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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ferior Strugg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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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개
작품등록일 :
2013.01.31 09:36
최근연재일 :
2021.11.10 22:29
연재수 :
226 회
조회수 :
586,436
추천수 :
10,871
글자수 :
1,513,856

작성
16.06.14 00:05
조회
871
추천
10
글자
21쪽

8. 등하불명(燈下不明) (9)

DUMMY

“죽여! 저놈을 쳐라!”


아인벨프의 외침에 따라, 뭇 시귀가 일제히 몸을 돌렸다. 두 눈이 퀭하게 뚫리고 죽은 피를 질질 흘리는 시귀가 일제히 다가온다는 광경은 어지간히 담이 크지 않고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일임은 분명했다. 아무리 강한 자라 해도 망자란 본래 꺼려지는 존재니까.

그런 의미에서 나는 상리를 한참 전제 벗어난 자가 아닐까 싶었다. 죽음이 끝이 아니라는 점에서는 나도 시귀나 다를 바 없는 자이기 때문일까? 천만에. 그저 흥분한 탓이다. 죽은 자렝 대한 거부감보다 재미있는 장난감을 쥔 악동처럼 안달이 아 나 있었다.


“천검대는 물러나십시오.”


시귀들이 만들어 냈던 포위망이 느슨해지며 천검대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움직이려 했다. 상황을 보는 눈이 제법 탁월하다는 사실에 다시 감탄하며 나는 천검대를 뒤로 물렸다. 이유는 세 가지. 나는 시귀를 단신으로 상대할 자신이 있었고, 그 근간이 되는 실력을 시험해보고자 했으며, 마지막으로 그 힘의 여파가 미칠 것을 저어했기 때문이다.


“달려! 뛰라고 이 지저분한 새끼들아!”


천검대가 물러가는 것에서 심상치 않은 조짐을 느낀 것인지 아인벨프가 시귀들을 닦달해가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천박하기 그지없다. 아무리 얄팍한 힘이라 해도 저만한 힘을 가지고서 저렇게 유난을 떨다니. 차라리 그 시간에 시귀와의 협공을 궁리해다면 조금이라도 승산이 생겼을 텐데. 마지막에 가서야 몸을 움직이는 마법사의 습성을 버리지 못한 탓일까?


“크르르..”


선두에 선 시귀가 상처투성이 짐승처럼 신음하며 비틀비틀 다가왔다. 천검대에 얼마나 시달렸는지 온몸에 날카로운 자상이 돋아 있었고, 입고 있던 옷은 진즉 떨어져 나가 흉측한 몰골을 무성의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캬악!”


아무런 의지도 숭고함도 없는 타성적인 움직임이 일었다. 사이한 기운이 감돌고 있는 두 손이 나를 잡으려 허우적댔다. 그 광경을 본 순간 기억 아래 가라앉아 있던 낡은 것들이 벌떼처럼 들고 일어나 환영처럼 머릿속에 겹쳐져 갔다. 닳고 닳은 투로가 정신없이 겹쳐지며 어지럽기까지 하다.


“아앗!”


“위험해요!”


내가 현기증을 느낀 것을 본 두 여인의 외침이 들렸다. 그러나 나는 그 목소리에 반응하기보다는 아슬아슬한 순간까지 정신없이 산란하는 투로를 고찰하고 억누르는 데 힘을 쏟았다.

모르고 본다면 싸움 중에 딴청을 피우는 것처럼 보이겠지. 그 말이 맞다. 떠오르는 수많은 투로 중 어느 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고찰할 정도로 여유가 넘쳤다. 다시 말해서 시귀 따위의 공격에 대응하는 데는 그리 많은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크에엑!”


가볍게 휘두른 검이 무거우면서도 날카롭게 파고들어 시귀의 빈틈을 갈랐다. 검을 휘감고 있던 검기가 검로를 따라 쏘아져 나가 뒤편에서 꾸물대던 시귀들까지 베어나갔다.


“단월!”


“뼈까지 통째로 가르면서도 저 정도의 위력이라니....


단숨에 시귀 여럿을 처치한 것에 놀란 이들이 하나같이 경탄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정작 나는 마땅찮은 결과에 기분이 가라앉아 있었다.


“쯧....”


부족하다. 닳고 닳은 경험 덕에 부족한 점이 보인다는 것이 이리도 뼈아픈 사실이라니. 부족한 점이 한두 개가 아니라 도무지 말이 나오지 않는다. 육신의 힘이 모자람이 첫째요, 초식에 대한 체득이 부족한 것이 둘째고 마지막으로 단월이 아니라 더 효과적인 방법이 뒤늦게서야 떠올랐을 땐, 절로 혀를 차기까지 했다. 깨달음으로 길을 밝혔으면 무엇 하나, 결국 진정한 실력이 빛나기 위해선 시간과 노력이 필요한 법인걸.


“제기랄!”


마음에 차지 않는 검이라 하나, 이 역시 충분히 위협적이었는지 아인벨프가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부질없이 쓰러지는 시귀떼 뒤에서 쏘아져 나와 선공을 취했다. 과연 소드마스터만큼이나 빠르다. 하지만 그 실력에는 깊이가 없다. 마치 어울리지 않는 실력을 휘두르던 나를 보는 것 같았다.


캉! 캉! 캉!


살며시 검을 쳐들고 미미하게 방향을 트는 것만으로 아인벨프의 연이은 공세가 막혔다. 순식간에 아인벨프의 얼굴이 초조함과 두려움으로 물들었다. 얄팍하게 쌓아올린 힘이란 그런 것이다. 더 큰 힘 앞에 너무 쉽게 꺾이고 말지.


“크르르...”


이지를 상실한 시귀가 검기(劍技)가 넘실대는 사지를 두려워할 리 없는 만큼, 시귀가 검기의 파도에 몸을 들이밀고 종잇장처럼 찢겨나갔다. 그 탓에 싸움이 난전의 형상을 띄며, 육박전의 경험이 일천한 아인벨프가 곤경에 빠졌다.


“이 병신들아! 꺼져! 꺼지라고!”


아인벨프가 뒤늦게 우왕좌왕 시귀들을 뒤로 물렸다. 그러나 이미 시귀의 대다수가 싸움의 여파조차 견디지 못하고 쓰러진 지 오래였다. 단지 잘려나간 몸뚱아리만 아직 죽지 못하고 꿈틀댈 뿐이다.


“기회를 드리겠습니다.”


목이 마르다. 더 시험해보고 싶은 것이 많은데. 더 다듬어야 할 검이 무궁무진한데 모자람을 채울 기회를 여기서 날려버리기 싫어 급기야 나는 상리를 벗어나는 멍청한 짓을 감행했다.


“시귀 따위는 집어치우고 그것들에 남아 있는 마나를 회수하고 듀라한을 앞세워서 싸우십시오. 태세를 정비할 시간은 얼마든지 줄 테니 말입니다.”


“무, 무슨 꿍꿍이냐?”


“기습따위를 할 생각이 없다는 건 그쪽이 더 잘 알고 있을테니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마십시오.”


비지땀을 줄줄 흘리던 아인벨프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혹시라도 천검대나 제삼자가 끼어들 것을 우려한 탓이겠지. 혹시나 싶어 나는 슬쩍 뒤를 돌아보며 끼어들지 못하도록 단단히 일러두었다.

옥천평을 비롯한 천검대 전원이 포권을 쥐고 그 자리에 일렬로 서는 것을 시작으로 마지막엔 심하령이 얼빠진 표정으로 시선을 돌렸다. 한소리 하지 않는 걸 보면 끼어들지는 않겠군.


“후회하게..... 해 주마.”


아인벨프가 이를 박박 갈며 시귀를 조정하던 마법을 해제하고 그 마나를 회수했다. 마나가 끊기자마자 천검대의 검에 난도질당한 흑호대의 시신이 모래처럼 부스러져나갔다. 고약한 악취가 검은 핏물을 파고 사방에 퍼져갔다.


“듀라한!”


아인벨프가 듀라한을 불렀다. 넝마나 다름없는 몰골이 된 머리 없는 시신이 목구멍에서 소름 끼치는 소리를 내며 아인벨프 앞에 섰다. 문득 한때는 고혹적인 자태를 과시하던 여인의 모습이 떠올라 연민마저 일었다. 아무리 악인이라 한들 시신이 저리되어 있는 것은 지켜보기 어려웠다.


“크큭.... 마법사에게 시간을 주다니. 어리석구나.”


아인벨프가 비릿하게 웃으며 곧 요사스런 주문을 외어 자신, 그리고 나찰편에게 수많은 마법을 부여했다. 그러니까 나찰편을 방패로 삼아 그 사이에 전력을 극대화하겠다는 의미였군. 듀라한이라는 방패를 무시하고 아인벨프의 목을 날릴 수많은 투로를 머리에서 지워내며 나는 묵묵히 그 작태를 지켜보았다.


“그런데 네놈, 정말로 대단하구나.”


얼마나 많은 마법을 외웠는지 입술이 말라붙은 아인벨프가 거무튀튀하게 변색된 입술을 핥으며 말했다. 그 목소리와 몸짓에는 지금까지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의 자신감이 들어차 있었다. 얕은 지식으로 어림짐작해도 조금 전보다 전력이 배 이상 상승한 것 같다.


“정말로 대단해. 어떻게 갑자기 그렇게 강해진 건지는 모르지만..... 아니, 왜 그렇게 힘을 감추었는지는 몰라도 그 정도면 엠펠로니아에서도 한자리 차지할 수 있겠군.”


“잔소리가 는 걸 보니 시간이 더 필요하지 않은 것 같군요.”


슬슬 쓰러진 한상염을 위해서라도 결착을 내야 한다. 심하령이 조처를 한다 해도 있다 해도 하루 이상 견디기는 어려울 것이다.


“운이 나쁘다는 말이다. 네놈이 이 야만의 대지가 아닌, 우리 대륙에서 났다면 혹시 내 상관이 되었을지도 모르지. 그래, 그랜드 나이트가 되는 것도 무리는 아니야.”


“수다를 떠는 척 저주를 준비하는 것도 참았으니 이젠 끝냅시다.”


한눈에 저주를 간파했다는 것에 경악한 아인벨프가 황급히 저주의 기운을 지웠다. 무슨 저주인지는 몰라도 조심해서 나쁠 건 없다. 저주 중에는 소드마스터를 일순간에 무력화하는 것도 있었으니까.


“흥, 그동안 잘난 척 한걸 후회하게 해 주마! 옴 샬라 두리칸....”


“더 기다리진 않을 겁니다.”


피잉!


무언가 쏘아져 나가는 소리가 뒤늦게 들려왔다. 순식간에 세 마디나 되는 주문을 내뱉은 아인벨프가 손을 뻗은 곳은 듀라한이 서 있던 장소다. 말 그대로 서 있던 곳. 지금은 두 동강이 나 한낱 시신이 되어버린 듀라한이 쓰러진 곳이다.


“아아.....”


어처구니없는 상황에 당황한 아인벨프가 나와 듀라한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나는 진득한 피가 흘러내리는 검을 바닥에 한차례 휘둘러 그것들을 떨쳐내면서 스산하게 말했다.


“말했잖소? 충분히 기다렸다고.”


듀라한과 싸워 본 적은 없지만 흑마법사가 무슨 짓을 하려고 햇는지는 안다. 언데드의 수준을 급격히 끌어올리는 비장의 술책. 언데드의 수명을 완전히 소모해 강력한 언데드를 만드는 사령술이다. 수없이 소드마스터를 곤혹스럽게 한 그 마법에 대한 유일한 방책은 하나. 마법이 구현되기 전에 언데드를 쓰러트리는 것뿐이다.


“아, 아니..... 어떻게 단번에 듀라한의 핵을 찾은 거냐!”


아인벨프가 놀란 것은 마법을 부리기 전에 손을 쓴 것이나 엄청난 속도의 쾌검 때문이 아니다. 단번에 사령술의 핵을 부수고 나찰편을 제압한 것 때문이다. 더듬거리며 말을 잇는 아인벨프를 싸늘하게 바라보며 나는 말했다.


“기다리는 동안 검에 당하지 않은 곳을 찾아봤는데 몇 개 남지 않더군요.”


그 한마디에 팽팽하던 시위가 마침내 끊어졌다. 아인벨프가 자포자기한 것처럼 괴성을 내지르며 소드마스터의 힘을 앞세워 달려들었다. 아인벨프의 손목에서 솟아난 검은 칼날이 정신없이 산란하며 날아들었다. 마구잡이식 칼질을 단순한 움직임만으로 받아내고 동시에 빈틈이 검을 찔러넣었다. 검기도 피어오르지 않는 단순한 검이 수차례 단단한 갑옷을 강타했다.


두두두두둥!


순식간에 열 곳이 넘는 급소를 격중당한 아인벨프가 비명을 터트리며 나가떨어졌다. 어디인지 마법으로 보호받지 않는 곳이 한곳 있었나 보군. 바람 소리로 이루어진 고요 속에서 아인벨프가 바닥을 나뒹구는 요란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언덕 아래로 한없이 구르던 아인벨프의 주위로 갑옷을 이루고 있던 뼈가 불쑥 솟아나 간신히 그를 지탱했다.


“크으...”


아인벨프가 차츰 정신을 차리려 머리를 휘휘 젓는다. 그러나 곧 휘청하고 균형을 잃는다. 재차 날린 검이 그를 지탱하던 뼈를 부수었기 때문이다. 그것을 시작으로 연달아 뻗어 나간 검이 아인벨프의 갑옷을 조금씩 깎아갔다. 어깨, 가슴, 복부, 허벅지. 위에서 아래로 이어진 연격에 마침내 나이트 아머지 힘을 잃고 먼지처럼 부스러져갔다.


“으아아......”


아인벨프가 먼지처럼 화한 갑옷을 움켜쥐고 엉금엉금 기며 내게서 멀어지려 한다. 그런 그를 내려다보며 나는 천천히 그 옆을 따라 걸으며 또박또박 말했다.


“포기하십시오.”


“아, 아아! 살려....”


추악하다. 실력을 시험하고 다듬어 보겠다는 뜨거운 정열은 싸늘하게 식어버린 지 오래였다. 더 검을 휘두르는 것도 무의미하다 싶어 검을 집어넣고 바닥을 기어가는 아인벨프의 뒷덜미를 잡아채 단숨에 그를 저만치로 내던졌다.


“끄아악!”


공중을 날아 아인벨프가 심하령과 천검대 사이에 처박혔다. 천검대가 재빨리 아인벨프를 포박하고 무릎을 꿇렸다. 이렇게 싸움은 이제 끝났다. 싸움이란 본래 허망한 결과로 귀결되는 일이라지만 그 과정하저 허망해서야 맥이 빠질 뿐이었다.


“이자는 어찌하시겠습니까?”


여기저기 흙먼지와 피가 묻어 있는 가운데도 찬연하게 빛나는 미남자, 옥천평이 조심스레 내 의사를 물어 왔다. 옥천평이 쥐고 있던 포승줄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나는 그 줄이 묶고 있는 겁먹은 동물의 이름을 불렀다.


“이젠 묻는 말에 대답할 차례인 것 같습니다만?”


완전히 겁에 질려 버둥대는 가운데, 나는 그대로 주저앉았다. 그래도 도망치지 않는 걸 보니 판단력은 제법 있는 모양이군. 조금이라도 낌새가 있었으면 어딘가를 잘라버리고 이야기를 시작하려고 했으니 말이다.


“사, 살려.......”


뒤늦게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아인벨프가 약삭빠르게 갑옷을 벗어 던지고 바닥에 넙죽 엎드렸다. 동시에 아직 긴장을 늦추지 않았던 이들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각자의 병장기를 내렸다. 그런 한편 나는 기가 차서 작은 한숨을 내쉬고 고개를 저었다.


“항복이 문제가 아니라 묻는 말에 대답부터 하란 말입니다. 대체 왜 흑마법사가 여기까지 흘러들어온 겁니까?”


“나, 난 고용됐다! 저 뚱땡이가 나를....”


“고용주가 죽어서 복수라도 하고 싶었습니까? 더 헛소리하고 싶다면 저승에서 실컷 하게 도와드리지요.”


위협 삼아 검기가 피어오르는 검을 휘두르는 시늉을 하니 아인벨프가 터진 개구리가 내뱉는 단말마 같은 비명을 지르고 그대로 졸도해 버렸다. 어처구니가 없는 상황에 별수 없이 검을 거둘 수밖에 없었다.


“지, 진짜 죽이는 줄 알았어요.”


종리혜가 조심스레 다가 와 한마디를 던졌다. 어째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주위를 보니 모두 그렇게 생각했는지 놀란 기색이 보였다. 나야 얼마든지 검을 멈출 자신이 있었기에 솜털이 닿기 직전까지 검을 휘둘렀지만 아인벨프 본인은 물론이고 모두가 살수를 펼쳤다 여긴 모양이다.


“잘못이야 있지만, 결과만 보자면 무의미하게 목숨을 빼앗을 정도는 아니라 생각합니다. 문 소협도 죽지 않았고 흑호단이야 천하에 다시없을 망종들이니 시귀가 되었다 하여 동정할 필요는 없을 겁니다.”


“아, 정말로요? 어떻게 아세요?”


“죽었다면 시귀가 되지 않았겠습니까? 하지만 아직도 일어나지 못한 걸 보니 상세가 좋지 않아 보입니다. 소저께서 조금 도와주시겠습니까?”


“아, 넵.”


종리혜가 문영 쪽을 쪼르르 달려가는 것을 물끄러미 보다가 이내 한상염의 상세에 생각이 미쳐 그쪽으로 몸을 돌렸다. 언제 자리를 잡았는지 심하령이 파리한 안색으로 한상염의 몸 여기저기에 침을 꽂고 있었다.


“도울 것이 있습니까?”


심하령의 주의를 흩트리지 않을 정도로 조심스레 다가가 손을 보태기 위해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아서 물었다. 심하령은 침 몇 개를 마저 꽂고는 반쯤 말라버린 땀을 닦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기력이 너무 쇠했어요. 공자께서 운기를 도와주시면 좋겠네요.”


“그렇습니까?”


어렵지 않은 부탁이다.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고 몸을 일으킨 다음, 한상염의 기력을 바로잡느라고 바삐 움직이는 심하령의 등에 손을 얹었다. 심하령이 흠칫 놀라서 나를 올려다보려는 찰나, 풍부한 내공이 그녀의 기혈을 휘감았다.


“하윽!”


심하령이 침구마저 떨어트릴 정도로 격렬한 내공의 흐름에 휘말려 몸을 웅크렸다. 이에 놀라서 손을 뗄 뻔 했지만, 곧 마음을 가라앉히고 요상에 집중했다.

본래 내공이란 마음에서 비롯되는 것이라, 함부로 움직이면 내공을 전해주는 쪽이 인식한 기혈과 실제 기혈이 어긋나기에 대단히 위험하다. 잘못하면 세맥으로 내공이 쏟아져 절명할 수도 있다. 하지만 다행히도 내 내공은 다른 내공과는 달리 기혈에 연연하지 않는 자연기(自然氣)에 가까워서 설령 검무를 추고 있어도 내공을 불어넣고 운기를 돕는 것이 가능하다.


“뭘 하시는 거예요!”


심하령이 벌떡 일어서서 표독스러운 눈으로 나를 노려보았다. 오랜만에 보는 생기 있는 모습에 반은 놀라고 나머지 반절은 반가운 느낌이 든다.


“운기를 도와드렸습니다만.”


“제가 아니라 한 대주를 도와달라는 말씀을.....”


그제야 이상을 눈치챈 그녀가 어느새 등에서 머리 위로 올라선 손을 올라다 보았다. 아직도 머리를 감싸고 있는 내 손에서는 내공이 흘러들어오고 있었다. 심하령이 무척 당황한 기색을 내보이면서도 기력이 샘솟는 상태가 신기한지 양손과 몸 이곳저곳을 들여다보며 중얼거렸다.


“움직였는데? 기혈을 무시하고 있어? 대체....”


“별것 아닙니다. 그럼 이제 한 대주 차례군요.”


심하령의 머리에서 손을 떼고 한상염의 가슴에 손을 얹었다. 그 순간 심하령의 눈을 스쳐 간 감정은 놀랍게도 아쉬움이었다. 어지간히도 개운했던 모양이다. 하기야 기경팔맥은 물론이고 세맥에까지 기운을 불어넣었으니 그럴 만도 하지.


“공자님은 도저히 파악하기 어려운 분이군요.”


“새삼스러울 것도 없지요. 한 대주는 제가 보살필 테니 문 소협을 부탁드립니다.”


“네? 하지만....”


불가능한 일에 만용을 부리는 것처럼 보였을까? 심하령은 쉽사리 걸음을 떼지 못했다. 하지만 오래지 않아 심하령은 수긍하며 문영 쪽으로 움직였다. 이런저런 일로 조금은 신뢰를 쌓았다고 생각해 두고 싶다.


“으음....”


한상염의 상세는 절로 고심하는 소리가 나올 정도로 심각했다. 온몸의 균형이 무너져있어 언제 쓰러져도 이상할 것이 없는 상태였고, 내공은 이미 닳아 없어진 지 오래다.

또한, 육신 자체의 기력마저 닳아버려 운기는 물론이고 요양조차 불가능한 상태다. 그런 상태로 지금까지 견딜 수 있었던 것은 거듭된 수련으로 단련한 한상염의 정신, 그러니까 혼백의 힘이다.


“과연 무룡이란 이름이 아깝지 않습니다.”


들릴 리도 없건만 그렇게 한상염에게 경의를 표하고 천천히 기력을 내공으로 보하는 것부터 시작했다. 심하령의 침술로 모아 둔 기력을 내공으로 감싸 조밀하게 쌓아올려 육신을 지탱하게 했다. 그리고 오래전 불이 꺼진 기맥을 열고 내공을 새로이 더해 스스로 움직일 수 있도록 힘을 더했다.


“후우....”


내공의 소모가 보통이 아니다. 무한정에 가깝던 내공이 순식간에 바닥을 보이며 심신이 피로에 물들어 가는 것이 느껴졌다. 조금 더 나은 방도가 있다는 것을 직감했건만 애석하게도 내게 그런 능력은 없었다. 그저 무모하게 내공을 쏟아부어 기력을 보충하는 것이 고작일 뿐.


“끝났나요?”


처치를 마치고 손을 떼자마자 종리혜가 언제 왔는지 바짝 다가와서 물었다. 문영의 상처를 돌보고 있던 심하령도 놀란 눈으로 내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무래도 꽤 시간이 흐른 모양이다.


“급한 불을 껐습니다만, 오랫동안 정양해야 할 겁니다. 한시라도 빨리 돌아가야겠군요. 옥 부대주는 어디 있습니까?”


용케 알아채고 옥천평이 어둑어둑한 수풀 사이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치료 때문에 움직이지 못하는 동안 주위를 경계하고 있던 모양이군.


“지금 상황은 어떻습니까?”


옥천평이 머리를 조아리며 부복한 채, 천천히 상황을 설명해갔다. 과연 그 대처가 확실하고 일목요연하여 새삼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여, 이대제자 중 셋은 저와 사방을 경계하고 있으며, 둘은 서역의 주술사를 감시하고 있나이다.”


“훌륭하군요.”


솔직히 감탄했다. 황도가 무너진 이래로 중원에는 군문의 전통이 끊어진 지 오래였다. 허망하게 유구한 가르침이며 병법이 실전된 와중에도 천검대는 서역의 숱한 군대 못지않은 일사불란함을 보여주고 있었다.


“거기에 몇 가지 임무를 추가로 완수해주셨으면 합니다. 우선 움직이기 전에 믿을만한 제자 한 조를 보내 길을 열어 주십시오. 환자가 있으니 조금 거칠더라도 빠른 길로 움직여야 합니다. 그리고 떠나기 전에 이 언덕을 모두 소각해야 합니다.”


“소각이라 하심은?”


“본래는 정화가 먼저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으니 시귀를 모조리 태워버려야 합니다. 아직 우기가 오기 전이니 다른 준비 없이 화섭자 몇 개만으로도 충분할 겁니다. 아, 그리고 이동간에 환자를 부축하고 흑마법사를 감시할 이들도 따로 준비해 주십시오.”


“존명.”


옥천평이 포권을 쥐어 보이고는 천검대원 중 성한 이들을 불러 모아 임무를 수행해갔다. 그 모습을 묵묵히 지켜보던 종리혜가 손뼉을 치며 은근슬쩍 나를 추켜세웠다.


“우와, 군문에 계셨던 것처럼 말투나 분위기가 보통이 아니셔요.”


그 말대로 학도병으로 징집되어 전장을 구르던 때도 있었고, 독립부대 장교로 움직인 적도 있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언행에 그런 느낌이 묻어나온 게 아닐까? 그러나 그때 생각을 하면 조금은 침울해지는 감이 있어 손을 내저어 굳이 그 사실을 외면했다.


“그건 아닙니다만, 이상하게 보였다면 주의하겠습니다.”


“에, 아니에요. 사실 취향이기도 하거든요.”


“예?”


“아하하, 아무것도 아녜요 정말로. 지금은 언니가 엄청 무섭게 노려보니까 나중에 얘기해 봐요. 우리.”


종리혜는 묘한 미소를 지으며 어린 사슴 같은 발걸음으로 멀어져갔다. 노려봐? 한발 늦게 심하령 쪽을 바라보았지만 심기가 뒤틀린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그냥 농담이었군 실없는 소리에 피식 웃음이 나온다.


“자, 그럼....”


나는 길게 숨을 들이마셨다가 내쉬었다. 막대한 내공에 가려진 피로감이 역력하게 느껴진다. 틈이 있을 때 쉬어야겠군. 다른 이들이 한창 일하는 가운데 쉬려니 조금 눈치가 보였지만 안타깝게도 내가 손을 보태봐야 일만 복잡해질 것 같은 느낌이 들어 적당한 자리에 앉아 눈을 감고 마음을 가라앉혔다. 그래, 어차피 앞으로 생각해 두어야 할 것들도 있으니 조금은 여유를 부려도 나쁠 건 없겠지.




감상이나 비평은 언제나 환영합니다.


작가의말

이번 편은 분량을 나누기 조금 애매해서 8장의 마지막 부분으로 쳐서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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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5 11. 남해(南海) (2) +5 19.11.26 371 11 11쪽
224 11. 남해(南海) (1) +6 19.01.30 336 11 11쪽
223 10. 운칠기삼(運七技三) (10) +5 18.10.30 362 9 17쪽
222 10. 운칠기삼(運七技三) (9) +4 18.05.25 426 5 17쪽
221 10. 운칠기삼(運七技三) (8) +3 18.01.17 400 10 15쪽
220 10. 운칠기삼(運七技三) (7) +4 17.12.31 410 5 14쪽
219 10. 운칠기삼(運七技三) (6) +2 17.12.05 349 6 40쪽
218 10. 운칠기삼(運七技三) (5) +2 17.10.17 396 6 17쪽
217 10. 운칠기삼(運七技三) (4) +5 17.06.13 565 7 11쪽
216 10. 운칠기삼(運七技三) (3) +1 17.06.13 473 5 15쪽
215 10. 운칠기삼(運七技三) (2) +5 17.03.20 588 10 19쪽
214 10. 운칠기삼(運七技三) (1) +6 17.01.15 743 10 17쪽
213 9. 넘고 넘어서, 돌고 돌아서 (5) +3 16.12.18 871 14 20쪽
212 9. 넘고 넘어서, 돌고 돌아서 (4) +6 16.12.03 682 13 25쪽
211 9. 넘고 넘어서, 돌고 돌아서 (3) +5 16.11.02 1,007 10 25쪽
210 9. 넘고 넘어서, 돌고 돌아서 (2) +7 16.09.12 831 11 36쪽
209 9. 넘고 넘어서, 돌고 돌아서 (1) +5 16.06.13 923 10 22쪽
» 8. 등하불명(燈下不明) (9) +2 16.06.14 872 10 21쪽
207 8. 등하불명(燈下不明) (8) +8 16.05.11 919 17 31쪽
206 8. 등하불명(燈下不明) (7) +6 16.03.29 785 10 24쪽
205 8. 등하불명(燈下不明) (6) +4 16.02.14 836 14 28쪽
204 8. 등하불명(燈下不明) (5) +3 16.02.10 916 14 18쪽
203 8. 등하불명(燈下不明) (4) +7 15.12.13 1,072 14 21쪽
202 8. 등하불명(燈下不明) (3) +11 15.10.12 867 20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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