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훼룡 님의 서재입니다.

레플리카 헌터는 많은 것을 바라지 않는다.

웹소설 > 일반연재 > 현대판타지, 판타지

훼룡
작품등록일 :
2020.12.29 11:21
최근연재일 :
2021.06.03 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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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6.03 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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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8화. 레플리카 헌터는 많은 것을 바라지 않는다. FIN.

DUMMY

레플리카 헌터는

많은 것을 바라지 않는다


118화


그 날은 유난히 화창했다. 회색 매연 가득하던 서울 하늘이 마나의 색처럼 새파랗게 물들고, 새털 구름이 옅은 선들을 그었다.


TV만 키면 DMZ 게이트 뉴스가 흘러나왔다. 눈 덮힌 설원에서 얼음 골렘들의 마석을 회수하는 E~C급 헌터들의 사진과 영상이 세계를 달궜다. 말 그대로 빌딩만 한 얼음 골렘들의 사체가 카메라를 타고 온 세상으로 퍼져나갔다.

단정하게 머리를 묶은 아나운서가 하마터면 나라가 망할 뻔했다는 자극적인 내용의 원고를 감정 실은 목소리로 읽어 내렸다. 초토화된 인근 마을과 군부대 사진이 여기저기에서 올라왔고, 수십 가지 SNS와 찌라시 언론사를 타고 널리널리 퍼졌다.

거대한 고드름 달린 처마 사진들, 하루만에 어른 키의 두 배가 넘게 쌓인 눈, 도망가지도 못하고 얼어 죽은 사람들 사진이 인터넷에 나돌았다.


그때쯤 DMZ 내부에 출몰하는 게이트를 북한과 공동으로 관리하기 위한 기관을 신설한다는 발표가 청와대에서 나왔다. 북한의 국무위원장이 게이트의 군주를 척결한 대한민국의 헌터들에게 감사를 표하는 글도 함께.


온갖 커뮤니티마다 헌터들과 마수들이 화재로 떠올랐다. 찬사와 동경, 그리고 그들이 수호해주는 나라에 있다는 으쓱한 감정에 취해 손가락을 놀렸다.

모두를 구해내지는 못했지만, 17년은 그게 불가능하다는 걸 깨달게 하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헌터들의 대처를 비난하는, 혹은 일말의 의심이라도 품는 글은 올라오지도 못했다.


헌터들의 영웅적인 활약은 입과 글을 타고 번졌다. 누가 몇 마리의 얼음 골렘을 잡았다더라, 에 살이 붙고 붙으며 영웅들이 만들어졌다.


사무실에서, 현장에서, 학교에서 “너 그거 봤냐?” 하며 옆 사람들과 한 마디씩 나눌 이야기거리가 되었다.


이서윤은 그 모든 찬사와 떠받드는 시선으로부터 등을 돌린 체 블루문 길드의 본사 최상층 펜트하우스 안으로 숨어들었다.


이번 게이트 브레이크 사건은 몇몇의 영웅을 만들어 냈다. B급 헌터로 각성한 모 아이돌 멤버의 첫 실전이었다. 수십 마리의 얼음 골렘을 죽였다는 기사와, 얼어죽은 사람들을 보고 눈물 흘리는 사진이 커뮤니티 사이트들을 뜨겁게 달궜다.


사람들은 늘 새로운 영웅을 필요로 했다. 미르한이 게이트를 닫았고, 고효산이 100미터급 얼음 골렘을 쓰러트렸다는 소식보다, 모 아이돌 출신 B급 헌터가 몇 마리의 얼음 골렘을 잡았는지가 더 화재가 되었다. 그리고 미르한도 이서윤도 그걸 당연하게 생각했다. 홍보의 기회는 때때로 생각지도 않게 찾아왔다. 아이돌의 팬들이 활약상을 알아서 세계로 퍼날라주고 있다. 물이 들어올 때 노를 저어야 했다. 강시우의 공갈 협박이 어쩌고 하는 기사를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묻어버릴 좋은 기회였다.


서윤은 본사 앞에서 몇 시간째 진행중인 기자회견을 내려다보았다. 회견장에 몰려온 팬들이 노래를 불렀다. 아까아래에서 하도 많이 들었더니 아직도 귓가에서 맴돌았다.

“헤르메스. 비서실에 연락 보내서 미르한 님하고 이번에 활약한 신입한테 뜨거운 라떼라도 한 잔 타줘. 기자들이랑 저 팬들에게도 아메리카노 한 잔씩 돌리고. 미르한 님은 커피 말고 녹차라떼로. 그걸 더 좋아하시거든. 그리고 유리창 투광도 좀 올려줄래? 얘들도 슬슬 일어나야 할 거 같은데.”


곧 봄이 오고 눈이 녹겠지. 얼음 골렘의 시체도 같이. 그럼 이 사건은 과거가 되고, 사람들은 과거를 쉽게 잊지.

그저께 아무도 모르던 E급 헌터 세 명이 재각성해서 A급 헌터가 되었어. 이상하게 그 세 명의 E급 헌터는 가족도 친척도 없는 천애고아라지. 하지만 아무도 의아해하지는 않지. 던전 안에서는 어떤 일이든 일어날 수 있으니까. 재각성은 놀라운 일이지만, 아이돌 헌터의 활약만큼 흥미진진하지는 않으니까.


어두침침한 창가에 침대 세 개가 놓여 있었다. 한 개는 비어 있었고, 두 개는 차 있었다. 평소에는 없던 침대였다.


서윤의 등 뒤로 비서들이 또각또각 달라붙었다. 진홍색 머리카락을 양 갈래로 올려 묶었다. 한번 빙그르 돌며 전신거울을 보았다.

캐주얼한 세로줄 정장에 은장 금속 버클 벨트를 찬 소녀가 있었다.

“벨트 금장으로 바꾸자. 그쪽이 어울릴 거 같아. 내 배지 가져오고.”


새 벨트를 차고 배지를 달고, 헤르메스가 적당한 타이밍에 유리창 투광도를 올렸다. 5% 수준이던 투광율이 80%까지 올랐다. 눈부신 햇볕이 쏟아졌다.

따로 등은 켜지 않았다. 좀 더 고요하고 정적어린 분위기를 연출할 수 있도록.


“일어났어?”


서윤은 단조롭게 물었다.


***


눈이 부셨다. 춥지 않았다. 뺨과 어깨견에 부드러운 천이 스쳤다. 눈밭에서 죽어가며 환각을 느끼고 있는 건 아니겠지? 간신히 확신하기까지는 1분 정도가 걸렸다.


43호가 천천히 상체를 일으켰다. 침대헤드에 등을 기대고 앉아 넓은 이불을 들췄다.

혹시 다리가 잘려나가지는 않았겠지? 아무리 재생력이 좋은 헌터라도 신체 결손은 어떻게 못 하는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허벅지에는 생체기 하나 남아있지 않았다. 척추뼈가 드러날 정도로 파였던 등허리도, 말 그대로 칼이 꽂혔던 배에도 아무 이상이 없었다.

손가락이랑 발가락 한 두 개 없는 정도는 각오했는데, 이렇게까지 멀끔하니 허탈할 정도였다.


“아. 감사합니다.”


서윤의 비서가 건네 준 머리끈으로 머리를 넘겨 묶고, 천천히 침대에서 내려왔다.


푸른 무늬가 들어간 대리석 기둥과 짙은 적갈색 원목 벽이 대비되었다. 남회색 타일을 바닥에 깔아 서늘하고 정적인 분위기를 냈다. 어쩐지 시선이 편해서 주변을 둘러보다가, 층고가 무척 높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아름다운 곳이었다. 탁 트인 창 너머로 온 서울이 내려다보였다.


“친구들 일어나면 마저 이야기할까? 과일 한두 조각 먹고 있어.”


테이블은 엄청나게 거대한 티라미슈 케익 같았다. 알 하나가 어지간한 귤보다 굵은 청포도, 육질이 단단한 열대수박, 만지면 녹아내릴 것 같은 망고, 얇게 썰린 풋익은 단감이 낮고 긴 접시들에 줄줄이 놓여 있었다.


“감은 약간 덜익은 걸 좋아하시나 봐요?”

“입맛에 안 맡니?”

“아니요. 오히려 좋아요. 물이 많이 나오고, 살짝 떫은 뒷맛이 깔끔하잖아요.”

“미르한 님하고 똑같이 말하네.”

“...”

“그런 표정 짓지 마. 맛있으면 맛있는 거야.”

67호가 밝은 금발을 우수수 휘넘기며 옆에 털썩 앉았다. 포크가 있는데도 굳이 맨손으로 네모나게 썰린 수박을 집어 한 입 깨물었다.


43호가 그래, 하며 쓰게 웃었다.

음식 취향이야 어쩌다 보면 맞을 수도 있는 거지.


“44호는 어디에 있습니까?”


서윤은 대답하지 않았다. 43호는 자리에서 일어서려 했다. 67호가 팔을 붙들었다.

“앉아.”

“이러지 마.”

“앉아!”

평소에도 딱히 입이 고운 편은 아니었지만 유독 심란한 반응이었다. 서윤의 앞이 아니라면 이미 욕을 퍼부었을 것 같았다.

67호가 서윤의 눈치를 살피며 테이블 밑으로 손을 넣었다. 43호의 무릎에 손가락으로 글씨를 썼다.


시험. 통제. 너. 은유. 약속. 지불. 대리. 가치. 평가.


43호는 순한 양처럼 눈을 내려깔았다. 목소리를 죽이고 시키는 대로 과일을 씹었다. 맛있었다. 이서윤이 만족스럽게 웃으며 다가와 커다란 포도알 하나를 씹었다. 문득 손에 눈이 갔다. 손톱이 검게 물들어 번들거렸다.


마지막 시험이었다. 블루문 길드와 콘체른 길드 간에 협상이 일어나고 있었다. 이서윤이 여기 있는 걸 보면 주체는 고효산과 미르한이겠지. 아니면 실무자 선에서 해결되거나.


나는 고은유와 계약을 했다. 정수를 넘겨받는 대신 3년간 콘체른 길드에서 일하겠다고. 44호는 결국 정수를 받아드리는 데 성공했다.

이제 내가 계약을 이행할 차레다.


그런데 변수 하나가 더 들어왔지. 미르한은 우리 셋이 같이 있게 해달라는 내 부탁에 그래, 라고 대답했다.


미르한이 우리 셋을 한데 모아서 쓰는 게 좋다고 판단한다면, 내가 지불해야 할 것만큼의 가치를 대신 지불하겠지. 반대로 우리 셋을 한데 모아 쓰는 것에 별 미련이 없다면, 혹은 3년 정도야 기다릴 수 있다고 한다면 흔쾌히 나를 넘겨줄 거다.

같이 있게 해달라는 약속? 무사히 다시 데려와 주기만 해도 감사해야 할 판이다.


“43호.”

67호가 씹던 과일을 꿀꺽 삼키고, 포도알로 손을 뻗으며 말을 걸었다. 서윤이 슬며시 한숨을 내쉬었다. 얘가 또 무슨 소리를 하려고, 같은 눈빛이었다.


“3년. 이제 고작 1년 살았는데, 3년이라고?”


천 년 같은 1년을 산 우리에게 3년은 무척이나 긴 세월로 다가왔다. 보통 1년 사이에 천 번쯤 죽을 뻔하지는 않거든. 기억과 충격에 무게를 잴 수 있다면, 보통 사람의 10년보다 무겁겠지.


“67호. 걱정 마. 설마 죽이기야 하겠냐? 금방 끝날 거야. 그럼 우리 인생도 좀 피겠지. 게이트 공략 없는 날에는 맛집이랑 디저트 카페도 돌아다녀. 술과 유흥에 젖어 살다 보면 그까이 3년-”

갑자기 목이 막혔다.

3년. 어떻게 살아서 돌아왔는데 또 떨어져야 하다니.

괜찮아. 내가 선택한 거잖아. 잘한 선택이었어. 다른 방법이 없었어. 지금까지 잘 했잖아. 앞으로도 잘할 수 있을 거야.


뭐라도 더 말하려던 67호는 고개를 푹 숙였다. 시발, 하는 중얼거림을 들은 것 같았다.


이서윤의 스마트폰이 알림음을 토했다. 그래. 올라와서 보고해, 하고 서윤이 답했다.

과일로 향하던 손이 저절로 멎었다. 눈이 현관 쪽에서 떨어지지가 않았다.매탈릭 컬러의 현관문에 선홍색 선들이 빛나고, 미르한이 성큼성큼 걸어 들어왔다.

“오셨습니까? 기자회견은?”

서윤이 주인을 마중 나간 도마뱀처럼 고개를 살포시 숙였다. 비서들이 그림자처럼 다가가 미르한의 정장 상의를 넘겨받았다.

“일혼이에게 넘겨주고 왔어. 무공훈장 수여는 내가 했고, 상장 수여는 시우가 할 거야. 이참에 세탁 끝내려고.”


그윽한 눈매와 마른 손, 단추 두 개 푼 큰 셔츠와 가슴골 사이로 엿보이는 마른 근육.


“서비스이십니까? 그렇게 입고 다니지 말라고 제가 몇 번이나-”

“뭐 어때? 홈마들이 우리 실드 얼마나 잘 쳐주는지 알잖아. 뭐해. 들어와. 애들 얼굴 안 볼 거야?”


현관 너머서 반짝반짝한 은발과 선홍색 적발이 뒤섞인 머리칼이 왔다갔다했다.


어, 어, 하면서도 너무 기대하면 실망할까 봐 무서웠다. 눈을 감았다. 먼저 다가와주기를 기다리면서. 내가 다가가면 부서질까 봐 무서워서.

“43호.”

손이 어깨 위로 올라왔다. 모양도 무게도 너무나 익숙했다. 그제서야 눈을 뜰 용기가 났다. 정수리 견은 은색이었고, 아래쪽으로 내려갈수록 짙은 선홍색 그라데이션이 들어가 있었다. 눈동자 색은 변하지 않았다.

“어떻게...됐어.”

나는 기다릴 수 있을 거야. 너도 그럴 수 있기를 바래.


네가 말해, 하며 미르한이 44호에게 눈짓했다.


“미르한이 사로잡은 겨울 후작을 콘체른 길드에 3년간 대여하기로 했어.”

“그럼...!”


“그럼, 은 무슨! 근로계약서 쓸 준비나 해. 너희 셋 다 개처럼 부려먹을 거니까.”


퉁명스럽게 말하는 원형의 목소리는 아련히 스쳐 갈 뿐이었다. 그저 지금 이 자리에 우리만이 무게와 색체를 가졌다.

67호가 긴장 풀린 한숨을 내쉬며 의자 등받이에 몸을 묻었다. 44호는 싱긋 웃으며 43호의 옆자리에 앉았다. 43호는 고이려 하는 눈물을 털어내고 웃었다.

지금까지 많은 걸 바라지 않았습니다. 앞으로도 많은 걸 바라지 않겠습니다. 온 세상을 구해주겠냐으니, 최강의 헌터가 되겠느냐니 하는 소리는 입에 담지도 않을 테니까,

그저 이 따스한 시간과 관계를 이어가고 싶습니다.

그럴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 겁니다.


레플리카 헌터는 많은 것을 바라지 않는다.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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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6 117화 +1 21.06.02 27 2 13쪽
115 116화 +1 21.06.01 25 2 12쪽
114 115화 피와 꽃 Fin. +1 21.05.31 31 2 12쪽
113 113화 +1 21.05.28 26 2 12쪽
112 112화 +1 21.05.27 31 2 12쪽
111 111화 +1 21.05.26 31 2 12쪽
110 110화 +1 21.05.25 28 2 12쪽
109 109화 재시험 Fin. +1 21.05.24 26 2 12쪽
108 108화 +1 21.05.21 37 2 12쪽
107 107화 +1 21.05.20 41 2 12쪽
106 106화 +1 21.05.19 44 2 12쪽
105 105화 +1 21.05.18 30 2 12쪽
104 104화 선물 Fin. +1 21.05.17 38 2 13쪽
103 103화 +1 21.05.14 26 2 12쪽
102 102화 +1 21.05.13 34 2 12쪽
101 101화 +1 21.05.12 31 2 12쪽
100 100화 +1 21.05.11 37 2 12쪽
99 99화 +1 21.05.10 26 2 12쪽
98 98화 +1 21.05.07 41 3 12쪽
97 97화 +1 21.05.06 37 3 12쪽
96 96화. 짧은 밤 fin. +1 21.05.05 37 2 12쪽
95 95화 +1 21.05.04 34 3 12쪽
94 94화 +1 21.05.03 35 3 12쪽
93 93화. 중력도검 Fin. +1 21.04.30 36 3 12쪽
92 92화 +1 21.04.29 41 3 12쪽
91 91화 +1 21.04.28 35 2 12쪽
90 90화 +1 21.04.27 45 3 12쪽
89 89화 +1 21.04.26 35 3 12쪽
88 88화 +1 21.04.23 41 3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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