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훼룡 님의 서재입니다.

레플리카 헌터는 많은 것을 바라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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훼룡
작품등록일 :
2020.12.29 11:21
최근연재일 :
2021.06.03 19:00
연재수 :
117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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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6,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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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6.02 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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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쪽

117화

DUMMY

레플리카 헌터는

많은 것을 바라지 않는다


117화


마나를 다 쓰면 성에꽃은 더 이상 번지지 못하겠지. 숨만 붙어 있으면 다시 열기가 몸을 채울 테고, 그럼 다 녹아 내리겠지.


“내가 이 날씨에 살아남을 수 있을까?”

손끝이 보랏빛이었다. 하반신에는 진작 감각이 사라진 지 오래였다. 패딩 세 벌을 껴입고 버틴다면, 적어도 마나가 다시 차오를 때가지 얼어 죽지는 않겠지.

자잘한 부상은 샐 수도 없이 많았지만 어찌어찌 목숨이 위험할 정도는 아니었다.

다만, 성에꽃 핀 옆구리의 상쳐가 마음에 걸렸다. 지금은 성에꽃과 마나가 상쳐를 막아주고 있지만, 마나를 다 쓰는 순간 상쳐가 터질 거다. 피가 없으면 마나가 녹아들지 않고, 마나가 없으면 얼어 죽을 게 뻔했다.


날씨는 점점 추워지고 있었다. 지금은 영하 70도도 넘는 것 같았다. 꽁꽁 언 나무들의 수피가 터지고 깨져나갔다.

44호는 열선의 구를 띄워 놓고, 전투복 상의의 양 소매를 찢었다. 플레이트를 뜯어내고 단단한 가죽으로 몸통을 휘감았다. 빵빵한 붉은 패딩을 두 겹 껴입었다. 몸통과 갈비뼈가 압박되서 숨 쉬기도 힘들었다. 그래도 피가 흐르는 걸 어느 정도는 막아주겠지.


“43호.”


귓가에 피어싱이 만져졌다. 금속이 얼어붙은 귓불에 동상을 입혔다. 마나를 아주 살짝 불어넣으며 속삭였다.


“피해.”


애인이 무릎으로 기며 인간형 마수로부터 떨어졌다. 인간형 마수는 창을 휘두르며 미르한을 둘러싼 역장 방패를 깎아냈다. 이제 몇 호흡 안에 앞으로의 모든 게 결정날 거다.

그렇게 생각하니 갑자기 세상 모든 게 우스워 보였다.


핏속에 흐르는 모든 마나를 열선에 욱여넣었다. 순간적으로 눈앞이 캄캄해지고 머리가 어질어질해졌다. 몸 상태가 계단에서 굴러 떨어지는 듯한 기세로 추락했다. 주저앉지 않는 것만 해도 기적이었다.


내가 죽지 않았으면 해, 네가 죽지 않았으면 해. 돌잔치 정도는 하고 가도 늦는 건 아니잖아. 100세 시대가 왔다는데 그 100분의 1도 못 살고 죽을 수는 없는 거야.


다리에 힘이 빠지고, 시야가 흐려졌다. 한 줌 용기와 악을 긁어모아 눈을 부릅떴다. 상대를 똑똑히 눈에 담았다.


“제발 죽어버려.”


강하게 당겨오던 고무줄을 놓은 것 같았다. 열선이 눈부시게 뿜어져 나가고, 반동과 함께 몸이 뒤로 고꾸라렸다. 눈이 감기는 건지 눈알이 돌아가는 건지, 시야가 캄캄해진다.


정말, 정말로 조용했다. 세상에 혼자 남겨진 것처럼.


***


산 위쪽에서 붉은 점이 깜빡였다. 43호는 자존심이고 뭐고 전부 내다 버리고 기기 시작했다. 일어날 수는 없지만 도망은 쳐야 했다.


“응?”


겨울 후작이 뒤를 돌아본다. 놈은 완전히 포기했는지, 엉금엉금 기며 멀어지고 도망치고 있었다. 무거운 대검은 내버리고, 움직이지 않는 오른 다리를 질질 끌면서 눈밭 위를 가로질렀다.


골렘을 불러 밟아 죽여야겠군, 하고 생각했다.

귀족의 긍지란 두려움을 이겨내는 대서 나온다. 탁월한 이성으로 나약한 육체를 지배하는 것이야말로 명예로운 행동이었다.


“그래서 혈통이 전부가 아니라는 거군.”

좋은 혈통을 물려받은 놈이었지만, 긍지를 모르는 놈을 귀족으로 대우해줄 생각은 없었다.

“네 놈. 멀리 가지 마라. 어차피 몇 걸음이면 따라잡힐 테니.”


겨울 후작은 43호를 돌아보지도 않고 소리쳤다. 43호 역시 겨울 후작을 돌아보지도 않고 대답했다. 산 위에 붉은 점이 여명처럼 부풀어 올랐다.


“내가 너 때문에 도망치는 거 같아?”


겨울 후작이 그 말을 귓등으로 흘려냈다. 성에 낀 창을 들어 미르한의 목을 겨누었다. 새파란 마나가 일렁이는 눈동자는, 가라앉은 체로 웃고 있었다.


“저런 걸 믿고 있는 너도 한심하군. 수많은 부하들을 거느렸지만, 결국 마지막 순간에 믿을 놈 하나 없다니.”


미르한의 입술이 천천히 달싹였다.


“뭐라고 했나?”


“역장 방패 앞쪽만 부셔줘서 고맙다고 말했네. 아무리 나라도 지금 이 상태서 등을 맞으면 큰일 날 것 같거든.”


미르한의 가슴팍을 가린 역장 조각은거덜났지만, 등펀을 가린 역장 조각은 여전히 방패를 이루고 있었다. 그제야 겨울 후작은 고개를 들어 산 위를 바라보았다. 눈동자가 순식간에 수축하고, 뭐라도 내뱉으려는 듯이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동조자가 불꽃을 가슴에 품어 나와 다른 기둥을 세웠으니, 이제 곧 이 성에도 무너지겠지. 먼저 가게. 겨울 귀족이여.”


산 위에서 불기둥이 떨어져 내렸다. 태양광 같이 눈부신 아크 불꽃이 사방으로 튀었다. 불기둥에 정통으로 얻어맞은 겨울 후작이 허우적거리며 뒤로 튕겨져 나갔다. 미르한의 등을 가린 육각미늘방패들이 하나 둘 깨지고 터졌다.

일대가 고스란히 타오르고, 눈 녹은 수증기가 안개처럼 주변을 뒤덮었다.


43호가 비틀비틀 일어나 중력도검을 불러냈다. 눈보라가 불며 수중기가 걷혔다. 반쯤 탄화된 겨울 후작이 창을 바닥에 꽂고 거친 숨을 내쉬고 있었다.


앞쪽으로 뻗으며 불기둥을 막았던 왼손은 어깨까지 숯으로 변했고, 긴 머리카락도 여기저기 그을리고 타들어갔다. 오른쪽 다리도 무릎 아래에서 터져나갔고, 그 외에도 여기저기 살결이 붉게 짖뭉개졌다. 마나가 푸르게 점멸하며 화상 입은 살 아래서 새 살을 돋아올렸다. 이미 눌러붙은 옛 살 아래서 아무렇게나 치고 올라오며 울룩불록 부풀어 올랐다.


“이제 좀 봐 줄 만하게 생겼네. 봐봐. 얼마나 마수다워.”


43호의 뺨에는 성에꽃이 활짝 피어 있었다. 등허리에는 척추뼈까지 드러날 정도의 상처가 벌어졌다 아물어졌다를 반복했고, 배와 허벅지에는 깊은 자상이 하나씩 나 있었다.


“이게, 이게 무슨 꼴이냐! 존귀한 이 몸이-” 겨울 후작이 창대로 눈밭을 내려 찍으며 이를 달달 떨었다. 안면 절반이 화상을 입고 껍질이 돼지껍대기처럼 일어났다.


그래. 너무 성질이 나면 말도 제대로 안 나오는 법이지. 주변이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 세상을 보는 관점이 완전히 자기 안으로 기울어 버려.


“자, 승부를 내 보자. 활활 타올라 숯검댕이가 된 겨울 후작과, 산체로 꽁꽁 얼어가는 레플리카 헌터의 승부를.”


겨울 후작이 43호를 바라보았다. 열기에 녹아 일그러진 눈동자 위로 마나의 빛이 일렁였다. 겨울 후작이 흐늘거리는 눈꺼풀을 오른쪽 소맷자랏으로 문대 털어냈다. 손가락이 전부 창대에 눌러붙어 있어서 놓을 수도 없었다.


“네놈만은!”


그래. 계속 그렇게 나를 보고 있어. 네 뒤에 누가 있는지도 모르면서.


미르한의 몸을 뒤덮었던 성에꽃이 사그라들기 시작했다. 44호가 정수를 받아들인 거다. 이제 그녀의 색은 은색과 연한 하늘색이 아니다. 동조율이 떨어지자 자연스럽게 저주의 공유 역시 끝나갔다.


“딱히 내 손으로 너를 끝장내고 싶다는 마음은 없어.”


금속성을 내며 중력도검과 창이 부딪혔다. 불꽃이 튀고, 창대가 휘청거리며 밀려났다. 오른쪽 다리를 못 쓰게 된 건 같은 신세였다.

43호는 중력조작 스킬로 왼발에 무게를 더해 중심을 잡았고, 겨울 후작은 비틀거리며 휘청이는 창대에 몸을 기댔다.


곱은 왼손을 놀리며 마지막으로 중력을 조작했다. 몸무게를 한없이 가볍게 하고, 왼 발로 땅을 박찼다. 중력대검을 휘두르며 겨울 후작의 어깨를 노렸다.

바람이 찼다. 눈이 내린다. 창대와 날이 부딪혔다. 잠시 두 무기가 균형을 유지했다. 겨울 후작에게는 여력이 있었고, 43호의 검은 더 무거웠다. 여력은 소모되었지만 부여해둔 중량은 소모되지 않았다. 창대를 타고 미끌어진 검이 겨울 후작의 팔꿈치를 내리쳤다.


겨울 후작의 몸이 앞으로 기운다.

43호의 몸도 앞으로 기운다.


겨울 후작은 몸을 기댈 곳 하나 없이 휘청였다. 타고 잘려나간 양팔을 휘젓다 눈밭에 얼굴을 묻었다. 그가 불러낸 눈밭이었다.

43호는 중력대검에 몸을 기대고, 쓰러질 듯 쓰러지지 않으며 계속 걸어 나갔다.


“고맙다. 진심이야.” 미르한이 43호의 가슴이 무너지지 않게 받쳤다. 웃기지도 않은, 이미 몇 년도 전부터 예상하고 있던 약점을 공략당해 죽을 뻔했는데도, 그는 여전히 여유로워 보인다.


43호는 씁쓸하게 웃는다.

당신이 거짓을 말하지 않는다는 건 알고 있어. 누굴 속이지 않아도 뭐든 얻어낼 수 있잖아. 우리하고는 다르게.


미르한의 팔에 43호가 몸을 기댄다. 미르한은 43호를 상냥하게 눈밭에 앉힌다. 성에꽃의 흔적은 찾아볼 수도 없었다. 찢어진 셔츠가 황제의 용포처럼 휘날렸다. 준수한 얼굴에 화사한 은발을 뒤로 묶고, 가라앉은 눈매로 잠시 43호를 돌아보았다.


43호는 미르한의 등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었다. 진짜, 손가락 하나 움직일 힘도 없었다. 제 몸무게에 눌려 죽을 것 같았다.


“진짜, 대단한 인간이야.”


한탄과 동경을 실어 중얼거린다. 미르한이 푸른빛 감도는 손으로 겨울 후작의 이곳저곳을 집었다. 겨울 후작이 몸을 바르르 떨고, 죽은 것처럼 뻣뻣하게 굳었다. 이곳으로 다가오려는 얼음 골렘들에게 새파란 열선을 한두 차래 발사해 쓰러트렸다. 모든 게 영화 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처럼, 비현실적으로 변했다.


미르한이 겨울 후작의 머리체를 잡고 질질 끌었다. 어플리케이션을 실행해 이것저것 글을 썼다.


“부탁이 있습니다.”

생각보다 먼저 말이 튀어나왔다.


“말해라.”


새파란 마나를 대기로 뿜어내며 미르한이 답했다.


“많은 걸 바라지 않겠어요.”


43호는 압도되는 감각을 느끼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피부 안쪽이 오싹오싹했다. 엄청난 양의 마나가 대기를 휘젓고 있었다.


“그래.”


“저희 셋이 같이 있게 해주세요.”


43호는 숨을 거칠게 들이쉬었다. 눈앞이 아득해졌다.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잠들고 싶었다.


다시 그래, 하는 짧은 대답이 들려왔다. 의식이 깊은 물 속으로 천천히 가라앉았다. 초점이 흐려지고, 포성이 메아리치다 사그라들었다. 등과 배를 에는 아픔도 지긋하게 삼켰다.


저 말을 듣기 위해 몇 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겼을까? 마지막까지 헛웃음이 나왔다.

바람이 멈췄다. 눈이 그쳤다.


***


쿵쿵거리는 소리에 67호는 눈을 떴다. 지면이 파도처럼 흔들리고 있었다. 버석거리는 땅을 밟고 달려 44호에게로 향했다. 세 번이나 넘어지고 나서야 왼쪽 다리가 부러졌다는 걸 깨달았다. 아직 익숙하지 않은 중력조작 마법으로 산 꼭대기까지 올라갔다.


“세상 시발.”


포성이 산등성이마다 메아리치고, 조명탄 불빛이 피처럼 눈 덮힌 대지를 밝히고, 헌터들의 함성과 얼음 골렘의 발자국 소리가 고막에서 떠나지 않았다.


정상에서 두 겹 패딩을 입은 44호가 몸을 동그랗게 말고 쓰러져 있었다. 눈이 몸 위로 두텁게 쌓여서 잘 보이지도 않았다.


검지와 중지 두 손가락으로 44호의 목 옆 혈관을 집었다. 약하지만 맥이 생생했다.


지진 같이 땅이 울었다. 아니, 땅만 오는 게 아니었다. 어마어마한 양의 마나가 게이트를 중심으로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눈을 쏟아내던 구름이 갈갈이 흩어지고 군데군데 별빛이 보였다.


키가 백 미터도 넘을 듯한 얼음 골렘이 한 걸음 내딛을 때마다 땅이 울렸다. 몇 백 미터 떨어진 오른쪽 골짜기에서 불기둥이 솟았다. 얼음 골렘의 상반신 절반을 집어 삼켰다. 고효산이었다.


왼쪽으로 빠져나가던 30미터 이상의 대형 골렘들이 새까만 기사들에게 갈려 나갔다. 진홍색 꽃잎과 질척한 어둠이 소용돌이치며 기어나온 죽은 자의 군대가 산 자의 세상을 지켰다. 이서윤이었다.


고효산보다 오른쪽 골짜기에서도 골렘 쓰러지는 소리가 났다. 앙상한 나무들이 흔들리며 눈발이 우수수 떨어졌다. 짐승의 우렁찬 포효 소리가 포성마저 뚫고 산골짜기마다 메아리쳤다. 이한성이었다.


“...미친.”


이 모든 광경을 바라본 67호마저도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끝내 정상까지 다가온 골렘들마저 뒤를 돌아보았다.


게이트가 찌그러지며 천천히 닫혀 갔다.


67호는 그 광경을 끝까지 보지 않고 44호를 안아 들었다. 생각보다 가벼웠다. 중력조작으로 몸을 띄우며 한 손으로 어플에 글을 썼다.


-부상자 발생. 후송 배차 요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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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7 118화. 레플리카 헌터는 많은 것을 바라지 않는다. FIN. +1 21.06.03 32 2 13쪽
» 117화 +1 21.06.02 28 2 13쪽
115 116화 +1 21.06.01 25 2 12쪽
114 115화 피와 꽃 Fin. +1 21.05.31 31 2 12쪽
113 113화 +1 21.05.28 26 2 12쪽
112 112화 +1 21.05.27 31 2 12쪽
111 111화 +1 21.05.26 31 2 12쪽
110 110화 +1 21.05.25 29 2 12쪽
109 109화 재시험 Fin. +1 21.05.24 26 2 12쪽
108 108화 +1 21.05.21 37 2 12쪽
107 107화 +1 21.05.20 41 2 12쪽
106 106화 +1 21.05.19 44 2 12쪽
105 105화 +1 21.05.18 30 2 12쪽
104 104화 선물 Fin. +1 21.05.17 38 2 13쪽
103 103화 +1 21.05.14 26 2 12쪽
102 102화 +1 21.05.13 35 2 12쪽
101 101화 +1 21.05.12 31 2 12쪽
100 100화 +1 21.05.11 37 2 12쪽
99 99화 +1 21.05.10 27 2 12쪽
98 98화 +1 21.05.07 41 3 12쪽
97 97화 +1 21.05.06 37 3 12쪽
96 96화. 짧은 밤 fin. +1 21.05.05 37 2 12쪽
95 95화 +1 21.05.04 34 3 12쪽
94 94화 +1 21.05.03 36 3 12쪽
93 93화. 중력도검 Fin. +1 21.04.30 36 3 12쪽
92 92화 +1 21.04.29 41 3 12쪽
91 91화 +1 21.04.28 36 2 12쪽
90 90화 +1 21.04.27 46 3 12쪽
89 89화 +1 21.04.26 35 3 12쪽
88 88화 +1 21.04.23 41 3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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