고 있을 뿐이다.


콰앙!


바로 그때, 느닷없는 폭음이 주위를 울렸다. 폭음의 근원지는 바로 심하령의 면전이었다. 심하령은 매캐한 연기가 피어오르는 짤막하고 두툼한 막대를 아인델프에게 겨누고 있었다.


“크악!”


하늘 높이 떠올랐던 아인델프는 갑옷의 어깨 부분을 움켜쥐며 추락했다. 그와 함께 그림자가 촛불이 꺼지듯 휙 사라져서는 아인델프 쪽에서 나타나 그를 받아냈다. 덕분에 나도 한숨을 돌리며 일단 후퇴를 감행할 수 있었다.


“언니, 그거.....”


종리혜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심하령에게 다가갔다. 정확히는 심하령이 쥐고 있는 물체에. 심하령은 아직도 매캐한 연기가 피어오르는 그것을 한차례 털어낸 다음 품속에 갈무리하곤 아무것도 아니라는 양 무심하게 반응했다.


“못 본 걸로 해요.”


“좀 작긴 해도 화포 같은데 대체 어디서 구한 기물인가요?”


“아, 고마워요.”


멋대로 대화를 끝내버린 심하령의 주위로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흑경 역시 차츰 정신을 차리고 모여든 것으로 이제 다시 처음으로 돌아간 셈이다. 아니, 아예 처음으로 돌아간 건 아니다. 그림자의 실력을 어느 정도 판단할 수 있었으니 말이다.


“이, 이 찢어 죽일!”


아인델프의 갑옷 중 어깨 부분이 절정 고수의 지법에 맞은 것처럼 움푹 파여 있다. 생각보다 그 기물의 위력이 절륜하군.그러나 아인델프가 주문을 외며 망가진 갑옷이 점점 제 모습을 찾기 시작했다. 이대로 시간을 더 주면 곤란하지.


“무슨 좋은 방도가 없겠습니까?”


좋지도 않은 머리를 굴리는 대신 모두의 의견을 구했다. 하지만 그 누구도, 심하령도 좀처럼 대답을 주지 못하고 있었다. 그림자의 힘은 막강했고 아인델프 역시 만만한 적은 아니었기에. 그런 때에 장위가 슬며시 손을 들어 보인 것은 아인델프가 그림자 옆에 붙어 장황하게 주문을 외기 시작한 때였다.


“제가 저 괴이쩍은 것을 상대해 틈을 만들어 보겠습니다. 그러니 소문주께서는 저 마법사를 상대해 주십시오.”


“잠깐만요. 정말 괜찮으시겠어요? 저건 엄청 강해요. 차라리 소문주님이 나서는 게 낫지 않을까요?”


종리혜가 걱정스럽게 장위를 만류하며 물었다. 하지만 우문이다. 우문임을 알면서도 종리혜는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으리라. 장위는 침묵을 지키다가 이내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살며시 종리혜의 손을 떼어내며 걸어나갔다.


“저희로선 저 사악한 자를 상대할 수 없습니다. 소문주님께선 마법사를 상대하는 데 익숙하신 듯하니, 부디 제게 저 괴물을 맡겨 주십시오.”


다소 자신 없어 보이는 목소리였지만 장위의 걸음은 침착하게 앞을 향하고 있었다. 잠시 후 그림자 앞에 선 장위는 침착하게 도를 겨누고 호흡을 가다듬고 있었다.

반면 그림자는 미동도 없이 검을 집어넣은 채 자연체(自然體)를 취해 장위를 기다리고 있다. 한눈에 보아도 누가 위에 있는지 명확한 가운데, 장위가 돌연 포권을 쥐었다.


“남해일문의 장 모가 한 수 배워가겠습니다!”


바닷사람다운 웅지가 넘치는 걸걸한 외침이다. 역시 그림자는 미동도 하지 않는다. 이내 장위가 제 자리서 두서너 번 도를 휘둘러 보고는 말했다.


“먼저 가오.”


선공을 취한 건 장위다. 순식간에 거리를 좁힌 장위의 도가 그림자를 노린다. 그 순간 그림자가 요동친다. 폭풍 같은 검세를 뻗어내는 그림자에 밀려 장위의 기세가 한풀 꺾였다.


“크아아앗!”


검과 도가 힘을 겨루는 코등이 싸움에 접어든 순간, 장위가 벽력성을 토해내며 힘으로 그림자를 밀어붙인다. 그 순간 그림자의 기세가 꺾인다. 놀란 아인벨프가 주문을 멈추고 격전을 지켜보았다.

나 역시 힘껏 검을 움켜쥐고 격전 속의 찰나 같은 틈을 노려보았다. 아직이다. 지금 달려들어 봐야 그림자가 얼마든지 날 막을 수 있다. 조금 더 큰 틈이 필요하다. 야속하게도 내가 할 수 있는 건 장위를 믿을 수밖에 없었다.


“커헉!”


아무래도 일이 그렇게 쉽게 풀리지는 않을 모양이었다. 잘 싸우고 있던 장위의 비명이 들린다. 기어코 그림자의 시커먼검이 장위의 가슴팍을 갈랐다. 장위가 비명을 지르면서도 재빨리 손을 써 혈을 짚었다. 허공으로 솟구치던 핏물이 차츰 잦아들었지만 이미 옷섶은 뜨끈한 선혈로 물들어가고 있었다.


“허억, 허억....”


장위가 거친 숨을 삼키며 도신을 지팡이 삼아 일어났다. 부지불식간에 당했는지 가슴팍이 시뻘건 선혈로 흥건했다. 점점 커져가는 뻘건 얼룩에 시선을 빼앗겼던 나는 답답한 마음에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제길, 내가 조금도 틈을 주지 않았다면 없었을 일이다. 짧은 후회에 이어서 장위가 불굴의 의지로 반쯤 꺾여 있는 허리를 펴고 불쑥 그림자에게 달려들었다.


“하아압!”


순식간에 쇄도한 장위에게 검이 내리꽂힌다. 다른 누구도 아닌 내 검이었기에 결과를 확신할 수 있었다. 장위는 왼편 어깨를 내주고 말았다.

그러나 그것은 회심의 고육지책이었다. 장위가 상처를 도외시하고 그대로 품속에 파고들어, 그림자를 움켜잡고 힘껏 등 뒤로 메쳤다. 지면에 처박힌 그림자가 한순간 형체를 잃고 일렁인다.


“죽어라!”


쓰러진 그림자를 향해 장위의 도기가 짓쳐 들었다. 그야말로 일격필살의 공격이라 이대로 결판이 날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림자 역시 녹록지 않았다. 미동도 없이 쓰러진 가운데도 육신의 탄력만으로 바닥에서 죽 미끄러져 위기를 피하고 그 기세로 몸을 일으켜 빙글 돌아 검을 휘둘렀다. 그것을 시작으로 쉴새 없는 연격이 이어져 나왔다.


크가강! 카강!


연달아 쏟아지는 검기에 장위의 도가 정신없이 흔들린다. 공전절후의 대결이었다. 소천검을 흉내 낸 그림자의 무위는 설명하기 무색할 정도로 출중하다. 어깨를 다친 장위 역시 지친 사자처럼 처절하게 싸우고 있었다.

일검과 일도의 일초 하나하나가 개안할만한 절기들이다. 내 상상만으로 펼쳤던 비무로는 얻을 수 없는 주옥같은 심득이 사정없이 뇌리를 휘갈겼다. 몸이 떨린다. 지금 같은 상황을 기쁘게 받아들이고 있는 나는 미친 놈이 분명했다.


“세상에......”


종리혜 역시 마찬가지였다. 놀란 눈으로 장위와 그림자의 격전을 새겨넣으며 종리혜는 그녀 역시 무인이라는 걸 입증하듯 완전히 눈앞의 혈투에 몰입해 있었다. 아니, 종리혜 뿐만이 아니다. 시간이 멈춘 듯 천검대와 마물들마저도 싸움을 멈추고 두 고수의 대결에 집중하고 있었다.

검기와 도기가 난무하는 격전은 한순간에 백여 합에 이르렀다. 장위의 도가 점점 무뎌지고 있었다. 고육지책이 만들어낸 미미한 차이였지만 그 차이가 벌어지는 것이 똑똑히 보였다.


“후욱, 후욱....”


장위가 어렵사리 절초를 펼쳐 가까스로 위기를 넘겼다. 이것이 마지막 구명절초라는 건 분명해 보였다. 그게 아니라면 장위가 다시 방어를 도외시하고 양 손으로 도를 움켜쥐었을 리 없다. 이제 도박을 걸 작정이리라. 그림자가 일체의 동요 없이 무심하게 진천검결을 펼쳐낸다. 그리고 장위의 눈에 광망이 번쩍였다.


“이게 마지막이외다.”


미증유의 기운이 피투성이가 된 장위의 주위에 도사린다. 그림자가 뻗어낸 기운이 장위의 코앞에서 뭔가가 걸린 것처럼 탁 멈추었다. 일렁이는 무형기가 그림자의 검을 그물처럼 옭아매고 있었다. 장위가 조용히 도를 횡으로 겨누었다. 그림자가 반대편에 새로운 검을 만들어 내지만, 이미 장위는 준비를 끝낸 뒤였다.


“해왕기(海王氣)? 언제 저걸 완성하신!....”


장위의 절기를 알아본 종리혜가 외쳤다. 그렇지만 장위의 신형이 이미 그림자를 지나쳐 간 뒤였다. 그림자의 신형이 사분오열되며 갈라진다. 바로 지금이다. 다시 오지 않을 천재일우의 기회다. 나는 바람처럼 쇄도해갔다. 은빛 섬광이 나를 앞서 아인델프에게 뻗어나갔다.


“우오오오!”


요란한 기합성과 더불어 은휘만리의 일초가 아인델프의 몸을 때렸다. 화포가 터진 것처럼 요란한 굉음이 울린다. 힘껏 뻗은 검이 무언가에 걸리는 것이 느껴진다. 전신을 뒤덮었던 다크나이트 아머가 한 점에 보여 있었다.

끝인가? 이대론 뚫을 수 없다는 직감에 사무쳤다. 그러나 나는 재차 부정했다. 이대론 불가능하지만, 또한 가능하다. 나는 할 수 있다. 무명검객와의 논검. 그리고 그림자와 장위릐 격전으로 느꼈던 새로운 가능성이 내 등을 떠밀었다.


카앙!


은빛 섬광이 더욱 거세게 진동하며 마침내 시커먼 갑옷을 꿰뚫었다. 됐다. 환호와 안도. 그리고 한계를 뛰어넘은 것에 대한 쾌감이 정수리의 백회혈부터 발바닥의 용천혈까지 쏘아져 나갔다.


“크아아악!”


아인델프가 비명을 내지르며 밀려난다. 아니, 밀려나? 갑옷은 완전히 파괴되었지만 그게 아인델프를 살렸다. 갑옷을 뚫으며 힘을 잃은 섬광이 한순간에 사라진다. 아인델프의 몸을 휘감고 있던 수십 개의 마법들도 일검에 모습을 감추었지만 정작 아인델프는 그걸 구명줄 삼아 목숨을 건졌다.


후웅.


등 뒤에 오싹한 기운이 느껴졌다. 시커먼 그림자가 등에 바싹 붙어 있었다. 울컥하고 핏물이 올라오며 그림자에 매여 있던 반절이나 되는 내공이 한순간에 소진된다. 이 정도 내공을 소진하는 무공은 하나. 진천검결의 오의 뿐이다. 그림자란 것이 전력을 다하는 순간이었다.


“감......히!”


일순 벽력같은 노호성이 터져 나왔다. 분노가 몸을 태운다. 둔재의 육신과 정신이 하얀 재가 되어버릴 정도로 나는 강렬한 열기에 휩쓸렸다. 그 열기는 나도 알 수 없는 어딘가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나마 남아 있던 반절의 내공이 스러지듯 사라진다.


“진천은 나의, 천의검문의 검이다!”


의식하지 못한 채 진천을 펼쳤다. 하늘을 울리는 검. 그것은 수많은 검의의 이합집산이었으며 달을 넘어 하늘에 닿은 유아독존의 검. 형언하기 어려운 그런 검이었으며 내가 펼칠 수 있는 최고의 검이다.

그렇기에 진천을 꺾을 수 있는 건 진천 뿐. 그림자의 검과 나의 검이 충돌하며 사방이 무거운 고요에 잠겨 들었다. 너무나도 큰 소리가 터져 나온 탓이리라. 힘겹게 눈을 떴을 때, 나는 힘없이 축 늘어져 간신히 서 있었고, 그림자 역시 진짜 내 그림자처럼 마찬가지로 힘겹게 자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잘은 몰라도 그렇게 보였다.


“길이...... 길이 무너져요!”


천지가 진동한다. 너무나도 거대한 힘이 충돌한 탓일까? 깊은 숲 속이었던 주위의 풍경이 일그러지며 녹아내리는 얼음처럼 지워지고 있었다. 길이 무너지면 어떻게 되는 걸까? 그런 의문을 품으며 나는 힘겹게 검을 들었다. 이 정도야 일기당천에게 당했을 때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체내에 다시 미증유의 기운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쿠오오오오!”


그림자가 울부짖는다. 나 역시 아마 울부짖었을 것이다. 같은 기운에서 비롯되었던 탓인지 우리는 서로 공명하고 있었다. 기분 나쁜 일이지만 사실이다.

그렇게 다시 나는 그림자와 맞붙었다. 나는 방금 이 싸움을 통해 성장했다. 너덜너덜한 육신은 이전보다 훨씬 능수능란하게 검을 움직이고 있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그건 나를 흉내 내는 그림자 역시 마찬가지였다.


“천검대는 무얼 하는 건가요! 당장 마물들을 끝장내요! 지금 우리는 천도 한가운데로 떨어지고 있다고요!”


심하령의 외침이 들린다. 주위의 풍경은 더없이 익숙한 모양을 하고 있었다. 천의검문이 있는 천도의 풍경이다. 휙휙 스쳐 지나가는 익숙한 풍경이 점점 느리게 움직이며 사람들의 모습이 점점 선명하게 그려진다.


“크아악!”


다시 나와 그림자는 양패구상했다. 승리도 패배도 아닌 애매한 결과. 그 속에서 나는 다시 검을 들었다. 엄밀히 말하자면 목표를 달성하지 못한 내 패배였지만 나는 아직 검을 놓지 않았다. 감정의 편린을 초월한 의식만이 나를 지배하고 있었다.


“왜, 왜 계속 물고 늘어지는 거냐앗!”


아인델프의 고함과 함께 마침내 천검대의 족쇄가 풀렸다. 어느새 마물들을 압도한 천검대가 표표검의 인도 아래 서서히 아인델프를 압박하고 있었다. 그런 한편 풍경이 지나가는 속도가 점점 느려진다. 느낌이 좋지 않다. 점점 선명해지는 풍경은 천도의 중심부를 닮아 있었다.


“더. 더 빨리요!”


누구라 할 것 없이 싸움에 뛰어든 판이다. 심하령도 무섭게 쌍장을 내뻗고 있었다. 차츰 정신을 차린 장위와 흑경도 한창 마물들을 몰아붙이고 있었다. 천검대는 빠른 속도로 아인델프를 상대하는 데 익숙해지고 있었다.


“이이익..... 하찮은 검사 나부랑이들이!”


마침내 풍경의 흔들림이 멎었다. 눈을 깜빡이고 나니 엄청난 인파가 보인다. 갑자기 나타난 우리를 두고 사람들이 경악하는 것이 보인다. 제길, 아인델프가 회심의 미소를 짓는 게 보인다. 아인델프가 인파 속으로 뛰어드는 걸 보고 나는 이를 악물고 몸을 돌렸다.


“크아악!”


등 뒤로부터 가슴에까지 시커먼 검이 솟아있다. 그림자의 검을 허용한 결과다. 선혈이 터져나오고 내공의 흐름이 뚝 끊겼다. 하지만 이건 내가 원했던 결과. 장위와 마찬가지로 내보인 고육지책으로 그림자에게서 일순간의 틈을 벌었다.


“놈!”


달렸다. 인파를 넘고 헤치며 아인델프 앞에 몸을 비틀어 착지했다. 형편없이 초췌한 몰골로 사람들을 헤치고 도망치던 아인델프가 엉망이 된 나를 발견하고 다급히 양 손을 들었다.


“자, 잠깐만.....”


“끝이다.”


“나, 날 죽일 순 없을걸? 살려주면 다 알려주마. 모든 걸 알려주....”


날카로운 파공음이 청명한 하늘 높이 울려 퍼진다. 이어지는 비명이 귀를 찌르고 사람들이 앞다투어 도망친다. 내 피와 내 것이 아닌 피를 칠갑한 나는 목 없는 시체 앞에서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며 갑자기 들이닥친 아픔에 신음하며 그 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크윽.....”


아픔이 생생할수록 지금 상황이 실감 난다. 무지막지한 기세를 발출하던 그림자의 기척은 이젠 없다. 짧지만 길었던 싸움은 그렇게 허망하게 끝나버렸다. 진작 이랬어야 한다. 다시 생각해보면 아인델프에게서 뭔가를 알아내려는 내 욕심이 만든 참극이었고 또한 아픔이다.


“궁금한 거야 많았지만...... 이젠 됐다.”


아인델프에게서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했다. 하지만 후회는 없다. 조금 돌아서 가자. 돌고 돌아도 결국 종착점은 하나. 하물며 그게 올바른 길이라면 무얼 망설이겠는가?


멍하니 아픔을 곱씹고 있노라니 등 뒤에서 잘 정련된 군기가 느껴진다. 도망친 사람들이 모여든 건 결단코 아니었다. 잘 조련된 정병만큼이나 예리한 기세를 발산하고 있는 이들은 분명 무인. 꽤 익숙한 느낌의 무인들이었다.


“군아.”


그리고 그중에서도 군계일학인 한 사람이 있었다. 눈물이 왈칵 치솟았다. 난리통이 벌어진 탓에 나오셨는가. 엉망이 된 몰골로 나는 송구스럽게 고개를 숙여 예를 갖추었다. 익숙한 신발 모양이 부연 시야 너머로 보인다. 긴장이 탁 풀리고 목구멍으로 먹먹한 뭔가가 치솟아 올랐다. 나는 핏물이 낭자한 두 손을 한데 모아 포권을 쥐고 대답했다.


“불초 소자, 군. 돌아왔나이다.”




감상이나 비평은 언제나 환영합니다.


작가의말

고구마같은 놈이지만 슬슬 사이다처럼 살기를 바랍니다.

저도 예전 글을 보니 답답하기만 하더랍니다. 제가 의도하지 않은 방향으로 표현된 부분이 많더군요.

아무튼 되도록 양심적인 연재주지를 되찾도록 노력하는 게 먼저겠지요. 노력하고 정진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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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넘고 넘어서, 돌고 돌아서 (5) +3 16.12.18 872 14 2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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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 9. 넘고 넘어서, 돌고 돌아서 (3) +5 16.11.02 1,007 10 25쪽
210 9. 넘고 넘어서, 돌고 돌아서 (2) +7 16.09.12 832 11 36쪽
209 9. 넘고 넘어서, 돌고 돌아서 (1) +5 16.06.13 923 10 22쪽
208 8. 등하불명(燈下不明) (9) +2 16.06.14 872 10 21쪽
207 8. 등하불명(燈下不明) (8) +8 16.05.11 919 17 31쪽
206 8. 등하불명(燈下不明) (7) +6 16.03.29 785 10 24쪽
205 8. 등하불명(燈下不明) (6) +4 16.02.14 836 14 28쪽
204 8. 등하불명(燈下不明) (5) +3 16.02.10 916 14 18쪽
203 8. 등하불명(燈下不明) (4) +7 15.12.13 1,072 14 21쪽
202 8. 등하불명(燈下不明) (3) +11 15.10.12 867 20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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