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훼룡 님의 서재입니다.

레플리카 헌터는 많은 것을 바라지 않는다.

웹소설 > 일반연재 > 현대판타지, 판타지

훼룡
작품등록일 :
2020.12.29 11:21
최근연재일 :
2021.06.03 19:00
연재수 :
117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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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636,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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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5.31 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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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쪽

115화 피와 꽃 Fin.

DUMMY

레플리카 헌터는

많은 것을 바라지 않는다


115화


이마는 뜨겁고 몸은 싸늘했다. 아까부터 들리는 딱딱 소리가 입 안에서 나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그제야 눈이 떠졌다. 붉은 패딩 세 장이 몸 위로 덮혀 있었다.

44호는 천천히 몸을 뒤집으며 무릎을 눈밭 위로 딛었다. 하얀 살결이 발갛게 달아오르며 열꽃이 피었다. 주변의 눈들은 피 같은 붉은색이었다. 한 줌 집어 손바닥 안에서 녹였다. 쇠 냄새가 났다.

이게 무슨 일이지? 누구 피가 이렇게 흥건한 거야? 44호나 67호 피는 아니겠지?

44호는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오랜 시간 깁스를 하고 있던 환자처럼 다리가 휘청거렸다. 눈밭에 무릎을 꿇었다.

힘이 안 들어가. 다리가 잘려나간 거 같아. 왜, 왜 이러지. 안 돼. 싸움은 아직 안 끝났어.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던 권능감의 상실은 지독했다. 주먹을 말아 쥐고, 허리에 힘을 주며 단숨에 몸을 일으켰다. 섰다, 고 느낀 순간 다시 엉덩방아를 찧었다.

일어나지 못하는 거야? 하반신 마비인가? 아니야. 오른쪽 다리는 움직여. 왼쪽 다리가 문제야.

옷을 들어 골반과 옆구리를 살폈다. 새하얀 성에꽃이 왼쪽 옆구리 전체를 뒤덮고 있었다. 위로는 심장 아래까지, 아래로는 골반 아래까지.

새삼스래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다. 폐부에서 이물감이 느껴졌다.


등 뒤에서 조명탄이 솟았다. 붉은 빛이 대지를 환하게 비췄다. 친구와 애인이 눈에 들어왔다.


친구는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산 중턱에서 벼락불의 색이 보였다. 위로 올라오려는 거대한 골렘들의 무릎을 부수고 골반을 무너뜨리고 있었다.


안 돼. 67호의 전류 공격은 골렘 같은 놈들하고 상성이 안 맞아. 핵을 공격 못 하면 계속 스스로를 수복할 거야.

본능이 위기를 알렸다. 67호는 산 중턱의 전선을 유지하고 있었다. 후방으로 빠졌다가 휴식을 취하고 다시 공격하는 방식을 취하지 않는지는 너무나도 명백했다.

나 때문이야, 44호는 손바닥에 피가 나도록 주먹을 말아 주었다.


다음으로 눈에 들어온 건 애인이었다. 참 신기하게도, 수백 미터 밖에서도 곧바로 찾을 수 있었다. 분명 눈밭의 검은 점처럼 보이는 거리인데도, 이목구비까지 선명했다.

기사 다섯, 그리고 한 눈에 봐도 위험해보이는 인간형 몬스터를 상대로 검을 겨루고 있었다.


곧 죽을 거야. 누군가가 귓가에 속삭였다.


“중력제어.”


걷지 못한다면 날아서라도 가겠어.


하지만 마나는 의지를 따르지 않았다. 그제야 몸 속에서 발광하는 수많은 이물감이 느껴졌다. 역병처럼 번지는 성에, 이글거림을 품고 잠든 붉은 정수, 거의 남아있지 않은 푸른 마나, 붉은 정수와 섞이지 않으려 드는 옅은 하늘색의 정수, 그리고 뒤죽박죽이 된 속을 어떻게든 꿰메어 굴러가도록 해 놓은 황금빛 마나.

67호의 것이라 곧바로 알아챌 수 있었다. 이미 섬에서 비슷한 온기를 받은 적이 있었으니까.


거의 눈에 뒤덮힌 기사검 조각. 흐릿하던 기억이 수면으로 떠올랐다. 어떻게 잊고 있었나 의심될 정도로 부드럽고 자연스럽게.


으윽, 하고 신음성을 내며 44호는 한쪽 무릎을 꿇었다. 성에꽃이 하얗게 빛나며 주변을 잠식해 갔다. 살을 얼리고 피를 굳히고 마나를 빼앗았다. 불타는 듯한 고통은 없었다. 시린 감각과 함께 천천히 옅어지는 의식을 한 발 물러나 자각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런 스킬, 그런 주술이었다.

이 일이 미르한에게도 동시에 일어나고 있다는 걸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고은유의 정수를 받아드려야 했다. 용광로처럼 뜨겁고 산불처럼 이글거리던 정수로 이끈 마나만이 이 성에꽃을 억누를 수 있었다.


할 수 없을 거야. 덜컥 두려움이 몰려와, 안 그래도 색색거리던 숨이 불규칙해졌다. 눈을 감아 버리고 싶었다. 눈 속에 얼굴을 파묻고 열까지 세고 나면 모든 게 끝나 있기를.


하지만 44호는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힘없이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누군가에게 떠밀려 움직이는 것 같았다. 남아있던 한 점 조명탄 불빛이 얼굴을 비췄다. 눈물이 아른거렸다.


“차라리 그렇게 믿을 수 있었으면 했어. 열까지 세고 모든 게 끝나있기를 바라다 죽고 싶어.”


난 세상에 희망이 없다는 걸 한 살 때 알았지.

글러먹었더라도 어른이 될 수만 있다면 후배들에게 으스대며 말해주리라.

좌절에 세상은 어떤 답도 해주지 않는다. 머리를 쓰다듬어 주지도 않지만, 차갑게 외면해버리지도 않는다.

그렇게,

상상 이상의 고통을 끌어안는다면 벗어날 수 있었을 거라는 희망을 자꾸 준다.

“아주 개새끼들이야.”

포기할 수도 없게 만드는 이 세상. 포기하지 않을 거라고 알아버린 몸. 10분 뒤에 조금만 더 일찍 시작할걸 하고 투덜거리는 미래가 너무 휜하다. 피터지게 싸우는 연인을 두고 죽음으로 도망쳐버릴 만큼 비겁한 여자는 되지 않았다.


마나를 움직여 붉은 정수를 긴 실처럼 뽑아냈다. 일단 흩어놓는 게 먼저였다.


저 멀리서 43호가 중력도검을 휘두르는 게 보였다. 기사검을 아슬아슬하게 피하고 막아낼 때마다 심장이 꾹꾹 조여왔다.

절박함과 두려움을 용기로 바꿀 수 있기를 바래. 네가 그러고 있는 것처럼 말이야.


43호가 중력도검을 머리 위로 붕붕 휘두른다. 보통 칼을 그렇게 휘둘러 봐야 종이도 제대로 못 자르겠지만, 43호가 휘두르는 칼은 스쳐도 팔다리가 떨어져 나갈 무게의 대검이었다.


기사검을 최대한 앞으로 뻗어도, 중력도검의 반경 밖에서는 43호의 몸에 닿지 않았다. 유효타를 입히려면 머리가 부서질 걸 각오하고 치고 들어가야 한다는 말이다.


갑옷뿐인 기사는 두려움을 몰랐다. 기사검 손잡이와 한쪽 팔을 내주고 칼날로 43호의 옆구리를 찌를 생각이었다.


뻑! 갑옷 옆구리가 철퇴에 맞은 것처럼 찌그러지고 우그러졌다. 알루미늄 호일처럼 찢어진 갑옷 틈에서 창백한 증기가 무럭무럭 피어올랐다.


“비켜라.”


겨울 후작이 창을 들어올리며 뛰어 올랐다. 기사들이 좌우로 비켜서며 길을 열었다. 얼음창 정도의 길이라면 중력도검의 반경 밖에서도 유효타를 넣을 수 있었다.


43호가 움찔거리며 방어 태세를 취하는 사이, 겨울 후작은 43호의 머리를 위를 가볍게 뛰어넘고 미르한을 향해 달렸다. 아차 하는 43호를 슬쩍 뒤돌아보며 비웃았다. 미르한은 무기질적인 아름다움을 품고, 대리석 조각상 같이 굳어가고 있었다.

겨울 후작은 창을 붕붕 돌리며 돌진했다. 애당초 한 번에 두 놈을 상대하려고 했던 게 잘못이었다. 저 괴물이 어떤 변수를 만들어낼지 몰랐다. 성에꽃에 온 몸을 파먹히면서도 겨울을 불러오는 대마법을 억누르고 있다. 지금 죽이지 못한다면 다시는 죽이지 못할지도 모르겠다는, 그런 근거 없는 불안감이 들었다.


“이 세계 제일의 귀족이여-”

나를 원망하지 말거라.


저 어린놈이 둘러 놓은 방벽 따위야 일격에 부셔버릴 수 있었다. 성에 낀 창날이 번뜩였다. 서늘한 오러가 줄기줄기 피어오르고, 콘크리트 벙커라도 일격에 뚫어버릴 찌르기가 쏘아져 나갔다.

육각미늘방패 조각이 깨져 나갔다. 단 한 조각만.


“무슨!”

온 방패가 와르르 무너지는 일은 없었다.


“그거, 방어 스킬 같은 게 아니야. 작은 미늘 하나하나를 모아둔 거야. 하나 깬다고 전부 와창장 부서져나가지 않는다고. 열심히 부수고 있어. 내가 곧 갈 거니까.”


경질화시킨 정강이로 하반신을 노리는 기사검을 막아내고, 검은색 대검으로 두 자루의 기사검을 흘려냈다. 경질화시킨 왼손과 위에 덧댄 역장 방패로 또 한 자루의 기사검을 쳐냈다.


43호가 요란한 기합을 넣으며 역장 대검을 휘둘렀다. 기사검들이 튕겨져 나가고 갑옷뿐인 기사들이 비틀비틀 물러났다.


“기다려.”


그 짧은 틈 사이에 43호는 하반신을 노리던 기사검을 짖밟았다. 손잡이를 쥐려 몸을 던진 기사가 아차 하며 몸을 뒤틀었다. 이미 기사의 머리 위로 새까만 대검이 떨어지고 있었다.


쩍, 중력도검이 투구부터 흉갑까지 떨어졌다. 반으로 벌어지는 갑옷 사이에서 창백한 연기가 무럭무럭 피어올랐다.


촤악! 기사 한 기가 움직이고, 파란 피가 방울방울 떨어졌다. 푸른 마나는 금세 대기 중으로 녹아들고, 눈밭은 붉은색으로 물들었다.


43호는 신음성을 내며 허리견을 집었다. 생각보다 깊었다. 성에꽃이 피고 있었다.


“그래. 나도, 너희도 시간이 없네.”


기사가 세 기 남았다. 43호는 몸무게를 가볍게 하고 돌진했다.


그 모습을 눈에 담으며, 겨울 후작은 생각했다.

내가 너무 여유롭게 살았어.

악마를 일격에 제압할 수는 있었지만, 이 세계의 귀족들 역시 그 정도 힘은 충분했다. 단지 그들에게는 아직 악마가 오지 않았고, 악마가 다루는 힘을 다루는 법을 몰랐을 뿐이다.

그들이 악마가 되어 다른 세상을 침공할 수도 있다는-예를 들어 눈앞의 사내가 푸른 열선을 쏴대며 쳐들어오는-생각을 하자 저도 모르게 이가 떨렸다.

새로 가신들을 들이고, 더 많은 기사를 키워내리라.

그런 다짐을 하며 수십 겹 육각미늘방패를 착실하게 깍아냈다. 반투명한 미늘 너머로 사내가 보였다. 착실하게 번지는 성에에 온 몸을 갉아먹히며, 이 모든 광경을 관조하고 있었다. 눈이 보였다. 가라앉아 있었지만, 포기한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내가 같잖다는 거냐!”


창을 휘두르는 손짓이 빨라졌다. 돌려 배고, 찌르고, 창대로 치고, 찍었다. 비록 마법계로 활동했다고는 하나, A급 최상위 마족이다. 마력 하나 제대로 운용할 줄도 모르는 신출내기가 둘려 놓은 결계 따위야 일격에 부셔버릴 수 있었다. 문제는 그 일격을 천 번쯤 내질러야 한다는 것이었다.


“내가...하늘섬에서 배운 게 있거든. 수가 많으면 그것만으로도 전략이 돼.”


무려 A급 헌터 다섯의 발을 묶어둘 수 있었지.


잠시 그 끔찍하던 흡혈귀 무리들을 회상했다.

43호의 몰꼴은 참혹했다. 안 그래도 하늘섬에서 나올 때부터 여기저기 망가져 있던 전투복은 더 이상 전투복이라고 말할 수도 없었다. 금속 플레이트가 다 깨져나가고 질긴 인조가죽도 걸래짝이 되어 눈보라에 깎여나갔다. 빰을 타고 길게 그어진 상처를 따라 성에꽃이 번졌다. 이미 볼 근육을 상당히 잡아먹었다. 입술이 비릿하게 말려 올라갔다.


후우, 후우, 43호가 거칠게 숨을 내쉬었다. 등허리를 따라 난 상처는 굳이 성에꽃 저주가 아니더라도 중상이었다. 왼팔은 무슨 통나무에 칼집을 낸 달력이라도 되는 것 같았다. 경질화한 피부가 처참하게 깨져 있었다.


천천히 왼손을 움직여, 오른쪽 허벅지를 반쯤 잘라낸 기사검을 뽑아냈다. 압축가스통이 터진 것처럼 피가 튀었다. 순식간에 핏방울들이 얼어붙고, 성에꽃이 허벅지를 뒤덮었다.


한 발 내딛으려는 순간 그대로 넘어질 뻔했다. 마비라도 온 것 같았다. 이건 답이 없었다.

평소였다면 금방 붙었을 거다. 마력량 604짜리 D급 최하위 헌터였을 때도 어지간한 부상은 하룻밤 자면 다 나았다. 하물며 지금은 A급 헌터다. 피를 타고 흐르는 짙은 마나가 어마어마한 자체 회복력을 선물한다.

지금 그 짙은 마나를 연료 삼아 성에꽃이 번져가고 있었다.


“경질화.”

허벅지 절반 가량이 수정질로 변했다. 끔찍하게 손을 뻗던 성에꽃들이 수정체 안에 갇혀 사그라들었다.

하필이면 땅을 박차며 가속할 때 쓰는 근육이 잘려 나갔다. 떨어지지는 않게 굳혀 놓았지만, 당연히 움직이지 않는다. 이제 기동성은 거의 상실했다고 봐도 되겠지.


피와 꽃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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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7 118화. 레플리카 헌터는 많은 것을 바라지 않는다. FIN. +1 21.06.03 31 2 13쪽
116 117화 +1 21.06.02 27 2 13쪽
115 116화 +1 21.06.01 25 2 12쪽
» 115화 피와 꽃 Fin. +1 21.05.31 31 2 12쪽
113 113화 +1 21.05.28 25 2 12쪽
112 112화 +1 21.05.27 31 2 12쪽
111 111화 +1 21.05.26 30 2 12쪽
110 110화 +1 21.05.25 28 2 12쪽
109 109화 재시험 Fin. +1 21.05.24 26 2 12쪽
108 108화 +1 21.05.21 37 2 12쪽
107 107화 +1 21.05.20 40 2 12쪽
106 106화 +1 21.05.19 44 2 12쪽
105 105화 +1 21.05.18 29 2 12쪽
104 104화 선물 Fin. +1 21.05.17 37 2 13쪽
103 103화 +1 21.05.14 25 2 12쪽
102 102화 +1 21.05.13 34 2 12쪽
101 101화 +1 21.05.12 31 2 12쪽
100 100화 +1 21.05.11 37 2 12쪽
99 99화 +1 21.05.10 26 2 12쪽
98 98화 +1 21.05.07 40 3 12쪽
97 97화 +1 21.05.06 37 3 12쪽
96 96화. 짧은 밤 fin. +1 21.05.05 37 2 12쪽
95 95화 +1 21.05.04 34 3 12쪽
94 94화 +1 21.05.03 35 3 12쪽
93 93화. 중력도검 Fin. +1 21.04.30 36 3 12쪽
92 92화 +1 21.04.29 41 3 12쪽
91 91화 +1 21.04.28 35 2 12쪽
90 90화 +1 21.04.27 45 3 12쪽
89 89화 +1 21.04.26 34 3 12쪽
88 88화 +1 21.04.23 40 3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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