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훼룡 님의 서재입니다.

레플리카 헌터는 많은 것을 바라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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훼룡
작품등록일 :
2020.12.29 11:21
최근연재일 :
2021.06.03 19:00
연재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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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6,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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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5.18 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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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쪽

105화

DUMMY

레플리카 헌터는

많은 것을 바라지 않는다


105화


조금 큰 콩알만 하던 붉은 구슬이 전부 44호의 동맥 안으로 흘러들어가는 대에는 30분 정도가 걸렸다.


고은유는 토끼처럼 동그랗게 눈을 뜬 44호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꽤 귀엽고 새침하게 생겼다. 괜히 한번 찔리보고 싶게 생겼다. 43호 같은 애가 좋아할만 했다.


“이제부터 진짜니까 정신 똑바로 차려. 힘 주지 말고 그냥 보고만 있어.”


정수를 44호 안으로 흘러 넣었다고 한들, 아직 그 정수는 고은유의 것이었다. 생생하게 느껴졌고, 원한다면 혈관 안에서 폭주시킬 수도 있었다.

물론 고은유는 그럴 생각이 없었다. 맞대고 있던 손목을 때며, 두 손가락으로 44호의 손목을 잡았다. 맥이 뛰는 게 선명하게 느껴졌다. 한없이 얇게 뽑아낸 정수가 핏줄을 타고 온몸을 흘렀다. 고은유는 어렵지 않게 44호의 심장에, 44호의 정수에 접촉할 수 있었다.


‘진짜 닮았네.’


불쾌할 정도의 일체감이었다. 익숙한 연청색이 생생하게 ‘보였다.’ 미약한 전류 같은 감각이 손 끝에 와 닿았다. 역시 익숙했다. 자연의 마나와 거의 비슷한 색채, 박은성에게 배운 약간의 전류 속성.

순간 칼단발에 갸름한 얼굴이 미르한의 것과 겹쳐졌다. 잠시마나 고은유는 자신이 미르한의 손목을 잡고 있다고 생각했다.


‘정신 차리자.’


이미 머리카락의 수십 분의 1로 나뉘어진 정수였지만, 고은유는 그것을 또다시 흩고 또 흩었다. 44호의 심장에 고인 하늘색 마나에 한 방울씩 흘려 넣었다. 한없이 작은 파문이 일었다. 거대한 호수에 붉은 비가 한 방울씩 내리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이글대는 붉은 색은 물감처럼 퍼지며 하늘빛 호수를 좀먹었다. 맑은 호수에 떨어진 붉은빛이 보랏빛으로, 군청색으로 변해갔다. 혼탁해지고 엉겨붙으며 또다른 무언가가 되어갔다.


또다시 한 시간 정도가 지나서야 고은유는 손을 놓았다. 44호의 손목이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성공했습니까?”

43호가 다급하게 물었다. 이해할 수 있었지만, 고은유는 자신을 고생시킨 43호에게 작은 면박을 주고 싶었다. 그대로 고꾸라지려는 44호의 몸을 조심스래 눕히며 대답했다.


“더럽게 힘들었어. 워낙에 짙고 순수한 마력이라서 자정 작용도 장난 아니야. 내 정수를 이물질 취급하면서 밀어내려고 했어.”


고은유의 셔츠는 반쯤 젖어 있었다. 뒷덜미 잔털에 이슬 같은 땀방울이 송글송글 맺혔다. 소매로 이마의 땀을 훔치며 43호를 바라보았다.


“네 애인은 한두 시간 뒤면 일어날 거야. 지금과는 머리색이나 눈동자 색이 좀 달라지겠지. 피곤하니까 가서 쉴게. 약속 이야기는 던전 밖에서 하자. 네 친구 67호가 너를 한 대 치고 싶어하는 것 같으니까.”


초원을 가로지르며 멀어진 고은유의 등이 손가락만하게 보였다.


43호는 반쯤 체념하며 67호를 바라보았다. 검은 바탕에 황금빛 감도는 눈동자가 노여움을 품고 있었다.

“44호 안 깰 정도로만-”

“그래. 시발. 안 그래도 그럴 생각이었어.”

짝! 뺨에서 화끈한 불꽃이 튀었다. 감싸 쥐며 고개를 들었다. 솔직히 곧바로 배를 걷어차일 줄 알았는데, 뺨 몇 대로 무마할 수 있다면,

“누가 네 멋대로 희생하래?”

짝! 반대편 뺨에서도 짜릿한 감각이 올라왔다.

“차라리 나를 팔아넘겼으면 그려러니 했을 거야. 필요와 거래로 시작된 관계의 쉼표로 그 정도면 적당하잖아.”

퍽, 67호의 손바닥이 가슴팍을 밀어쳤다. 폐가 짓눌리는 감각이 한 순간, 하늘에 별이 총총했다. 엉덩이가 조금 욱신거렸다. 눈앞에 선 67호를 보고서야 떠밀려 넘어졌다는 걸 알아챘다.


“너 없으면 얘는 누가 돌보라는 거야? 네가 콘체른 실험실에 들어가면 44호가 좋아라 했겠다.”

67호의 얼굴은 자괴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 이유를 모르지 않았다.

“알고 있잖아. 어쩔 수 없었어.”

어쩔 수 없었다. 참 편리한 핑계다. 사실 진짜로 어쩔 수 없는 일은 많지 않다. 옷 벗을 걸 각오하면, 좀 다칠 걸 각오하면, 명예가 실추될 걸 각오하면, 시간과 돈을 조금만 더 쓰면, 대부분의 일은 바꿀 수 있다. 하지만 목숨을 바쳐도 바꿀 수 없는 일이라면?


“나는 44호를 위해 죽을 수 있지만, 내가 죽어 봐야 아무것도 바뀌지 않겠지.”

“...”

“너도 44호를 위해 피 흘릴 수 있잖아. 하지만 우리가 아무리 피를 흘려도 바꿀 수 없는 결론이 있다면, 다른 방법을 찾아봐야지.”

“그래. 시발. 네가 옳아. 시발. 잘했어. 시발. 내가 미안하다.”

67호가 옆으로 다가와 털썩 주저앉았다. 희미한 황록색을 손 끝에서 뿜어내며 부어오른 뺨 위를 비춘다.

“새로 만든 스킬이야?”

“섬에서부터 가지고 있던 거야. 너 머리색 변한 그 날이었을걸?”

“떠난지도 오래됐네...이제 우리 한 살은 넘었나?”

“아니. 아직. 4월 중순은 되야 한 살이야.”

“진짜 더럽게도 긴 1년이었네. 지금 마력 수치 몇이야? A급 달지 않았을까?”


67호가 자신의 마력량을 확인하는 사이, 나도 내 상태창을 살폈다.


잔여마력: 7735/7735

공격스킬

마법계 <열선> <교란전격> <경질화>

도검계 <중력도검> <역장도검> <오러 블레이드> <흡성검기> <반탄검기>

방어스킬

<육각미늘방패> <역장방패>

보조스킬

<신체부분변조> <신체강화>

<점멸걸음> <중력조작>


마력량 604의 어린애였던 게 고작 1년도 되지 않았다니. 지금 생각하면 어떻게 살았나 헛웃음이 나올 것 같았다.


이제 난 A급 하위 헌터다. 아직 마력 제어는 아리수나 반충헌 같은 고위 헌터들에 비해 미숙하지만, 중력도검 하나는 어디 가서 확실히 자랑할 만하다.


“별 예쁘네.”

67호가 시발 좆같네, 같은 어감으로 중얼거렸다.

“나 먼저 들어간다. 반충헌 님이 술 가져온 거 같아. 내가 다 마셔버리기 전에 44호 데리고 들어와. 너무 오래 있지는 말고.”

67호가 한쪽 눈을 찡긋하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시 그 등을 바라보던 43호는 죽은 듯이 잠든 44호의 얼굴로 눈을 돌렸다. 이제 진짜 둘뿐이었다.

옷깃만 스쳐도 전생부터 연이 있다는데, 우리는 어떤 업과 연이 얽혀 만나게 됐을까? 우리에게도 영혼이 있을까? 누구에게 물어보면 알 수 있을까? S급 사령술사 이서윤이라면 알고 있을까?


으음, 하며 44호가 작게 신음했다. 43호는 팔로 등을 떠받치며 44호를 일어켜 앉혔다. 44호는 한참을 잔 것처럼 몽롱한 눈을 하고 있었다.


“나 머리색 변했어?”


44호는 꿈꾸는 것 같은 눈을 하고도 단발 머리를 손가락으로 빗으며 색상을 확인했다. 본 차이나 같이 윤기가 흐르는 은발이었다.

그래. 은발이었다.

“어, 잠깐만. 이게 무슨.”

뭔가 대단히 잘못 돌아가고 있었다. 등골이 싸해졌다.

“눈, 눈동자 봐봐.”

43호는 44호의 뺨을 양쪽에서 잡으며 눈동자를 확인했다. 아주아주 옅은 붉은 기운이 감돌았다. 정수를 받기 전과 다르지 않았다.


“변했어?”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다는 듯한 목소리로 44호가 물었다. 죽어가는 새처럼 몸이 파르르 떨렸다.

43호는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저었다.

“일단, 고은유에게 가보자. 혹시 스킬 변한 거 있나 확인해봐.”


임시의 임시에 불과했지만 캠프의 분위기는 나쁘지 않았다. 고급 양탄자와 같은 초원. 네온샤인처럼 빛나는 별과 달. 서울에 비해 비교도 할 수 없는 맑은 공기. 폐부가 충만해지는 짙은 마력. C급 헌터라면 조금 애매한 조건이었지만, 그래도 피부를 스치는 바람은 상쾌하고 부드러웠다.


“옛날에 드래곤이랑 싸운 이야기 해줄까?”

“네. 듣고 싶네요. 얼마나 큰 놈이었어요? 설마 성체급이에요?”

“야, 네가 싸운 것처럼 말하지 마. 고효산 님 뒤에 숨어서 벌벌 떤 주제에.”

“너는 뭐 한 게 있는 것처럼 말한다?”

“나는 힐러였잖아. 등신아. 내가 일선에 있다는 건 진영이 망했다는 거지.”


반충헌과 67호가 어깨동무를 하고 앉아 노래를 불렀다. 예상대로 술판이 벌어지고 있었다. 많은 양은 아니었지만, 혀에 기름칠을 하기에는 충분한 양이었다.


“어, 왔어-”

반갑게 손을 들어올리던 67호가 이쪽을 보자마자 정색했다. 와그작, 들고 있는 종이컵이 형편없이 구겨졌다.

“야. 이거 비싼 술이야!”

반충헌의 면박을 들은체 만 체 하고 67호가 달려왔다.

“이게 시발 무슨 좆같은 상황이야.”

“나도 몰라. 일단 뒤쪽 가 있을 거니까 고은유 님 좀 불러줘. 혹시 모르니까 이서윤 님 눈에는 띄지 말고.”

이서윤. 그 이름을 듣자마자 67호가 이를 악물었다.

“오늘 우리 다 죽을 수도 있겠는데.”


44호를 부축하며 캠프 근처의 큰 바위 뒤로 가 앉았다. 오래지 않아 고은유가 나타났다.


“너 무슨 특이체질 같은 거니?”

이런 상황은 생각도 못했다는 것처럼, 고운유의 눈동자가 상하좌우로 흔들렸다.

“44호. 정수 받아드린 거 어떻게 했어? 우리 중력마석도 소화해냈잖아.”

다급하게 묻자, 44호가 인상을 찡그리며 눈을 꼭 감았다. 얇은 눈두덩이 위로 안구가 움직이는 걸 눈치챌 수 있었다. 상태창을 살피고 심장을 들여다보고 있겠지.

“안 섞였어. 전부 아래로 가라앉았어.”

“내가 그렇게 얇게 뽑아서 섞었는데? 말이 돼?”

고은유가 앙칼지게 소리쳤다.

“저도 어떻게 된 건지 모르겠어요. 43호. 미안해.”

44호의 눈에 눈물이 맺혀 갔다. 실핏줄이 빨갛게 부어 올랐다. 필사적으로 눈물을 참았지만, 결국 오른쪽 눈에서 한 방울이 뺨을 타고 길게 흘러내렸다.

“네가, 네가 왜 미안해.”

안아주는 것밖에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지나가다 보니까 무슨 이상한 소리가 들린 거 같은데.”

지금 제일 보기 꺼려지는 사람이었다.

“12시 넘었어. 오늘이 31일째야. 마력 일치율 확인해볼 수 있을까?”

단조로운 목소리, 던전과 어울리지 않는 구둣발, 바람에 흔들리는 진홍색 트윈테일.

검게 칠해진 손톱이 고은유의 어깨 위에 얹혀졌다. 은유가 몸을 바르르 떨며 한 발 옆으로 걸었다.

“67호. 그 눈빛 뭐니?”

눈을 치켜뜨고 앞을 막아서던 67호가 손끝을 바들바들 떨었다. 정전기가 튀며 머리카락이 일어서고, 손톱 사이에서 푸른 전류가 지직거렸다.

“비켜.”

단호한 언령. 공기 대포에 맞기라도 한 것처럼 67호가 떠밀렸다.

“43호.”

귓가에 속삭이는 목소리. 여기서 죽는 한이 있어도 안 돼. 만용을 부리며 44호와 이서윤 사이를 막아섰다. 시야 우상단의 잔여마력수치를 확인했다.

“43호.”

부드러운 손이 어깨 위로 올라왔다. 이서윤의 것이 아니었다. 본 차이나 같은 색의 칼단발이 내 옆을 스쳤다. 등이 보인다.

“미르한 님이 너에게 한 달을 주셨어. 기억하지?”

“그래요. 한 달. 오늘까지에요. 아시잖아요. 1월은 31일까지.”

“...”

“미르한을 만날 거에요. 그 사람이 그렇게 대단하다면, 이 정수를 녹아들게 할 방법도 알고 있겠죠.”

서윤은 매끄럽게 고개를 저었다.

“한 달의 시간은 문제가 해결되기까지 주어진 시간이야. 문제 해결은 네 몫이고. 그분이 네 뒤치다꺼리까지 해 줄 이유는 없어.”

서윤의 외눈에도 망설임은 어려 있었다. 한 달 동안 정도 들어 있었다. 하지만 이미 내려온 명령을 어길 만큼은 아니었다. 피눈물을 흘리면서도 명을 따를 여자였다.

“뒤치다거리? A급 헌터 세 명이 언제부터 그렇게 쓸모없는 전력이 되었죠?”

44호가 입을 연다. 하나뿐인 이서윤의 눈동자가 잠시 흔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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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7 118화. 레플리카 헌터는 많은 것을 바라지 않는다. FIN. +1 21.06.03 31 2 13쪽
116 117화 +1 21.06.02 27 2 13쪽
115 116화 +1 21.06.01 25 2 12쪽
114 115화 피와 꽃 Fin. +1 21.05.31 31 2 12쪽
113 113화 +1 21.05.28 26 2 12쪽
112 112화 +1 21.05.27 31 2 12쪽
111 111화 +1 21.05.26 30 2 12쪽
110 110화 +1 21.05.25 28 2 12쪽
109 109화 재시험 Fin. +1 21.05.24 26 2 12쪽
108 108화 +1 21.05.21 37 2 12쪽
107 107화 +1 21.05.20 40 2 12쪽
106 106화 +1 21.05.19 44 2 12쪽
» 105화 +1 21.05.18 30 2 12쪽
104 104화 선물 Fin. +1 21.05.17 38 2 13쪽
103 103화 +1 21.05.14 26 2 12쪽
102 102화 +1 21.05.13 34 2 12쪽
101 101화 +1 21.05.12 31 2 12쪽
100 100화 +1 21.05.11 37 2 12쪽
99 99화 +1 21.05.10 26 2 12쪽
98 98화 +1 21.05.07 41 3 12쪽
97 97화 +1 21.05.06 37 3 12쪽
96 96화. 짧은 밤 fin. +1 21.05.05 37 2 12쪽
95 95화 +1 21.05.04 34 3 12쪽
94 94화 +1 21.05.03 35 3 12쪽
93 93화. 중력도검 Fin. +1 21.04.30 36 3 12쪽
92 92화 +1 21.04.29 41 3 12쪽
91 91화 +1 21.04.28 35 2 12쪽
90 90화 +1 21.04.27 45 3 12쪽
89 89화 +1 21.04.26 34 3 12쪽
88 88화 +1 21.04.23 40 3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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