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훼룡 님의 서재입니다.

레플리카 헌터는 많은 것을 바라지 않는다.

웹소설 > 일반연재 > 현대판타지, 판타지

훼룡
작품등록일 :
2020.12.29 11:21
최근연재일 :
2021.06.03 19:00
연재수 :
117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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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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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636,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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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5.28 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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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쪽

113화

DUMMY

레플리카 헌터는

많은 것을 바라지 않는다


113화


격렬한 반발음이 튀고, 미르한은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어떤 술식을 새겨둔 건지, 도저히 모르겠네.”

반동으로 반쯤 구겨진 오른손. 손목 뼈가 살을 찢고 나왔다. 손에서 튕겨나간 사이드소드가 뱅글뱅글 돌며 날아가더니 툭 떨어졌다. 눈밭에 박히지도 않고 맥없이 쓰러졌다.


“한 번에 이 코트를 찢어버릴 줄이야.”

겨울 후작은 놀라움을 표하며 넝마가 된 코트를 벗어던졌다.


“익숙하지도 않은 검술로 긍지를 표하느라 고생했네. 아마 자네가 평소에 검을 갈고 닦았다면, 혹은 오늘 저주에 당하지 않았더라면 누가 쓰러졌을지는 모르겠어.”


“저주를 걸어 놓고 안타까운 척 하지 말게나. 울면서 하든 웃으면서 하든 결국 같은 일이야. 그리고 누가, 가 아니라 네가 쓰러졌겠지. 여기서 살아 돌아간다면, 북한이고 외교고 나발이고 DMZ 전체에 게이트 탐지기를 심어 놓고 말겠어. DMZ 뿐이겠냐? 모든 무인도에도 다 설치할 거야.”


“독기 어린 각오와 성찰, 귀족의 덕목이로다.”


겨울 후작은 창을 거세게 잡아당겼다. 미르한이 겨드랑이에 끼워 놓았던 창날이 훽 돌아가며 뽑혀 나갔다. 가슴 근육과 겨드랑이 안쪽에서 피가 흘렀다. 짙은 마나가 섞여 푸르른 색이었다.


“날이 생각만큼 춥지 않군. 빙결점 아래 90도까지는 내려갔어야 하는데. 이 상황에서도 여력을 남겨두는 건가?”


“혼자 감당하고 있는 게 아니라서 말이야. 착각하지 말아 주겠나? 이 저주만 아니었다면 넌 이미 갈갈이 찢겨서 사방에 흩뿌려졌을 거야. 가죽을 벗겨서 방패에 씌우고 뼈를 갈아서 장신구를 만들었겠지.”


“머리 정도는 술잔으로 만들어도 좋겠지. 그 멋진 은발을 도려내야 한다는 게 아쉽지만, 어쩔 수 없을 것 같네.”


겨울 후작은 승기를 결정지으려 했다. 미르한의 얇은 셔츠 아래, 성에가 거의 목까지 뒤덮은 것이 보였다. 창을 단단히 쥐고 폐를 노렸다. 심장에는 어떤 주술이 걸려있을지 모르니.


길어지듯 자연스럽게 찔러 온 창을, 미르한은 옆으로 구르며 피했다. 눈이 온 몸에 덕지덕지 달라붙었다.


“바닥을 구르면서까지 생에 매달리는 건가? 고작 몇 초, 몇 분을 위해서 바닥을 기어?”


“그 몇 초만 있으면 살 수 있는데 바닥을 기지 못할 것도 없지.”


미르한은 푸른 안광을 뿜어내며 장난스래 웃었다. 안도감 어린 미소, 겨울 후작은 곧바로 주변을 경계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자신의 명령에 따라 사방으로 진군하는 거대한 골렘들뿐이었다. 이렇게 주위를 흐트려 놓고 기습하려는 건가, 하고 의심했다.


그때 43호는 하늘에서 뛰어 내렸다. 사람 몸뚱이 만한 검을 내려치며.

이건 미친 짓이라는 생각만이 머릿속에 가득했다. 하지만 그래도 미르한이 바로 옆에 있는데, 설마 내가 죽게 내버려 두지는 않을 거라고 되뇌었다. 맹세컨대 그가 저주 탓에 손발도 가누기 힘든 상황이라는 걸 알았더라면, 뛰어 내리기까지는 더 많은 용기와 절박함이 필요했을 거다.


쾅!


본능적으로 위험을 알아챈 겨울 후작은 미끄러지듯이 몸을 뒤로 던졌다. 창대라는 건 원래 대검의 일격을 받아내기 위한 무기가 아니었다. 그리고 땅에 자루까지 박혀든 대검을 보자, 직접 부딪혀서는 안 된다는 직감이 머릿속을 스쳤다.


“아주, 아주 무거운 검이군. 그대 역시 귀족이라 불려 부끄럽지 않은 실력이야. 하지만 나의 결투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네. 조금만 더 기다려 줄 수-”


“너 때문에 내 애인이 죽어가.”


“한낱 치기어린 감정에 긍지를 내던지는 건가?”


독수리처럼 푸른 눈동자. 긍지를 입에 담은 순간 눈동자에 감도는 선홍색 살기와 단호한 감정.


“사랑에 눈이 먼 사람이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 모르지?”


겨울 후작과 눈이 마주쳤다. 멋들어지게 내뱉은 대답에 야속하게도 다리가 부들부들 떨렸다.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진다. 싸우면 반드시 진다. 마지막 한 톨의 마나까지 전부 동원하고, 분노와 절박함과 불안과 두려움, 어떤 감정을 실어 검을 잡아도 결국 바닥에 눕는 건 내가 될 거다.


놈이 A급인지 S급인지는 모르겠다. 던전의 지배자가 게이트의 등급보다 더 높은 랭크를 자랑하는 건 딱히 드문 일도 아니라지.


중요한 건 뭐가 됐든 나보다는 강한 상대라는 거다. 온 힘을 쏟아낸다 해도 당해내지 못할 상대. 미르한을 챙겨 도망칠까? 하는 생각이 곧바로 뇌리를 스쳤다.


“어떻게 된 게 나는 늘 도망갈 생각부터 하냐?”


쓰게 웃었다. 어디로 도망친다는 말인가? 우리가 오늘 여기서 진다면 이 땅 전체가 저 골렘들의 발 아래 얼음으로 뒤덮힐 텐데.


“그대 역시 사랑을 알 텐데. 일신을 태우고 주변까지 불사르는, 저주스럽고 치열한 감정을.”


당장은 저 화법에 맞춰주도록 할까?


“모른다 하지 않겠네.”


“그럼 그대가 이해하게나. 긍지도 예법도 전부 잊어버린 가엾은 짐승을.”


말을 마치는 동시에 달려나가며 중력대검을 휘둘렀다. 겨울 후작은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성에 낀 창을 찔러드며 반격했다. 넓은 검면으로 창끝을 흘려내고 배려 했지만, 어느새 반대편에서 창대가 이마를 향해 날아왔다.


캉!


중력대검을 휘둘러 막았다. 당연하게도 창대는 가볍게 튕겨 나갔다. 저 창이 아무리 날카롭고 강한 냉기를 품고 있다 해도, 중량은 이쪽이 압도적이다.


하지만 창대를 쳐내자마자 또 반대쪽에서 창촉이 배어 들어왔다. 크로스가드도 없는 대검으로는 제대로 막아내지 못했다. 눈썹 위쪽으로 풀잎에 배인 것 같은 상처가 났다. 그것만으로도 주변이 얼어붙으며 성에꽃이 피었다.


검술을 제대로 배워본 적이 없다는 걸 새삼 실감했다. 교관들을 상대했을 때 우위를 접했던 것도 스펙의 힘이었다. 더 많은 마나로 더 강한 힘을 내며 싸웠다. 갑옷뿐인 기사를 때려부쉈을 때도 마찬가지다.

기술로는 상대도 되지 않았지. 쌓아올린 시간이 다르니까.


“미숙하군. 그런 대검을 다루기에는 기본기도 준비되지 않았어. 검을 만들 줄만 알고 휘두를 줄은 모르는 귀족이라니.”


겨울 후작은 유성처럼 떨어지는 중력도검을 날렵한 보법으로 피했다. 조급한 마음으로 휘두른 큰 휭배기를 창대로 흘려냈다. 날에 스친 창대가 불꽃을 내며 갈려 나갔지만, 겨울 후작은 가볍게 파고들어 내 가슴팍을 걷어찼다. 갈비뼈가 다 부러지는 줄 알았다.


쿨럭, 쿨럭, 대검에 몸을 기대고 기침을 토했다. 목구멍에 갈라질 것처럼 따가웠다.


겨울 후작이 창 끝을 겨누고 일갈했다.

“긍지 높은 귀족이라 생각했건만, 운 좋은 핏줄을 물려받았을 뿐인 풋내기였나? 실망이군. 죽여라.”

가만히 서 있던 갑옷 기사들이 움직였다.


“운이 좋은 핏줄이라.”


미르한을 잠시 바라보았다. 도와주지 않을까 생각하기도 했지만, 성에에 뒤덮혀가는 모습을 보고 그 생각은 완전히 접었다. 내가 그를 도와야 하는 상황이었다.


운이 좋다. 이상하리만큼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객관적으로 보면 운이 좋다고 할 수도 있을 거다. 아니, 마력 6백에서 8천까지 1년 만에 올랐다고 하면 운이 놓은 게 맞다.


“그런데 왜 이렇게 배알이 꼴리냐?”


시야 우상단을 눈짓하며 상태창을 펼쳤다. 오랫동안 쓰지 않은 스킬이라 없어지지 않았을까 걱정했지만, 제 자리에 남아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오른손에 전류를 모으고, 왼손에 열선을 쥐었다. 한 발의 열선에 수백의 마나를 때려 부었다. 최고급 발광석 같은 빛이 손아귀 안에서 뿜어져 나왔다.


쩡! 굵은 열선이 극달같이 쏘아져 나갔다. 네 기의 갑옷기사가 창백한 가스를 뿜어내며 주저앉았다.


“그래. 우리는 운이 좋지. 시발. 아직까지 살아 남았잖아.”


잔뜩 그러모았던 교란 전격을 해방했다. 새까만 전류가 체인처럼 뻗어 나가고, 세 기의 기사가 갑옷뿐인 몸을 뒤틀었다. 판금 사이에서 불꽃이 튀고, 떨어져나간 플레이트 사이에서 창백한 가스가 올라왔다.


마력이 시야 우상단에서 뚝뚝 떨어졌다. 44호나 67호라면 훨씬 더 효울적으로 같은 위력을 낼 수 있었겠지.


“가끔은 그런 생각을 해. 우리를 만들어내기 위해서 몇 명이 죽었을지. 배아 단계에서 페기된 애들만 해도 다섯 자릿수라는데, 몸 다 성장했지만 기억 삽입하고 못 일어난 애들도 수천 명은 된다는데, 얼굴 보고 살던 애들 백 명 중에서 살아남은 건 열댓 명도 안 되데-”

멀쩡히 살아서 숨 쉬는 것만 해도 얼마나 운이 좋은 일이냐? 제 목숨뿐만이 아니라 애인의 목숨까지 챙길 수 있는 건 또 얼마나 운이 좋은 일이냐? 너를 만들기 위해 죽어간 생명들을 생각하면,


“다 닥쳐.”


단호하게 상념을 끊어냈다. 흥분할 필요는 없다. 저 새끼에서 한 방 먹여주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스킬: 오러 블레이드. 중력도검에서 흑청색 오러가 남실거리며 타올랐다.


“스쳐도 배인다. 알지?”


발목에 힘을 주고 얼어붙은 눈밭을 박찼다. 사람 몸뚱이만한 대검을 휘두르며 겨울 후작을 몰아세운다. 흑청색 오러는 잔불처럼 타오르며 허공에 궤적을 남긴다.


“허점이 너무 많아.”


겨울 후작의 창 끝이 기묘한 궤적을 그린다. 큰 원을 그리며 아래쪽으로 파고든다. 대검 아래를 아슬아슬하게 스친 창끝.

올려 밴 대검을 겨울 후작이 뒤로 물러서며 피한다. 겨울 후작이 내려 밴 창날은 깔끔하게 허벅지 안쪽으로 파고든다. 많이 아프겠지. 저 창날에는 빙결의 저주가 걸려 있다. 베이는 순간 허벅지 대동맥이 꽁꽁 얼어버릴 거다.

카가강!


살과 창촉이 부딪혔다고는 믿기지 않을 소리가 났다. 경화된 살을 창촉이 파고들며 깎아냈다. 무른 수정을 강철 정으로 부수듯, 43호의 허벅지 조각이 눈밭에 떨어졌다. 하지만 피는 단 한 방울도 나지 않았다.


“경질화한 부분은 못 얼리나 보네?”


43호는 창대를 짓밟아 부러트리며 뛰어 올랐다. 육각미늘방패 조각을 밟고 하늘을 달리던 몸이다. 불안한 발판을 딛고 확실한 결과를 내놓는 대에 익숙했다.


“이 놈!”


처음으로 겨울 후작의 눈에 두려움이 스쳤다. 놀라운 보법으로 몸을 날렸지만, 중력대검은 셔츠를 찢어내며 어깨 살덩이를 깊게 파해쳤다.


“조금만 더 깊었으면 쇄골까지 자르는 건데.”


눈동자에 파란 핏발이 솟았다. 마나의 빛이 실핏줄에까지 미치며 점멸했다. 이름을 말하지 않은 A급 헌터가 해줬던 말을 기억한다. 내 검은 중량이요, 과감하게 나서야 한다고 했었지.


“쫄지 마.”


저에게 한 말로 받아드렸나? 겨울 후작이 기사에게 새 창을 받아들며 인상을 찌푸렸다.


“고통스럽게 죽여주리라 약속하마. 네 살갗은 얼고 녹기를 반복하며 천천히 썩어 문드러질 거다.”


“네가 내 앞에서 고통을 논해? 넌 고통을 몰라. 난 태어날 때부터 이 나라 정상급 권력자를 적대하는 피가 흘렀다고.”

오만하게 손짓하며 대검을 치켜올렸다. 말을 들을 미르한이 씁쓸하게 웃는다. 놈의 이마에 핏줄이 솟는다. 왼쪽 어깨에서 피가 흐른다. 붉은 피가 셔츠를 적시고, 그 위로 마나의 푸른 빛이 보석 가루처럼 반짝인다. 얼음 결정들이 상쳐에서 우후죽순으로 자라나고, 떨어져 나간다. 말끔한 피부가 찢어진 옷 사이에서 반들거린다.


“생긴 건 우리하고 비슷하게 생겼는데, 역시 괴물이구나.”


괴물이라는 게 뭐 별 거 있나? 말이 안 통하는 위협적인 존재가 우리를 적대시하면 그게 괴물이지. 하지만 내 말은 긍지 높은 귀족에게는 다르게 받아드려졌나 보다.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눈빛으로 창을 겨누었으니까.

이왕 이렇게 된 거, 도발이나 더 해야겠네.


“오늘 괴물을 죽이고 영웅이 되야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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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7 118화. 레플리카 헌터는 많은 것을 바라지 않는다. FIN. +1 21.06.03 31 2 13쪽
116 117화 +1 21.06.02 27 2 13쪽
115 116화 +1 21.06.01 25 2 12쪽
114 115화 피와 꽃 Fin. +1 21.05.31 31 2 12쪽
» 113화 +1 21.05.28 26 2 12쪽
112 112화 +1 21.05.27 31 2 12쪽
111 111화 +1 21.05.26 30 2 12쪽
110 110화 +1 21.05.25 28 2 12쪽
109 109화 재시험 Fin. +1 21.05.24 26 2 12쪽
108 108화 +1 21.05.21 37 2 12쪽
107 107화 +1 21.05.20 40 2 12쪽
106 106화 +1 21.05.19 44 2 12쪽
105 105화 +1 21.05.18 29 2 12쪽
104 104화 선물 Fin. +1 21.05.17 38 2 13쪽
103 103화 +1 21.05.14 26 2 12쪽
102 102화 +1 21.05.13 34 2 12쪽
101 101화 +1 21.05.12 31 2 12쪽
100 100화 +1 21.05.11 37 2 12쪽
99 99화 +1 21.05.10 26 2 12쪽
98 98화 +1 21.05.07 41 3 12쪽
97 97화 +1 21.05.06 37 3 12쪽
96 96화. 짧은 밤 fin. +1 21.05.05 37 2 12쪽
95 95화 +1 21.05.04 34 3 12쪽
94 94화 +1 21.05.03 35 3 12쪽
93 93화. 중력도검 Fin. +1 21.04.30 36 3 12쪽
92 92화 +1 21.04.29 41 3 12쪽
91 91화 +1 21.04.28 35 2 12쪽
90 90화 +1 21.04.27 45 3 12쪽
89 89화 +1 21.04.26 34 3 12쪽
88 88화 +1 21.04.23 40 3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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