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훼룡 님의 서재입니다.

레플리카 헌터는 많은 것을 바라지 않는다.

웹소설 > 일반연재 > 현대판타지, 판타지

훼룡
작품등록일 :
2020.12.29 11:21
최근연재일 :
2021.06.03 19:00
연재수 :
117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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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8
글자수 :
636,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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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6.01 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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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글자
12쪽

116화

DUMMY

레플리카 헌터는

많은 것을 바라지 않는다


116화


왼발 아래서 기사가 꿈틀거렸다. 중력조작으로 이 녀석의 몸무게를 몇 배로 늘려 놨으니, 쉽게 움직이지는 못하겠지.


“소중한 부하야? 아니면 한낯 소모품이야?”


미친 듯이 창을 휘두르던 겨울 후작이 우뚝 멈춰 섰다. 처음 달려들었던 갑옷 기사 다섯 기 중 멀쩡하게 서 있는 건 고작 두 기였다. 그나마 둘 중 하나는 한쪽 팔이 완전히 우그러져 있었다.


겨울 후작이 톱니바퀴 돌아가듯이 고개를 돌린다. 창을 한쪽으로 늘어트리고, 많은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은 목소리로 입을 연다.


“그들은 살아서도 죽어서도 내게 모든 것을 바쳤다. 아느냐? 귀족 가문의 묘지에는 기사들을 위한 자리가 마련되어 있음을?”

“...”

“살아생전 나는 그들에게 충분한 보답을 내렸다. 죽은 후 소모품으로 쓰일 몫까지도. 그러니 지금은, 한낯 소모품이다. 그들이 그리 써 달라 말하였으니.”


43호의 눈빛이 흔들린다. 저런 소리를 들으니까 꼭 내가 악역이 된 것 같잖아. 불쾌감을 실어 중력대검을 내리찍었다. 두꺼운 등갑을 가볍게 뚫고 들어갔다. 손목에 힘을 주어 양 옆으로 돌렸다. 판금이 압도적인 질랑 앞에서 알루미늄 호일처럼 찢어졌다.


“내가 다쳐서, 뛰지를 못하겠어. 그래도 저 갑옷 두 개 정도는 어찌어찌 부술 수 있을 거 같아. 당신이 골렘을 불러오지만 않는다면, 당신이 내 육각미늘방패를 다 부수기 전에 내가 당신 등에 중력도검을 내려칠 거야.”


“기다리고 있으마. 어차피 이 녀석 다음은 너다.”


겨울 후작이 다시 고개를 돌린다. 격정에 차 휘두르던 창의 궤적은 어느새 기계적으로 변해 있다. 하지만 더 날카로웠고, 더 효율적이었다.


그 등까지의 거리는 약 서른 발자국. 한 호흡에 돌파할 수 있는 거리였지만, 43호와 겨울 후작 사이에는 두 기의 갑옷 기사가 있었다.


등허리와 옆구리를 짚었다. 상쳐가 깊었다. A급 헌터의 생명력이 아니었다면 당장 쓰러져 죽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왼팔은 걸래짝이었고, 오른쪽 다리는 돌처럼 굳었다. 뺨이 따가웠다. 44호가 걱정할 텐데, 그 생각이 들었다. 온 몸을 창백하게 훑고 간 크고 작은 자상들은 차마 다 언급하기도 귀찮았다.

그나마 저 기사들이 배기 공격을 주로 시도해서 다행이었다. 성에꽃은 약한 헌터든 강한 헌터든 공평하게 번지며 역량을 깎아먹으니 더 효율적이라 생각한 거겠지.


“너흴 죽이고, 겨울 후작을 몰아내고, 미르한을 구할 거야. 44호는 고은유의 정수를 받아드릴 거고, 미르한과 동시에 나을 거야. 그럼 미르한이 저 겨울 후작을 갈갈이 찢어놓겠지.”


구름 너머의 별들에게 그런 내용의 소원을 빌었다. 중력제어로 몸무게를 낮췄다. 왼쪽 다리만으로 몸을 제어하려면 몸이 좀 더 가벼워야 했다.


탁, 몸이 부드럽게 바람을 갈랐다. 눈송이들이 가까워지고,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앞쪽의 기사가 과감하게 한 발 내딛으며 성에 낀 기사검을 내리쳤다. 한 걸음 뒤의 기사는 딱 반의 반 호흡 뒤에 검을 내질렀다. 하나를 막으면 다른 하나를 맞을 수밖에 없는 절묘한 호흡이었다.

중력대검의 넓은 면과 긴 길이를 활용해 한 번에 두 개의 검격을 흘려내는 걸 자주 보여 줬더니, 기사놈들이 학습을 해냈다.


이미 역장 방패를 불러내기에는 늦었다. 왼팔이 언제까지 버텨 줄 수 있을까? 결국 또 모험이었다.


더더욱 빠르게 돌진했다. 기사검을 치켜올리던 갑옷 눈가리개 사이에서 창백한 빛이 일렁였다. 막 가속하는 내려 배기에 수정질 왼팔을 가져다대며 막았다. 쩍, 소리가 나고, 팔꿈치에 커다란 금이 갔다. 하지만 아직 어찌어찌 붙어 있었다. 나와 놈이 교차하는 순간, 이 둘을 뚫어낼 수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뒤쪽에 서 있던 기사의 찌르기가 눈앞까지 다가왔다. 역장도검의 넓은 날로 뒤쪽 기사의 찌르기를 흘려보낸 뒤, 머리 위로 크게 휘두르며 놈의 투구를 후려쳤다. 압도적인 질량 앞에서 투구는 찌그러지며 부서져 나가고, 텅텅 빈 갑옷 안에서 창백한 가스가 훅 피어올랐다.


그대로 몸을 훽 돌렸다. 앞쪽 기사가 두 번째 기사검을 빼들고 있었다. 동시에 검을 휘둘렀다.

놈이 조금 더 빨랐지만, 내 검이 더 크고, 더 길고, 비교도 안 되게 무거웠다. 손쉽게 성에 낀 기사검을 부수고 놈의 어깨로 떨어져 내렸다. 판금갑옷 상반신이 대각선으로 쪼개졌다.

그 때, 놈은 왼손에 들고 있던 기사검을 내 배에 찌르고 있었다.


갑옷이 무너져가는 걸 보면서, 상상 외의 광경에 손을 떨었다. 경질화조차 제대로 하지 못한 빈틈을 파고든 공격이었다. 생각이 짧았다. 나는 이 녀석들을 돌파하고, 미르한을 죽이지 못하게 막아야 이기는 거다. 반대로 이 녀석들은 어떻게든 나를 막기만 하면 이기는 거다. 그래. 이 녀석은 처음부터 중력도검의 배기를 막아낼 생각이 없었다.


금속성 어린 호쾌한 비웃음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자신을 승자라고 선언하듯이 창백한 가스가 축포처럼 솟았다.


“닥쳐.”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기사검 칼날을 꼭 쥐었다. 쉽사리 빠져나오지 않았다. 칼이 깊숙이 밖혀서가 아니었다.


시야 오른쪽 상단에 잔여 마력 게이지가 거의 바닥이었다. 굳이 그걸 보지 않아도 느낄 수 있었다.

나는 너무나도 지쳐 있었다.

의지의 문제가 아니었다. 음식 냄새를 맡는 순간 배가 미칠 듯이 고플 것을 예상할 수 있었다. 심장은 마나를, 뇌는 포도당을 탈탈 털어 비워냈다. 그러니까 이건, 물리적 의미의 탈진이었다.


천만다행히도 기사검이 결국 뽑혀 나왔다. 중력도검 크기와 무게를 줄이며 회수한 마나로 상처 주변을 경질화시키며 성에꽃을 막아냈다.


“아무래도 자네가 먼저 지친 것 같군.”

겨울 후작이 역장 방패를 향해 휘두르던 창을 멈췄다. 이제 언제라도 부술 수 있을 거라는 선언이었다. 만족스런 식사를 마친 것 같은 표정으로, 그가 창 끝을 이쪽으로 돌렸다.


“...닥쳐.”


깁스를 한 것 같은 오른발을 대신해 왼발로 눈밭을 박찼다. 목을 노리고 중력도검을 한껏 쳐올렸다. 나는 지쳤지만, 중력도검은 중량을 만들기 위해 운동에너지와 위치에너지를 더할 필요가 없었다. 저 턱뼈가 반으로 갈라지고 나면, 저놈도 조금 더 좋은 얼굴을 할 거라고 믿었다.


깡! 쇳소리가 났다. 눈송이들이 얼굴 위로 하나 둘 떨어져 내렸다. 금속 창대가 시야 구석에서 한 차레 움직였다. 이마가 아팠다. 약간이지만 두개골이 함몰된 것 같았다. 성에 낀 창날을 이용한 공격이 아니어선지, 피가 얼지 않고 흘러내렸다. 이마를 타고 흐르며 눈가를 뱅 돌아 뚝뚝 떨어졌다. 생각보다 훨씬 뜨거웠다.


그때, 귓가에서 피어싱이 울었다.


“피해.”



***


마나는 헌터의 의지에 사역된다. 간절한 바램, 불꽃 같은 욕망, 절실한 복수심, 뭐라도 좋으니 강력한 감정이 불러일으킨 의지가 보이지도 않는 마나를 손발처럼 다루며 현실에 변화를 일으킨다.


제발, 제발 되라. 이 정도는 해줄 수 있잖아. 내가 지금까지 얼마나 성실하게 살았는데.

특별한 사람들을 만났지.

선택의 순간에 과감한 승부수를 던질 수 있는 43호.

구름을 가르는 벼락 같은 빛을 내는 67호.

그런 특별한 사람들의 곁에 있고 싶었어. 이 땅에서 살아 숨 쉬며 특별한 삶을 살아가고 싶었어. 하지만 나는 내가 그다지 특별하지 않다는 걸 알아.


“67호가 황록색 마나로 상쳐를 안정화시키는 스킬을 만들었을 때, 내가 어느 정도 수준이었더라? 열선 두 세 개를 간신히 띄워 올렸던 거 같은데.”


44호는 씁쓸하게 웃었다. 하지만 그 눈에는 여전히 이지의 빛이 남아 있었다.


“그런 년놈들을 좋아하게 됐지.”

가슴이 막 벅차고 설랬어. 눈물이 나올 것처럼 서러웠어. 나는 43호처럼 검을 휘두를 수도, 67호처럼 압도적인 힘이 있는 것도 아니었으니까.

그래서 성실하기로 했어. 재능이 없어서 못하는 건 어쩔 수 없지만, 노력을 안해서 밀리는 건 참을 수가 없었어. 재능을 가진 애들 옆에 계속 서 있으려면, 그 애들의 재능을 대신할 수 있을 만큼 노력해야 했어.


마나수용도를 이용한 붕괴 유도 기술, 한 번에 수십 발을 띄워 올릴 수 있는 열선의 구, 높은 마력 패턴 일치도를 십분 활용한 전투 방식, 이것들로 쌓아 올린 지금의 나.


44호는 핏줄 안에서 헛도는 붉은 정수를 연청색 마나로 애워쌌다. 붉은 정수에 신경을 기울이는 동시에, 연청색 마나를 움직여 붉은 정수를 얇은 실처럼 뽑아냈다.


나도 잘하는 게 있었지. 마력 패턴 일치도가 높다는 건 훌륭한 재능이었지. 붕괴 유도 기술을 익히며 마나와도 친해졌지. 얘들이 어떻게 흐르는 건지 이제 조금이나마 알 것 같기도 해.


붉은 정수가 낚싯줄에 걸린 물고기처럼 몸을 뒤틀었다. 처음으로 44호의 의지에 반응했다. 피를 토할 뻔 했지만, 꾹꾹 참으며 연청색 마나와 뒤섞었다. 배배 꼬아 서로 스며들게 했다.


“아프다.”


마나가 더 필요했다. 짙은 피에 힘입어 빠르게 회복되고 있었지만, 모세혈관에까지 들어찬 붉은 정수를 전부 전부 애워싸고 스며들게 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성에꽃의 진로를 차단하던 67호의 황금색 마나를 빨아들였다. 이미 44호의 몸 안에 들어온 마나는 44호의 의지에 복종했다. 성에꽃이 다시 번지기 시작했다.


“할 수 있어. 하고 싶어. 해내고 말 거야. 우리 셋 다 같이 살아남아서 보란 듯이 누리고 살 거야.”


67호가 얼음 골렘의 주먹에 빗겨맞는 게 눈에 들어왔다. 집어던진 찰흙처럼 뒤로 날아가 나무를 몇 개나 몸으로 부러드리고서야 멈춰 섰다. 강인하던 친구의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다.


저 멀리서 43호가 다리에 박힌 기사검을 뽑았다. 피가 눈밭 위로 분수처럼 솟구치고, 43호의 다리가 수정체로 변했다.

저래서야 당장 움직이지도 못할 텐데.


옆구리가 시렸다. 뼛속까지 시려서, 당장이라도 마나를 퍼부으며 침묵시키고 싶었다. 척추까지 으슬으슬 떨리는 게 이대로라면 진짜 얼어 죽을 것 같았다.


하지만 지금 찾아오는 색다른 권능감은, 이 고통이 헛되지 않다고 속삭였다. 핏줄을 따라 흐르는 붉은 정수가 세찬 물줄기처럼 내달렸다. 연청색 마나의 유도가 없이도 44호의 혈도를 타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래, 이제 너도 그렇게 내 말을 들어.

내 소중한 사람들이 죽어가. 아주 아주 특별한 사람들이야. 도와줘.


구하고 싶다는 간절함과 적을 향한 분노와 새로운 힘을 얻었다는 고양감이 머릿속에서 황홀하게 터졌다. 희망의 끈 한 줄기는 강철 케이블만큼 튼튼했다. 수천 개의 썩은 동앗줄 중 하나, 내가 잡은 게 진짜였다.


그리고 44호는 마나를 사역함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을 새삼 되새겼다.

“난 할 수 있어.”

의지와 확신이 이능을 사역하고 현실에 기적을 일으킨다.


아주아주 짧은 순간이었다. 붉은 정수가 연청색 마나와 휘감겼다. 심장에 스스로의 공간을 만들며, 새 주인의 명을 따를 준비를 했다. 하얀색에 가까운 연청색 마나를 역으로 잡아먹으며 자신의 세를 불려 나갔다.


44호는 희열에 손을 떨며 43호의 전장을 바라보았다. 대기에서 페부를 통해 흡수하는 푸른 마나가, 심장을 거치고 덧씌워져 열기를 띄었다. 넓어지기만 하던 성에꽃이 데친 이파리처럼 움츠러들기 시작했다.


“열선.”


화르르르르르르륵!


수천 번이고 사용했던 스킬이 익숙지 않은 빛을 띄고 눈앞으로 떠올랐다. 달 같던 열선의 구는 오후 다섯 시경의 태양처럼 빛났다. 플레어를 화산처럼 뿜어내며 요동쳤다.


저 멀리서 성에 낀 창을 든 인형의 마수가 43호를 후려치는 게 보였다. 인형의 마수가 미르한에게 창을 겨누는 것도 보였다.


한 방에 잡아야 했다. 남아있는 모든 마력을 퍼부어서라도.


여기서 얼어 죽는 한이 있더라도.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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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7 118화. 레플리카 헌터는 많은 것을 바라지 않는다. FIN. +1 21.06.03 32 2 13쪽
116 117화 +1 21.06.02 28 2 13쪽
» 116화 +1 21.06.01 26 2 12쪽
114 115화 피와 꽃 Fin. +1 21.05.31 31 2 12쪽
113 113화 +1 21.05.28 26 2 12쪽
112 112화 +1 21.05.27 31 2 12쪽
111 111화 +1 21.05.26 31 2 12쪽
110 110화 +1 21.05.25 29 2 12쪽
109 109화 재시험 Fin. +1 21.05.24 26 2 12쪽
108 108화 +1 21.05.21 37 2 12쪽
107 107화 +1 21.05.20 41 2 12쪽
106 106화 +1 21.05.19 44 2 12쪽
105 105화 +1 21.05.18 30 2 12쪽
104 104화 선물 Fin. +1 21.05.17 38 2 13쪽
103 103화 +1 21.05.14 26 2 12쪽
102 102화 +1 21.05.13 35 2 12쪽
101 101화 +1 21.05.12 31 2 12쪽
100 100화 +1 21.05.11 37 2 12쪽
99 99화 +1 21.05.10 27 2 12쪽
98 98화 +1 21.05.07 41 3 12쪽
97 97화 +1 21.05.06 37 3 12쪽
96 96화. 짧은 밤 fin. +1 21.05.05 37 2 12쪽
95 95화 +1 21.05.04 34 3 12쪽
94 94화 +1 21.05.03 36 3 12쪽
93 93화. 중력도검 Fin. +1 21.04.30 36 3 12쪽
92 92화 +1 21.04.29 41 3 12쪽
91 91화 +1 21.04.28 36 2 12쪽
90 90화 +1 21.04.27 46 3 12쪽
89 89화 +1 21.04.26 35 3 12쪽
88 88화 +1 21.04.23 41 3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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