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별춤 님의 서재입니다.

망나니 소드마스터의 시종이 되었다.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퓨전

완결

별춤
작품등록일 :
2022.10.28 14:10
최근연재일 :
2022.11.28 22:00
연재수 :
25 회
조회수 :
3,528
추천수 :
162
글자수 :
168,373

작성
22.11.05 23:40
조회
187
추천
8
글자
18쪽

계약 (1)

DUMMY

검은 제복은 하인의 자부심이다.


귀족을 직접 응대하는 몇 없는 하인. 그래서 이들은 집사나 몇몇 시종 외에는 사용인 중 최고 서열이나 다름없다.


낡은 셔츠를 입는 보통 하인들에게 목 아래를 모두 감싸는 격식 있는 제복은 선망의 대상이다.


판챠는 빈틈없이 각이 잡혀 있는 검은 제복을 보며 웃었다.


‘안심하고 두들겨 패도 되겠네.’


귀족가는 체면을 중시한다. 사용인들끼리 주먹다짐이 오갔다는 게 알려지면 백작의 체면도 상할 터.


그러면 패면 안 되는가? 아니다. 제복 아래를 때리면 해결된다.


판챠는 단순명쾌한 결론을 내리고 앞으로 뛰어들었다.


존스는 비웃으며 주먹을 날렸다.


“쪼끄만 놈이 어딜! 이얏!”


존스와 앨링 모두 키 180cm가 넘는 건장한 사내다. 평생 막싸움으로는 져본 적이 없었다.


키 160cm이 될까 말까 한 마른 소년에게 진다는 생각은 꿈도 꾸지 않았을 것이다.


그건 보통의 사람들 사이에서 통용되는 상식이었다.


하지만 눈앞의 소년은 너무 빨랐다. 게다가 작다고 얕본 것이 되려 화근이 되었다.


“어, 어느새?”


판챠는 순식간에 존스의 리치 안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손바닥을 들었다.


짝!


오러를 손바닥에 고루 실었다. 타격력은 제복을 넘어 단숨에 피부와 피하조직 전체에 고루 퍼졌다.


“------!”


존스의 눈이 부릅떠졌다. 평생 겪어본 적 없는 통증이다.


존스는 허벅지를 부여잡고 뒹굴었다. 비명조차 나오지 않았다.


한바탕 땅바닥을 구르고 나서야 비명이 나올 정도의 고통.


“크하아아악! 허, 흐컥!”

“입이 이제 터지네. 발달이 늦구나. 근데 소리가 좀 커.”


판챠는 존스의 제복 앞주머니에서 기품 있게 손수건을 꺼내어 들었다.


“읍, 으읍!”


마침 입을 크게 벌리고 있어서 손수건은 손쉽게 입 안으로 쑤셔 넣어졌다.


짝! 판챠는 다시금 오러를 담은 손바닥을 휘둘렀다.


존스는 입이 틀어 막힌 채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꺽꺽거렸다.


“이 개자식! 죽어엇!”


앨링은 존스가 당하는 것을 보고 양손을 깍지 낀 채 판챠의 뒤통수를 후려쳤다.


정확히는 후려쳤다고 믿은 거지만.


“어?”


속도에서 상대가 되지 않았다. 앨링 입장에서는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눈앞의 금발 소년이 감쪽같이 사라졌으니까.


그리고 판챠에게는 아주 좋은 위치였다.


짝!


앨링의 등짝에 손 모양의 자국이 크게 남았다.


“흐, 흐어억!”

“아, 찰지다 찰져. 등판이 넓으니 치는 맛이 있네.”


앨링은 존스보다도 고통을 참지 못했다. 헛간 바닥의 건초 지푸라기들이 단숨에 검은 제복에 흐드러졌다.


판챠는 땅바닥을 뒹구는 존스와 앨링을 보며 부드럽게 말했다.


“걱정 마. 많이 아픈데 안 죽어.”


오러를 실어 주먹으로 치면 단번에 뼈나 내장까지 상할 확률이 높다. 민간인은 그러다간 골로 가기 딱 좋다.


하지만 손바닥으로 후려치면 피하조직과 지방에 타격력이 넓게 퍼지니 죽을 확률은 한없이 낮아진다.


대신 전신에 시퍼렇게 멍은 들겠지만. 그래도 오러를 두른 손에 맞고 이 정도로 넘어가는 게 어딘가? 판챠의 손에 감은 붕대는 오히려 살인 방지용이라 할만했다.


“흠. 흐흠.”


판챠는 콧노래를 부르며 마음껏 존스와 앨링의 등짝을 두들기기 시작했다.


“끄흐으으업! 사, 살려줘!”


둘은 해괴한 비명을 지르다 몇 분도 되지 않아 만신창이가 된 채 바닥에 무릎을 꿇고 말았다.


자랑이던 검은 제복은 헛간에 널브러진 건초와 진흙에 범벅이 되어 엉망이었다.


“대체 어떻게······.”


존스와 앨링은 황망한 표정이었다. 저렇게 작은 소년에게 당했다는 것이 납득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게 현실이었다.


판챠는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저런··· 이걸 어쩌나. 제복 다 구겨졌네.”

“······.”


두 명은 더 이상 싸울 의지가 없었다. 판챠는 매서운 표정으로 쏘아붙였다.


“야. 쪽지에 사라 씨를 어떻게 한다는 거, 해명해 봐. 5초 주지.”



존스가 얼굴이 구겨진 채 변명하기 시작했다.


“시, 실제로 그럴 생각은 없었어! 그건 널 여기서 꾀어내기 위해서··· 루퍼트 님이······.”


그러고 보니 부집사 루퍼트는 여기 없었다.


“직접 나서는 모양새는 피하겠다 이거지. 용의주도하군.”


“우, 우리도 시켜서 한 거라고! 루퍼트 씨는 보기보다 무서운 분이야······.”

“무서운진 모르겠고, 얍삽하긴 하네. 그런데 너 말이 짧다?”

“아, 아니. 그게, 예. 알겠습니다.”


판챠는 마른 건초더미를 하나 들고 와서 그 위에 앉았다. 푹신한 게 심문할 때 딱 좋아 보였다.


“판챠를··· 아니 날 괴롭힌 이유나 좀 들어보자. 루퍼트가 사주했나?”


앨링이 눈치를 보며 입을 열었다.


“듣기로 미드랜드인의 자긍심을 잃은 놈이라고··· 제국 귀족인 베르두고 가에 빌붙은 배알도 없는··· 분이라고요.”

“묘한 데서 존칭이 시작된다? 더 맞을래?”

“아, 아닙니다.”

“흐음.”



앨링과 존스가 더듬거리며 설명을 이어갔다. 아르케임 대공국이 망한 뒤로 기사단 제국이 미드랜드에 간섭해 왔다. 미드랜드 오백작은 대항할 힘이 없었다.


“아르케임 대공국이 망했다고?”

“엥? 망한 거 자체는 오래됐죠.”

“아냐, 계속해.”


고통받은 건 자신 같은 평민들 뿐이다. 기사단 제국에 대해 좋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드물다. 운운.


판챠는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말은 거창하지만 결국 핑계였다.


“야, 내가 기사단 제국이냐? 결국 니들보다 약해 보이는 애 괴롭히는 거잖아.”

“마, 맞습니다.”


앨링과 존스는 고개를 숙였다.


‘근성이 썩어빠지긴 했지만··· 이유란 게 아예 없던 건 아니었네.’


뭔가 바뀌긴 확실히 바뀌었다.


원래의 역사. 그 정보는 판챠의 머릿속에 있다.

그러면 바뀐 부분과 바뀌지 않은 부분을 구분해야 한다.


“야.”

“예! 예!”

“백작님 성함은?”

“두지트, 두지트 카사프란이십니다.”


카사프란 백작위를 세루인의 동생인 두지트가 가지고 있었다. 뭔가 바뀌긴 확실히 바뀌었다.


“역시.”

“예?”

“아냐. 그럼 마법사왕은?”


“예···? 옛날에 멸망한 고왕국의, 그 마법사왕요?”

“그거, 귀신 같은 거 아냐? 우리 어릴 때 할머니가 막 그랬잖아. 산에 함부로 가면 마법사왕이 잡아간다고.”


‘무슨 역사책에나 나올 소리 수준이 아니라 설화 수준이군.’


하지만 이 세계로 넘어올 때부터 느꼈던 괴리감이 확고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아르케임 대공국은 멸망했고 펠트 기사단국은 기사단 제국이 되었다.


‘아군이어야 할 이들은 스러지고 대적해야 할 자들은 훨씬 강해졌군. 게다가 제일 심각한 건······.’


로키노는 마법사왕과 대적할 운명이었다. 하지만 이 세계선에서 마법사왕은 없다.


판챠는 신음이 절로 나오는 것을 참았다.


‘그래서 아직도 술과 도박에 빠진 인간 말종··· 아니 망나니인 상태였군. 삶의 목적이 없어서.’


원래의 역사대로라면 로키노도 지금쯤 정신을 좀 차릴 시기였다. 망나니라도 타락한 마법사왕 처단 같은 목적이 있다면 올바르게 살 수 있는 법이다.


그렇지만 인생의 목적을 잃은 망나니는 인간 말종에 불과하다.


“두들겨 패서 갱생시킬 수도 없고 말이지.”

“예? 예?”


판챠의 혼잣말에 존스와 앨링이 흠칫하며 되물었다. 판챠는 둘을 보고 피식 웃었다. 저 둘 같은 조무래기는 판챠가 주먹으로 갱생시킬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로키노를 누가 패서 갱생시킨단 말인가?


‘그렇다고 내버려 두고 내 갈 길 가기엔··· 위험해.’


시종의 충성심? 의리? 그런 도의적인 문제가 아니었다.


애당초 이 세계는 <망나니 소드마스터>의 세계다. 망나니 주인공을 방치했을 때 판챠의 운명이 어떻게 될지는 누구도 알 수 없었다.


살아남는 것이 최우선이더라도 최대한 로키노의 옆에 붙어 있어야 한다.


그리고 로키노에게 목표를 만들어 줄 수 있는 열쇠는, 아이러니하게도 시종인 판챠일 확률이 높았다.


‘방법을 찾아봐야겠군.’


판챠는 어리둥절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존스와 앨링에게 손짓했다.


“뭐. 좋아. 물러가라. 앞으론 최대한 협조하고.”


“예, 옙! 알겠습니다!”


존스와 앨링은 황급히 인사하고 헛간에서 뛰쳐나갔다. 마치 훈련받은 경비대원처럼 군기가 바짝 들어 있었다.



* * *



술병이 나뒹굴었다. 로키노는 머리를 긁으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염병할··· 오래간만에 꾸는군.”


천재 소리를 들었다. 어릴 땐 누구도 적수가 없었다. 십 대 중반에 이미 오러를 개화했다. 광명류 남파 검법의 계승자가 바로 자신이었다. 자존심이 하늘을 찌르는 것도 당연했다.


자신을 가로막은 한 소년을 만나기 전까진.


아마 동갑이었을 것이다. 자신보다 작은 소년이었다. 하지만 폭발적인 궤도로 날아오는 제국검은 결코 작지 않았다.


예측할 수 없이 무규칙하고, 어처구니없이 빠른 검속. 하지만 로키노 또한 천재. 타고난 감각과 재능으로 검로를 막는다.


그러나 막아낸 검이 속절없이 부러진다. 그리고 자신의 검을 부러트린 상대의 검이 로키노의 몸에 파고든다.


그렇게 천재로 불리던 소년의 자존심은 무참히 부서졌다.


‘젠장.’


또래에선 단 한 번의 패배도 없었다. 녀석을 만나기 전까진. 종이 한 장 차이였다고 주변에서 위로해주는 말이 더욱 쓰라렸다.


그렇게 동갑내기에게 최초로 당한 패배는 상처로 남았다. 마음에도, 육신에도.


괴물 같은 놈.


녀석이 백금 기사단에 입단했다는 소문은 들었다.


패배의 트라우마보다도 기사단 제국의 숨 막히는 조직에 더 거부감이 들었다.


그렇게 강한 놈조차 기사단 제국의 장기 말이 되어 황제의 뜻대로 움직여야 한다.


로키노는 장기 말이 될 생각이 전혀 없었다.


“기분 더럽군. 이제 와서 왜···.”


어디를 가도 기억은 쫓아온다. 다른 시간 다른 장소에서도.


“응?”


창문 아래로 헛간이 보인다. 황급하게 뛰어나가는 덩치 둘. 검은 제복이 엉망이 되어있었다.


로키노는 자리를 털고 방문을 열었다.



판챠가 헛간에서 나오니 로키노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뭐한 거야? 건초로 사람을 야무지게 비벼놨던데.”

“로키노 님처럼 치안유지활동··· 아니 교육 좀 했죠.”

“흐음. 뭐, 됐다. 내가 상관할 바는 아니지.”


잠시간의 적막. 조금 어색한 분위기가 이어졌다. 대련을 명목으로 시종을 삼 일이나 기절시켰으니 당연한 분위기였다.


로키노는 뒤통수를 긁적이며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에이, 젠장. 시펄, 미안하다.”


접두사가 좀 많이 붙는 사과였지만 판챠는 웃었다. 로키노에겐 저것도 어마어마한 사과란 걸 알기 때문에.


“뭐. 저도 얻은 게 있으니까요.”


다시 잠시간의 침묵. 로키노는 판챠의 눈동자를 보았다. 이전과 다른 힘이 담겨 있는 맑은 녹색 눈.


“···강해지고 싶냐?”

“네.”


로키노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네 스승을 찾아주마. 기초는 내가 가르쳐줘도 돼.”


판챠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스승요?”


로키노는 그럼 자신이 가르칠 줄 알았냐는 얼굴이다.


“베르두고류 남파 광명검에 정식으로 입문하려고? 별로 추천하지 않아.”

“흐음···.”

“뭘 그런 눈으로 보냐? 치사하게 전수해주기 싫어서 그러는 거 아냐. 우리 유파 입문은 내가 힘쓰면 문제가 없지만··· 광명검을 배우면 기사단 제국과 엮이게 되니까 그러지.”


이건 바뀐 시대의 정보였다. 판챠는 갸우뚱하면서 물었다.


“엮이면 문제가 되나요?”

“응. 지독한 놈들이야. ”


로키노는 치가 떨린다는 얼굴로 말했다.


‘그런데 베르두고 가문도 제국 귀족이라던데.’


베르두고 가문은 원래 역사라면 메세타 소왕국의 유력 귀족이다. 하지만 판챠는 그런 말은 꺼내지 않았다. 왠지 로키노의 기분이 더러워질 것 같았다.


“견습기사 등록은 본가에 돌아가서 해야 하는데··· 음. 당분간 시종으로 있으면 내가 괜찮은 유파를 찾아보마. 어때, 괜찮은 거래지?”


판챠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의 후견인 역할을 하는 게 로키노에게도 좋았다. 그게 일생일대의 목표는 아니더라도, 술 먹고 망나니짓 하는 거보단 괜찮은 목표였으니까.


“거래 성립이군.”

“잘 부탁드립니다.”


판챠는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그럼, 오늘 일과 전에 잠시 기초부터 하자. 시간 되지?”

“저야 언제든지 환영이죠.”


로키노는 판챠에게 오러를 운용하는 기본적인 기법, 간단한 검술 기초를 지도했다.


한 시간도 되지 않아 판챠는 기초가 몸에 익는 것을 느꼈다. 비록 단순한 가로 베기 몇 종류와 오러를 체내에서 순환하는 경로 정도였지만, 로키노가 흡족해할 정도의 속도였다.



“그럼 시종의 일을 해야 할 때군.”


의도한 건 아니지만 판챠도 자기 업무를 삼 일이나 쉬었다. 검 손질뿐만 아니라 자질구레한 소모품도 미리 사두어야 했다.


귀족의 검은 정향유로 닦는 게 정석이었다.


판챠는 왠지 치가 떨리는 표정이었다.


‘날 두들기는데 쓴 검을 내가 손질해야 해? 아! 이 얼마나 무시무시한 직업인가?’


뜬 생각을 하며 아래층으로 내려가니 하인 대기실에는 존스가 셔츠 차림으로 앉아 있었다. 아무래도 검은 제복은 세탁 중인 모양.


판챠는 존스에게 다가가 대뜸 말했다.


“정향유.”

“뭐, 뭐, 뭐요! 정향유?”


왠지 기겁하며 존스가 말했다. 다른 하녀와 하인들이 동그래진 눈으로 둘을 바라봤다.


“정향유. 달라고.”

“없어요. 다른 기름은 몰라도 정향유는 안 쓰니 진즉 떨어졌죠. 매입할 때가 되긴 했지만.”


판챠는 의심 어린 표정으로 되물었다.


“없어? 또 나 엿 먹이는 거 아냐?”


존스는 손사래를 치면서 부정했다.


“애초에 두지트 백작님은 칼 뽑는 일이 없어요. 기사님들은 다들 자기 집에서 손질하고, 병사들이야 대충 아무 기름으로나 닦지. 뭐.”


판챠는 납득하고 말았다. 백작은 검을 휘두르긴커녕 승마조차 힘들어 보이는 체구다.


‘미드랜드의 검술 명가도 땅에 떨어졌군.’


판챠는 혀를 찰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직접 사러 나가야 했다.


판챠가 나갈 채비를 하자 존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지금 나가서 나온다고···요? 저택에서 상업지구까지 걸어서 다녀오려면 아침에 출발해야 할 텐데.”


말이라도 빌리지 않으면 어떻게 저녁 전에 다녀오겠냐는 표정이었다.


귀족가의 저택은 시끌벅적한 도시 중심부와는 꽤 떨어져 있는 경우가 많았다. 게다가 지리상 아예 반대편이었다.


“다 방법이 있어.”


판챠는 피식 웃으며 대기실을 나갔다.



“응? 어디 행차하시나 보군.”


저택 대문에는 외출하는 백작을 집사와 부집사가 배웅하고 있었다.


판챠는 백작을 유심히 살폈다.


‘확실히 세루인 백작이 아니군.’


그냥 살이 많이 찐 건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검의 천재던 세루인에 비해 두지트는 재능이 없었다. 오히려 둔재랄까.


두지트가 어떻게 백작위를 계승했는지 모를 일이었다.


판챠는 백작이 완전히 떠날 때까지 잠시 기다리다 대문을 지났다.


“넌···.”


부집사 루퍼트와 마주쳤다. 부하들이 당한 소식 정도는 이미 파악하고 있는 듯했다. 그는 낮은 목소리로 판챠에게 경고했다.


“꼬마. 너무 까불면 다쳐. 조심해라.”

“판챠. ”

“뭐?”


판챠는 귀를 후비며 대답했다.


“내 이름. 부집사님은 집사님보다 젊어 보이는데 벌써 기억력이 떨어졌나요?”


루퍼트는 판챠를 쏘아보기 시작했다.


“아무튼 부집사님도 조심하시죠. 두뇌 건강은 중요하거든요.”

“흥···.”


루퍼트는 상대하기도 싫다는 듯 자리를 비켰다. 판챠는 그의 뒤를 보며 문을 나섰다.


‘미드랜드인의 자부심이라.’


유랑민 출신이라곤 하나 판챠의 고향도 미드랜드다.


물론 그 영혼은 한국인의 그것이었지만, 판챠의 육체는 미드랜드란 말에 반응하고 있었다.


‘이렇게 개판이 되어있을 줄은 몰랐지.’


당장 어떻게 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다. 판챠는 달리기 시작했다.


아직 해가 높이 떠있다. 그렇다라도 단순한 소년의 걸음으로는 다녀오기 버겁다.


판챠는 오러를 몸에 순환시켰다. 로키노에게 기초적인 오러순환법을 배운 차였다.


코어에서 발바닥까지 오러가 펌프처럼 요동치며 힘을 돋운다. 땅을 박차며 도심으로 향하는 내리막을 달렸다.


“엇차, 휴. 넘어질 뻔했네.”


순간적으로 치고 나가는 가속력이 생소할 정도다. 첫 몇 걸음에 휘청인 판챠는 이내 중심을 잡고 뛰어나가기 시작했다. 상쾌했다.


“햐, 죽이네. 하하하!”


소년은 자유로웠다. 전생에도, 현생에서도 이렇게 가뿐하게 뛰어본 적이 없었다.


어지간한 말과 다름없는 속도로 비탈길을 내려갔다. 백작가 소작농들의 농지가 빠르게 뒤로 스쳐 지나갔다. 멀리 에이더스 시의 거주구가 보였다.


이맘때엔 늘 바빠야 할 경작지에는 농민들이 별로 보이지 않았다.


‘한적하네’


주변을 둘러보면 판챠는 순간 어지러움을 느꼈다.


“어···?”


판챠의 육체는 아직 성장기. 더군다나 오러를 개화한 이후 폭발적으로 재구성 중이었다. 성장할 여지가 크다는 말이지만, 동시에 불안정하다는 말이기도 했다.


달리던 판챠의 몸이 크게 휘청였다.


‘정신 잃기 대회라도 나가면 최소 우수상 감이군.’


판챠는 헛소리를 떠올리며 땅을 짚었다. 그래도 완전히 기절할 정도는 아니다.


무언가 다가왔다. 멍해진 시야에 무언가 이물이라도 낀 듯 덩어리진 형체. 판챠는 고개를 흔들었다.


“괜찮니?”


소녀의 실루엣이 말을 걸어왔다. 그녀는 손을 뻗었다. 환한 빛이 판챠의 머리 위로 어렸다.


‘치유 마법?’


소녀의 얼굴이 보이기 시작했다. 왠지 낯이 익었다.


작가의말

감사합니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망나니 소드마스터의 시종이 되었다.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25 시작의 끝 22.11.28 76 2 14쪽
24 준비 (5) 22.11.28 33 3 14쪽
23 준비 (4) +1 22.11.24 54 5 15쪽
22 준비 (3) 22.11.23 67 4 12쪽
21 준비 (2) 22.11.22 71 3 13쪽
20 준비 (1) 22.11.21 77 5 16쪽
19 아델하이드 (4) 22.11.19 85 4 14쪽
18 아델하이드 (3) 22.11.18 82 4 14쪽
17 아델하이드 (2) 22.11.17 80 4 12쪽
16 아델하이드 (1) 22.11.16 91 4 13쪽
15 수련 (4) 22.11.15 88 6 13쪽
14 수련 (3) 22.11.14 88 4 15쪽
13 수련 (2) 22.11.12 105 7 14쪽
12 수련 (1) 22.11.11 128 6 17쪽
11 계약 (5) 22.11.10 130 7 17쪽
10 계약 (4) 22.11.09 130 8 16쪽
9 계약 (3) 22.11.08 139 7 15쪽
8 계약 (2) 22.11.07 163 8 15쪽
» 계약 (1) 22.11.05 188 8 18쪽
6 개화 (5) 22.11.04 206 7 15쪽
5 개화 (4) +1 22.11.03 213 8 17쪽
4 개화 (3) +1 22.11.02 227 9 19쪽
3 개화 (2) +2 22.11.01 250 8 16쪽
2 개화 (1) +1 22.11.01 304 12 14쪽
1 하필이면. +8 22.11.01 454 19 14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