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영복도 데이트도 포기하지 못해!
"있잖아, 사치. 너희는 방학이 언제냐?"
고다와 함께 테이블을 정리하던 사토리는 갑작스런 그의 질문에 불안해하는 얼굴로 말했다.
"다음 주이긴 한데.. 혹시 평일에도 아르바이트를 해달라는 이야기라면 거절한다."
"그런 게 아니라! 실은 우리도 다음 주면 방학이거든! 그러니까 바다에 놀러가지 않을래? 물론 후유 누님도 같이 말이야."
뜬금없이 고다가 바다에 가자는 제안을 하는 이유를 처음에는 알 수 없었지만 코우카 선배의 이름이 언급되자 사토리는 그의 속내를 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너 말이야.. 나랑 코우카 선배를 신경써주는 건 고마운데 그렇게 억지로 묶으려고 하는 건 그만해."
"오? 뭐야! 너 언제부터 후유 누님을 이름으로 부르게 된 거냐? 헤어졌다더니 오히려 전보다 더 가까워진 거 아니야?"
"그런 건..!"
고다의 이야기를 강하게 부정하려던 사토리는 문득 코우카 선배와 포키 게임을 했을 때의 부끄러운 기억이 떠올라 입을 꾹 다물었다.
애초에 어째서 코우카 선배는 헤어진 자신에게 이름으로 불리기를 바랬을까.
설마하는 기대가 부푼 것도 잠시. 자신을 바라보는 고다의 입가에 배시시 수상한 미소가 번진 것을 확인한 사토리는 괜스레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아마 아닐거야.."
"짜식!! 뭐, 어쨌든 모처럼 바다에 가는 거니까 사람이 조금이라도 많은 편이 재미있잖아? 실은 별장에 계시는 삼촌이 3일정도 집을 비우게 되서 가는 거거든.
그 근처에는 다른 사람이 아무도 없어서 심심하단 말이야."
순간 사토리는 그가 방학이라고 자신을 신경써주는 줄 알았던 희미한 감동이 산산이 부서져버렸다.
"솔직히 말해. 너 방학이니까 바다에 가고 싶은 게 아니라 그냥 너 혼자 있는 게 심심해서 날 데려가고 싶은 거냐?"
뜨끔-
당황한 기색으로 고개를 외면하는 고다의 모습에 사토리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속내는 솔직히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기 힘들었지만 모처럼이니 오랜만에 바다에 가는 것도 괜찮겠다고 생각한 사토리는 순간 머릿속에 떠오른 의문을 입밖으로 꺼냈다.
"있잖아, 고다. 사람이 많은 편이 좋다면 혹시 내가 신세지고 있는 친구도 별장에 같이 가도 될까?"
"응? 뭐, 상관없긴한데. 이왕이면 남자쪽 인원은 늘리지 않는 게 너랑 후유 누님한테도 좋지 않아? 너랑 후유 누님이 헤어진 사이에 기회를 엿볼 수도 있다고?"
테이블에 있는 접시들을 치우며 그렇게 말하는 고다의 충고에 사토리는 볼을 긁적이며 나지막이 대답했다.
"그러니까 그런 건 네가 신경쓸 필요 없다니까! 게다가.. 일단은 여자거든.. 두 명 정도.."
쨍그랑-
"야 임마!! 켄!! 정신 똑바로 안 차릴래?! 그 접시들 전부 네 용돈에서 변제할 줄 알아!!"
"너.. 너 이 자식..!! 네가 언제부터 그렇게 부러운 인생을 살고 있었던 거야!!"
후유 코우카라는 사람이 있으면서도 다른 여자가 둘이나 더 있다는 의미로 받아들인 고다는 주방에서 들려오는 아주머니의 언성을 들은 채도 하지 않았다.
그저 분하면서도 부러운 인생을 살고 있는 사토리를 뒤로한 채 소리를 지르며 가게를 뛰쳐나갔다.
그리고 다음날.
학교 점심시간에 어김없이 옥상에서 식사를 하고 있던 사토리는 같은 자리에 앉아 있던 호시야와 히토미를 향해서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저기.. 두 사람 다 혹시 방학하고 나서 스케쥴이라던가 있어..?"
"응? 나는 딱히 없는 것 같은데..?"
"그러네. 있다고 한다면 방학 마지막에 있는 불꽃축제에 가는 것 정도려나."
다행히 두 사람 모두 방학중에 스케쥴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사토리는 안심하고서 마음 편히 본론을 꺼냈다.
"그럼 방학하고 같이 바다에 가지 않을래? 아르바이트하는 곳에 고다라는 녀석이 삼촌한테 3일 동안 별장을 맡아달라고 부탁을 받았거든."
바다라는 말에 히토미와 호시야는 방금 전까지 아무렇지 않게 먹고 있던 도시락을 갑자기 내려놓고는 뚜껑을 닫았다.
"응? 두 사람 다 벌써 다 먹은 거야?"
"으, 응..!! 왠지 오늘따라 식욕이 없네.. 헤헤.."
"이미 충분히 배가 부른 것 뿐이야."
아직 절반도 채 먹지 않은 도시락으로 배가 부르다는 게 신기하기만 하던 사토리는 잊어버릴 뻔 했던 두 사람의 의사를 정확히 듣기 위해서 다시 한 번 물었다.
"그래서 아까 말했던 바다 말이야.."
"가고 싶어!!" "같이 가줄게."
흔쾌히 같이 가겠다고 마치 계획한 듯 동시에 대답하는 두 사람의 모습에 사토리는 왠지 모를 무서운 기백을 느꼈다.
"그런데 사토리.. 바다에 가려면 나 수영복을 사야하는데.."
"아아. 그렇구나. 확실히 히토미는 밖에 잘 나가지 않았었으니까.. 호시야 씨는 수영복 갖고 있어?"
"뭐, 일단은."
호시야가 수영복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한 사토리는 한시름 놓으며 히토미를 향해 말했다.
"그럼 수영복을 사야하는 건 히토미뿐인가. 모처럼이니 학교가 끝나면 사러 갈래? 혼자서는 백화점에 가지 못하니까 괜찮으면 내가 같이 가줄게."
"으, 응..!!"
사토리와 히토미가 둘이서 수영복을 같이 고르며 즐겁게 웃고 떠드는 모습을 상상한 호시야는 상당히 불쾌해 보이는 모습으로 말했다.
"..나도 같이 가겠어."
"응? 하지만 호시야 씨는 수영복이 이미 있다고.."
"내가 같이 가면 안 되는 문제라도 있어?"
더 이상 무슨 말을 하면 신변이 위험해질 것이라 느낀 사토리는 입을 다물고서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렇게 학교를 마치고 백화점에 도착한 세 사람은 엘리베이터를 타고서 곧장 4층에 있는 여성 수영복 매장으로 향했다.
온갖 화려한 수영복들이 가득한 매장을 돌아다니던 내내 사토리는 차마 고개를 들 수가 없을만큼 창피했다.
"사토리! 하얀색이랑 노란색중에 어떤게 좋아?"
"..노, 노란색이려나.."
색깔만 다른 비키니를 보여주며 어느쪽이 좋냐는 히토미의 질문에 사토리는 수영복을 제대로 보지도 않고 노란색이라고 답했다.
"그럼 바로 입어볼테니까 어떤지 봐줘, 사토리!"
자신이 골라준 노란색 비키니를 들고 히토미가 기쁜 모습으로 탈의실에 들어가면서 사토리는 그저 묵묵히 따라다니기만 했던 호시야와 단둘이 남게되었다.
"저기.. 호시야 씨도 한 번 둘러보는 게 어때..? 굳이 살 필요는 없어도 마음에 드는 수영복이 있으면 입어볼 수도 있잖아."
"흐응. 내 비키니가 그렇게 보고 싶은 거야?"
"미.. 미안..!! 그런 의미로 꺼낸 말은.."
짓궂은 농담에 얼굴까지 붉혀가며 당황하는 사토리의 모습에 호시야는 옅은 미소가 새어나왔다.
"농담이야. 하지만.. 그러네. 괜찮으면 내 수영복도 한 번 골라주지 않을래? 네 말대로 다른 수영복도 입어보고 싶어졌어."
히토미와는 다르게 수영복 자체를 골라달라는 그녀의 부탁에 사토리는 차마 시선을 외면하지도 못하고 차근차근 여성 수영복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저런 건.. 어때..?"
사토리가 호시야에게 추천한 수영복은 검정색 계열의 프릴이 달린 비키니였다.
"나쁘지 않네. 입어보고 올게."
그렇게 호시야 마저 사토리가 골라준 수영복을 갖고 탈의실로 들어선 순간.
먼저 다른 탈의실로 들어갔던 히토미가 수줍어 하는 모습으로 천천히 그의 곁에 다가왔다.
"사토리.. 어때..?"
히토미의 곱슬거리는 금발 머리와 조화가 잘 어울리는 노란색 홀터넥 비키니는 가슴이 조금 빈약한 히토미가 입어도 충분히 섹시하다고 느껴질만큼 잘 어울렸다.
"응..굉장히 잘 어울려.."
어색해진 분위기. 서로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얼굴만 붉힌 채 서있기를 10초 정도 흘렀을 때 히토미가 먼저 탈의실로 돌아가며 말했다.
"그럼 이걸로 살게..!!"
"으, 응.."
사토리에게 있어 시선을 어디에 두어야 할 지 알 수 없는 비키니란 수영복은 말로 설명할 수 없을만큼 위험했다.
히토미가 옷을 갈아 입으러 탈의실로 돌아간 뒤. 잠시도 쉴 시간을 주지 않으려는 것처럼 이번에는 호시야가 비키니를 입고서 다가오며 물었다.
"어때? 잘 어울려?"
어른스러운 검정색 계열의 색감과 가슴골을 가려주는 프릴이 달린 비키니. 하지만 그럼에도 히토미보다 조금 더 부풀어오른 볼륨감이 드러나면서 호시야의 수영복 차림에 사토리는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안 돼. 제대로 봐야지."
"자, 잠ㄲ... 호시야 씨..!!"
사토리가 고개를 돌리지 못하도록 호시야는 가까이 다가와 그의 얼굴을 자신 쪽으로 고정시켰다. 좋든 싫든 그 덕분에 사토리는 강제적으로 그녀의 가슴을 눈앞에서 보게 되었다.
"잘 어울려..!! 잘 어울리니까 손 좀 치워줘..!!"
히토미와 호시야. 얼핏봐도 아이돌과 모델이라는 인식이 들 정도인 두 사람의 수영복 차림을 지켜보고 있던 가게의 여직원 역시 속으로 연신 감탄을 내뱉고 있었다.
다만 그 중에서 유일하게 드는 한 가지 의문이 있다면..
'어째서 저렇게 예쁜 여자애들이 저런 평범한 남자랑 같이 다니는 걸까..?'
두 사람에게는 전혀 안 어울릴 정도로 평범해 보이는 사토리의 존재였다.
"구매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결국은 호시야 역시 사토리가 골라준 수영복을 사버렸고 세 사람의 쇼핑은 그렇게 끝이 났다.
하지만 사토리는 이때 알아차렸어야 했다.
무언가 아주 중요한 것을 잊어버리고 있다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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