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훼룡 님의 서재입니다.

레플리카 헌터는 많은 것을 바라지 않는다.

웹소설 > 일반연재 > 현대판타지, 판타지

훼룡
작품등록일 :
2020.12.29 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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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6.03 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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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7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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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5.05 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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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쪽

96화. 짧은 밤 fin.

DUMMY

레플리카 헌터는

많은 것을 바라지 않는다


96화


43호의 가슴이 들썩였다. 더운 입김이 어둠 속으로 사라져 갔다. 언데드들은 43호를 기다려주지 않았다. 다리가 잘리면 팔로 기어서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뾰족한 이를 드러냈다. 목까지 차오른 숨을 삼키며 검을 휘둘렀다. 이미 다리를 잃은 놈의 팔을 잘라내 달마로 만들고, 머리를 내리쳐 부수고, 어깨를 비스듬하게 잘라 냈다.

43호는 500미터 잠영을 마친 것처럼 숨을 들이쉬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뒷덜미를 따라 땀방울이 송글송글 맺혔다.


‘A급 헌터들이 범위기를 쓰지 않아. 효율상 아끼고 있는 건지, 아예 없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지금까지 봐서는 한 번에 여러 마리를 상대하기에 좋은 스킬이 없는 거 같아. 아까 반충헌도 언데드 무리에 삼켜졌을 때, 한 마리 한 마리 해치우면서 나왔어.

HP 1짜리든 HP 1만짜리든 한 대 때려서 죽일 수야 있겠지만, HP 1짜리가 1만 마리 오면 1만 대 때려야 하는 거야.’


이거 곤란한데.


“수정구슬 하나 더 띄우겠습니다!”

C급 헌터가 수정구슬을 하늘로 집어 던졌다.

벌써 수정구슬을 아홉 개가 넘게 썼지만, 언데드 군단은 끝이 보이지 않았다.


“고은유 님! 이놈들 수가 너무 많습니다!”

“역산 끝나 가! 조금만 더 버텨!”


역산?


팔다리 잘린 언데드 하나를 연구계 헌터들이 붙들고 있었다. 손끝에서 빛을 내며 뭔가를 뜯어내고, 날카롭고 뾰족한 도구들로 언데드의 머리와 심장 살을 잘라냈다.


“고은유 님! 역산 끝났습니다.”

“그럼 뭐하고 있어? 빨리 이서윤에게 좌표 보내!”

“그, 그게. 네크로멘서가 한둘이 아닙니다! 서른 한 놈이나 되요. 거기에 몇 놈은 계속 이동하고 있습니다.”

“역시...한 놈이 이 정도 숫자를 동원할 수는 없겠지. 신경쓰지 말고 좌표 보내. 그 정도야 서윤이 알아서 할 거야!”


밀려오는 언데드 사이, 조금 다르게 생긴 놈들이 눈에 띄었다. 높이 약 5미터에 왕구슬을 잔뜩 뿌려 높은 것 같은 눈. 온 몸을 빈틈없이 둘러싼 갑각은 윤기나는 흑회색이 아닌 말라붙은 갈색이었다.


“강철굼뱅이다!”

누군가가 외쳤다.


“너! 저거 잡을 수 있겠냐? 한 방에 못 잡을 거 같으면 말해. 내가 간다.”

3시 방향을 맡던 반충헌이 소리쳤다.


43호는 흘깃 뒤를 돌아보았다. C급 헌터 몇몇이 43호를 꼭지점으로 삼각형을 이루고 있었다. 43호는 그들을 반충헌을 꼭지점으로 하는 삼각형에 합류시켰다.

“제가 가겠습니다. 나름 괜찮은 중량기도 있다고요.”

중력을 조작해 몸을 가볍게 하고, 날 듯이 땅을 박찼다. 풍선이라도 된 것처럼 몸이 둥실둥실 떠올랐다. 팔다리를 휘저으며 균형을 잡았다.

‘연습해야지. 연습! 제대로 못 쓰면 폼 다 구기겠다.’

다리에 달라붙는 언데드 몇몇을 힘껏 걷어차며 다시 몸을 띄우고, 강철굼뱅이의 머리 위까지 나아갔다.

“역장도검, 중력조작.”

얇은 박도에 육각미늘방패 조각들이 달라붙고, 검신 폭만 한 뼘이 넘는 대검으로 변모했다. 대검에 중력조작 스킬이 더해지고, 푸르스름하던 검신이 밤바다 같은 검은색으로 물들었다.

머리 위로 한껏 넘겨들었다가 내리치는 동시에, 몸을 띄우고 있는 중력조작 스킬을 해제했다.


쿵 하는 소리가 울렸다. 운석이라도 맞은 것처럼 강철굼뱅이의 등이 파여 들어갔다. 긴 검신은 손잡이까지 파묻혀 보이지도 않았다. 강철굼뱅이의 머리와 몸통 일부가 돌바닥에 짖눌리며 으깨졌다.

증기기관차의 바퀴처럼 강인하게 움직이던 다리들이 바르르 떨고, 강철굼뱅이가 멈춰 섰다.

저 멀리서 강철굼뱅이에 더불어, 갑각 지네까지 보이기 시작했다.

‘야단이네.’


“네가 9시 방향 맡고, 네가 3시 방향 맡아. 충헌아, 네가 나가서 대형종들 잡아. 큰 놈들 잡느라 작은 놈들이 쌓이면 안 돼.”


장검을 쓰던 A급 헌터가 3시 방향의 방비를 충현에게 넘겨받았다. 잠시 둘이 눈빛을 나누고, 충헌이 폭주한 코뿔소처럼 돌진했다.


“어마어마하네.” 43호는 세 마리째의 강철굼뱅이를 때려부수며 중얼거렸다.


충헌이 너클을 끼고 돌진하면, 기적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언데드들이 갈라졌다. 주먹 한 방 한 방을 날릴 때마다 붉은 기운이 피어올랐다. 주먹에 맞은 대형종과 붉은 기운에 휩쓸린 소형종들은 짖밟힌 과자부스러기처럼 변했다.


43호는 다시 허공으로 몸을 날렸다. 중력조작으로 몸을 띄운 뒤 육각미늘방패를 적당한 발판으로 사용하면 하늘을 날 듯이 달릴 수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너희들은 내 인생에 도움이 안 돼.”


갑각지네의 부체꼴 머리 위로 뛰어내렸다. 눈 근처에 떨어진 작은 적을 치우려 갑각지네가 앞다리를 들어올렸다.


앞다리가 머리 위까지 올라오기도 전에 중력도검을 휘둘렸다. 나비 날개처럼 휘저으며 부체꼴 두개골을 후려쳤다. 갑각과 근육이 찢어지고 깨지며 터져나갔다. 머리를 발로 찬 택배 상자처럼 찢고 몸통 첫 마디를 반쯤 으스러트렸다. 갑각지네의 다리가 하나 둘 꺾이고, 몸이 기울기 시작했다. 머리를 박차며 뛰어올라 다음 대형종을 찾았다.


“고은유 님! 이서윤 님에게 통신 들어왔습니다. 서른 한 놈의 네크로맨서 중 열 한 마리를 처치했다고 합니다.”

“좋아. 이제 조금만 더 죽이면 웨이브 끝나겠네.”


은유가 붉게 달아오른 장검을 휘둘러 언데드들을 송당송당 잘라내고, 67호가 전류를 발사해 언데드들을 터뜨리고, 44호가 열선으로 대형종들을 불태우고, C급, B급, A급 할 것 없이 자기 자리서 최선을 다하고 있는 가운데, 한연구계 헌터가 고함쳤다.

“고은유 님. 인근 네크로맨서 위치 특정했습니다.”

“어딘데?”

“그게, 은유 님 앞쪽으로 200미터입니다.”

쥐구멍이라도 찾고 싶다는 듯 기어들어가는 보고가 들리자마자, C급 현장지원직 헌터 하나가 은유의 앞쪽으로 수정구슬을 집어 던졌다. 조명탄이라도 터뜨린 것 같이 눈부신 빛이 터져나오고, 수천의 언데드들에게 선명한 그림자를 드리웠다. 병마용갱에 온 것 같았다.

그 사이에서 군계일학으로 음산한 기운을 뿜어내는 존재가 있었다.

키도 덩치도 일반 언데드와 다르지 않았다. 뼈다귀처럼 말라붙은 손가락도, 되다 만 미라 같은 살가죽도 똑같았다. 찢어진 망토를 두르고 있었다. 한 손으로 옷깃을 감아쥔 걸 보면, 흉측한 맨살을 드러내기 싫은 것 같았다.

“그 꼴이 돼서 수치심은 남아있는 건가?”

은유가 중얼거렸다.


네크로맨서가 뼈다귀같은 손가락으로 위쪽을 가리켰다. 그 끝이 44호를 향하고 있다는 걸 알아차리기까지 잠시 시간이 걸렸다.


“이 되다 만 싸구려 육포 같은 게!”

43호는 곧바로 중력도검을 휘두르며 돌진했다. 감히 누구에게 주술을 쓰려고 하는지 알려주어야 했다.

땅을 달리는 것보다 하늘에서 육각미늘방패 조각을 박차는 게 더 빨랐다. 발 아래쪽에서 언데드들이 휙휙 뒤로 사라졌다

네크로맨서는 계속 44호만을 가리키고 있었다. 움푹 파인 눈이 오랜지색 광체를 뿜어내고, 손가락 끝에서 비명같은 파동이 일었다.


44호는 네크로맨서를 비웃으며 역장방패를 전개했다.

“얕보인 거라면 자존심 상하는데.”


파장계의 공격은 범위가 넓지만 관통력은 떨어진다. 뭔가에 한 번만 막혀도 위력이 급감한다.

“맞아가면서 배운 거라서 안 까먹어.”


남아있던 여섯 발의 열선을 일제히 발사했다. 불씨가 흩날리고 불기둥이 뿜어져 나갔다. 인근의 대형종과 소형종을 집어 삼키며 네크로맨서에게 혀를 날름거렸다.


동시에 음울한 빛을 뿜는 파동이 역장 방패에 부딪혔다. 잔금이 내달리고, 조각이 떨어져 빛무리로 변했다.

‘...안 사그라드는 거야?’

의문을 품은 순간, 역장채로 몸이 휘말렸다. 튜브를 탄 체로 거대한 파도에 휩쓸린 것처럼 떠밀렸다. 몸이 뱅글뱅글 돌아서, 얼마나 날아갔는지도 모르겠다.

네크로맨서는 폭풍 속의 가랑잎처럼 날아가는 44호를 보고 깔깔 웃었다. 구멍 뚫린 목에서 바람이 쉿쉿 새어나갔다.

뼈다귀 같은 손가락이 복잡한 수인을 그리고, 방금 것과 같은 파동이 몇 개나 쏘아져 나갔다. 새까만 연기를 뿜으며 등골이 오싹해지는 비명을 내질렀다.

지척까지 다가선 43호는 파동 안에서 대여섯 개의 뒤엉킨 얼굴들을 보았다.

증오보다는 혐오가, 혐오보다는 분노가 앞섰다.


“잡아와! 죽이지 마!”


고은유가 성난 용처럼 앙칼지게 소리쳤다.

43호는 반쯤 돌아간 눈을 간신히 바로 뜨고, 네크로맨서의 머리 위에서 뛰어 내리며 대검을 휘둘렀다.

네크로맨서가 개구리처럼 뛰어 오르며 피했다. 말라죽은 나뭇가지처럼 앙상한 손짓을 따라 수십 마리의 언데드들이 달라붙었다. 음습한 신음성을 내며 갈퀴 같은 손가락을 휘둘렀다. 옷깃이 잡힐 듯 잡히지 않았다.

‘뭐야? 갑자기?’

언데드 하나가 다리를 붙들었다. 축구공을 걷어차듯 다리를 털어냈다. 자빠트리기에 충분한 힘이었지만, 놈은 거꾸로 팔을 뻗으며 허벅지를 할퀴었다.

‘강해졌어. 이 근처 몇 놈과 힘을 나눈 거야.’

당황하다가는 숫자에 밀려 파묻히겠지.


하지만 처음부터 땅 위를 뛰어 쫒아갈 생각은 없었다. 중력을 조작하고 땅을 박차며 몸을 띄웠다. 달려들던 언데드들이 부딪히며 나동그라지고 닭 쫓던 개처럼 하늘만 바라보았다. 서로를 짖밟고 올라서면서까지 주인의 명을 따르려 했지만,

이미 43호는 그 주인의 뒷목을 경화한 왼손으로 우악스럽게 붙들었다.


“44호 어디로 날려버렸냐? 이 개새끼야!”

네크로맨서는 움푹 패인 눈에서 오랜지색 광체를 내며 웃었다. 썩어 들어간 입술이 비릿하게 말려 올라갔다.

“XXXXX! xXXXXXXX!”


“...그래. 네가 우리 말을 할 수 있을 리가 없지.”


네크로맨서가 참치처럼 몸을 비틀었다. 사기를 두른 손날을 단검처럼 휘두르며 43호의 목 혈관을 노렸다.

캉, 불꽃이 튀고 쇳소리가 울렸다. 반쯤 우그러진 플레이트 아래서 경질화된 피부가 엿보였다.

“그럴 줄 알았어.”


중력 도검이 우수수 무너지며 크기를 줄여 나갔다. 양손으로 잡기도 힘들어보이는 대검에서 날 길이 두 뼘 정도의 소검으로 변했다. 대검을 휘두르기에 네크로맨서는 바짝 붙어 있었다.


“내가 궁금한 게 하나 있는데.”


뒷목을 으스러트릴 기세로 힘을 주었다. 이쪽을 돌아보는 오랜지색 눈동자에 분노와 질투, 그리고 희미한 공포가 깃들었다.

화색을 표하며 43호는 물었다.


“너도 피가 흐르니?”


두 팔은 팔꿈치 위에서, 두 다리는 무릎 위에서 잘라 냈다. 잡졸 언데드들과는 다르다는 듯이, 놈의 팔다리를 잘라도 먼지로 흩어지지 않았다. 뭔가 주문을 외려 하는 것 같아서, 잘라놓은 팔뚝을 아가리 안에 쑤셔 넣었다. 이빨 몇 개가 우수수 떨어졌지만, 어차피 내 이빨도 아니었다.


“고은유 님! 잡아왔습니다!”

“잘했어. 연구계 애들한테 넘겨. 그 멍청한 자식. 뭐하러 여기까지 기어온 거야?”


오랜지색 눈동자가 데굴데굴 굴렀다.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놈들의 대표적인 태도였다.

“뭔가 잘못 돌아가고 있는 거 같지?”


43호는 원형의 방진 위를 가로질러 달렸다. 방패벽 안쪽에서 연구계 헌터들이 하늘을 향해 손을 뻗어왔다.


“계획이 있던 것 같은데...누구나 근사한 계획을 가지고 있지. 처맞기 전까지는.”


부드럽게 하강하며 연구계 헌터들의 손에 네크로맨서를 넘겼다. 마디마디 불거진 손들이 놈의 몸뚱이를 단단히 붙들었다. 연구계 헌터들은 창백한 지성으로 눈을 빛내며, 손에 손에 메스를 치켜들었다.


짧은 밤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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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6 117화 +1 21.06.02 28 2 13쪽
115 116화 +1 21.06.01 26 2 12쪽
114 115화 피와 꽃 Fin. +1 21.05.31 31 2 12쪽
113 113화 +1 21.05.28 26 2 12쪽
112 112화 +1 21.05.27 31 2 12쪽
111 111화 +1 21.05.26 31 2 12쪽
110 110화 +1 21.05.25 29 2 12쪽
109 109화 재시험 Fin. +1 21.05.24 26 2 12쪽
108 108화 +1 21.05.21 37 2 12쪽
107 107화 +1 21.05.20 41 2 12쪽
106 106화 +1 21.05.19 44 2 12쪽
105 105화 +1 21.05.18 30 2 12쪽
104 104화 선물 Fin. +1 21.05.17 38 2 13쪽
103 103화 +1 21.05.14 26 2 12쪽
102 102화 +1 21.05.13 35 2 12쪽
101 101화 +1 21.05.12 31 2 12쪽
100 100화 +1 21.05.11 37 2 12쪽
99 99화 +1 21.05.10 27 2 12쪽
98 98화 +1 21.05.07 41 3 12쪽
97 97화 +1 21.05.06 37 3 12쪽
» 96화. 짧은 밤 fin. +1 21.05.05 38 2 12쪽
95 95화 +1 21.05.04 34 3 12쪽
94 94화 +1 21.05.03 36 3 12쪽
93 93화. 중력도검 Fin. +1 21.04.30 36 3 12쪽
92 92화 +1 21.04.29 41 3 12쪽
91 91화 +1 21.04.28 36 2 12쪽
90 90화 +1 21.04.27 46 3 12쪽
89 89화 +1 21.04.26 35 3 12쪽
88 88화 +1 21.04.23 41 3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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