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훼룡 님의 서재입니다.

레플리카 헌터는 많은 것을 바라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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훼룡
작품등록일 :
2020.12.29 11:21
최근연재일 :
2021.06.03 19:00
연재수 :
117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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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6,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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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5.06 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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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쪽

97화

DUMMY

레플리카 헌터는

많은 것을 바라지 않는다


97화


열 세 번째 네크로맨서가 기름칠이 덜 된 것 같은 고개를 돌렸다. 몸을 움직일 때마다 피부조각이 파이처럼 겹겹이 일어나 떨어졌다.


산 아래 포위망은 여전히 건재했다. 수천 수만의 언데드들이 명령을 따랐다. 한 줌도 되지 않는 헌터들은 언젠가 지칠 거다. 그동안 이 땅을 재건하려 했던 모든 각성자들이 그랬듯이.


‘지켜야 할 백성을 버린 놈들이.’


네크로맨서는 별빛 총총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거대한 하늘섬들이 고래처럼 떠다녔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면 절로 경외감이 든다. 무릎 꿇고 머리를 조아려야만 할 것 같다.


선선한 바람이 말라붙은 살결을 쓰다듬고 지나갔다. 네크로맨서는 쭈그러든 폐로 숨을 들이켰다. 개운했다.


이 세계는 풍요로운 곳이었다. 자신들의 세계에서 같이 넘어온 곰팡이가 모든 것을 집어삼킨 지금마저도, 과거의 영광과 장엄함을 지키고 있었다.


“이런.”


새싹이 발뒤꿈치에 밟힐 뻔했다. 조심스래 흙을 북돋고, 휘어진 줄기를 뼈마디 성성한 손으로 일으켜 세웠다. 혹여 부러질까 두려워 손끝이 덜덜 떨렸다.


의도적으로 퍼트린 곰팡이와 독이끼가 대지를 뒤덮었지만, 이 세상은 여전히 자생력을 잃지 않았다.


“오래 남지 않았어.”


각성자들을 제물로 바쳐 새로운 문을 열리라. 저 높은 하늘, 산천초목 가득한 섬에 발을 들이리라. 그 땅을 차지한 다음에는 대지를 다시 풍요롭게 하리라, 나무를 심고 꽃을 피우리라.


지상에 남아있던 골렘들은 거의 다 부수었다. 하늘섬으로 올라간 옛 지배자들은 자멸의 길을 걸었고, 하늘섬에 올라가지 못한 가여운 백성들은...자신과 닮은 모습이 되었다.


신의 저주를 받은 제 형제자매들을 모두 데려와야겠지. 그리고 이 땅에 건주술을 풀어야겠지.


주술을 풀면 곰팡이와 이끼는 곧 사라질 것이다. 주술 없이는 애초에 자라나지도 못했을 것들이다.

그 다음에는 신의 저주를 받기 전, 아름다웠던 조국을 재건하리라. 신이 따라오지 못한 이 땅에서.


“가라.”


네크로맨서의 등 뒤로 도열해 있던 언데드들이 피막 날개를 펄쳤다. 최하급 흡혈귀를 떠올리게 하는 모습이었다. 바싹 마른 몸이 바람을 일으키며 하늘로 떠올랐다.


순풍이 부니 저 각성자들까지 단숨에 날아갈 수 있을 거다. 그렇게 중얼거린 열 세 번째 네크로맨서는 얼마 남아있지도 않은 머리카락이 일제히 곧두서는 감각을 느꼈다.


“뭐지?”


손가락이 떨렸다. 채액이 남아 있었더라면 땀이 손수건을 흥건하게 적셨으리라. 뒷덜미와 등골을 따라 피부가 당겼다. 몸이 절로 쪼그라들며, 무의식적으로 주변을 둘려보았다.


“느껴본 적 있어. 아니야. 아닐 거야! 여기까지 쫓아올 수는 없다고!”


열 세 번째 네크로맨서가 헌터들을 등졌다. 바위산 아래 깊은 굴을 향해 걸음을 재촉했다. 늑대에게 쫒기는 빨간 모자 같았다.


헌터들의 방진에서 수정구슬 하나가 더 떠올랐다. 수만 언데드를 부리는 사령술사의 위엄은 어디 가고, 겁먹은 한 여인의 그림자만이 드리워졌다.


“여기 있었구나.”

“히익!”

네크로맨서는 낡은 망토로 얼굴을 가렸다.

“좀 뭉쳐 있어.”

짜증이 잔뜩 섞인 목소리였다.

“네가 열 다섯 번째야. 이제 또 열 여섯 번째를 잡으러 가야 한다고.”

“어, 어떻게? 어떻게?”

네크로맨서가 울부짖으며 얼굴을 긁어댔다. 후드가 벗겨지고, 갈색으로 말라 비틀어진 얼굴이 수정구슬 빛을 받아 선명하게 드러났다. 이마에는 이해할 수 없는 글씨로 검은색 인장이 찍혀 있었다.


“어? 아...그렇게 된 거였구나.”

서윤은 천천히 땅에 발을 딛었다. 검은 깃털이 사방으로 흩날리고, 높이 올려 묶은 양 갈래 진홍색 머리칼이 잔잔히 가라앉았다.

서윤이 자박자박 다가와 네크로맨서의 이마에 손을 얹었다. 가시 밖힌 목줄을 잡히기라도 한 듯이, 네크로맨서는 오랜지색 동공을 수축시키며 몸을 떨었다.


“이상하네.”


중성적인 목소리였다. 쇠막대를 비벼 대는 것 같이 무뚝뚝하고 거칠었다.

툭. 외안 안대를 벗어 올려 머리카락에 걸쳤다. 빛을 잃은 회색 눈에서 검은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땅에 닿지 전에 증발하며 물 속에 떨어트린 물감처럼 공기에 녹아들었다.


“내가 분명히 너희를 전부 죽였다고 생각했는데?”

“...카타크토니오스. 어떻게? 어떻게!”

네크로맨서는 알아듣지 못할 말을 중얼거리며 비명을 내질렀다.

“당신을 피해 3천 년을 떠돌았어! 수십 개의 세계를 넘나들었다고! 그 어디에나 당신이 기다리고 있었지! 신의 심장을 만들어낸 각성자에게 죽었다고 들었는데..!”

카타크토니오스, 아니 서윤은 고개를 저었다.

“나를 우롱하려 드느냐?”

어? 하며 네크로맨서는 제 팔뚝을 내려다보았다. 바싹 구운 파이처럼 수십 겹으로 겹쳐진 피부가 부슬부슬 흘러내렸다.

“그 누구도 나를 죽일 수 없다.”

투둑, 투두둑, 손가락이 떨어지고 망토가 버석거리며 흩어졌다. 갈비뼈 위를 덮고 있던 얇은 살점이 물에 젖은 잿가루처럼 흘러내렸다.

“그 누구도 내게서 도망칠 수 없다.”

말라붙은 얼굴 살점이 누네띄네 과자처럼 부스러졌다. 사기를 두른 손을 뻗어 보지만, 물에 젖은 종이처럼 무너져버린다. 한순간에 팔꿈치까지 부서져 사그라든다.

파앗. 서윤의 등 뒤에서 눈부신 빛이 터져나왔다. 수정구슬의 창백한 빛을 후광처럼 두르며, 서윤은 회색의 눈동자에서 검은 눈물을 잉크처럼 흘린다.

“XXXXXXXXXX!”

인간의 입으로 발음할 수 없는 마지막 마디 앞에서, 수천 년을 떠돌아온 네크로맨서가 잿더미로 변해 흩어졌다. 팔다리가 나무껍질처럼 부서지고 쇄골이 석조 다리처럼 무너지는 가운데, 성흔은 마지막까지 이마에서 검은색으로 빛났다.

서윤은 무덤덤하게 손짓했다. 등에서 검은 깃털들이 우우 자라나며 까마귀 같은 날개를 만들었다. 연구계 헌터들이 보내준 좌표를 쫓아 날아오른다.


“네 기억은 언제나 불쾌하네. 이용하려는 사람 투성이, 도망치려는 사람 투성이. 힘들었겠어.”


어디서도 환영받지 못한 신이여.

내 그대를 천 년 손님으로 대할 것이니오

영원히 내 안에서 살아가소서.


***


치솟아 오른 수정구슬의 빛이 눈꺼풀 위를 훑고, 44호는 신음성을 내며 눈을 떴다.


“어디까지 날아온 거야?”


팔과 다리에 힘을 줘가며 몸 상태를 확인했다. 골반을 좌우로 돌리며 허리가 부러지지 않았나 확인했다. 여기저기 쑤시고 아팠지만, 부러진 뼈는 없는 것 같았다.

‘중력제어 덕인가? 몸무게가 가벼운 상태였으면 충격도 적었을 테니까. 머리 아파. 아까 그 공격은 뭐였지? 맞는 순간 물에 빠진 것 같았어.’


쉬이익! 뱀 같은 소리가 났다. 44호는 용수철처럼 튀어 일어나며 이를 악물었다.

“뭐야! 끝난 거 아니었어?”

경질화시킨 주먹으로 가드를 올리며, 44호는 눈동자를 굴렸다.

‘뭐가 저렇게 생겼냐?’

머리와 팔은 뚜렷했지만, 갈비뼈가 성성한 몸통은 반투명해서 뒤가 비쳐보였다. 다리는 붙어 있지도 않았고, 척추뼈가 꼬리처럼 움직이며 둥실둥실 떠다녔다.


‘반혼계 언데드다...굳이 분류하자면 듀라한에 가까워. 반혼기사...저 잡졸들보다 훨씬 강해.’


거대종들을 손쉽게 이길 수 있는 언데드들이었다. 샥, 샥, 칼 가는 소리와 함께 반혼 기사 다섯이 반원을 그리며 44호를 포위했다. 그들이 갈비뼈 안쪽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문드러진 과일 즙을 짜내는 것 같은 소리와 함께 짧은 소검이 뽑혀나왔다. 날이 두툼했고, 칼등 쪽에는 깔쭉깔쭉한 톱니가 나 있었다.


“아. 근접전은 취향이 아닌데.”


44호는 곤란하다는 듯이 웃으며 육각미늘방패조각들로 몸을 애워쌌다. 여덟 개의 열선을 띄워 올리며 주변을 밝혔다. 이글거리는 열기가 은발 머리에 붉은 그림자를 드리웠다.


“와라. 이 죽지도 못한 괴물 새끼들아.”


***


43호는 방패벽 안쪽에서 가루 아이스티 탄 얼음물을 들이키며 숨을 돌랐다. 방금 전부터 언데드들의 공격이 더뎌졌기에, 번갈아 가며 물 한 모금 마실 시간이 있었다.

목구멍에 헤어드라이기를 쳐밖은 듯한 목마름이 해소되자, 43호는 고은유에게 머리를 숙였다. 초조함과 불안함이 맴도는, 보이는 것만으로도 불경하다 소리를 들을 감정이 들끓는 눈을 숨겼다.


“은유 님. 44호 찾으려 다녀와도 되겠습니까?”


은유는 손잡이에 달걀만 한 붉은 보석이 박힌 레이피어를 내질렀다. 듬성듬성 달려드는 언데드 다섯 마리를 한 호흡에 배어죽인 다음, 이쪽으로 손을 내밀었다.

“...”

손을 잡아들라는 뜻이 아닌 건 확실했다.

‘이거...내가 마시던 건데?’


“목말라 뒤지겠다! 나도 아이스티 한 모금만 줘 봐!”

결국 먼저 인내심이 다한 은유가 오만상을 하고 소리쳤다.

“네, 넵!”

양 손으로 공손히 바쳐든 텀블러가 훽 하고 사라졌다. 얼음을 와자작 와자작 씹는 소리가 들렸다.

은유는 바짝 조이던 허리띠를 푼 것처럼 한결 편해진 눈길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땅이 보이지 않을 만큼 몰려들던 언데드들이 듬성듬성했다. 벽처럼 몰려들던 강철굼뱅이들도, 길쭉한 몸을 뻗어오던 갑각지네도 뜸했다. 적 사이를 종휭무진 휘젓던 충헌도 어느새 방진으로 돌아와 있었다. 지쳐서가 아니라, 그가 나서야 할 만큼 대형종들이 몰려들지 않아서였다.


흐음, 하고 짧게 중얼거린 은유는 방진의 가운데로 눈길을 돌렸다. 네크로맨서가 연구계 헌터들의 손길을 따라 갈갈이 찢겨나가고 있었다. “귀중한 자료다! 죽이지 않게 조심해.” 라던가, “길드 지하에서 10년은 연구할 가치가 있는 놈이야.” 같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지막으로 은유는 43호의 눈을 바라보았다. 실핏줄 하나하나 곧두서 붉게 이글거리고 있다. 당장이라도 피눈물을 쏟아낼 것 같다.


“너, 근접전 전문이지? 비행을 동반한 수색이나, 주술을 쓰는 적과의 조우 상황을 고려하면,”


흘깃, 은유의 눈 끝에 거친 백금발이 닿았다 떨어졌다. 67호는 영구기관을 장비한 증기기관차라도 되는 듯이 전류를 쏘아내고 있었다. 체인처럼 뻗어나간 전류에 닿은 언데드들이 몸뚱이 안에서부터 타오르며 터져나갔다.

‘약한 다수’를 상대한 이번 전투에서 효율을 따지자면 A급 헌터들에 준하는 활약이었다. 콘체른 길드 소속이었다면 이번 달 보너스가 월급의 150%쯤 나왔을 거다.


“저 친구를 보내는 게 더 좋을 것 같은데...꼭 네가 가야 하는 이유가 있나? 대형종들을 견제하려면 너의 그, 대검 스킬이 필요한데 말이야.”


은유는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듯이 43호를 떠보았다.


43호는 구토처럼 새어나오려 하는 울분과 불안을 애써, 정말로 애써 짖눌렀다. 감정이 진득한 형태를 이루며 새어나왔다. 땀이, 온 몸에서 구멍 뚫린 비닐봉투에 담은 물처럼 쏟아졌다.


“...안 됩니다. 저, 저만이 중력 마법을 통해, 비행에 준하는 빠른 이동이 가능합니다. 수색의 기본이라 할 수 있는 고공 이동이 가능한 건 저뿐입니다.”

“저 친구도 꽤 빠르다고 알고 있는데? 너희 구했을 때도 장난 아니었다며. 한 줄기 벼락처럼.”

“빠르지만, 비행은 불가능합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수직 이동과 수평 이동이 자유로운 건 저 하나입니다.”

“너, 꼭 그 애랑 반드시 붙어있어야 할 이유가 있는 것 같다?”


은유는 노회한 정치인이었다. 16년전 세상이 뒤집혔을 때부터, 반드시 그렇게 되겠다고 약속했다. 하나뿐인 오빠, 고효산은 칼 들고 세상을 구하기에 바빴다. 그럼, 적어도 누구 하나는 오빠를 구해줘야지.


“대답해. 넌 뭐고, 그 애는 뭐야? 쟤 이름은 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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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7 118화. 레플리카 헌터는 많은 것을 바라지 않는다. FIN. +1 21.06.03 32 2 13쪽
116 117화 +1 21.06.02 28 2 13쪽
115 116화 +1 21.06.01 26 2 12쪽
114 115화 피와 꽃 Fin. +1 21.05.31 31 2 12쪽
113 113화 +1 21.05.28 26 2 12쪽
112 112화 +1 21.05.27 31 2 12쪽
111 111화 +1 21.05.26 31 2 12쪽
110 110화 +1 21.05.25 29 2 12쪽
109 109화 재시험 Fin. +1 21.05.24 26 2 12쪽
108 108화 +1 21.05.21 37 2 12쪽
107 107화 +1 21.05.20 41 2 12쪽
106 106화 +1 21.05.19 44 2 12쪽
105 105화 +1 21.05.18 30 2 12쪽
104 104화 선물 Fin. +1 21.05.17 38 2 13쪽
103 103화 +1 21.05.14 26 2 12쪽
102 102화 +1 21.05.13 35 2 12쪽
101 101화 +1 21.05.12 31 2 12쪽
100 100화 +1 21.05.11 37 2 12쪽
99 99화 +1 21.05.10 27 2 12쪽
98 98화 +1 21.05.07 41 3 12쪽
» 97화 +1 21.05.06 38 3 12쪽
96 96화. 짧은 밤 fin. +1 21.05.05 38 2 12쪽
95 95화 +1 21.05.04 34 3 12쪽
94 94화 +1 21.05.03 36 3 12쪽
93 93화. 중력도검 Fin. +1 21.04.30 36 3 12쪽
92 92화 +1 21.04.29 41 3 12쪽
91 91화 +1 21.04.28 36 2 12쪽
90 90화 +1 21.04.27 46 3 12쪽
89 89화 +1 21.04.26 35 3 12쪽
88 88화 +1 21.04.23 41 3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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