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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ferior Strugg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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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개
작품등록일 :
2013.01.31 09:36
최근연재일 :
2021.11.10 22:29
연재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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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13,856

작성
15.12.13 1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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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21쪽

8. 등하불명(燈下不明) (4)

DUMMY

육대종이 끌고 온 무인 중, 창을 쓰는 이의 이름은 엄한이고 그는 호평 출신의 사파 무인이었다. 그날 내공 한 줄기 없는 내게 처참하게 밀리며 당혹감을 느낀 이들은 몇몇 있었지만, 그 중 진정 수치심을 느낀 이는 엄한 한 명뿐이었다.


“일어나.”


엄한이 묵직한 창을 내리트리고 싸늘하게 나를 내려다보았다. 바닥에 웅크린 채 고통에 몸서리치던 나는 신음하며 엄한을 다시 마주하기 위해 꿈틀거렸다.



“큭큭큭. 또 일어나는 거 봐라.”


“자존심 부리기는. 아직도 지가 잘난 줄 안단 말야?”


잘나서 자존심을 부리는 게 아니다. 팔산으로 방향을 잡았던 첫날부터 시작된 수모가 수치스러운 것도 새삼스런 일이다. 싸우지 않으면 밥을 굶기고 물조차 주지 않는, 그런 역경보다 더 중요한 사실이 내겐 있었다.


“아아아!”


소리를 짜내며 허리를 쭉 폈다. 몸이 불탄다. 극심한 고통과 피로에 몸이 가루가 되어 흘러내리는 것 같다. 그럼에도 가까스로 몸을 일으키고 바닥을 뒹굴고 있는 조악한 목검을 쥐었다. 말이 목검이지 그냥 나뭇가지에 불과한 그런 물건이다.


“쓰레기가!”


엄한이 눈에 보이지 않는 속도로 가까워진다. 저항할 힘이 있을 리 만무하다. 지금 서 있는 것도 기적이나 다름없으니까. 힘껏 복부를 걷어차이고 새된 비명을 내뱉었다.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도합 스무 번이나 엄한의 초식을 제압했으니 초식이 망가진 만큼 괴로워해야 이 상황도 끝나리라.


“또 발악해 봐! 발악해! 내 창이 우스워? 네놈 뱃가죽이 그렇게 단단하면 또 개겨 봐!”


자기 무공에 대한 자부심이 있었든, 사파인 특유의 자존심 때문이든 아무래도 좋았다. 이제 곧 고통은 끝난다. 엄한은 나를 죽일 수 없다. 단지 제대로 된 치료 한 번만으로도 덧나지 않을 정도의 고통을 줄 뿐.

한번 나를 거의 죽일 뻔했을 때 검노가 스산한 검기를 발해 가슴팍에 상처를 낸 적이 있었다. 아무리 엄한이 화가 치밀어도 그 상처가 낫기 전까진 나를 죽일 생각을 품을 순 없으리라.


“후욱, 후욱...”


엄한의 거친 숨소리가 들려온다. 끝났다. 고개를 들 여력도 없이 바닥에 코를 처박은 채 흐릿한 고통에 꿈틀대고 있으려니 곧 뒤통수에 둔탁한 감촉이 느껴졌다. 오늘 먹을 것이 든 가죽 주머니를 던져 준 모양이다.

잠시 후 엄한의 발소리가 멀어지고 가냘픈 손길이 나를 일으켰다. 머리 위에 얹힌 주머니가 바닥에 툭 떨어진다. 챙겨야 한다는 생각과는 달리, 몸은 점점 주머니로부터 멀어졌다. 나를 부축하는 이를 그것을 돌아보지도 않고 나를 저들로부터 멀찍이 떨어트리는 데 심혈을 기울일 뿐이었다.


“언제까지 이런 짓을......”


자리에 나를 눕히고 치료를 이어가던 심하령이 먹먹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아직 독기가 가시지 않아 얼굴에 그늘이 가득하다. 그런 상황 속에서도 심하령은 나를 치료하기 위해 온 신경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것도 오늘이 마지막인 것 같다. 심하령이 조용히 침구를 내려놓으며 속삭이듯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번이 마지막 처치입니다. 전 이제 당신을 치료하지 않겠어요.”


말은 조용했지만 심하령은 양손을 움켜쥐고 몸을 부르르 떨고 있었다. 간신히 고쳐둔 사람이 다시 엉망이 된다는 허무함도 있겠지만 내가 계속해서 고통 받는 상황 자체를 받아들이기 힘든 것이리라.


“죄송합니다. 제 실력이 더 나았더라면...”


“도 공자 당신 때문이 아니라, 더는 육대종의 장단에 놀아나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육대종은 계속해서 나를 괴롭혀서 내가 자진이라도 하기를 원하고 있었다. 며칠째 제대로 먹지도, 마시지도 못한 것부터, 엄한이 고약한 싸움을 거는 것. 그리고 심하령이 계속해서 나를 치료하게 두는 것 모두가 육대종의 음모였다.


“개소리 지껄이지 마라.”


엄한이 귀신같이 심하령의 목소리를 훔쳐듣고 성큼성큼 걸어왔다. 한 손에 든 창이 한낮의 햇살을 받아 번쩍였다. 본래 심하령 혼자서도 어렵지 않게 쓰러트릴 자였지만, 지금이라면 단숨에 우리 둘의 목숨을 앗아가는 정도는 더 잆이 쉽겠지.


“고쳐. 내일 또 비무를 치를 수 있게 고쳐라.”


며칠간 제대로 먹지도 쉬지도 못하는 자를 핍박하는 것이 비무라면 이 세상에 비무 아닌 싸움이 없겠군요. 모자란 실력을 그런 식으로 충당하니 기분이 퍽이나 좋은가요?“


“뭐야?”


심하령의 도발에 엄한이 버럭 소리를 지르며 창을 들이밀었다. 그러나 그 순간, 일행 한쪽에서 미증유의 기세가 터져 나오는 것을 시작으로 수 명의 무인이 일제히 움직였다. 한차례 돌풍이 불어닥치고, 나는 무거운 눈을 들어 주위를 분간하려 애썼다.


“창을 거두는 편이 좋을 게다 애송이.”


미증유의 기세가 터져 나온 곳은 다름 아닌 심유환이 포박된 자리였다. 검노와 뭇 무인들에게 포위된 상태에서도 심유환의 두 눈에는 안광이 형형했다.


“나를 묶고 있는 것은 이 따위 고철이 아니라 이 상황일 뿐. 너희 애송이 몇을 저승길 동무로 삼는 건 어렵지 않다는 걸 명심해라.”


만약 심유환이 움직인다면 검노는 어렵지 않게 심유환을 제압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 전에 사람 한둘 처리하는 건 심유환에게 너무나도 손쉬운 일이었다. 실제로 여정이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있던 일이다. 내가 엄한에게 당해 널브러져 있을 때 욕정을 품고 심하령을 겁간하려 든 사내가 있었다.

그때 심유환은 단숨에 몸을 구속하는 사슬을 부수고 단숨에 그 사내의 목을 뽑아버렸었다. 그리고는 검노가 심유환의 목을 취하려는 차에, 검노와 육대종을 지긋이 바라보며 스스로 사슬로 몸을 묶었었다.

그 일 이후 심하령에 함부로 수작을 부리는 자는 단 하나도 없었다. 아무리 약해졌어도 심유환은 목숨 몇 개쯤은 충분히 앗아갈 수 있는 강자임을 실감한 것이다.


“말했을 터다. 저 아이를 건드리지 않는다면 나도 얌전히 있어 주겠다고.”


“......검노. 저놈 끌어내.”


육대종이 못마땅한 듯 눈짓하니 엄한은 검노가 나설 것도 없다는 듯 스스럼없이 창을 거두고 일부러 발소리를 내며 뒤로 돌아갔다. 한참이나 정적이 흐르고, 지금까지의 상황을 지켜보던 육대종이 말했다.


“치료하기 싫으면 하지 마. 하지만 저놈이 소천검을 괴롭히는 것까지 어떻게 해줄 생각은 없어.”


돈줄이나 다름없는 두 사람과는 달리 나는 육대종의 원한을 산 처지다. 심유환이 나까지 보호하려 했다면 육대종이 잠자코 있을 리 만무했다. 심유환도 그 사실을 알기에 내가 수모를 당할 땐 굳이 나서지 않았다.


“그것까지 내가 어떻게 할 의리는 없지. 저 아이는 심가가 아니니 말이야.”


심유환은 눈을 감고 팔짱까지 낀 채 검노를 올려다보았다. 검노를 비롯한 이들이 무기를 거두고 다시 육대종이 말했다.


“간단히 말해서, 네가 치료를 하든 안 하든 이놈이 안 싸우지는 않아. 그럼 소천검이 뒈지는 건 네년 탓이 되는 거지. 어라? 이거 이득이잖아. 차도살인이라고 들어는 봤나?”


“마음대로 하시지요. 저는 더는 이런 수모를 감내하지 않을 겁니다.”


한 톨의 긍지 때문에라도 목숨을 바치는 자가 바로 무인. 변변찮은 인연 때문에 목숨을 내던진 토리나 때문에라도 나는 수치스럽게 살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조금 달랐다. 수치스러운 것보다 더욱 중요한 것이 있었다. 심하령이 이 사실을 듣는다면 나를 육대종만큼이나 정신 나간 작자로 볼 것이다. 그리고 나 역시 내가 완전히 미쳐 있다는 것을 확신한다.


한 세 번째부터였다. 세 번째 싸움에서 나는 자신도 놀랄 정도로 부드럽게 검을 쏘아냈었다. 그 사실에 놀란 나머지 이어진 반격에 단숨에 당해버리고 말았다.

우스운 일이다. 그간의 수련이 드디어 싹을 틔운 순간은, 다름 아닌 생의 끝자락이었다. 노력이란 것이 무의미해졌을 때 노력은 자그마한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처음에는 혼란스러웠지만 오래지 않아 나는 그것이 진실임을 깨달았다. 천의결과 궁극에서 엿보았던 해답에 가까워졌음은 분명했다.


그렇지만 이런 소소한 깨달음을 얻어 봐야 육대종으로부터 벗어날 수는 없었다. 그야말로 절망적인 사실이다. 그렇지만 어느 날 찾아든 열병은 나를 미치광이로 만들었다. 그때부터 나는 엄한의 시비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그것이 반복되고 또 반복되며, 비로소 오늘에서야 엄한의 실력을 넘어섰음을 짐작했다. 내공이 비등하다면 이제 엄한은 절대 나를 이길 수 없으리라. 팔산까지 열흘이 남았을 때 나는 그런 확신을 가졌다.


“치료를 부탁합니다.”


정작 가장 피해를 본 내가 심하령에게 포권을 취하려 간곡히 청하니, 결국, 심하령도 불만 가득한 얼굴로 치료를 이어갔다. 멍하니 치료를 받으며 엄한이 아닌 다른 상대와의 비무를 상상했다. 싸움이 아니라 비무다. 이제 이건 수모라 부를 수도 없을, 성장의 발판이었다. 정말 어처구니없는 열병이다.


“이봐.”


그래서 다음 날 새벽. 나는 잠조차 잊고 무인들이 잠든 자리에 다가갔다. 그리고 미리 눈여겨 둔 자의 등을 힘껏 짓밟았다. 당연한 수순으로 난리가 났다. 자신을 짓밟은 자가 나라는 걸 깨달은 사내가 얼빠진 얼굴로 고개를 흔들었다.


“이게 미쳤나?”


“그리 생각하는 게 편할겝니다.”


웃음이 나왔다. 그 웃음을 이해할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으리라. 아니, 단 두 사람만은 조금이나마 내 기행을 받아들였다. 검노와 심유환. 절정에 다다른 또 다른 미치광이는 지금 나약한 미치광이 하나의 발광을 지켜보고 있었다.



시간은 빠르지만 또한 느리게 흘러갔다. 고통받으며 꿈틀거릴때는 천천히 흘렀지만 정신을 잃고 치료를 받은 다음 무공을 참오할 때는 쏜살같이 빠르게 흘러갔다. 그러게 얼마간의 시간을 보내고, 어느덧 나를 감당할 수 있는 이들이 하나도 남지 않게 되었다.


“저, 저 새끼가!”


“죽여! 죽여버려!”


악이 받쳐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는 자들을 여유롭게 바라보았다. 안타깝게도 저들은 나를 죽이진 못한다. 나를 죽인 순간 육대종은 그를 버릴 것이고, 동시에 천의검문 공적이 될 테니 실수로라도 나를 해쳐서는 안 되겠지.


“하아, 하아.”


숨을 몰아쉬며 엄한을 비롯한 도합 세 명의 무인에게 힐끗 시선을 주었다. 저들에게 볼일은 끝났다. 이제 남은 것은 조금 뒤편에 서 있는 두 사람인가? 빈틈없는 합격술을 구사하지 못하는 이상, 내가 죽기 살기로 다른 두 사람에게 달려들면 남은 세 명도 섣불리 손을 쓰지 못한다. 즉, 나 하기에 따라서 입맛에 맞는 상대와 싸울 수 있다는 의미다.


“제길! 나뭇가지 따위에...”


대도를 쥔 사내가 부드러운 연격에 밀려난다. 그러나 곧 대도의 단단함에 힘입어 목검이 사정없이 밀려났다. 그 틈을 노리고 철추가 거침없이 가슴팍에 파고들었다. 위험하다. 이걸 얻어맞으면 여기서 끝날 뿐. 목검을 회수할 틈 따위는 없었기에, 허리 힘만으로 몸을 비틀어 철추의 충격을 피해냈다.


“큭!”


그러나 완전하지는 못했다. 충격의 여파에 몸이 둔해진다. 대도가 다시 날아들어 목검을 갈랐다. 나뭇가지가 두 동강나고 이어서 목검을 쥐었던 팔마저 위험할 때, 자루만 남은 목검을 놓아버리고 대신 주먹을 움켜쥐었다.


“하아!”


내공이 실리지 않은 것치고는 꽤 충실한 권격이 대도 자루를 쥔 손가락을 후려쳤다. 예기치 못한 일격에 대도의 기세가 흐릿해졌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파고들었다. 반대편 팔로 사내의 균형을 다시 한 번 흩어내니 가슴팍을 훤히 드러났다.


두두두두둥!


쉴 새 없이 가슴팍에 주먹을 퍼부었다. 가랑비라도 옷은 분명 젖는 법. 그 충격은 무시할만한 것이 아니어서 대도를 놓치고 사내는 그만 뒤로 넘어지고 말았다.


“저, 저 멍청한 놈이...”


엄한이 이를 갈며 창을 휘두른다. 안타깝지만 엄한의 초식은 이제 지루할 정도였다. 사내를 가격하던 양손 펼쳐 창대를 밀어냈다. 손에 피가 튀며 껍질이 벗겨진다. 아찔한 통증은 있었지만 그게 끝이다. 엄한이 꼴사납게 창을 고쳐 쥐는 틈을 포착하고 일격을 가하려는 순간, 재차 철추가 날아들었다,


“칫.”


철추를 피하는 통에 허점을 놓쳤다. 내공이 충분했다면 철추의 여력을 한 손으로 감당하면서 엄한을 끝장낼 수 있었는데. 그 사실을 실감한 것은 엄한 역시 마찬가지여서, 그는 더욱 악을 쓰며 창을 휘둘렀다.


“어설퍼. 찌를 때 하체의 균형이 완전히 기울어서야 더 강하게 찌를 수 없지.”


앞을 향한 왼 다리를 가볍게 걸어서 넘어트리고 차츰 정신을 차리려는 대도 사내의 복부에 다시 일격을 먹였다. 그리고 다시 철추를 피한 다음.....


“그만.”


그 순간, 심후한 내공이 담긴 목소리가 좌중을 압도했다. 이 자리에 있던 모두가 그 목소리에 몸을 멈추었다. 그렇지만 차르릉 소리를 내는 철추는 아직도 나를 노리고 있었다.


“커헉!”


철추가 옆구리를 강타하고 나는 형편없이 나가떨어졌다. 맹수가 옆구리를 한 움큼 베어 문 것 같은 격통이 찾아왔다. 그러나 그런 나를 일으켜주려는 이는 고사하고 눈길을 주는 이조차도 없었다. 나를 상대하던 이들 모두가 검노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출발시간이다. 한 시진 내에 팔산에 도착할 것이다.”


“빌어먹을....”


엄한이 유독 강하게 반감을 표하며 혀를 찼다. 검노의 말대로라면 이것이 마지막 싸움인데, 그때까지도 엄한은 변변한 일격 한번을 성공한 적이 없었다. 아쉬운 것은 괜히 시비가 걸린 다른 사내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도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손이 어지러워질 뿐이었으니까.


“좋아하는 건 이르다. 거래가 끝나도 너는 끝까지 우리와 갈 테니까.”


엄한이 그리 말하곤 창을 거두고는 작은 봇짐을 집어들고 걸음을 재촉했다. 저 멀리 이미 느릿한 말이 끄는 수레가 앞서 가 있었다. 그리고 그 위에는 연신 거들먹거리며 술에 거하게 취한 육대종이 앉아있다.


“젠장할, 팔산은 뭐 이리 먼 거야?”


“곧 도착합니다.”


마부 노릇을 하면서도 싫은 기색 하나 없는 검노가 나직한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한편, 비척대면서도 금세 수레에 따라붙은 나는 묵묵히 걸음을 재촉하는 심하령의 옆에 다가섰다. 심하령은 나를 없는 사람 취급하며 계속해서 걷고 있다. 이것 참 미안하게 되었군. 조심스럽게 그녀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으려 애쓰며 입을 열어 보았다.


“소저, 혹시 남는 금창약이....”


대답이 없다. 금창약이 다 떨어진 건 사실 나도 잘 안다. 단지 말문을 트기 위해 꺼낸 말이건만, 심하령은 도무지 반응조차 없어서 결국 나 역시 꿀 먹은 벙어리 노릇을 할 수밖에 없었다.


“팔산에서 이틀 정도 지체할 모양이다. 도착하자마자 우리를 넘기고 다시 서악으로 출발하겠지.”


심하령을 대신해 입을 연 것은 묵직한 철판에 구멍을 내 만든 수갑을 차고 있는 심유환이었다. 책 두 권 크기의 철판을 달고 다니는 모습은 어찌 보면 우스꽝스러웠지만 심유환이라는 사람의 무게감 때문인지 그리 우습지만은 않았다.


“그렇습니까?”


이것이 마지막 대화가 될 가능성이 농후한 만큼 조금 묘한 기분으로 대화를 이어가려 애썼다. 내가 무사한 것도 팔산까지다. 서악에 가까워질수록 천의검문의 이름값은 가벼워지고, 더불어 내 목숨도 그만큼 가벼워지겠지. 나를 죽이지 못해 안달 난 이들을 힐끗 바라보며 작게 중얼대 보았다.


“위험하겠군요.”


“그러게 누가 저 치들을 자극하라 했더냐.”


“그래도 덕분에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내공이 없으니 아무리 강해져도 겨우 삼류에서 이류에 가까워진 수준인데 그게 그리도 좋더냐?”


“적어도 후회는 없더군요.”


끝의 끝에 와서 내 삶은 나를 배반하지 않았다. 비록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 해도 지난 삶처럼 어리석게 살았다는 후회는 들지 않았다. 이에 심유환이 진중한 시선으로 되물었다.


“후회만 없다고 죽어버린다면 그 책임은 누가 지는 게냐? 나와 령이가 어떻게 무림의 종말을 막을 수 있겠느냐?”


심유환의 말에 흠칫 놀라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러나 우리의 대화에 관심 두는 이는 없었다. 심하령조차도 말이다. 하기야, 노인네와 미치광이의 잡담으로 들릴 뿐인데 굳이 비밀로 할 필요도 없겠지.


“지난번에 느낀 것입니다만 꼭 제가 나설 필요는 없었습니다. 사필귀정이라 결국은 옳은 길이 다 있더군요. 혹여 정 어려우시면 서역에서 힘을 구하십시오. 서역 최고의 무가에 훌륭한 인재가 있습니다.”


“비룡검객이 의탁했다는 그곳 말이냐?”


폰테일 공작가의 모습이 떠오른다, 그리고 그 중심에 선 아름다운 소녀도. 잠시 감회에 젖어 뜸을 들인 다음, 고개를 끄덕였다. 언젠가 한번 가보려 했는데 역시 안 되는구나.


“가능하다면 제가 직접 접촉하고 싶었습니다만 뒷일을 부탁드립니다.”


“흥, 되었다. 서역 것들과는 말도 통하지 않는데 무얼 해보란 말이냐? 그냥 나도 이젠 손 놓고 살아야겠다. 괜히 령이 따라서 이게 무슨 고생인지 모르겠구나.”


“시끄러워 이 새끼들아! 대체 무슨 헛소리들이 그리 긴 거야?”


우리 둘의 대화는 육대종의 신경질로 단숨에 끝나버렸다. 그렇지만 그것만으로도 꽤 뜻 깊은 대화였다고 생각한다. 뒷일에 대한 걱정을 털어버릴 좋은 기회가 아니었을까?




팔산에 도착한 것은 안개가 잔뜩 낀 새벽녘이었다. 다들 지쳐있던 탓에 검노는 휴식을 제의했고, 그렇게 우리는 가까운 객잔에 들어섰다.

놀랍게도 육대종은 심하령과 심유환에게 선선히 제대로 된 식사와 휴식을 제공할 요량인지 객잔에 꽤 큰돈을 지불했다. 물론 나는 예외다. 내게는 식사는커녕 고약한 냄새가 나는 건량만 조금 던져주었을 뿐이다. 조금은 아쉽다. 이게 마지막 만찬이 될지도 모르는 터인데.


“지긋지긋한 놈들. 돈만 받고 나면 얼른 쫓아버려.”


육대종은 이제 심하령의 미색을 구경하거나 심유환을 조롱하는것도 지겨워졌는데 두 사람을 일컫어 지긋지긋하다 평하며 지금까지 마시던 싸구려 독주를 내던졌다.


“존명.”


술병 깨지는 소리와 함께 검노가 공손히 부복하고 육대종은 신경질적으로 새로 나온 술병을 기울였다. 그때 느닷없이 대도를 만지작대던 사내가 눈앞의 빈 술잔만 만지작대더니 조심스레 운을 띄웠다.


“크흠, 그런데 육 대공자 나리. 우리는 몸값 중에 얼마를 받을 수 있는 겁니까?”


이에 육대종이 눈썹을 찌푸리더니 이내 사내의 이마를 세게 후려치고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이 멍청한 놈. 여기 심가장 사람이 있으면 어쩌려고..... 다 조용히 해. 주위를 살펴봐 얼른!”


그래, 그럴지도 모르겠군. 혹시 도망칠 구석이 있는지 조심스레 주위를 살폈지만 역시나 별다른 구석은 없었다. 무엇보다 검노의 눈을 피할 길은 여전히 없었다. 쳇, 심가장 사람들이 와 있다면 지금이 마지막 기회일 텐데. 나라고 모든 걸 포기한 건 아니라서 꽤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그렇게 체념한 차에, 우리가 침묵한 탓에 우리 반대편 자리에서 믿을 수 없는 말소리가 생생히 들려왔다. 그야말로 믿을 수 없는 소리였다.


“소천검이 팔산에 들어왔다지?”


“푸욱!”


육대종이 그 소리를 듣고 입에 머금은 술을 사방에 내뿜었다. 그와 함께 검노가 천천히 그 말이 들려온 자리로 다가갔다. 노골적인 살기에 떠들썩한 객잔이 조용해지고, 검노가 노려보는 장년인은 아예 거품을 물기 직전이었다.


“소천검이 팔산에 온 것은 어떻게 알았지?”


“그, 그, 그, 그것이.......”


마침내 장년인이 졸도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검노의 손이 맞은편 사내에게 향하는 순간, 그 사내가 눈을 질끈 감고 외쳤다.


“이, 이미 파다한 이야기입죠! 소천검하고.... 천금화. 그리고 무슨 의원 하나랑 무슨 무룡......”


“철검무룡? 네놈이 어디서 거짓을 논하느냐!”


“으, 으아악! 정말입니다요. 다들 아는 사실인지라....”


검노가 매서운 눈으로 주위를 노려보자, 주위에 앉아 있던 모두가 눈을 내리깔았다. 검노가 다시금 성큼성큼 걸어가 다른 사내의 뒷덜미를 잡아챘다. 이에 사내가 미친 듯이 발광하며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저, 정말 입니다요. 심가 나으리들이 극진히 모시는 걸 제 눈으로 똑똑히 봤습죠. 네.”


도대체 어떻게 된 거지? 소천검을 사칭하는 이들인가? 하지만 심가장 사람들이 속아 넘어간다는 것도 이상한 일이다. 혹시나 싶어 심하령을 바라보았지만, 그녀 역시 혼란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어, 어디냐! 그 가짜 놈들은.... 소천검은 어디 있어?”


육대종이 날듯이 그 사내에게 달려가 고함을 질렀다. 사내가 얼떨떨한 듯 육대종의 말을 되뇌이다가 황급히 정신을 차리고 대답했다.


“여, 여기.... 여기 후원을 통째로 빌려서 계시는....”


“대체 뭐가 이리 소란스러운지 모르겠군.”


믿을 수 없는 일이 이어졌다. 내 목소리와 별반 다르지 않은 목소리가 울려 퍼진 것이다. 그 목소리가 들려온 쪽은 객잔의 2층으로 올라가는 난간 부분이었다. 모두의 시선이 그쪽을 향했다. 내 눈이 잘못되었다 생각하는 것이 좋으려나? 그곳에는 정말로...


소천검과 천금화. 심지어 의가제일로 추정되는 백발의 노인과, 무뚝뚝한 표정의 철검무룡이 나란히 서 있었다.




감상이나 비평은 언제나 환영합니다.


작가의말

오래 걸려서 돌아왔습니다.

더불어 전편은 약간 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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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3 10. 운칠기삼(運七技三) (10) +5 18.10.30 362 9 17쪽
222 10. 운칠기삼(運七技三) (9) +4 18.05.25 427 5 17쪽
221 10. 운칠기삼(運七技三) (8) +3 18.01.17 400 10 15쪽
220 10. 운칠기삼(運七技三) (7) +4 17.12.31 411 5 14쪽
219 10. 운칠기삼(運七技三) (6) +2 17.12.05 349 6 40쪽
218 10. 운칠기삼(運七技三) (5) +2 17.10.17 396 6 17쪽
217 10. 운칠기삼(運七技三) (4) +5 17.06.13 566 7 11쪽
216 10. 운칠기삼(運七技三) (3) +1 17.06.13 474 5 15쪽
215 10. 운칠기삼(運七技三) (2) +5 17.03.20 589 10 19쪽
214 10. 운칠기삼(運七技三) (1) +6 17.01.15 743 10 17쪽
213 9. 넘고 넘어서, 돌고 돌아서 (5) +3 16.12.18 872 14 20쪽
212 9. 넘고 넘어서, 돌고 돌아서 (4) +6 16.12.03 683 13 25쪽
211 9. 넘고 넘어서, 돌고 돌아서 (3) +5 16.11.02 1,008 10 25쪽
210 9. 넘고 넘어서, 돌고 돌아서 (2) +7 16.09.12 832 11 36쪽
209 9. 넘고 넘어서, 돌고 돌아서 (1) +5 16.06.13 923 10 22쪽
208 8. 등하불명(燈下不明) (9) +2 16.06.14 872 10 21쪽
207 8. 등하불명(燈下不明) (8) +8 16.05.11 919 17 31쪽
206 8. 등하불명(燈下不明) (7) +6 16.03.29 785 10 24쪽
205 8. 등하불명(燈下不明) (6) +4 16.02.14 836 14 28쪽
204 8. 등하불명(燈下不明) (5) +3 16.02.10 917 14 18쪽
» 8. 등하불명(燈下不明) (4) +7 15.12.13 1,073 14 21쪽
202 8. 등하불명(燈下不明) (3) +11 15.10.12 867 20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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