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훼룡 님의 서재입니다.

레플리카 헌터는 많은 것을 바라지 않는다.

웹소설 > 일반연재 > 현대판타지, 판타지

훼룡
작품등록일 :
2020.12.29 11:21
최근연재일 :
2021.06.03 19:00
연재수 :
117 회
조회수 :
8,843
추천수 :
338
글자수 :
636,119

작성
21.05.24 19:00
조회
26
추천
2
글자
12쪽

109화 재시험 Fin.

DUMMY

레플리카 헌터는

많은 것을 바라지 않는다


109화


그는 아주 오랫동안 혼자였다.

파도마저 얼어버린 북쪽 바다의 성에 유폐되어, 돌아오지 않을 날들을 꿈꾸었다.

악마는 꼬리가 잘려나갈 각오를 하고 그의 저택에 들어갔다.

그의 심장은 텅텅 비어있었다. 차가운 놋쇠 바닥을 아무리 긁어 봐도 억울함도 분노도 슬픔도 찌꺼기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악마는 가슴 위로 시나몬 향이 나는 뜨거운 우유와 향긋한 크림, 설탕과 커피를 부었다.

그는 한 손으로 악마를 붙잡아 뿔과 꼬리를 잘라내고, 식탁 위에 손등을 못 박았다.

그리고 악마가 부었던 따듯하고 아련한 향기를, 한 방울 찍어 맛보았다.


그는 또다시 속아주기로 했다.


“이 세계에도 귀족을 자처할 만한 자들이 있구나.”

겨울 후작은 약간의 경의와 기대, 그리고 담백한 적의를 담아 말했다. 골렘들의 눈을 빌어 밖의 존재들을 바라보았다.


푸른 마나를 다루는 자, 죽음을 품어낸 자, 검은 머리의 불꽃, 심연을 물어뜯어 뼈와 고기를 탐닉한 자.


“강하구나. 무척, 무척이나 강해.”

성의 옥좌에서 천천히 걸어 내려왔다. 금장 버클이 달린 가죽 단화를 벗고, 하얀 가죽으로 만든 정장 재킷도 벗어 내려놓았다. 시종의 도움 없이 강철 부츠의 끈을 조이고, 무릎견까지 내려오는 검정색 코트를 걸쳤다.


복도에는 이음새를 얼음으로 채운 갑옷들이 좌우로 여덟 쌍이 서 있었다. 철컹이는 소리를 내며 뒤를 따랐다.


얼음 조각 떨어지는 소리를 들어, 창밖을 바라보았다. 굉음에 얇은 유리창이 파르르 떨었다. 막 60미터급 얼음 골렘 스물 네 마리가 일어나 게이트로 향했다.


만족스런 눈길로 바라보며, 바로 뒤따라오던 갑옷에게 명했다.


“악마에게 가서 15미터 이상의 대형 골렘들을 주로 만들라고 전해라. 저 세계의 귀족들은 강하지만 수가 적고, 저보다 약한 이들을 앞세우지 않는다. 적이라서 다행이구나.”


갑옷 기사 둘이 몸을 훽 돌리며 아래층으로 향했다. 철컹이는 발소리를 들으며 무기고로 향했다. 날이 새파랗게 선 창 몇 자루를 집어들어 창날을 만져 보았다. 얼음도 금속도 아닌 기묘한 색이었다.


“잘 갈려 있다. 눈트롤의 심장도 한 번에 뚫을 수 있겠어.”


곱슬거리는 머리를 한데 묶고, 허벅지에 각반을 차고, 인장반지를 꼈다.

저 세계의 귀족들은 강하지만, 약점은 분명이 보였다.


죽음을 품어낸 소녀는 지혜를 몰랐다. 소녀가 품은 것은 아주아주 무거운 존재였다. 그것을 껴안은 이상 사람으로 살 수는 없었다.

검은 머리의 불꽃은 장작더미에 짓눌려 바람을 갈망했다. 지키고 싶었던 것들이 사내의 본성을 갉아먹고 있었다. 저래서야 결코 제 실력을 낼 수 없다. 심연을 물어뜯고 뼈와 고기를 탐닉한 자는 그 댓가로 짐승이 되었다. 교활하고 악랄하나 한 치의 긍지도 품지 못한 자였다. 자신보다 강한 상대에게 순식간에 무너질 자였다.

푸른 마나를 다루는 소년은 강했다. 눈물이 많았지만 유악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소년은 나약한 동조자를 근처에 두고 있었다.


“혼자서는 모두를 지킬 수 없다는 걸 알았구나. 하지만 빠르게 군대를 육성하는 대에는 위험이 따르는 법이지.”


갑옷뿐인 기사가 차고 있던 검을 뽑는다. 속이 비어버린 기사는 투구의 틈 사이로 서늘한 기운을 뿜어내며 부동자세를 유지한다. 검은 창날과 마찬가지로 성에가 슨 채 새파랗게 갈려 있었다. 소금꽃이 핀 것 같았다.


“너희 넷. 동조자를 찔러라. 푸른 마나의 소년이 무너지면 그때 내가 움직이겠다.”


킹과 퀸이 직접 최전선에 나서는 것은 바람직하지만, 때로는 치명적인 위험을 동반한다.

그리고 치명적인 위험이란 대부분 한번 만들어내기는 어렵지만, 한 번 기회를 잡은 이상 절대 피해갈 수 없었다.


“네 머리로 술잔을 만들고 싶구나.”


금관을 쓴 해골들이 가득한 응접실을 빠져나가며 겨울 후작은 중얼거렸다.


***


펑! 산 너머로 어마어마한 마나의 빛이 번쩍였다. 마나의 푸른 빛이 오로라처럼 하늘을 뒤덮었다. A급 헌터가 된 지금이라서 알 수 있었다. 저 정도 힘을 사용할 수 있다는 게 무슨 뜻인지. 그리고 저 정도의 힘을 사용해야 하는 상황이라는 게 무슨 뜻인지도.


“가, 가봐야 하는 거 아니야?”


44호가 15미터급 얼음 골렘의 핵을 쥐어뜯으며 말했다.

67호 역시 불안감 어린 눈길로 고개를 끄덕였다.

안전과 임무만 생각하면 이 자리에 남아있는 것이 맞았다. 저곳에는 신 같은 가진 헌터들이 넷이나 몰려 있다. 괜히 우리가 가 봐야 인질만 더 될 것이다.

“그래도 경계해가면서 다가가는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저분들은 엄청 강하지만, 그렇다고 걱정하지 않을 수는 없잖아.”

알면서도 그렇게 말했다. 스마트폰을 들어 어플에 글을 썼다. -강력한 마나의 빛 관측. 상황 확인 후 보고할 예정. 답글은 전부 무시했다.


“가자.”

67호가 단호하게 내뱉으며 앞장섰다.

“우리는 그냥 버티는 것만으로는 못 살아남아.”

67호의 시야 끝에는 44호가 있었다.

“자기 자리에서 각자 최선을 다한 건 칭찬받을 일이지만 전공이라고 할 수는 없어. 시발, 새로 협상이라도 시도해보려면 일단 나서서 뭐라도 해야 돼.”


마지막 시험이다. 전 시험을 망쳐버린 덕에 100점을 받는다 해도 통과할 수 없다. 50점이나 100점이나 그게 그거다. 우리가 더 이상 우리로 있을 수 없다.

무난한 활약에는 무난한 보상이 고작이다. 시험관을 놀라게 할 정도의 무언가를 찾아내야 한다.


중력을 조작해 몸을 가볍게 했다. 걸음마다 허벅지까지 빠지는 일은 더 이상 일어나지 않았다. 소년소녀들은 눈밭 위를 가벼운 발걸음으로 달려나갔다.


나무 사이를 해치고 달렸다. 어쩌다 보이는 거대한 골렘은 빠르게 헤치웠다. 앞쪽의 야산이 의외로 높지 않았던 건지, 우리 발걸음이 생각보다 빨랐던 건지 몇 번의 전투를 겪었는데도 30분 만에 산 정상에 도달할 수 있었다.


“그래도 골렘에게 원거리 기술이 없어서 다양이야.”

44호가 산 위로 기어오르던 골렘의 손가락을 열선으로 잘라내며 말했다.

“전적으로 동의해. 만약에 이 괴물새끼들이 냉기라도 방사했으면 한 마리 잡는 데 30분은 걸렸을 거야.”

몇 분 만에 얼음 골렘 한 마리를 쓰러트릴 수 있는 건 우리의 실력보다는 압도적인 상성 덕이었다.


기본적으로 크고 느린 놈들이었다. 본래라면 놈들이 도시를 향해 진격하는 것만으로도 헌터들에게 불리한 싸움이 된다. 더 크고 센데다가 수복까지 가능한 놈들을 막아야 하는 입장이 되니까. 하지만 우연찮게도 이곳은 이 나라에게 가장 인구 밀도가 낮은 지역이었다. 민간인 피해를 비교적 덜 걱정하고 움직일 수 있었다.


동시에 우리 셋은, 셋 중에 셋이 원거리 기술 구사와 비행이 가능했다. 느릿한 주먹질과 발길질은 날아서 피하고 중력도검으로 발목을 썰어낸 뒤, 전기로 지지고 열선으로 깎아내면 30미터급도 뚝딱이었다.


쾅! 아래쪽에서 폭탄 터지는 소리가 났다. 이 정도 폭음이면 대전차지뢰였다. 100여 년이 넘게 흐른 지금도 6.25의 잔재는 이 땅에 남아 있었다.


3미터 가량 되어 보이는 골렘 하나가 오른쪽 발목이 날아간 체로 비틀거렸다. 하지만 오래 지나지 않아 얼음 조각들이 자라났다.


“진짜 저렇게 작은 애들은 우리 피하네.”

44호가 중얼거렸다. 원도연이 말한 그대로였다. 작은 놈들은 아예 A급 헌터들에게 적의를 드러내지 않았다. 상대의 마력량을 감지하기라도 할 수 있는 건가?


“뭔가 소름 끼쳐. 움직이는 얼음조각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저런 걸 보면 지성이 느껴진단 말이야.”


67호가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고 교란전격을 쏘아냈다. 우리를 우회하던 3미터 골렘의 몸이 칼바람 속의 생크림처럼 깎여 나갔다. 명치 부근의 핵이 반짝 빛났다.


대형 골렘은 핵이 목과 몸통 사이쯤에, 소형 골렘은 핵이 명치견에 있었다.


띠링, 기다리던 알림이 어플에서 떴다.

-조명탄 일제사격-


조명탄은 20분 정도 간격을 두고 발사되었다. 군에서 뒤쪽 고지 몇 개를 확실히 점령하고 박격포를 설치해낸 것 같다.


피유우우우우웅...


맥 빠지는 소리를 내며 몇 개의 조명탄이 하늘로 솟았다. 등 뒤에서 오랜지색 빛이 터져 나왔다. 시야가 확장되며 주변의 모든 것이 눈에 들어왔다.


“멋있다.”


신기하게도 그 말이 제일 먼저 나왔다. 두려움도 책임감도 사라진 자리를 메운 건 나이에 걸맞는 어린아이 같은 감상이었다.


사방에서 눈발이 휘몰아쳤다. 포성과 마나의 폭발음, 골렘들의 발소리가 바람 소리를 뚫고 들려왔다. 붉은빛 필터를 덧씌운 것 같은 세상을 굽어보며, 우리는 S급 헌터들을 눈으로 쫓았다.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건 서윤이었다. 물론 서윤을 직접 본 건 아니었다. 이 거리에서는 진홍색 머리칼조차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서윤이 불러냈을 시병들은 볼 수 있었다.


캉! 쇳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열두 기의 데스나이트가 동시에 롱소드를 빼들고 30미터급 얼음 골렘의 발목을 찔렀다. 골렘이 비틀거리며 넘어지고, 뼈만 남은 말을 타고 달려온 듀라한 나이트가 골렘의 머리를 일격에 잘라냈다. 야산 위쪽에서는 보석 왕관을 쓴 리치들이 검게 타오르는 불덩이를 날렸다. 70미터급 얼음 골렘이 수증기를 뿜으며 무너지고 스켈레톤 병사 수백 마리를 깔아 뭉겠다. 하지만 스켈레톤 병사들은 수천 마리가 더 남아 있었다. 40미터급 얼음 골렘의 몸을 타고 올라가 검과 방패를 휘두르며 팔다리와 몸통을 깎아 냈다.


“내가 저런 인간 앞에서 당신은 칼 어쩌고 운운했단 말이지.”

44호가 질린 듯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스켈레톤 병사들 사이에서 진홍색 꽃잎과 어둠이 진흙처럼 소용돌이치고, 거대한 몬스터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생전의 색은 검은색으로 덧씌워진 체, 진홍색 안광을 이글이글 뿜었다.


강철 부리와 강철 발톱을 단, 와이번만 한 부패한 까마귀떼가 날아 올랐다. 네 쌍 여덟 개의 다리를 한 100미터급 도마뱀이 검은 왕관을 쓰고 얼음 골렘을 물어뜯었다. 15미터 정도 되는 거인들이 잿빛 불꽃을 갈기처럼 흩뿌리며 얼음 골렘들에게 달려들었다.


“저래서 우리가 아직까지 살아 있던 거네.”


죽은 자들의 군단은 죽지도 못하는 것들을 짖뭉갰다. 50미터가 넘는 초대형 골렘들이 분쇄기에 들어간 얼음처럼 갈려나갔다. 저것들 중 한 두 기라도 바깥으로 나갔으면 도시가 궤멸되었겠지.


펑! 오른쪽에서 불기둥이 솟았다. 잿빛과 서늘함, 눈과 얼음으로 가득 차 있던 시야에 선명한 붉은색과 노란색이 파고들었다. 눈발을 녹이며 수백 미터를 밀려든 열풍에 얼굴을 가려야 했을 정도다.


“고효산이네. 이래서 사람들이 S급 헌터가 뭔 짓을 해도 그려려니 봐 주는 거였구나.”

67호가 홀린 듯한 눈으로 구름까지 올라갈 기세로 치솟는 불기둥을 바라보았다.


수천, 어쩌면 수만의 병사들을 거느린 서윤과 달리, 효산은 일신으로 전장을 휘저었다. 마나의 빛을 머금은 푸른 불씨가 날리면 어김없이 폭발이 일어나고 불기둥이 솟았다. 60미터도 넘을 얼음 골렘 하나가 순식간에 수증기로 변해 날아갔다.


푸른 불씨는 주변의 산소를 집어삼키며 오랜지색으로 부풀어 오르고, 반경 안에 있는 모든 게 수증기와 잿더미로 변했다.


“저기 게이트다.”


S급 헌터들의 활약에 눈이 먼 나와 67호를 44호가 현실로 잡아당겼다. 그래. 우리는 S급 헌터들을 동경하는 소년소녀가 아니라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치는 A급 헌터다.


그 사실을 머릿속에 꼭꼭 새기며 게이트를 눈에 담았다.



재시험 Fin.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1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레플리카 헌터는 많은 것을 바라지 않는다.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117 118화. 레플리카 헌터는 많은 것을 바라지 않는다. FIN. +1 21.06.03 32 2 13쪽
116 117화 +1 21.06.02 28 2 13쪽
115 116화 +1 21.06.01 26 2 12쪽
114 115화 피와 꽃 Fin. +1 21.05.31 31 2 12쪽
113 113화 +1 21.05.28 26 2 12쪽
112 112화 +1 21.05.27 31 2 12쪽
111 111화 +1 21.05.26 31 2 12쪽
110 110화 +1 21.05.25 29 2 12쪽
» 109화 재시험 Fin. +1 21.05.24 27 2 12쪽
108 108화 +1 21.05.21 37 2 12쪽
107 107화 +1 21.05.20 41 2 12쪽
106 106화 +1 21.05.19 44 2 12쪽
105 105화 +1 21.05.18 30 2 12쪽
104 104화 선물 Fin. +1 21.05.17 38 2 13쪽
103 103화 +1 21.05.14 26 2 12쪽
102 102화 +1 21.05.13 35 2 12쪽
101 101화 +1 21.05.12 31 2 12쪽
100 100화 +1 21.05.11 37 2 12쪽
99 99화 +1 21.05.10 27 2 12쪽
98 98화 +1 21.05.07 41 3 12쪽
97 97화 +1 21.05.06 38 3 12쪽
96 96화. 짧은 밤 fin. +1 21.05.05 38 2 12쪽
95 95화 +1 21.05.04 34 3 12쪽
94 94화 +1 21.05.03 36 3 12쪽
93 93화. 중력도검 Fin. +1 21.04.30 36 3 12쪽
92 92화 +1 21.04.29 41 3 12쪽
91 91화 +1 21.04.28 36 2 12쪽
90 90화 +1 21.04.27 46 3 12쪽
89 89화 +1 21.04.26 35 3 12쪽
88 88화 +1 21.04.23 41 3 12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