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정 오류(2)
산전수전 공중전까지 별의별 일을 다 경험해본 나였으나 이번 일만은 당혹, 그 자체였다.
왜냐하면 그녀가······.
“사라졌다?”
적이 기습해올 때처럼 순간, 기분 나쁜 기척이 느껴졌다.
재빨리 자세를 낮추었다.
“병든 검.”
아이템 이름을 나지막이 읊조리자 인벤토리에 넣어두었던 검이 오른손에 쥐어졌다.
살기는 없었지만 무언가가 다가오는 건, 분명했다.
“······제길.”
적이라니.
어떻게 된 거야?
예민아는 또 어디로 사라진 거고.
“납치라도 당한 건가?”
그럴 리가 없다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방금까지만 해도 그녀는 분명 내 뒤에 있었다.
그러니 누군가 납치를 시도했다면 나한테 들키는 게 마땅하다.
“예민아!”
서둘러 그녀의 이름을 부르는 찰나였다.
<작가의 권한 Lv.1: 은신한 적을 감지했습니다.>
<작가의 권한 Lv.1: 투명화 된 적의 형체를 볼 수 있도록 미세한 빛과 열을 증폭시킵니다.>
<작가의 권한 Lv.1: 은신한 적의 형체가 뚜렷하게 보이기까지는 다소 시간이 길어질 수 있습니다.>
<작가의 권한 Lv.1: 10, 9, 8, 7······.>
저 경고 메시지도 뜻밖이었다.
은신한 적이라니.
<멸‧개‧법>에서 은신은 최상의 경지에 오른 추적자만이 부릴 수 있는, 그야말로 밸붕 스킬 가운데 하나.
은신을 가능하게 하는 아이템이 있기는 하지만 그걸 얻을 확률은 로또에 당첨되는 것보다 낮다.
작가의 권한 스킬이 오류를 일으킨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사실이었다.
아무 것도 없던 전방에서 어렴풋이 보였다.
아주 익숙한 실루엣이······.
“아저씨!”
예민아의 목소리가 불쑥 튀어나왔다.
막 물질을 끝낸 해녀가 힘겹게 잠수복을 벗는 것처럼 끙끙거리며 무언가를 빠져나오는 그녀였다.
“짠.”
예민아가 장난스런 제스처를 취했다.
손끝에는 아까 획득했던 그것의 알이 다소 늘어진 모양으로 걸려 있었다.
“나, 못 봤죠?”
“어?”
“내가요, 엄청 뛰어다녔거든요? 아저씨 눈앞에서 막 춤도 추고. 근데 아저씨가 날 찾더라고요. 나, 투명해진 거 맞죠?”
뭣이 그리 재미난 지, 예민아는 또 쉴 새 없이 조잘거렸다.
그녀의 말 폭탄에 시달리며 나는 이마를 짚었다.
어이가 없어서······, 그러다 깨달았다.
“설마.”
저 장난감처럼 생긴 아이템이 투명화를?
예전에 저런 종류의 아이템을 우연히 본 적 있다.
추적자가 아닌데도 은신할 수 있게 해주는 아이템이었는데, 상급 악마종 드래곤을 100마리나 잡은 끝에 획득했다던가.
하지만 그렇게 어렵사리 획득한 아이템조차도 저 정도 수준의 은신을 구현하진 못했다.
춤까지 췄는데도 기척을 느끼지 못했다는 건, 은신을 가능케 하는 아이템 중에서도 최상품이라는 뜻.
그래도 여전히 이해되지 않는 게 있었다.
저걸 뒤집어 쓸 생각은 어떻게 한 거야, 라는.
“예민아.”
“네!”
“왜 뒤집어 쓴 거지? 그런 생각을 어떻게 한 거야?”
“뭐래? 지금 나, 머리 나쁜 년이라고 욕하는 거예요?”
“······그런 게 아니라.”
“아니기는. 나도요, 아이디어라는 게 있는 여자라고요. 여자!”
자꾸 말꼬리를 잡고 늘어지는 게 싫어서 나는 짐짓 화난 표정을 내비쳤다.
“묻는 말에나 대답해, 딴 소리 말고.”
“치.”
“저 알 속에 들어가겠다는 생각을 어떻게 한 거야?”
“생각 안 했는데요.”
“하.”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서 진짜 화를 내려던 참이었다.
삐죽이던 그녀가 재빨리 정답을 말했다.
“진짜예요, 내가 생각한 게 아니라.”
“······아니라.”
“얘가 말해줬어요. 자길 뒤집어써보라던데요?”
“뭐?”
나는 그녀가 끌어안고 있는 그것의 알을 노려봤다.
“아이템이 말을 걸어왔다고?”
순간 생장형이라는 아이템 분류 코드가 뇌리를 스쳤다.
그게 뭔 말인가 했더니, 살아있는 생물처럼 자기의식을 가진 아이템이라는 뜻이었나?
“처음에는 진짜 놀랐어요. 얘는 입도 없잖아요. 그래서 아저씨가 말을 건 줄 알았죠.”
“그래서?”
“그래서는? 보다시피 뒤집어썼죠. 그랬더니 와, 너무 좋은 거야. 따뜻한 바닷물에 둥둥 떠 있는 기분, 알죠? 딱 그랬어요.”
예민아가 계속 재잘거렸다.
“아무튼요, 알을 뒤집어썼더니 아픈 데도 사라졌어요.”
“통증이 사라져?”
“네! 아까 미늘뱀 때문에 좀 놀랐거든요. 그래서 근육통이 심했어요. 그게 싹 사라지는 거 있죠.”
그녀의 말에 미간을 찌푸렸다.
저 말이 사실이라면 그것의 알이라는 아이템은 은신 외에도 다른 기능이 있다는 건데.
치유까지 하는 건가?
기분이 좋아졌다고 하는 걸 보면, 몸뿐만 아니라 마음까지?
“아이템 확인.”
+
<아이템:그것의 알>
아이템 설명: 정체모를 생명의 알입니다. 아직은 깨어나지 않았으나 의사소통은 가능합니다.
아이템 기능 1: 이 아이템을 뒤집어쓰면 은신이 가능합니다. 현재는 2명까지 동시 사용이 가능합니다.
아이템 기능 2: 미약하나마 영육을 치유합니다. 이 치유 기능은 점점 향상될 수 있습니다.
아이템 기능 3: ?
+
아까와는 확연히 다른 아이템 설명이 떴다.
아직은 깨어나지 않았으나······라는 말이 거슬렸다. 깨어나면 다시 형태가 바뀐다는 건가?
거기에 더해 은신이 2명까지 가능하다니.
아니지, 현재라는 말이 덧붙어 있으니 이후에는 더 많은 사람이 동시 사용할 수 있다?
“이건 대체.”
뭐야?
“말이 안 되잖아.”
어이가 없어 혼잣말하는 내게 예민아가 말을 걸어왔다.
“아저씨.”
“어?”
“아저씨도 해볼래요? 이거요, 둘이 써도 된다고 했어요.”
아직 대답도 안 했는데 그녀는 냅다 바닷물로 뛰어든 듯이 그것의 알을 뒤집어썼다.
“자, 안으로 들어와 봐요. 발을 쑥, 넣으면 돼.”
어색하게 상체만 드러낸 예민아가 손을 내밀었다.
사라질 듯 말 듯, 텅 빈 허공이 넘실거리는 파도처럼 그녈 감싸고 있었다.
“됐어, 위험하니까 너나 나와.”
“그러지 말고, 네?”
“됐으니까 나오라고.”
“칫.”
예민아는 그것의 알을 머리끝까지 뒤집어 써버렸다.
또 사라졌다.
<작가의 권한 Lv.1: 은신한 적을 감지했습니다.>
<작가의 권한 Lv.1: 투명화된 적의 형체를 볼 수 있도록 미세한 빛과 열을 증폭시킵니다.>
그녀는 까불고 있었다.
자길 볼 수 없다고 확신하고 있어서 그랬는지 딱 스무 살짜리 여자애가 할만한······.
하, 다 보인다고 말을 해줘야겠다고 마음먹는 그때였다.
“······.”
계속 못 본 척하지 않으면 안 되게 돼버렸다.
이마를 짚을 수밖에 없었다.
다 큰 여자애가 못하는 짓이 없다며.
“당장 나와.”
풀이 잔뜩 죽은 예민아를 잡아끌며 포탈 앞에 섰다.
주의사항을 그녀에게 단단히 일러줬다.
“긴장해야 해. 이 밖엔 적이 우글거린다.”
이윽고 포탈로 뛰어들었다.
눈앞의 풍경이 순식간에 바뀌었다.
※
※
※
<이름 모를 안개지역의 1234번 안전구역에 도착했습니다.>
<특정 조건을 달성하면 이 구역에 할당된 서브 퀘스트를 개방할 수 있습니다.>
<서브 퀘스트를 클리어하면 다음 퀘스트 구역으로 가는 길을 찾기가 훨씬 수월해집니다.>
아, 두통이 몰려왔다.
어질어질한 게 속도 울렁거리고.
내 발밑에선 예민아가 우엑거리며 구역질을 해댔다.
순간이동 후유증치고는 꽤 지독했다.
게다가 이 안개.
딱히 독성은 없었으나 어찌나 자욱하던지 전방 2미터 앞도 보이지 않았다.
<파티원과의 귓속말이 재개됩니다.>
<그동안 쌓여있던 메시지가 전송됩니다.>
며칠간 유인나와 개진산이 보낸 귓속말이 한꺼번에 폭주했다.
시야가 그들의 문자로 가득 찼다.
<귓속말을 음성으로 바꾸어 들을 수도 있습니다.>
<음성으로 재전송할까요?>(Y/N)
시스템이 권유하는 대로 그들의 귓속말을 음성으로 전환했다.
<4일 전 메시지입니다.>
― 유인나: ‘강한 씨, 우리 도착했어요. 빨리 와요.’
― 개진산: ‘와, 포탈 진짜 어지럽네. 야, 이강한이. 언제 오냐?’
― 유인나: ‘어디 다친 건 아니죠? 벌써 세 시간이 지났는데 연락이 안 돼서요. 별일 없을 거라는 건 아는데요, 강한 씨. 그래도 시간 나면 귓속말 보내줄래요?’
헤어진 지 얼마 되지도 않았지만, 그래도 목소리를 들으니 반가웠다.
이곳으로 이동한지 첫날까지는 별 문제가 없는 것 같아 다행스럽기도 했고.
<3일 전 메시지입니다.>
― 개진산: ‘야, 강한아. 문제가 생겼다.’
저 귓속말을 들었을 땐 살짝 긴장했다.
문제라니, 뭐가?
― 개진산: ‘하, 미치겠네. 이거 어떡하냐? 곰 변신이 안 풀려. 유인나 씨도 변신 푸는 방법을 모르겠대. 강한아, 내 말 듣고 있냐? 연락도 안 되고, 너 땜에 내가 어? 이러다 평생 곰으로 살아야 해? 아니지? 제발, 아니라고 해.’
막상 다 듣고 나서는 황당했다.
드루이드 주제에 곰 변신을 못 풀어?
하여튼 개진상.
이 와중에도 그의 푸념은 계속됐다.
― 개진산: ‘아니, 곰 발바닥에 가시가 박혔는데, 빼질 못하겠네. 졸라 아파.’
세계가 멸망했는데, 발바닥에 박힌 가시 하나 때문에 엄살이라니.
어쨌든 이날까지는 나름 그들의 목소리가 평온했다.
하지만 이 다음부터는 어조가 확, 달라졌다.
<2일 전 메시지입니다.>
― 개진산: ‘야, 뒈졌냐? 여긴 골 때린다. 사람들이 완전 미쳤어.’
― 유인나: ‘강한 씨, 괜찮아요? 왜 연락이 안 돼요? 이틀이나 지났잖아요! 강한 씨!’
― 개진산: ‘하, 답답하네. 야! 이강한! 뒈졌냐고! 너 때문에 내가 얼마나 고생하는 줄 아냐? 망량이인지 뭔지 알지? 징그럽게 꼬리 달린 거 말야, 그 자식이 지금 우리한테······.’
유인나와 개진산이 보낸 귓속말은 점점 다급해지고 있었다.
나한테 호구 잡힌 망량이가 그들을 괴롭히는 모양이었다.
히든 퀘스트로 현상금 같은 걸 걸어버린 건 아니겠지, 하며 다급히 메시지를 넘겼다.
<1일 전 메시지입니다.>
― 개진산: ‘제길. 엿됐다.’
저게 다였다.
이후에는 그 어떤 음성 메시지도 들려오지 않았다.
“뭐지?”
파티창을 열어 그들의 생명력부터 확인했다.
길쭉한 바로 표기되는 생명력이 다행히 100% 꽉 차 있는 게 보였다.
“다친 데는 없는데?”
유인나한테 귓속말을 보내봤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개진산한테도.
하지만 응답을 보내온 건 그들이 아니라 시스템이었다.
<귓속말 전송에 실패했습니다.>
<파티원:유인나, 개진산은 귓속말이 전송되지 않는 지역이 있습니다.>
<위치도 확인되지 않습니다.>
때마침 돌풍이 일었다.
자욱하던 안개가 순식간에 떠밀려 가는데, 발밑에서 구역질하던 예민아가 나를 툭툭 쳤다.
“아저씨, 저 새끼······, 죽여도 돼요?”
그녀가 전방을 향해 적개심을 드러냈다.
오들오들 떨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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