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훼룡 님의 서재입니다.

레플리카 헌터는 많은 것을 바라지 않는다.

웹소설 > 일반연재 > 현대판타지, 판타지

훼룡
작품등록일 :
2020.12.29 11:21
최근연재일 :
2021.06.03 19:00
연재수 :
117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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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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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8
글자수 :
636,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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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5.26 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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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쪽

111화

DUMMY

레플리카 헌터는

많은 것을 바라지 않는다


111화


67호는 재능이 있었다. 생각과 행동이 일치하는 무심의 인간형. 화가 나면 미친 듯이 화를 내고 슬프면 아이처럼 엉엉 우는 것이 당연하다. 그런 꼬인 구석 없는 성격이 의지를 현상으로 바꾸는 데 유리했다.

“이런 것도 할 수 있더라고.”

한때 흩날리는 눈과 같은 색의 머리칼은 탐욕스런 금빛으로 물들어갔지만, 여전히 피에는 가능성이, 머릿속에는 단순함과 탁월함이 남아 있었다.


중력조작 응용기, 중력제어 인과 척. 갑옷뿐인 기사가 허공에 붙들린 채로 다리만 버둥거렸다.


67호는 천천히 왼손을 놀렸다. 중력을 감각적으로 더하고 감하며 갑옷뿐인 기사를 눈높이까지 들어 올렸다.


“계속 밀어내기만 하니까 제대로 공격이 안 들어가잖아.”


투구 눈가리개 사이로 창백한 불꽃이 흔들렸다. 성에가 낀 검을 휘둘러보지만, 살점에 얼음을 번지게 하는 마검도 중력을 밸 수는 없었다.


67호의 손아귀 안에 황금빛 전류가 모여들었다. 눈을 돌리고 싶어질 만큼 달아올라 찬란하게 빛났다.


아구공 정도 크기로 뭉쳐든 전류를 굴리듯 던진다. 유도류 한 점까지 탐욕스럽게 빨아들이며 쏘아져 나가 갑옷과 충돌한다. 가죽 끈이 타들어가고 갑옷 이음새가 들뜬다.


펑!


싸구려 폭죽이 터지는 것 같은 소리가 났다.

중력조각 응용기, 중력제어 척. 염동력으로 밀어낸 것처럼 기사가 쏘아져 나갔다. 한참 몰려든 얼음 골렘들의 발치로 떨어진다.


20미터급 얼음 골렘이 43호를 잡으려 손을 휘두른다. 바닥을 볼 생각 따위는 당연히 하고 있지 않다. 으지직, 백수십 톤 얼음이 주술 걸린 갑옷을 짖밟는다. 황금빛 전류가 튀고 창백한 연기가 피어 오른다.


비슷한 시간에 비슷한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44호는 30여 개의 열선을 효율적으로 사용했다. 기사는 빨랐지만 작았고, 이 황폐한 능선에는 엄폐할 바위 하나 보이지 않았다. 서른 개의 열선을 퍼부으며 상대해주기에 기사는 너무 하잘것없었다.

열선으로 얼음골렘들의 무릎과 눈과 핵을 맞추며 43호를 서포트했다. 잠시 여유가 생기면 S급 헌터들 쪽을 바라보며 게이트에서 얼마나 많은 골렘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나 확인했다.


골렘들이 변형시킨 주먹과 발-스파이크가 나 있다거나, 얼음 칼날이 돋아 있다거나-를 찍어 어플에 올렸다. 후방의 B급 헌터들이 ‘좋아요’를 누르고 감사를 표했다


“이런 거 할 시간도 있나 보네.”


44호는 자신의 시야가 넓어졌다고 생각했다. 원래는 더 많은 것들을 생각하며 행동하게 되었다는 비유적인 표현이지만, 이번에는 실제로 시야각이 넓어진 것 같았다.

시야각 왼쪽 끝을 따라 달려오던 기사를 놓치지 않았다.


“너희랑 칼싸움 해야 했으면 너무 힘들었을 거야.”


44호는 하늘섬 게이트-광산 안에서 싸웠던 반혼 기사들을 떠올렸다. 역시 난전과 근접전은 취향에 맞지 않았다. 시뮬레이션 게임 하듯이 하늘에 떠서 고정포대처럼 열선이나 쏘아대는 게 적성에 맞았다.


쩡! 열선 한 발이 정확하게 기사의 허벅지 안쪽에 직격했다. 얇은 금속판이 달뜨며 벌어지고, 창백한 연기가 피어 올랐다. 잠시 경직된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이마, 다시 이마. 쩡, 소리를 내며 열선이 어둠 속을 밝혔다. 단단한 투구가 찌그러지고 그을음이 끼고 녹아 내렸다.

기사가 왼팔을 들어 얼굴을 가렸다. 44호는 눈을 가늘게 뜨고 기사를 바라보았다. 건틀렛과 팔꿈치 보호대 사이의 간격, 안에 헌터가 들어 있다면 저곳을 노려 봐야 강화된 육체에 막히겠지만, 속이 빈 저놈들이라면.

쩡! 열선이 수백 미터 거리를 정확하게 가로질렀다. 점과 선처럼 보이던 기사의 손목 부분에 직격했다. 요란한 소리와 불꽃이 일며 철판 건틀렛이 떨어졌다.

눈도 없는 놈이 흠칫하는 걸 본 듯한 뿌듯한 기분을 안고, 44호는 가드가 없어진 기사의 얼굴에 열선을 발사했다.

쩡! 눈가리개의 틈이 결국 부러졌다. 투구 안쪽으로 빨려들어간 열선이 반사되고 반사되며 갑옷 안쪽을 뒤흔들었다. 전기 나간 로봇처럼 기사가 비틀렸다.


“쓰러져.”


44호는 입김을 담배연기처럼 내쉬며 차갑게 일갈했다.

창백한 연기가 피어 오르는 게 선명하게 보였다.


네 번째 기사가 튀어나온 건 그때였다. 산비탈 아래로 데굴데굴 굴러간 기사는, 산을 아예 한 바퀴 돌아 뒤쪽에서 기습하기를 택했다. 무척이나 오래 걸렸지만, 갑옷뿐인 기사는 피로와 긴장을 몰랐다. 필요하다면 행할 뿐이었다.


어느새 발밑까지 다가온 기사. 44호는 만면에 쓰디 쓴 웃음을 띄웠다.


“아, 뭐라고 해야 할까? 그래. 43호 미안해. 사랑해. 고마워.”


44호는 소풍이라도 가는 듯한 어조로 낭랑하게 소리쳤다. 어깨 위에 남아있던 열선 여섯 발을 전부 기사에게 퍼부었다. 물론 여기까지 접근을 허락해버린 이상 상처 하나 없이 쓰러트릴 수 있다는 생각은 하지도 않았다.

운이 나쁘다면 동귀어진, 운이 좋다면 관통상 정도의 부상. 67호가 혈류를 조작을 통한 회복을 할 줄 알고, 아까 채다영이 준 약도 있으니 어지간해서는 죽지 않을 거다. 어지간해서는.


기사가 땅을 박찬다. 하늘을 향해 이를 드러내며 날개가 달린 듯이 치솟아 올랐다.

심장이 경주용 자동차의 엔진처럼 뛰었다. 남아있는 마나를 아낌없이 열선의 식에 퍼부었다.


44호는 본인이 당황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 애써 마음을 가다듬어려 많은 시간을 쓰지는 않았다. 쩡! 한 발이 쏘아져 나갔다. 기사의 오른쪽 무릎 아래가 깔끔하게 잘려나가고 열선이 땅에 처박혔다. 주변의 눈이 녹아내리고 돌이 타들어가며 매캐한 연기를 피워 올렸다.


두 번째, 세 번째 열선이 기사의 몸을 두들겼다. 녹아내린 구멍에서 창백한 연기가 피어 올랐지만, 진흙탕에서 피어난 연꽃처럼 성에 낀 검끝은 꼿꼿했다.


네 번째 열선이 빛나가고, 다섯 번째 열선이 기사의 왼팔을 갈갈이 찢었다. 남은 마나를 털어넣듯이 마지막 한 발을 쏘아냈다. 수 킬로미터 뒤쪽 군의 관측소에서 육안으로 보였을 정도의 위력이었다.


기사가 열풍에 휘말리고, 검끝이 휘었다. 44호는 마지막 열선을 쏘아낸 직후 몸통 전체에 경질화를 시도했다. 검끝이 향하는 곳을 정확하게 볼 수 있었다면 좋았겠지만, 마지막 열선이 너무 밝았는지 눈 앞에 빛기둥이 잔상으로 남았다. 검끝은 셋으로 보였다.


성에 낀 기사검이 옆구리를 찔렀다. 붉은 패딩이 북 찢어지며 사슴털이 흩어졌다. 강화술식 새겨진 전투복 플레이트를 뚫으며 속도가 줄어들었다.

내장 안쪽으로 향하던 궤적은 얇게 경질화된 가죽을 부수며 휘었다. 갈비뼈 사이로 들어와 옆구리 쪽으로 빠져나갔다.

동시에, 날개가 달린 듯이 뛰어올랐던 기사의 도약이 끝났다. 중력 마법은 44호의 것이었지 기사의 것이 아니어다. 이미 마지막 열선의 여파로 갑옷의 하반신은 걸래짝이 되 있었다.


창백한 가스가 피어오르는 것을 보며, 44호는 자신의 추락을 느꼈다.


수박 깨지는 것 같은 소리가 났다. 옆구리가 이상하리만큼 시렸다.


그때 직선거리로 몇백 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서도 비슷한 일이 일어났다. 수호신이라 불리던 헌터는 옆구리를 파고드는 싸한 감각에 인상을 찌푸러트렸다.

“우물쭈물 하다가 내 이렇게 될 줄 알았지.”

남은 의식을 쥐어짜내 어플리케이션에 글을 썼다.

-부상. 구조요망. A급 이상의 헌터 필요.-

옆에 S자가 붙은 아이디로 글을 쓰고, 레어 이모티콘까지 하나 올렸다. 수락 요청 범위는 일부러 좁게 잡았다. 멀리 떨어진 헌터가 요청을 수락한다면, 그 헌터가 다가올 때까지 이 설원에 방치된다. 의식을 잃는 순간 간신히 억누르고 있던 냉기가 터져나올 거다. 얼어 죽기는 싫었다.


“제일 가까운 놈들은...하필이면 이놈들이냐?”

실 끝을 잡았다고 생각한 운명은 가혹하여, 아무리 강한 자라 하여도 벗어날 수가 없다. 10만 8천 리를 날고도 부처님 손바닥을 벗어나지 못했던 손오공처럼.

미르한 역시 가장 못 미더운 놈들에게 가장 절실한 순간 목숨을 맡기는 신세가 되었다.


역시 싫다.


마지막 공격에 80미터가 넘던 골렘이 쓰러졌다. 얼음 폭포가 쏟아지듯이 부서지며 사방으로 조각들을 날렸다.


눈앞으로 날아오는 자동차만 한 조각을 경질화한 주먹으로 부수었다. 격렬한 반동과 함께 주춤거리며 물러섰다. 머리 위로 쏟아지는 집체만 한 조각은 육각미늘방패들을 우우 불러내 막았다.


후, 하.


거친 숨을 내쉬며 게이트 안쪽을 바라보았다. 얼음 가루들과 눈발로 가려진 시야 너머, 간질간질한 감각만으로 느껴지는 존재가 있었다.


하필이면 지금.


미르한은 옆구리를 감싸 쥔 손을 풀고 하늘하늘한 셔츠를 걷어올렸다. 왼쪽 갈비뼈를 따라 성에가 번져갔다. 어느새 폐부에 싸늘한 감각이 느껴졌다.


이 몸에 입은 상쳐가 아닌지라, 아무리 마나를 퍼부어도 억누를 수가 없었다.

“기회를 주지 말았어야 했을까?”

절실하던 소년의 눈빛을 떠올린다. 43호라고 했던가? 클론이니 당연한 것이겠지만 자신과 너무나도 닮아 있었다. 냉정하게 굴기가 어려울 만큼, 이성적으로 굴고 싶지 않을 만큼. 온 세상에 내 자리가 없는 것처럼 느껴지는 기분을 기억했다.


유성처럼 떨어지는 얼음 조각들을 창대로 쳐내며 겨울 후작이 걸어 나왔다. 열 두 명의 기사들이 한 걸음 뒤에서 그를 보좌했다.


“이 땅의 귀족이여. 그대에게 결투를 청하지.”


창백하게 뜬 얼굴, 한데 묶은 머리, 굵은 인장반지.

술술 나온 한국어에 잠시 당황했지만, 미르한은 한 쪽 눈썹을 치켜올리며 받아드렸다. 던전에서 이유를 따지기 시작하면 일찍 죽었다. 마나의 신비는 넓고도 깊었고, 자신조차 이제 한 발을 들였을 뿐이었다.


“그 땅 귀족들의 매너는 상대에게 저주를 걸어 놓고 결투를 청하는 건가? 내 똑똑히 기억해 두지.”


겨울 후작의 색소 옅은 눈썹이 위아래로 움찔거렸다.


“미안하군. 하지만 귀족으로서가 아니라 지휘관의 판단이었다고 생각해 주지 않겠나?”


“결투를 거절할 권리 같은 건 없는 것 같군.”


말장난으로 끌 수 있는 시간은 아쉽게도 여기까지였다. 띠링, 누군가 구조 요청을 수락한 알림음이 들려왔다. 아주아주 악갼 안도하며, 허공에 손을 뻗었다.


“패검하지 않은 건가? 내 창을 한 자루 빌려주겠네.”


“고맙지만 사양하지. 마음에 검을 품은 자는 손에 검이 필요없는 법이라서.”


은시계 초침이 부풀어 오른다. 미세한 문양이 빛나며 크로스가드와 링 모양의 장식 겸 엄지손가락 보호대가 펼쳐졌다. 검 전체가 같은 색의 금속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부드러운 크림색에 윤기가 흐르고, 단단하면서도 탄력이 넘쳤다.


“드래곤 본이군. 아름다운 사이드소드야. 그런데 딱히 마음에 품은 검으로 보이지는 않는데?”


미르한은 검신에 푸른 오러를 두르며 싱긋 웃었다.


“가장 사랑하는 여자가 나의 무사귀환을 빌며 만들어 준 시계지. 내 마음은 그녀의 것이고, 그녀를 위해 검을 들었으니 어찌 마음에 검을 품지 않았다 할 수 있겠는가.”


“품위를 갖춘 상대를 만나게 되어 기쁘군.”


진심처럼 들려서, 미르한은 씁쓸하게 웃었다. 한 번 시작한 귀족 흉내를 끝까지 이어가주기로 마음먹었다. 이 땅의 귀족이라는 호칭이 썩 나쁘지 않게 들렸던 탓이다.

손목을 세우며 칼날을 코와 이마에 일직선으로 가져다 댔다. 겨울 후작은 창대를 코와 이마에 일직선으로 세웠다.


“승자에게 자비과 영광을-”

“패자에게 겸손과 승복을-”


꼴에, 하고 생각하며 미르한은 달려나갔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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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6 117화 +1 21.06.02 27 2 13쪽
115 116화 +1 21.06.01 25 2 12쪽
114 115화 피와 꽃 Fin. +1 21.05.31 31 2 12쪽
113 113화 +1 21.05.28 26 2 12쪽
112 112화 +1 21.05.27 31 2 12쪽
» 111화 +1 21.05.26 31 2 12쪽
110 110화 +1 21.05.25 28 2 12쪽
109 109화 재시험 Fin. +1 21.05.24 26 2 12쪽
108 108화 +1 21.05.21 37 2 12쪽
107 107화 +1 21.05.20 41 2 12쪽
106 106화 +1 21.05.19 44 2 12쪽
105 105화 +1 21.05.18 30 2 12쪽
104 104화 선물 Fin. +1 21.05.17 38 2 13쪽
103 103화 +1 21.05.14 26 2 12쪽
102 102화 +1 21.05.13 34 2 12쪽
101 101화 +1 21.05.12 31 2 12쪽
100 100화 +1 21.05.11 37 2 12쪽
99 99화 +1 21.05.10 26 2 12쪽
98 98화 +1 21.05.07 41 3 12쪽
97 97화 +1 21.05.06 37 3 12쪽
96 96화. 짧은 밤 fin. +1 21.05.05 37 2 12쪽
95 95화 +1 21.05.04 34 3 12쪽
94 94화 +1 21.05.03 35 3 12쪽
93 93화. 중력도검 Fin. +1 21.04.30 36 3 12쪽
92 92화 +1 21.04.29 41 3 12쪽
91 91화 +1 21.04.28 35 2 12쪽
90 90화 +1 21.04.27 45 3 12쪽
89 89화 +1 21.04.26 35 3 12쪽
88 88화 +1 21.04.23 41 3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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