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훼룡 님의 서재입니다.

레플리카 헌터는 많은 것을 바라지 않는다.

웹소설 > 일반연재 > 현대판타지, 판타지

훼룡
작품등록일 :
2020.12.29 11:21
최근연재일 :
2021.06.03 19:00
연재수 :
117 회
조회수 :
8,844
추천수 :
338
글자수 :
636,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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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5.07 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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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쪽

98화

DUMMY

레플리카 헌터는

많은 것을 바라지 않는다


98화


원래 C급이 되면 교관들과 연구원들이 이름을 지어주기로 했었지. 내가 뭐라고 불리게 될지 생각하며, 들뜬 기분으로 잠자리에 누웠어. 나수빈 님이 직접 이름을 지어주셨으면, 하고 생각했지.

마력은 바라는 만큼 오르지 않았지. 조바심에 발을 동동 구르면서도, 눈을 꼭 감고 시야 오른쪽 상단의 마력량 몇 번이고 확인했어.


난 아직도 그날이 기억나. 박수 소리와 함께 67호가 단상으로 올라갔지.

딩연히 금장 명찰에 이름이 새겨져 있을 줄 알았어. 그때까지 67호를 보는 내 눈에는 호감과 두려움과 경외감이 뒤섞여 있었지. 이제 67호가 어떤 이름으로 불리게 될까 기대하며, 단상 위의 그녀에게서 나를 봤어.

67호가 명찰을 보는 순간, 미미하게 흔들리던 눈을 본 건 43호 나뿐이겠지.


“67호는 그때 분명히 실망했습니다.”

“뭐? 안 들려? 다시 말해봐.”


43호는 시선을 고은유의 어깨쯤으로 향하며 장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당신을 어디까지 믿을 수 있을까요? 이서윤 님은 어디까지 믿을 수 있을까요? 이서윤 님이 44호의 목을 치고 언데드의 소행이라 말할 가능성이 없다고 누가 장담할까요?’


“꼭, 꼭 제가 가야 합니다.”

“그러니까...그 이유를 말해 보라니까. 발 빠른 B급 헌터 대신, 여기서 대형종들을 상대할 능력이 있는 널 꼭 보내야 하는 이유. 유성처럼 달리던 쟤 대신 너를 보내야 하는 이유.”


‘67호는 안 됩니다. 67호가 44호를 좋아한다는 건 확신합니다. 하지만 67호는 부귀와 영화를 원해요. 목숨을 빼면 뭐든지 타협할 수 있는 친구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지금까지 같은 길을 걸어올 수 있었지요. 하지만, 이서윤이 44호를 죽이려 한다면, 67호는 같이 죽을 각오로 덤비기보다는 피눈물 흘리며 비켜 설 겁니다.’


때로는 같이 죽겠다는 낭만이 모든 것을 바꿔 놓기도 한다. 미르한을 설득시킬 수 있던 것도, 목숨마저 내놓겠다는 각오 덕이라고 생각한다.

67호는 단순한 소녀다. 생각하려 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강하지만, 그래서 쉽게 부러진다. 차마 넘어설 수 없는 상대가 소중한 것을 요구한다면, 슬퍼하면서도 어떻게든 잘라 낼 거다. 끝까지 달라붙으려 하지 않을 거다.


“저와 무슨 상대인지 물으셨지요.”


‘당신은 어디까지 믿을 수 있을까요? 콘체른 길드는 블루문 길드와 얼마나 가까운 사이일까요? 길드 마스터라는 고효산은 미르한과 얼마나 친할까요? 고은유 당신은 우리를 마음에 들어하는 것 같지만, 미르한에게 우리를 살려달라고 할 수 있을까요?’


선택의 순간이다. 43호는 손끝을 바르르 떨며 입을 열었다. 혀가 쥐가 난 것처럼 굳어 움직이지 않았다. 저, 제, 그러니까,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만 하며 버벅거렸다.


‘밑져야 본전이지! 설마 네가 미르한 클론이라고 셋을 다 죽이기야 하겠냐? 어차피 한 달 뒤에 44호 일치율 못 떨어트리면 44호는 죽어! 그럼 네가 살 수 있을 거 같아?’


미르한에게 덤벼들고, 한 방에 죽어나가겠지.


“저희 이름 모르셨죠?”


매끄럽게 흘려 나온 말. 고은유가 눈썹을 치켜올리며 만족스럽게 웃는다.


“깊은 대화를 나누기에 좋은 상황은 아니네. 빨리 말해.”


“제 이름은 43호, 아까 날아간 눈부신 은발의 제 애인 이름은 44호입니다. 마음에 들어하시는 것 같은 저 친구 이름은 67호입니다. 지금 이름이 왜 그따구야? 이런 생각 하셨죠? 나머지는 다녀와서 말해드릴까 하는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전부 다 털어놓을 기세였다. 고은유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혹여 어디서 이서윤이 보고 있지 않나 주변을 살피는 모습이 경건하기까지 했다.


“좋네. 빨리 다녀와. 죽지 말고.”


“여부가 있겠나이까?”


67호가 눈썹을 치켜올리며 의문을 표했다. 푸른색과 금색이 뒤섞은 전류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졌다. 어쩌려고? 결국 털어놓으려고? 묻는 것 같았다.

어쩔 수 없잖아. 뭐가 썩은 동앗줄인지 모르면 하나라도 더 구해놔야지. 쓰게 웃으며 땅을 박찬다. 중력조작, 하고 중얼거린다. 육각미늘방패 조각들을 밟으며, 43호는 하늘을 내달리기 시작했다.

***


“역시 근접전은 취향이 아니라니까.”

빠르게 세 걸음 물러서며 44호는 진저리쳤다.

“뒤엉켜가지고 때리고, 걷어차고, 막 이렇게 저렇게 엎어쳤다가 또 찌르고 배고...그걸 다 어떻게 하는 건지 모르겠어.”

부서진 어깨 플레이트 사이서 맑은 피가 흘렀다. 오른쪽 허벅지 플레이트에는 단검이 깊숙하게 꽂혀 있었다. 길게 배인 뺨에서 흘러내리는 피를 거친소맷자락으로 찍어내며, 경질화시킨 주먹으로 가드를 올렸다.


입을 굵은 실로 꿰맨 흔적이 있는 반혼 기사 넷이 슬슬 따라왔다. 다리도 없는 것들이 달리려는 듯이 상체를 앞으로 기울이며 눈을 번뜩였다.


‘열선이 먹히기는 해.’


여덟 발 중 세 발을 얻어맞은 반혼 기사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불타 부서졌다. 저쪽 구석에 머리와 척추뿐인 시신이 축 늘어져 있었다.

올 테면 와 봐라. 순순히 죽어 주지는 않을 테니까.

그렇게 각오를 다지는 순간, 오른쪽 허벅지에 박힌 단검의 주인이 화살처럼 돌진했다.


파앗! 네 번째 열선이 기사의 머리 옆을 스쳤다. 갈변한 머리카락이 흩날리고 반건조된 귀가 떨어져 나갔다.


파앗! 다섯 번째 열선은 기사의 오른팔을 향해 날아들었다. 기사가 소검 검신을 세워 막자, 거울이라도 되는 것처럼 열선이 흩어졌다. 하지만 그리 좋은 마도구는 아니었는지, 1초 가량 버티다 깨져나갔다.

순간 기사의 눈빛에 낭패감이 감돌고, 44호를 두 걸음 앞둔 상태에서 기사의 오른팔이 깔끔하게 잘려 나갔다.


“그럼 이제!”


기대감으로 한 발 나서며 기사의 얼굴을 경질화 시킨 주먹으로 후려치려던 찰나, 기사가 44호의 오른쪽으로 몸을 내던지며 왼손을 휘둘렀다.


깡! 검을 돌에 부딪힌 것 같은 소리가 났다. 충격을 버티지 못하고 깨진 플레이트 사이로, 경질화된 허벅지가 눈에 띄었다. 단검은 수정에 박힌 검처럼, 단단히 고정되어 빠져나오지 않았다.

“내가 눈토끼 같은 걸로 보이냐? 이거 그대로 박아 놓고 계속 신경 건들게 놔둘 수는 없지. 그렇다고 이거 함부로 뽑았다간 피 줄줄 나서 마나 다루지도 못할 건데.”


44호의 뒤편으로 낙법을 펼친 기사가 분노와 수치심으로 갈색 얼굴을 붉히며 주먹을 날렸다.


역장 방패를 불러내 정면에서 찔러오는 세 번째 기사의 칼을 막고, 이제 칼도 없을 두 번째 기사의 얼굴에 여섯 번째 열선을 발사했다.


두 번째 기사가 뒤로 넘어가는 걸 다 보지도 않고, 깨지기 직전인 역장 방패 쪽으로 눈을 돌렸다.

이제 다리도 없는 괴물이 되었다고 한들, 반혼 기사의 검법은 물 흐르듯 명료했다. 첫 번째 찌르기가 막히자마자 반동을 타고 몸을 돌리며 회전력을 더했다. 어느새 역수로 잡은 소검의 끄트머리가 저 멀리서 날아오른 수정구슬의 빛을 받아 반짝였다.


거친 금속음과 함께 역장 방패가 깨져나가고 조각들이 흩날렸다. 조준도 하지 않고 남은 두 발의 열선을 정면으로 발사했다. 육각미늘방패 조각 사이를 해쳐나오던 세 번째 반혼 기사가 복부에 정통으로 열선을 얻어맞았다. 갈비뼈가 바람 빠진 풍선처럼 쭈그러들었다.


측면으로 파고든 네 번째 반혼 기사를 향해서도 열선을 발사하려 했지만, 어깨 위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맞다. 방금 두 발이 마지막이었지?”


인생의 마지막이 될 수는 없지. 크게 뒤로 점프하며 몸을 비틀었다. 까치발을 들면 뒤로도 달릴 수 있었다.


네 번째 반혼 기사가 이를 악물었다. 문드러져 말라붙은 뺨 사이로 어금니에 잔뜩 힘이 들어간 게 보였다. 발도 없는 주제에 각력은 왜 그렇게 좋은지, 아무리 피하려 해도 자석처럼 달라붙어 소검을 휘둘렀다. 위로 치켜 올라간다 싶으면 유성처럼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십자 배기를 간신히 아래 팔뚝 플레이트로 막아냈다. 금속판이 살얼음처럼 깨져 나가고, 피가 터져나와 독이끼 깔린 대지에 뚝뚝 떨어졌다.


“...이!!”


다소의 반동을 감당하며 억지로 마력을 끓어 올렸다. 구역질을 복근으로 억누르고 이를 악물었다. 붉은 빛 감도는 열선 한 발이 허공을 갈랐다. 반혼 기사의 코트를 찢고 갈비뼈 몇 대를 날려버렸지만, 놈을 완전히 죽일 수는 없었다.


깡! 흉부의 플레이트가 송곳으로 찌른 통조림 캔처럼 꿰뚫렸다. 소검이 조금만 더 길었더라면 왼쪽 가슴을 완전히 날려버렸을 찌르기였다.


“미안하지만 이건 네 게 아니라서!”


오른손 손바닥 안으로 마나를 긁어모았다. 네 번째 반혼 기사를 밀치며 다섯 번째 반혼 기사가 레이피어를 찔러들었다. 끌어모든 마나가 열선으로 변하기 일보 직전이었다. 붉은 색 감도는 구를 꿰뚫은 레이피어 가장자리가 녹아내렸다. 동시에, 손등으로 달궈진 금속 꼬챙이가 튀어나왔다.


“...미친.”


44호는 못 믿겠다는 듯이 눈을 한두 번 깜박였다. 허탈감에 올라간 광대가 내려오지를 않았다.

‘침착, 침착하자. 거리만 벌리면 돼.’

그대로 두 걸음 더 물러났다. 손등을 확인해보니, 정확히 검지와 중지 사이가 찢어져 있었다. 뼈에는 생체기 하나 안 났을 것 같았다.

‘시간만 끌어. 내가 보인 활약이 있으니 고은유 님이나 이서윤 님이 누구라도 보내 줄 거야. 43호도 와 주려고 할 거고.’


열선을 띄워 올릴 수가 없었다. 마나가 충분히 모여들기 전에 레이피어와 소검이 날아들었다. 기껏 긁어모아 둔 마나가 찢어져 나갔다.

‘이건 원래 살상용으로 만든 게 아닌데!’

광선을 발사했다. 어른 몸뚱이보다 굵은 빛줄기가 다섯 번째 반혼 기사의 몸뚱이를 후려쳤다. 척추뼈 끝이 꼬리처럼 요동치고 다섯 번째 반혼 기사가 물대포에 맞은 것처럼 데굴데굴 굴러갔다.

네 번째 반혼 기사의 소검이 왼쪽 허벅지를 향해 파고들었다. 저절로 감기는 눈을 부릅뜨며, 최대한 경질화시키고 뒤로 뛰어올랐다.

소검 끝이 느릿하게 따라오는 게 똑똑히 보였다. 0.8cm 두께의 금속 플레이트에 파고들고, 경질화한 허벅지에 부딪히자 불꽃을 튀겼다. 적잖은 반동에 허벅지가 뒤로 밀려나고, 소검은 플레이트를 가르며 위쪽으로 미끌어졌다.

플레이트가 반으로 갈라지고, 허벅지를 따라 올라온 소검이 그대로 갈비뼈 아래를 찔러들었다.

구조상 플레이트에 틈이 있을 수밖에 없는 곳이었다.

‘미치고 환장하겠네.’

소검 끝이 질긴 전투복을 찢었다. 손가락 한 마디까지 칼날이 파고들었을 때, 44호는 신발 밑창으로 반혼 기사의 얼굴을 힘껏 밀어찼다.

찔러들어오던 소검 끝이 다시 빠져 나가고, 네 번째 반혼 기사가 땅바닥을 굴렀다.


하아, 거친 숨을 들이쉬며 44호는 열선 여섯 발을 띄워 올렸다. 남은 마력을 탕진하며 역장 방패도 다시 불러냈다.

“내가, 내가 이겼어.”

세 발의 광선을 하늘로 발사했다. 혹시 누군가 나를 찾고 있다면, 분명 볼 수 있겠지.


반혼 기사 둘이 레이피어와 소검을 치켜들었다. 44호는 귀한 집 아가씨처럼 반혼 기사들을 바라보았다.

“...이 무례한 것들이.”


하늘 저 편에서 익숙한 그림자가 눈에 띄었다.

44호는 됐다, 하고 작게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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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7 118화. 레플리카 헌터는 많은 것을 바라지 않는다. FIN. +1 21.06.03 32 2 13쪽
116 117화 +1 21.06.02 28 2 13쪽
115 116화 +1 21.06.01 26 2 12쪽
114 115화 피와 꽃 Fin. +1 21.05.31 31 2 12쪽
113 113화 +1 21.05.28 26 2 12쪽
112 112화 +1 21.05.27 31 2 12쪽
111 111화 +1 21.05.26 31 2 12쪽
110 110화 +1 21.05.25 29 2 12쪽
109 109화 재시험 Fin. +1 21.05.24 27 2 12쪽
108 108화 +1 21.05.21 37 2 12쪽
107 107화 +1 21.05.20 41 2 12쪽
106 106화 +1 21.05.19 44 2 12쪽
105 105화 +1 21.05.18 30 2 12쪽
104 104화 선물 Fin. +1 21.05.17 38 2 13쪽
103 103화 +1 21.05.14 26 2 12쪽
102 102화 +1 21.05.13 35 2 12쪽
101 101화 +1 21.05.12 31 2 12쪽
100 100화 +1 21.05.11 37 2 12쪽
99 99화 +1 21.05.10 27 2 12쪽
» 98화 +1 21.05.07 42 3 12쪽
97 97화 +1 21.05.06 38 3 12쪽
96 96화. 짧은 밤 fin. +1 21.05.05 38 2 12쪽
95 95화 +1 21.05.04 34 3 12쪽
94 94화 +1 21.05.03 36 3 12쪽
93 93화. 중력도검 Fin. +1 21.04.30 36 3 12쪽
92 92화 +1 21.04.29 41 3 12쪽
91 91화 +1 21.04.28 36 2 12쪽
90 90화 +1 21.04.27 46 3 12쪽
89 89화 +1 21.04.26 35 3 12쪽
88 88화 +1 21.04.23 41 3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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