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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ferior Strugg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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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개
작품등록일 :
2013.01.31 09:36
최근연재일 :
2021.11.10 22:29
연재수 :
226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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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6,4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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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871
글자수 :
1,513,856

작성
18.10.30 0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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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글자
17쪽

10. 운칠기삼(運七技三) (10)

DUMMY

감정의 격발. 그에 호응하여 주변의 공기가 일렁였다. 적의와 위압감으로 가득한 기의 파도가 주위를 뒤흔들고 있었다. 그러나 일기당천은 그 기세를 한 몸으로 받으면서도 일말의 경계도 없이 외려 조소할 따름이었다.


“말은 당당하다만 그 꼴로 누구를 벌하겠다고 나서느냐?”


그 말대로 아버지의 모습은 일견 패장(敗將)같았다. 늘 단정하던 의복은 넝마처럼 휘날리고 있었고, 검집은 커녕 요대조차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아버지는 여전히 일문의 문주다웠다. 잔뜩 흐트러진 머리카락이 흩날려 눈을 가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는 끝까지 당당하게 이선엽에게 검을 겨누고 있었다.


“행색이 초라한들 무엇이 달라지겠는가? 이선엽 그대는 본문의 우방인 심가를 핍박하였으며 나아가 무림 전역을 혼란케 하였으니 죄를 물어야 마땅할 것이다.”


당연하다면 당연하게도 이선엽은 코웃음조차 치지 않았다. 애당초 말로 타이를 정도였다면 이 지경까지 오지도 않았다는 듯.


“가소롭구나. 그렇다면 그 매끄러운 세 치 혀로 말해 보아라. 피붙이가 한나절 내내 궁지에 몰려 있었는데 아비란 자는 어디서 무얼 하다 왔느냐?”


가슴 속에 묻어 두었던 의문이 무명천에 물이 배듯 슬며시 피어올랐다. 사람의 마음이란 얼마나 간사한 것일까? 고작 단초 하나만 가지고 이렇게 흔들리다니.


“말을 삼가라!”


한순간이나마 아버지, 천의검문의 문주를 의심했다는 부끄러움을 이기지 못하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 뱃속이 부글부글 끓어오르고 가볍게 목을 타고 핏기가 올라왔다. 아차 싶었다. 지쳐 나가떨어진 판에 명경지수는커녕 역정을 내다니.


“마음을 가라앉히어라 군아.”


그래도 그간의 수양이 아주 헛된 것은 아니었는지, 평온하기 그지없는 아버지의 목소리가 귀를 타고 들어오자 자연히 진탕되었던 속이 가라앉았다. 그래, 침착하자. 사실이 어찌 되었든 눈앞에 놓인 것보다 중할 순 없다.


“슬슬 시시한 소리도 지겹구나. 이제 슬슬 덤벼들 테냐, 계속 입씨름만 할 테냐?”


이선엽이 입매를 치켜세우며 조소를 날렸다. 일문의 문주든 그 무엇이든 단번에 박살낼 수 있다는 강한 자신감, 비할 데 없는 저력에서 오는 고양감이 여실히 느껴졌다.

당연히 이선엽이라고 아버지의 실력을 짐작하지 못하는 것은 아닐 터, 그렇다면 정말로 이선엽은 아버지를 압도할 자신이 있다고 해야 할까?

답은 내릴 수 없었다. 걱정이 앞서는 한편 슬쩍 기대감이 부풀었다. 과연 아버지의 진신무공과 끝을 알 수 없는 이선엽이 격돌한다면? 금방이라도 상승의 무공이 보여줄 진풍경이 손에 잡힐 것 같았다.


”이 불초 역시 묻겠다. 떠나려는 자가 어찌 계속해서 싸움을 거듭하는가?“


”네놈들이 붙잡지 않았다면 진즉 떠났을 게다! 그래, 지금이라도......“


역정 어린 고함을 내지르려던 이선엽의 안색이 변했다. 미처 깨닫지 못한 급소를 기습당한 것 같은 차가운 표정이다. 이선엽이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두리번거린다. 그러다가 머리를 감싸 쥐고는 이를 바득바득 악물며 더듬거렸다.


”이건.... 무슨....“


”이제 깨달았는가? 애당초 그대에게 주어진 퇴로란 없었다. 숲에 숨겨진 법진은 서역으로 옮겨주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서역에서 이쪽으로 이어지는 법진에 불과했으니“


아버지가 고개를 내저으며 품속에서 무언가를 거내 바닥에 툭 내던졌다. 이선엽이 그 물건에 시선을 주었지만 별다른 반응은 없었다. 오히려 반응은 내 쪽에서 더욱 격렬했다.

팔찌치고는 꽤 두껍다. 저건 반지다. 그러나 결코 인간에게 맞는 반지는 아니었다. 빌어먹을, 나는 그 반지를 알아볼 수 있었다. 기사단장의 반지(Ring of Commander). 엠펠로니아의 기사 중에서도 수위에 있는 자만이 가지고 있다는 상징이었다.


”법진에서 나타난 마물 중 하나가 가지고 있던 기물이다. 이 물건의 효능이 무엇인지 아는가?“


”치워라.....당장 치우지 못할까!“


돌연 머리를 감싸쥔 이선엽이 노호성을 터트리며 그 기물을 향해 묵직한 강기를 휘둘렀다. 금강석이라도 산산조각 날만한 기세로 날아드는 일격. 그러나 어느 순간 갑자기 이선엽이 신형이 휘청이며 무지막지한 힘의 방향이 뒤틀렸다.


쿠웅!


애꿎은 지면을 휘갈긴 결과는 참혹했다. 일 장에 달하는 구덩이가 한순간에 나타나 있었다. 그러나 놀랍게도 그 여파는 아슬아슬하게 반지를 비켜나 있었다.


”이것을 가진 마물은 이 기물을 통해 다른 마물을 지배하는 것으로 보였다. 그렇다면 파천의 꾐에 넘어간 그대는 어떠한가? 상태를 보아하니 별반 다르지 않겠군.“


”나, 나는..... 나는.....!“


이선엽이 희번득 거리는 눈으로 억지로 반지를 향해 팔을 뻗어 보지만, 마치 누가 반대로 잡아당기는 듯 팔이 멋대로 뒤로 꺾일 뿐, 반지 가까이도 가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기를 얼마간, 이선엽의 코와 입에서 선혈이 터져 나오며 마침내 그녀가 체념하고 고개를 처박은 채 벌벌 떨기 시작했다..


”아버지, 그렇다면.....“


”마제로부터 힘을 받은 대가라 할 수 있겠지.“


아버지가 조용히 한숨을 내쉬며 얼핏 안타까운 시선으로 이선엽을 바라보았다. 그 시선을 절대 나를 향한 시선은 아니었다. 하지만 별안간 몸이 간지러워 도무지 참을 수가 없었다. 단지 이선엽이라는 안타까운 이에 한한 일이 아니었다. 나 역시 그녀와 마찬가지로 큰 우를 범했었던 것을 어찌 잊을까?


“생각해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마제가 그대르 앞세워 무얼 하였으리라 생각하는가? 그것도 기백의 마물과 함께 무슨 짓을 하려고 했는지 생각해 보아라.“


아버지가 추상같은 목소리로 이선엽을 추궁했다. 바닥에 바짝 옆드려 있던 이선엽에거서 조금 전과 같은 떨림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 대신, 조금 다른 느낌의 떨림이 느껴졌다. 이른바 노기(怒氣)다.


“무림을 파멸로 이끌려 했군요.”


이선엽을 대신해 담담하게 내뱉은 한마디에는 참 많은 것들이 배어 있었다. 무림의 멸망. 나는 그 결말을 접한 적 있었다. 이선엽과 마찬가지로 파펀마제가 주었던 힘을 휘둘렀을 때, 빙룡의 내습 때 말이다.

다시 생각해보면 참 석연찮은 일이다. 사방의 제후가 건재했고 무림의 숱한 방파가 있었는데 그렇게 조용히 멸망했다니. 빙룡이라는 대적(大敵)을 앞두지 않았다면 좀 더 이상하다고 생각해보지 않았을까?

그리고 지금 이 순간, 무림의 멸망에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무언가가 있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무림은 단순히 빙룡 하나 때문에 멸망한 게 아니었다. 추측컨대 여러 액이 겹치고 또 겹쳐서 멸망하지 않았을까? 그리고 아마 그 결정적인 재액은 일기당천이 아니었을까?


”왜!“


이선엽이 흡사 짐승처럼 포효했다. 일말의 내공도 담기지 않은 순수한 포효. 단말마와도 같은 외침에 섞인 것은 깊고 깊은 회한 단 하나뿐이었다.


”어찌 나는 죽지도 못하는가! 황상..... 나를 데려가시오. 제발 이 못난 이를 데려가시게 황상!! 나를 버리지 마!!“


점점 고성으로 치달아가는 이선엽의 포효는 폐허가 되어버린 천도 곳곳을 메아리쳤다. 그렇게 점차 힘이 빠진 이선엽이 축 늘어져 주저앉은 채 하늘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눈물이며 콧물이며 줄줄 흘린 자국이 역력한 가운데 이선엽은 남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은 채 침까지 질질 흘리고 있었다.


“아, 그런데 아버지. 몸은 괜찮으십니까? 분명 숲에서 마물을....”


“나는 괜찮다. 그보다 곧 시작될 테니 어서 몸을 추스르거라.”


“시작된다니.... 무슨 말씀이십니까?”


아버지의 대답이 들려오기도 전에 그 대답이 이선엽으로부터 터져 나왔다. 파공음이 울린다. 이선엽을 중심으로 퍼져나간 기파가 맹렬히 공기를 가르는 소리였다.

순간 후끈하게 달아오른 공기를 느끼자 간간이 느껴지던 탈력감이며 자잘한 아픔이 싹 달아났다. 빌어먹을, 가만히 두어도 픽 고꾸라질 것 같던 이선엽은 어느새 꼿꼿하게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크르르.....”


흡사 흉포한 짐승을 떠올리게 하는 모습이었다. 이선엽은 피로 벌겋게 물든 이를 훤히 드러내고 가진바 기운을 줄줄이 흘리고 있었다. 어지간한 자라면 근처에 서 있는 것만으로 속이 진탕될 위험천만한 기파가 넘실대고 있었다.


“아버지!”


위험하다. 위기를 깨닫고 외치기도 전에 이선엽의 신형이 움직였다. 아버지가 검을 들어 이선엽의 쌍장을 막아섰지만 여지없이 튕겨 나가고 말았다. 마물들과 일전을 벌이고 여기까지 달려오셨으니 여력이 남는 게 이상할 뿐이지.

이선엽이 재차 아버지를 노리는 지금, 내가 할 일은 하나뿐이다. 이를 악물어 바닥을 보이는 내공을 일제히 끌어모은 뒤, 전력으로 경공을 펼쳐 이선엽에게 몸을 날렸다.


“이쪽이다!”


터엉!


호기롭게 달려든 것은 좋았지만 그게 고작이었다. 굉음을 동반한 일 합으로 결판이 났다. 천천히 회복되던 속이 진탕되는 것은 물론이고, 간신히 끌어올린 내공은 낡은 실처럼 툭 끊어져 버렸다. 그렇게 주춤한 새, 이선엽이 짐슴처럼 포효하며 묵직한 장저로 복부를 후려쳤다.


“어딜 보는 것이냐!”


묵직한 풍압이 느껴지는 찰나, 갑자기 어딘가에서 부드러운 바람이 불어오는가 싶더니 서릿발 같은 목소리가 주위를 에워쌌다.


“크아아아!”


이선엽이 괴성을 내지르며 웬걸 갑자기 투로를 잃고 뒤로 끌려가기 시작했다. 이선엽이 목줄이 채워진 듯 딸려간 방향에서는 초췌한 모습의 아버지가 한결같이 무뚝뚝한 모습으로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잊었는가? 네 상대는 나다.”


아버지가 그 말과 함께 검을 다시 한차례 휘젓자 이선엽을 에워싼 부드러운 기운이 사라졌다. 원리를 짐작할 수도 없는 고절한 수법에 감탄하는 것도 잠시, 이선엽이 전과는 달리 경계심을 바싹 세우며 천천히 아버지를 향해 적의를 내보였다.


“크아아!”


이선엽이 다시금 몸을 날렸다. 위험하다. 이선엽에게서 선명하게 느껴지는 내공의 양과 질은 무시무시할 정도였다. 하지만 괘씸하게도 그 절체절명의 순간에 아버지를 걱정하기보다 또 어떤 검이 튀어나올지 기대감이 부풀어 올랐다.


콰지직!


이선엽의 일격을 검 한 자루로 받아낸 순간, 아버지의 다리가 지면을 긁으며 죽 밀려났다. 못 막는다. 기대감에 빠져 있던 자신을 꾸짖으며 나는 다급히 목청을 드높였다.


“아버!.....”


“검객이라는 자가 일희일비(一喜一悲)하지 마라!”


별안간 아버지로부터 전에 없던 노호성이 터져 나왔다. 한없이 부족하던 시절, 가문의 힘으로 내공을 키우고 싶다는 말을 꺼냈을 때 보였던 노기충천한 모습에 나는 그만 목구멍까지 올라온 외침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검이란 마음을 담는 그릇이거늘, 눈앞의 것에 현혹된 자의 검이 어찌 무뎌지지 않을 수 있겠느냐?”


한없이 뒤로 밀려갈 것 같던 아버지의 모습이 천년 묵은 거목처럼 지면에 고정되어 있었다. 이선엽이 무작정 앞으로 내뻗은 팔을 회수하려 하지만 어찌 된 일인지 이선엽의 팔을 따라 검이 낭창낭창 움직여 도무지 떨어질 줄을 몰랐다.


“무슨.....”


감탄을 넘어 기괴함까지 느껴지는 광경이다. 보이지 않은 무언가로 이어진 듯 팔을 따라오는 검에 난처함을 느꼈는지 이선엽이 다시 어마어마한 기운을 폭사했다. 하지만 아버지는 그마저도 흘려넘길 뿐 대수롭지 않게 그 자리를 지키고 있을 뿐이었다.


“제자 군은 듣거라.”


“세이경청하겠습니다.”


웃음이 나온다. 그리고 보니 이번 생에선 제대로 가르침을 구한 적이 없었구나. 몸 여기저기가 만신창이었지만 알 수 없는 생기가 풀풀 피어올라 아픔은 느껴지지 않았다.


“이 자를 보아라. 제 힘에 취해 있는 일기당천을 보니 무엇이 느껴지느냐?”


“제자가 불민하여 대답하지 못함을 용서하시옵소서.”


대답하기는커녕 질문의 본의도 짐작하지 못한 게 참담한 지경이다. 씁쓸함을 곱씹는 내게 아버지가 다시 입을 열었다.


“군 너는 강하다. 검의 깊이며 내공의 현묘함은 가히 하늘에 가깝다 할 수 있다. 그 사실을 잘 아느냐?”


“예.”


아버지와 내 문답이 이어지는 가운데도 이선엽과 아버지의 조용한 힘겨루기는 계속되고 있었다. 딱 붙어서 떨어지지 않은 검을 떨쳐내지 못한 이선엽이 급기야 반대편 손이며 발길질까지 가했지만, 그때마다 닿은 부분이 조용히 검면에 붙어버리는 괴이쩍은 광경이 나타날 뿐이었다.


“허나, 부족하다. 산을 가르고 바다를 메울 내공이 있다 한들 무엇하겠느냐? 그것을 온전히 쓰지 못하면 이처럼 짐승이나 다를 바 없을 뿐이다.”


아버지가 한차례 팔을 휘둘러 커다란 원을 그리자 이선엽이 그 움직임에 죽 딸려가선 휙 하고 내동댕이쳐졌다. 물론 형편없이 나뒹구는 대신 날렵하게 균형을 잡았지만, 아버지 앞에서 기세가 한풀 꺾인 것은 분명해 보였다.


“지금 내가 일기당천을 상대하는 것을 보았을 것이다. 군, 너는 왜 이리 할 수 있겠느냐?”


추상같은 목소리에 절로 고개가 수그러든다. 할 수 없었다. 아버지가 무슨 가르침을 내리려 하시는지도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우습게..... 보지 마라!”


어느 정도 정신이 돌아왔는지 이선엽이 사자후를 내뱉으며 좀 더 무인다운 움직임을 구사하며 압박을 가했다. 그러나 승부를 논하는 것이 무의미할 차이가 느껴졌다. 아버지는 문자 그대로 어린아이를 다루듯 일기당천을 압도하고 있었다.


“일기당천이라, 단신으로 기천의 군세를 막아낸 것은 위업 중의 위업이다. 허나, 정작 본신의 수양은 미진하기 그지없으니. 섬기는 이를 잃어 갈 곳 없는 힘으로는 무명검객 하나도 감당할 수 없음이야.”


“개소리!”


다채로운 기운과 투로를 타고 수없이 많은 권격이 이선엽으로부터 쏟아져 나왔다. 검으로 저걸 막기란 차라리 쏟아지는 소나기를 검으로 튕겨내는 것이나 다를 바 없었다. 한마디로 대응하기란 요원하다는 의미다.

그렇지만 정말로 그럴 해낼 수 있다면? 검 한자루로 쏟아지는 폭우 속에서 옷자락조차 적시지 않을 수 있다면 어떠할까?


지잉.


일검이었다. 무수한 권경(拳勁)을 쳐낸 것은 단 하나의 검로였다. 어떻게 된 일인지 짐작할 수도 없었다. 그저 경탄할 뿐. 찬사를 보낼 뿐이었다.


“후우우.......”


심호흡을 내쉬며 검을 내린 아버지가 담담하게 나를 응시했다. 일기당천은 이제 허망함을 못 이기고 그대로 두 팔을 축 내려트리고 있었다. 나 역시 작금의 상황을 모두 잊고 경천동지할 검경에 놀라 아버지를 바라볼 뿐이었다.


“보았느냐?”


“예.”


“검은 베기 위한 것이다. 쾌(快), 강(强), 유(流). 변(變). 그 외에 검에 담아낼 수 있는 모든 것들의 귀결은 결국 하나다.”


참(斬). 하지만 단순히 검에 힘을 가해 하는 것이 아니다. 무언가, 더 깊고 드높은 무언가가 그 안에 분명 존재했다.

이제 육신의 아픔과 고단함 따위는 흔적도 없다. 아니, 숫제 활력이 돌기 시작했다. 그 사실을 인지하면서도 깨닫지 못한 채, 나는 아버지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군 너의 무공은 완성되었다. 네 노력도 있겠지만 운도 따라준 덕일 것이다. 허나, 그것이 곧 종착이라 할 순 없다. 모든 것을 초월해 다다르는 무궁무진함. 우리 문에서는 그것을 일컬어 천의라 칭한다.”


이전 삶에서 비슷한 가르침을 받았던 것이 여실히 기억난다. 이제야 알 것 같다. 지금이라서 알 수 있었다. 형언할 수 없는 무언가를 움켜쥐었던 시절. 그때를 떠올리게 하는 가르침의 한올 한올이 가슴을 벅차오르게 한다.


“나는 다만 선각(先覺)한 자로서 전할 뿐이다. 검은 베기 위한 물건이다. 허나 너 자신이 없는 검은 그저 신외지물(身外之物)에 불과하니, 검이 무언가를 벤다면 그건 검이 무언가를 베는 것이냐, 아니면 검이 아닌 네가 무언가를 베는 것이더냐?”


정천의 검이 하늘 높은 곳을 가리킨다. 마치 내가, 우리가 나아가야 할 길을 가리키듯 말이다. 그리고 천천히 위에서 아래를 향했다. 아무런 기운도, 기세도 담기지 않은 무색무취한 검. 그러나 일검에 담긴 무게는 일생(一生). 아니, 수십 생을 담았다 여길만큼 거대했다.


“아아......”


베었다. 그 사실을 깨달은 순간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 실선이 그어진다. 그러나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왜냐면 아무것도 없는 무(無)를 베었기 때문에.


“내공이며 초식에 연연하지 마라. 군 너는 이미 그것을 초월하였으니 이제 무공을 넘어 너 자신을 갈고 닦도록 하여라. 시류에 흔들리지 않으며 끝없이 정진하라. 그 길을 일컫어 나는 이리 칭하였다.”


아버지의 음성을 타고 어렴풋한 짐작으로 남용하던 진천검결의 형체가 사방으로 흩어졌다.

흩어지고 다시 뭉치기를 반복하며 마침내 커다란 구멍을 남기고 진천검결이 단단하게 굳었다. 그 구멍에 들어갈 것은 검. 그리고 나 자신이었다.


“신검합일(身劍合一)이라고.”




감상이나 비평은 언제나 환영합니다.


작가의말

뭔가 헷갈린다면 정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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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4 11. 남해(南海) (1) +6 19.01.30 337 11 11쪽
» 10. 운칠기삼(運七技三) (10) +5 18.10.30 363 9 17쪽
222 10. 운칠기삼(運七技三) (9) +4 18.05.25 427 5 17쪽
221 10. 운칠기삼(運七技三) (8) +3 18.01.17 400 10 15쪽
220 10. 운칠기삼(運七技三) (7) +4 17.12.31 411 5 14쪽
219 10. 운칠기삼(運七技三) (6) +2 17.12.05 349 6 40쪽
218 10. 운칠기삼(運七技三) (5) +2 17.10.17 396 6 17쪽
217 10. 운칠기삼(運七技三) (4) +5 17.06.13 566 7 11쪽
216 10. 운칠기삼(運七技三) (3) +1 17.06.13 474 5 15쪽
215 10. 운칠기삼(運七技三) (2) +5 17.03.20 589 10 19쪽
214 10. 운칠기삼(運七技三) (1) +6 17.01.15 743 10 17쪽
213 9. 넘고 넘어서, 돌고 돌아서 (5) +3 16.12.18 872 14 20쪽
212 9. 넘고 넘어서, 돌고 돌아서 (4) +6 16.12.03 683 13 25쪽
211 9. 넘고 넘어서, 돌고 돌아서 (3) +5 16.11.02 1,008 10 25쪽
210 9. 넘고 넘어서, 돌고 돌아서 (2) +7 16.09.12 832 11 36쪽
209 9. 넘고 넘어서, 돌고 돌아서 (1) +5 16.06.13 924 10 22쪽
208 8. 등하불명(燈下不明) (9) +2 16.06.14 872 10 2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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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6 8. 등하불명(燈下不明) (7) +6 16.03.29 785 10 2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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