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훼룡 님의 서재입니다.

레플리카 헌터는 많은 것을 바라지 않는다.

웹소설 > 일반연재 > 현대판타지, 판타지

훼룡
작품등록일 :
2020.12.29 11:21
최근연재일 :
2021.06.03 19:00
연재수 :
117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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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8
글자수 :
636,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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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5.11 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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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쪽

100화

DUMMY

레플리카 헌터는

많은 것을 바라지 않는다


100화


고은유는 새침한 웃음 뒤로, 능구렁이 천 마리를 감췄다.

세상이 달라졌다. 검은 기름을 뽑아내 전차를 굴리고 전투기를 띄울 수 있는 나라는 더 이상 없다. 화학, 경공업, 제조업, 정치인들과 경제인들은 산업구조를 뼛속까지 갈아내야 했다. 그러지 못한 나라들은 내전과 쇠락의 길을 걸었다.

평화란 힘이 균등할 때만 지켜진다. 위협이 될지언정 경멸당해서는 안 된다. 100여 년전 핵무기의 위치가 오늘날 고위 헌터의 위치였다. 고위 헌터를 보유하지 못한 국가에게 외교력 따위는 없었다.

인위적인 각성 연구, 마도구 양산, 헌터 클론 제조, 어느 나라 어느 기관에서나 한 번은 건들어보았을 일들이다. 바다 건너 외국도 형제 같은 옆 길드 마스터도 다르지 않았다. 레드서클의 이한성은 아직도 포기하지 않았다지.


거창한 마음가짐으로, 모두가 실패해도 우리만은 다를 거라고 생각하며 귀중한 고위헌터에게 협력을 요구하고 피를 뽑았다.


‘나는 성공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 모두가 그랬듯이’

실험에 대해 아는 사람은 실무진들을 제외하면 친오빠이자 길드 마스터, 혈액 제공자인 고효산뿐이었다.

아쉽게도 실패했다. 미치고 팔짝 뛸 만큼 아쉽지는 않았다. 재생 포션에 대한 몇 가지 좋은 개량법을 알아냈고, 실험 과정에서 얻은 데이터로 의수형 마도구의 양산을 성공시켰다.

100%의 성공이 아니라 한들, 충분히 가치 있는 일이었다.

애초에 S급 제작계 헌터 라지아 언니마저 못한다고 했던 일이다. 밑져야 본전이다. 한 번 찔러 봐서, 뭐가 나오면 대박이요 실패해도 안 된다는 걸 확인한 걸로 충분했다.


그런데, 복제된 피험체가 바로 눈앞에 있었다. 그것도 셋이나.

셋 다 멀쩡하게 움직였다. 관을 덕지덕지 꽂아넣고 재생 포션을 배양액에 부어줘야 간신히 붕괴하지 않던, 고효산의 클론들과는 달랐다.

콘체른 길드의 정예 B급 헌터들과 비교해도 꿇리지 않는 실적을 올렸다.

이건 감에 가까운 판단이지만, 성장의 폭도 아직 많이 남아 있는 것 같았다.


“너흴 만들어낸 그 연구자, 한 번 만나보고 싶은데.”

“블루문 길드의 가장 깊은 비밀 실험실에 감금되었다. 평생 자기가 하고 싶었던 연구를 할 수 있을 거다. 이서윤 님은 그렇게 말해 주셨습니다.”


얘들을 만든 연구원은 미르한 오빠 몰래 클론을 만든 모양이야. 진짜, 설마 안 걸릴 거라고 생각한 건가? 외장형 간이라도 달았을까? 배짱 좋네.

오빠는 의외로 이런 면에서 자비로우니까, 던전 안에 던져버리는 그런 짓은 안 했겠지.

서윤이는 이런 부분에서 잘 갈린 낫처럼 확실해. 죽여야 한다고 생각했겠지. 성공하지 못했더라면, 관을 덕지덕지 끼워야만 유지할 수 있는 수준이었더라면 곧바로 죽였을 거야. 살려 뒀다는 건 미르한과 블루문에 도움이 된다는 걸 받아들였다는 것. 내가 데려갈 여지는 없는 거 같네. 이서윤이 낫 들고 콘체른 본사에 처들어오게 만들 수야 없지.

그래도 호의 정도는 배풀어놔도 나쁘지 않을 거 같은데?


“마력 패턴 일치율이 낮아지면 성장이 안 되고, 너무 높으면 원형에게 영향을 주지. 알지?”

“예. 알고 있습니다.”

“그래. 아무래도 너랑 저 친구, 67호는 별 문제 없는 거 같은데...네 애인이 문제네. 저 정도 색으로는 아직도 95% 이상 일치할 거야. 성장 가능성도 너희들 중에 제일 많이 남아있지만, 황천에 한 발을 담그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

“방법이 있으시다는 말씀 같습니다.”

“야. 눈에 힘 풀어. 한 대 치겠다.”

은유는 까칠하면서도 능글맞은 고양이처럼 43호를 들어다 놓았다.

“결국 마력 패턴은 속성에 제일 크게 영향을 받아. 다루는 게 냉기냐 열기냐 전기냐...아니면 단순한 신체 강화냐. 뭐 그런 거 말이야.”

“미르한 님은...별다른 속성이 없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럴 거였으면 이야기도 안 꺼냈지. 은유는 어깨를 으쓱하고, C급 현장보조 헌터에게 라떼 커피와 쫀득한 비스켓을 건네받았다.


“언론에서는 자연의 마나 그 자체라면서 떠들어대는데, 사실 틀린 말이야. 굳이 속성을 따지자면 전기에 가깝지. 하지만 미르한의 마력 패턴은 미르한이라는 인간 그 자체라고 봐도 돼. 이건 고위 헌터 누구나 그래. 하다못해 나랑 오빠가 똑같이 열기를 다뤄도 마력 패턴은 많이 달라. 우린 워낙 자기주장이 강한 사람들이잖아?”


“44호는 패턴을 바꾸기 위해서 평소와 다른 방식의 전투법을 사용하거나, 속성 마도구를 여과한 마나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벌써 2주째인데...큰 효과는 보이지 않습니다.”


네가 몸이 달았구나. 그래. 빨리 본론만 듣고 싶은 거지? 은유는 43호의 눈에서 지독한 절박함을 읽어냈다. 지금껏 보아왔던, 혹은 풍문으로 들었던 클른들보다 훨씬 강한 자아를 가지고 있었다.

‘은성 오빠의 클론은 명령이 없다면 목을 칼로 썰어도 인형처럼 가만히 서 있었지. 우리 오빠의 클론은 배고프면 짐승처럼 눈에 보이는 걸 잡아먹으려고 했어. 얘들은 진짜, 사람이구나.’

사람이라면 아는 데로 상대할 수 있었다. 욕망을 읽어내고, 불확실한 것을 제시해서 확실한 것을 내놓도록 할 수 있었다. 지난 십수 년간 그랬던 것처럼.

“내가 도와줄 수 있어. 난 열기를 다루는 A급 최상위 헌터야. 자기주장이 강한 여자지. 내 정수를 조금이라도 나눠주면 네 애인, 44호의 머리색에는 붉은 기운이 맴돌 거고, 마력 패턴 일치율은 75% 이하로 떨어질 거야. 그 정도면 원형에게 어떤 영향도 주지 않지.”

43호의 눈은 이미 반쯤 돌아가 있었다. 상체는 무의식적으로 앞으로 기울었고, 심장이 미친 듯이 뛰어 귀가 붉어졌다. 은유는 이 상태가 된 사람이라면 손과 다리를 잘라 바치라고 해도 듣는다는 걸 알고 있었다.

“뭘, 저희에게 뭘 바라십니까?”


43호는 불타는 거미줄 가운데로 걸어들어가는 감각을 느꼈다. 달달한 윤기가 도는 말로 된 실이 팔다리를 휘감았다. 매끄럽고 부드러워 들어가기는 쉽지만, 나서려 하는 순간 질긴 밧줄이 되어 온 몸을 집어 삼키겠지. 아니, 나서려는 생각조차, 거역하려는 생각조차 하지 못하게 되겠지.

문득 열기, 그 중에서도 불꽃을 다루는 자들의 본성에 대해 들은 내용이 떠올랐다.

불꽃 같은 욕망에 눈이 멀어 주변의 모든 것을 불사르며 나아간다. 그리고 분명 파란만장했을 삶의 끝에서 결국 스스로마저도 불태우게 된다.


그런 면에서, 자신의 삶은 불꽃조차 되지 못하리라.

불꽃에 눈이 먼 나방은 날개를 태우며 불 속으로 떨어지기 마련이다. 43호는 자신이 고은유의 불꽃에 먼 불나방이요, 거미줄에 걸린 나비라고 생각했다.


“뭘 할 수 있니?”

그 질문에 할 수 있는 대답은 정해져 있었다.

“뭐든지 하겠습니다.”

“뭐든지 할 수 있다는 말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말하고 별로 다르지 않단다.”

“무고한 사람을 당신의 이익을 위해 죽일 수 있습니다. 더 필요하십니까?”

“나를 위해 그런 일을 해줄 수 있는 사람은 네가 아니라도 많지.”


먼동이 터 온다. 지평선을 따라 보석 같은 빛이 떠오른다. 여명을 등지고 검은 날개를 편 소녀가 가까워진다.

그 모든 광경을 배경 삼아 고은유는 제안했다.

“너희 셋 중 하나. 콘체른 길드에서 3년간 일해줘야겠어. 근무 조건은 일부 협상 가능. 주로 이런저런 실험에 협조해주는 일이 될 거야. 휴가와 휴일, 고액의 연봉과 심신의 안전은 보장해줄게. 어때?”


목이 타들어 갈 것처럼 진한 단맛의 꿀이 뚝뚝 떨어지는 것 같은 목소리였다. 실험의 피험체가 되어, 3년간 유리방 안에서 손목에 링거 바늘이 꽂힌 체로 살아가는 미래가 선했다.


“친구들에게는 비밀로 해주십시오. 적어도 44호가 당신의 정수를 완전히 받아들일 때까지는.”

“애인이 싫어하지 않겠니? 내가 44호라면 물어보지도 않고 희생해버리는 애인이 미워질 것 같은데?”

“그러게 말입니다.”

머리 뒤쪽, 척수에서 뻗어온 신경다발과 뇌가 만나는 그곳이 한없이 차갑게 식었다. 다른 방법을 찾아보자는 몸부림을 이성이 초연하게 밀어냈다.

다른 방법이 없다는 걸 알고 있잖아. 필사적으로 고민해보면 뭔가 나올 수도 있겠지. 44호가 남은 2주여 동안 스스로 마력 패턴을 바꿔낼 수도 있겠지. 하지만 우린 시간이 없어. 44호는 원거리전 기반의 전투법을 바꾸지는 못할 거야. 원거리 전투법을 유지하려면 계속 열선계 스킬을 사용하야 할 거고, 열선계 스킬을 쓰려면 결국 미르한의 푸른 열선이 제일 효율적이야. 의식적으로 불편함을 감수하며 다른 패턴을 써야 하겠지만, 그런 식으로는 몸을 바꿀 수 없어. 자연스러워지지 않아. 바닷가의 소금기 묻은 모래처럼, 비빔밥에 섞인 모래알처럼 꺼끌거리겠지.

방법은 단숨에 마력 패턴을 바꾸는 것 뿐이야. 효율의 기준을 바꿔야 해. 원래 스킬을 쓰던 방식이 어리석어 보일 정도로 단번에.

아무리 생각해도 선택지는 두 개뿐이야. 고은유의 요구를 들어주거나, 이서윤에게 죽거나.

67호 욕할 게 아니었네. 나도 결국 체념이 빠른, 태어난 지 1년도 안 된 클론일 뿐이야.

“제가 아직 어려서요.”


왼쪽 귀의 피어싱이, 웅 하고 운 것 같았다.


지평선에서 커져 온 검은 새가 날개를 휘저으며 내려앉았다. 무게감 느껴지지 않는 깃털들이 기화해 대기 중으로 녹아들고, 훤칠한 정장 차림의 소녀가 모습을 드러냈다. 굽 높은 구두를 신고, 모델처럼 1자로 걸음을 내딛었다.

“아까 무슨 이야기 했어?”

서윤이 은유를 향해 상체를 기울였다. 진홍색 머리칼이 우수수 흔들리며 좌우를 가렸다.

“내 이야기, 네 이야기. 그리고 쟤들 이야기.”

은유는 턱끝으로 세 클론을 가리켰다. 살아남은 것만으로도 기쁘다는 듯이 웃고 있었다. 라떼와 비스켓을 앞에 두고,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서윤에게 자리를 권하며 은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렇게 말하면 너무 늙어버린 거 같기도 한데...저때가 그립지 않냐? 오늘 살아남은 거하고 내일 살아남을 것만 신경쓰면 됐잖아. 아침에 내 옆에 있던 사람이 저녁에도 내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했잖아.

지금처럼 길드니 정치니 수입이니 수출이니 수익률이니 헌터 관련 범죄니...뭐 이딴 거 하나도 신경 쓸 필요 없었잖아. 우리는 목숨을 걸고 세상을 구하는 헌터. 사람들은 우리의 헌신에 감사했지. 착한 각성자와 박수치는 시민들의 시대. 그때가 좋았으려나? 헌터의 죽음은 늘 고귀하고 희생적인 죽음이었지.”

서윤의 얼굴에 아련한 감정이 떠올랐다 사그라들었다. 물 위로 올라왔다가 다시 고요히 가라앉는 상어 등지느러미 같았다.

“그 시대를 끝낸 건 우리야. 영웅으로 죽기를 거부했어. 지켜야 할 사람들에게 무기를 겨누었지. 잘못했다고는 생각 안 해. 누가 먼저 시작했는지 따지자면 끝이 없어. 그래도 그 시대를 끝낸 건 우리야. 100여년 전에 군이 정치에 발을 들이려고 했듯이, 이번에는 우리가 정치에 발을 들인 거야.”

은유는 맞아, 하고 순순히 긍정했다.

“그래. 맞아. 내 선택이었지.”

뱀을 입 안에 키우는 고양이처럼 웃으며 말을 이었다.

“나, 쟤들 탐나. 한 명만 주면 안 될까?”

“흙 속에 눞고 싶다는 소리를 잘도 뱅뱅 돌려서 말하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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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7 118화. 레플리카 헌터는 많은 것을 바라지 않는다. FIN. +1 21.06.03 32 2 13쪽
116 117화 +1 21.06.02 28 2 13쪽
115 116화 +1 21.06.01 26 2 12쪽
114 115화 피와 꽃 Fin. +1 21.05.31 31 2 12쪽
113 113화 +1 21.05.28 26 2 12쪽
112 112화 +1 21.05.27 31 2 12쪽
111 111화 +1 21.05.26 31 2 12쪽
110 110화 +1 21.05.25 29 2 12쪽
109 109화 재시험 Fin. +1 21.05.24 27 2 12쪽
108 108화 +1 21.05.21 37 2 12쪽
107 107화 +1 21.05.20 41 2 12쪽
106 106화 +1 21.05.19 44 2 12쪽
105 105화 +1 21.05.18 30 2 12쪽
104 104화 선물 Fin. +1 21.05.17 38 2 13쪽
103 103화 +1 21.05.14 26 2 12쪽
102 102화 +1 21.05.13 35 2 12쪽
101 101화 +1 21.05.12 31 2 12쪽
» 100화 +1 21.05.11 38 2 12쪽
99 99화 +1 21.05.10 27 2 12쪽
98 98화 +1 21.05.07 42 3 12쪽
97 97화 +1 21.05.06 38 3 12쪽
96 96화. 짧은 밤 fin. +1 21.05.05 38 2 12쪽
95 95화 +1 21.05.04 34 3 12쪽
94 94화 +1 21.05.03 36 3 12쪽
93 93화. 중력도검 Fin. +1 21.04.30 36 3 12쪽
92 92화 +1 21.04.29 41 3 12쪽
91 91화 +1 21.04.28 36 2 12쪽
90 90화 +1 21.04.27 46 3 12쪽
89 89화 +1 21.04.26 35 3 12쪽
88 88화 +1 21.04.23 41 3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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