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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춤 님의 서재입니다.

망나니 소드마스터의 시종이 되었다.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퓨전

완결

별춤
작품등록일 :
2022.10.28 14:10
최근연재일 :
2022.11.28 22:00
연재수 :
25 회
조회수 :
3,518
추천수 :
162
글자수 :
168,373

작성
22.11.02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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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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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9쪽

개화 (3)

DUMMY

역사가 조금 뒤틀렸다. 그리고 판챠의 몸도 뒤틀리도록 아팠다.


오러를 개화한 반동은 후불 결제나 다름없었다.


지불해야 하는 것이 돈이 아니라 고통이라는 게 문제였지만.


“아이고!”


판챠는 말 그대로 바닥을 데굴데굴 구르기 시작했다.


‘이, 이거 장난 아닌데.’


누가 전신의 근육과 근막을 강제로 뼈에서 뜯어낸 다음에 재조립하는 느낌이었다. 판챠의 등에 식은땀이 물 흐르듯 흘렀다.


귀족가의 저택이라는 것을 감안해 최대한 신음을 참았지만, 15분도 되지 않아 하녀가 다시 문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이게 무슨 소리지? 어디 아프신가요?”

“···.”


판챠는 입을 틀어막았다. 그걸 말이라고 하냐? 당연히 눈물 나게 아프지! 라고 하고 싶었지만, 소란은 피하고 싶었다.


하지만 이번 하녀는 그냥 넘어가지 않았다.


“아무래도 안 되겠어. 들어갈게요.”


긴급 상황이다 싶었는지 문이 벌컥 열렸다.


”어머! 괜찮아요?“


아까의 하녀가 아니었다. 낮에 판챠를 애처롭게 바라봤던 하녀장이었다. 이름이 사라였을 것이다.


그녀는 바닥을 구르는 판챠를 보고 놀란 표정을 짓더니 사람을 부르려 했다.


“저택의 의술사 분을 모셔 올게요. 잠시만···”


사라의 말에 판챠는 황급히 고개를 저으며 일어섰다.


“아닙니다!”

“예? 아무리 봐도 통증이 심해 보이는데···”

“그냥 지병이에요. 곧 괜찮아집니다.”


판챠는 땀을 뻘뻘 흘리며 고개를 저었다. 사실대로 말해봐야 믿을 사람도 없다.


시종이 느닷없이 오러를 각성해서 몸에 격통이 찾아온다고? 미쳤냐, 머리가 아픈 게 아니냐, 이런 시선을 받을 게 뻔하니까.


‘게다가 애당초 의사들이 치료해줄 수 있는 고통도 아니야.’


미간을 찌푸리며 허리를 똑바로 세우는 판챠를 보고 사라가 다시 한번 물었다.


“저, 정말 괜찮으신가요?”

“예. 배려는 감사합니다. 그런데 제가 아직 할 일이 있어서···.”


판챠는 사라를 바라봤다. 사실상 나가달라는 말과 다름없었다.


“예에··· 그러면 언제든 휴게실로 내려오세요. 치료가 필요하면 도와드릴게요.”

“예, 고마워요.”


하녀장은 조용히 손님방에서 나가나 싶더니, 뒤돌아서 당부했다.


“30분 뒤에도 내려오시지 않으면, 다시 방문해도 될까요?”

“음, 그게. 상관은 없지만···. 알겠어요.”


사라 입장에서는 원체 허약해 보이는 소년이 안색도 창백하기 짝이 없자 가만히 둘 수 없던 모양이었다.


판챠가 힘겹게 고개를 끄덕이자 사라는 걱정스러운 눈빛을 한 번 보내더니 손님방에서 물러났다.


판챠는 숨을 크게 들이쉬며 긴장을 풀었다. 그래도 하녀장을 맞이하느라 집중해서 그런지 통증이 조금 가셨다.


판챠는 땅에 털썩 앉더니 오러를 느끼기 위해 감각을 가다듬기 시작했다.


‘최대한 버티는 수밖에.’


저택의 예법에 어긋나더라도 지금은 다른 하인들과 부대낄 때가 아니다.


어울리지도 않게 허약한 판챠의 몸에 개화한 오러다. 신체가 재구성되는 이 시기를 최대한 안정적으로 넘겨야 한다.


판챠는 몸에서 느껴지는 미약한 오러를 다스리기 시작했다. 결국 오러로 인해 느껴지는 고통이니 오러를 순환시켜 해결한다.


“······.”


오러 순환의 기초는 이미 머릿속에 있었다. 재능 없이 원작의 지식만 가지고 있던 아까와는 다르다.


“된다.”


찌릿한 감각이 전신을 달렸다. 아까와 달리 기분 좋은 통각이었다.


전신의 신경이 몸 자체에 새로 적응하는 느낌.


보이지 않는 몸속의 길을 따라 오러가 흐르기 시작한다.


그 뒤를 따라 잠자던 결합조직이 깨어나고, 잠겨져 있던 근신경이 활성화되기 시작했다.


판챠는 희열을 느꼈다. 분명 한 줌 밖에 안되는 오러였지만, 자신은 그 힘을 제어할 수 있었다.


그 순간 판챠는 자유로웠다.



판챠는 아래층으로 내려가는 계단을 신속히 내려가기 시작했다.


“왠지 개운한걸?”


마치 사우나에서 나온 것 같았다.


로키노였다면 개운하게 한잔하러 갔을 것이다. 하지만 판챠는 입장이 다르다.


통증이 한결 가신 지금, 시종의 일은 이제 시작이다.


‘갑주 청소는 오늘 해놔야 해.’


다른 일은 다음 날 한다고 해도 갑옷 손질은 늦어서는 곤란했다. 그 비싼 갑옷에 녹이라도 슬면 책임은 판챠가 질 수밖에 없었다.


오러가 몸에서 싹텄다고 해도 여전히 시종은 시종이었다.


‘이쪽인가?’



저택 내에서도 귀족과 평민들의 구역은 엄격하게 나뉘어 있었다.


평민들은 청소할 때조차 눈에 띄지 않게 조심해야 했다. 평민들이 감히 귀족님들의 망막에 함부로 나타나면 신분을 잊은 불경한 행위니까.


현대에서 개같이 일하면서 노예니, 머슴이니 말은 했지만, 막상 신분제 사회에 놓여보니 체감이 달랐다.


‘수수하군.’


품위가 넘치던 위층에 비해 아래층은 느낌 자체가 달랐다.


크게 봐서 두 개의 영역. 요리장이 주관하는 주방과 하인들의 대기실.


판챠는 주방 옆 복도를 재빨리 지나쳤다.


벽돌로 만들어진 장작 오븐에서 혹독한 열기가 뿜어져 나와 공기가 후끈했다.


오븐 근처에서 커다란 체구의 조리장이 소리치고 있었다.


“야! 접시 조심히 안 옮겨? 근데 왜 발은 보여? 한가해? 엉? 거기! 치아바타 태워 먹으면 너도 오븐에 처박아버릴 줄 알아!”


‘가관이군.’


아래층에선 일상적인 풍경이다.


요리장이 조심하면서 서두르라는 불합리한 요구를 하며 고래고래 소리치는 와중에 하인들이 열심히 요리며 디저트며 만들고 나르고 있었다.


주방 맞은 편에서는 위층의 귀족들이 시키는 잔심부름을 하기 위해 하녀들이 바쁘게 움직였다.


판챠는 백조가 헤엄치기 위해 물갈퀴를 분주히 놀린다는 우화가 떠올랐다.


위층에서는 우아한 만찬과 화려한 연회를 벌이고, 아래층에서는 미친 듯이 발을 놀리며 움직이는 꼴이 딱 그 짝이었다.


‘실제로 백조는 그렇게 바쁘게 헤엄치지 않지만.’


사실 백조는 그저 우아하게 떠다닐 뿐이다.


그렇게 따지자면 백조보다 못한 게 아래층 사용인들의 인생이다.


“야, 저기, 저거 온다.”


판챠가 아래층 대기실에 도착하자 제복을 입은 키 큰 하인 두 명이 비릿한 웃음을 지으며 반겼다.


“이제 왔어? 왜 이리 늦었어? 형님들이 기다렸잖냐.”


판챠는 제복 하인들을 응시했다.


‘이 새끼들, 뭐더라?’


지극히 무례했다. 아무리 제복을 입은 하인들이라고 하지만, 시종에게 할 수 있는 말이 아니었다.


“아, 존스랑 앨링이랬나?”


판챠는 떠올렸다. 정말 스쳐 지나가는 에피소드가 있었다.


심약한 판챠가 아래층 하인들에게 협조도 못 받고 괴롭힘당한다. 시종이 훌쩍거리자 로키노가 내려가서 목소리를 깔고 을러댄다. 단 한마디에 괴롭히던 놈들이 깨갱한다. 상황 종료.


‘판챠, 얘는 주인님이 구해주지 않으면 안 되는 인생이었지.’


한편 존스는 반말을 듣자 황당하다는 듯이 손을 뻗었다.


”너, 못 보던 새에 말이 짧아졌다?“


키 190cm는 되어 보이는 장대한 덩치가 두툼한 손으로 판챠의 어깨를 잡으려 했다.


사라가 하인들에게 뭐라고 하는 소리가 들렸지만 아무 소용 없었다.


저 우악스러운 손아귀에 가볍게만 잡혀도 판챠는 어미에게 목덜미 물린 새끼고양이처럼 무력화되었을 것이다.


어제, 아니 오늘 낮까지는 분명히.


”손 치워.“


판챠는 오러를 담아 아주 가볍게 존스의 가슴을 밀었다.


”어?“


커다란 덩치의 존스가 아이처럼 아무 저항도 못 하고 의자에 주저앉았다.


”뭐, 뭐야?“


존스는 눈을 끔뻑거리며 멍청한 음색으로 중얼거렸다. 낄낄거리며 앉아서 구경하던 앨링도 안색이 변했다.


판챠는 무표정하게 그들의 어깨 위에 양쪽 손을 올렸다.


‘무, 무거워! 뭐지? 마술인가?’


존스와 앨링은 일어날 수 없었다.


판챠는 순식간에 그들을 제압하고는 천천히 뇌까렸다.


”지금 당장 교육을 해주고 싶지만···.“


두 하인은 침을 꿀꺽 삼켰다. 눈빛이 달랐다. 이 자식 정말 그 비리비리한 꼬맹이가 맞나?


아주 짧은 순간 고민하던 판챠의 눈에 사라가 보였다.


그녀는 의자에서 엉거주춤한 자세로 일어나 있었다. 하인들에게 항의하던 사라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판챠를 바라보고 있었다.


판챠는 그녀를 보고 피식 웃었다. 할 일이 많았다.


“바쁘다. 나중에 꼭 보자.”


판챠는 눈 깜빡할 새에 갑옷 청소에 필요한 도구를 챙겨 대기실을 빠져나갔다.


제복 하인들은 멀어지는 판챠를 보며 황망히 중얼거렸다.


“뭐, 뭐야. 저놈 원래 저렇게 빨랐나?”

“휴우. 그, 그러게? 도망쳤군.”


존스와 앨링은 애써 피식거리며 대범한 척 말을 주고받았다. 그런데 이상하게 왠지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그들은 판챠에게 잡힌 어깨를 주무르며 제복 깃을 가다듬었다.


‘원숭이 같은 놈들.’


상황을 지켜보던 부집사 루퍼트가 날카로운 눈빛으로 판챠의 뒷모습을 살폈다.



판챠는 계단을 올라가며 생각했다.


‘남의 등 뒤에 숨을 생각은 없어.’


로키노가 나서서 구해준다면, 하인들도 적극적으로 괴롭히진 않더라도 은근한 멸시와 무시가 뒤따를 것이다.


물론 서술조차 제한적인 조연의 삶에서 그런 장면은 독자에게 보이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조연의 삶이라도 지금의 판챠에겐 주인공의 삶보다 중요한 현실 자체였다.


‘그나저나 어마어마하게 얕보이긴 했구만.’


아무리 평민 시종이라지만, 그렇다고 제복 하인보다 사용인 서열이 낮지 않다.


판챠는 오러를 각성한 직후의 고통을 되새겼다. 생각해보면 후불로 받아야 할 고통은 자신만 있는 게 아니다.


판챠는 후불 정산서를 머릿속에 담아뒀다. 그리고 존스와 앨링은 묘한 한기를 느꼈다.



“휴, 무겁긴 엄청 무겁네.”


판챠는 땀을 닦았다. 로키노의 갑옷을 챙겨 세탁실에 도착하니 이마에 송골송골 땀이 맺혔다.


갑옷을 통째로 들어 한꺼번에 옮기는 것은 예전 같으면 엄두도 못 냈을 것이다. 아니, 어지간한 장정에게도 버거운 일이다.


‘좀 서둘렀나?’


자기 키보다 큰 갑옷을 통째로 옮기는 소년은 진풍경이긴 했다. 위층을 청소하던 하녀가 입을 헤 벌린 채 멍하니 바라보다 요강을 카펫에 쏟을 뻔할 정도로.


다행히 하녀가 경을 칠 일은 없었지만. 메이드복에 조금 튀었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취침 시간 전에 갑옷 청소를 끝내려면 서두르는 게 좋았다.


“어디 보자···, 올리브유. 왁스. 다 있고. 세척용 천 재질이 괜찮네.”


준비는 완벽했다. 막 갑주를 분해하려던 차, 세탁실 입구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하녀장 사라가 조용히 세탁실로 들어왔다.


판챠는 그녀에게 가볍게 목례했다.


“아, 안녕하세요. 아까는 고마웠습니다.”

“몸은 좀 괜찮아요?”

“예에. 덕분에.”

“조심해요. 존스 쪽 친구들이 벼르고 있더라구.”


사라가 경고했지만, 판챠는 피식 웃었다.


“그러라죠.”

“어머, 정말 완전 딴사람이 된 거 같네··· 아무튼, 이거 먹어요.”


사라는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이내 쟁반 하나를 판챠에게 내밀었다.


소박한 쟁반에 흑빵 몇 조각과 우유 한 컵이 올려져 있었다. 저녁도 못 먹고 있던 판챠의 눈에는 사라가 순간 천사처럼 보였다.


“고맙습니다. 정말 친절하시네요.”

“별말씀을. 식사도 못 했을 것 같아서.”


사라는 살폿 웃으며 목례하고 세탁실을 나섰다. 방해하고 싶지 않다는 표정이다.


‘진짜 착한 누님이네.’


하녀장이라도 기본적으로 고용인들은 먹을 게 넉넉하지 않다. 요리장이 아래층에서 독자적인 권력을 가진 이유기도 하다. 볼품없는 흑빵이라도 챙기는 게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판챠는 흑빵을 우적우적 씹었다. 오러로 재구성된 육체가 영양소를 갈구하던 차, 뱃속에 녹아드는 기분이다.


‘하긴 물류센터에서 잘생긴 애들이 누님들한테 간식이라도 하나 더 받긴 했지.’


왠지 감동스러웠다. 우진이었을 땐 그런 적이 별로 없었으니까.


사라는 걱정했지만 사실 존스 같은 잔챙이들은 판챠의 안중에도 없었다.


제일 중요한 건 생존. 오러는 생존을 위한 하나의 재료, 이 재료를 이용해서 앞으로 살아남는 것. 그것만이 최우선 목표였다.


“에너지도 보충했으니, 일해볼까?”


판챠는 호기롭게 외쳤다.


갑옷 청소는 구두를 닦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애초에 닦아야 할 면적 자체가 다르니까.


미드랜드에 온 뒤로 꽤 오래 야외생활을 했다. 초원과 황야의 흙먼지는 갑옷 구석구석에 찌들어 있었다.


판금 갑옷의 가장 큰 문제가 유지보수였다. 그건 이세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지극히 귀찮은 일이다. 그걸 기사들이 직접 할 리가 없으니 아랫사람을 데리고 다니는 것이다.


‘일단 분해부터···.’


몸이 기억하는 듯 갑옷을 분리하기 시작했다.


가슴을 방호하는 흉판과 배를 둘러싸는 복갑을 분리한다. 벨트를 해제하고 분해를 마치자 연결부 사이사이에 낀 때와 녹이 보였다.


“에휴···.”


한숨이 절로 나왔다. 이래서 야외에서 유지보수는 한계가 있다.


야영할 때 고운 모래를 이용해 세척 작업을 해뒀지만, 이러면 갑옷의 광택이 다 죽는다.


기사가 입는 갑옷이 반짝반짝해야 주인의 위신도 서고 시종도 체면치레하는 것이다.


판챠는 일단 갑옷의 가장 더러운 부분부터 천으로 닦아내기 시작했다.


쓱싹쓱싹. 기분 좋은 마찰 소리가 계속 이어졌지만, 결과는 신통치 않았다.


오러를 익혔다지만 원체 허약했던 판챠다. 그의 근력으로는 녹을 벗기는 데 너무 오래 걸렸다.


“오러를 활용하면···.”


기름천을 쥔 손가락에 오러가 맺히기 시작했다. 그러자 오래된 때들이 마치 땟국물이 흘러나오는 것처럼 박박 떨어져 나가기 시작했다.


”거, 시원하게 닦이네.“


얼마 지나지 않아 갑주의 녹과 오래된 때들은 모조리 끝장났다.


어느새 훨씬 반들반들해진 갑옷이 자태를 드러내고 있었다.


보기만 해도 기분이 좋았다. 하지만 지금이 위험하다.


갑옷 표면을 청소하면서 녹 방지 역할을 하던 외부의 고운 입자들도 모조리 쓸려나갔다.


지금 판금 갑옷은 마치 세안을 갓 마치고 나온 피부 같은 상태다.


’무방비의 극치라고 할 수 있지.‘


이 상태로 바깥 공기에 계속 내놓으면 녹스는 것도 시간문제다.


판챠는 아까 사용인 대기실에서 꺼내온 올리브유를 꺼냈다.


’역시 카사프란 백작가, 수준이 괜찮군.‘


산패 따윈 찾아볼 수 없는 신선한 기름이다. 천에 올리브유를 묻히고 능숙한 손길로 갑옷 구석구석을 닦기 시작했다.


갑옷의 곡선을 따라 윤기가 반질반질하게 나기 시작한다.


”와아···.“


뒤에서 감탄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세탁실 입구에 어느새 하녀들이 삼삼오오 모여서 구경하고 있었다.


제대로 만들어진 판금 갑옷은 하나의 예술품이자 사치품이다. 현대라면 어지간한 명품도 감히 견주기 힘든 것이 기사의 갑옷이다.


’갑옷 세척하는 거 처음 보나?‘


판챠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오러를 활용한 세척은 엄청난 핸드 스피드를 보여줬다.


힘도 제대로 못 쓸 것 같은 가녀린 시종이 눈으로 좇아가기 힘든 속도로 기사님의 갑옷을 닦는다.


일상에 찌든 하인들에겐 충분한 구경거리였다.


’오러가 보이진 않겠지?‘


두툼한 세척용 천에 손가락이 가려져 있어서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다른 사용인들은 오러를 활용하는 줄은 꿈도 꾸지 못했다.


판챠의 손길로 갑옷이 점점 제 모습을 찾아가자 바라보는 시선이 마치 장인이나 명인을 보는 시선이 되어갔다.


하녀들은 연신 감탄하며 로키노의 갑주를 카사프란 백작의 갑주와도 비교하기 시작했다.

어떤 하녀는 판챠에게 직접 칭찬을 건네기도 했다.


”대단하세요. 백작님의 갑주도 이 정도로 깔끔하진 않은데.“

”별말씀을. 아직 멀었답니다.“

“예에?”


탄성을 자아내기 위한 거짓말이 아니었다. 아직 마무리 작업은 시작조차 하지 않았다.


”쳇. 저기서 뭘 더 어떻게 한단 말이야?“


어느새 제복을 입은 남자 하인들도 고까운 눈빛을 보내며 구경하고 있었다.


판챠는 피식 웃으며 다시 세척용 천을 꺼내 들었다.


’여기서 물기를···.‘


판챠는 세척용 천에 침을 탁 뱉으려는 순간 멈칫했다.


존경(?)과 선망(?)에 찬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하인과 하녀들의 시선이 심장에 꽂혔다.


’아니. 이건 아니지.‘


시선이 부담스럽다. 그래도 여긴 귀족가인데 주인의 갑옷에 침을 섞어서 닦는다니.


물통에서 적당히 물을 덜어낸 다음에 갑옷용 왁스와 적절히 배합해 닦기 시작했다.


로키노의 갑옷의 곡선은 판챠의 손이 기억하고 있었다.


’왠지 손맛이 좋은걸?‘


완벽한 숙련도였다. 손끝에서 발생한 미세한 오러는 갑옷의 오래된 표면을 아주 미세하게 연마하며 마치 새살이 돋는 것 같은 효과를 불러일으켰다.


그 뒤로 천에 묻은 갑옷용 왁스가 마치 갑옷의 도장면을 코팅하듯 마찰광을 불러일으키는 동시에 광택을 극대화했다.


“저, 저거···!”


눈썰미가 좋은 나이 든 하인 몇 명이 탄성을 발했다.


바야흐로 오러미세광택법이라는 갑주 광택의 새로운 경지가 개척되는 순간이었다.


닦는 사람 입장에서도 너무 번쩍거려 눈이 부실 지경이다.


’이 정도면 안구 건강에 지대한 악영향을 미치겠군.‘


눈을 찌푸리며 갑옷의 각 부위를 거치대에 장착하니 인간형의 한 벌 갑주가 그대로 장식된 채 위용을 자랑했다.


“어쩜······.”


하인과 하녀들은 말을 잊은 채 한 벌의 예술품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모여든 사용인 무리 뒤편에서 근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일들 안 하나? 거기 모여서 대체 뭣들 하는 거요?”


카사프란 가문의 노집사였다. 그가 들어오자 수군대며 갑옷 청소를 구경하던 하인과 하녀들이 몸가짐을 단정히 꾸몄다.


집사는 하인들을 뚫고 세탁실로 들어오자마자 미간을 좁혔다. 아직 주인님들의 연회가 끝나지도 않았는데 딴짓하는 아랫것들에게 불호령이라도 날릴 태세였다.


“자네들은 잠시라도 가만있질 못하는군. 내가 늘 감시라도 해야 한단 말······ 음?”


하지만 노집사의 시야에 빛으로 짜놓은 듯한 갑옷이 들어오고 말았다.


늘 엄격한 표정을 유지하던 노집사의 얼굴 근육이 순간 풀려버렸다.


“오, 오오···.”


주변의 하급자들이 키득거리며 바라보자, 집사는 재빨리 다시 근엄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정말이지 내 집사 생활 평생··· 이런 광택은 처음 보는군···.”


평생 귀족들을 모신 노집사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올 정도면 게임 끝이다. 더 말할 것도 없었다.


하긴, 윤이 반질반질한 카사프란가 호위 기사의 갑주도 빛이 바래 보일 정도였다.


’인증 완료.‘


판챠는 휘파람을 불며 뒷정리를 시작했다. 왠지 어깨가 으쓱거렸다. 갑옷 청소한다는 게 판이 커져 버린 느낌이다.


사실 시종이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이다. 오러를 곁들이긴 했지만.


그때 로키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판챠 여기 있냐? 뭐가 이렇게 시끄러워?”


이번엔 진짜 귀족이다. 하인과 하녀들이 황급하게 예를 갖췄다.


귀족은 저택의 아래층에 내려올 일이 거의 없었지만, 취한 귀족들이 가끔 변덕을 부리러 내려오는 경우도 있었다.


과연 로키노는 얼큰하게 취해있었다. 술김에 자기 시종이 잘 있는지 확인하러 온 모양새. 주정이나 안 부리면 다행이다.


“음? 오···.”


로키노는 갑옷을 보더니 살짝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 표정도 잠시. 그는 이내 판챠 쪽으로 시선을 돌리더니 굳은 표정을 지었다.


아니, 굳은 정도가 아니었다. 로키노의 눈썹이 확 치솟아 올랐다.


하인들이 심상찮은 분위기를 느끼고 얼어붙은 그 순간, 로키노의 입이 열렸다.


“너 이 자식··· 날 기만한 거냐?”


작가의말

감사합니다.


제목을 수정했습니다. ‘개화’는 2화가 (1)번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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