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훼룡 님의 서재입니다.

레플리카 헌터는 많은 것을 바라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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훼룡
작품등록일 :
2020.12.29 11:21
최근연재일 :
2021.06.03 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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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6,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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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5.17 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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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쪽

104화 선물 Fin.

DUMMY

레플리카 헌터는

많은 것을 바라지 않는다


104화


내려올 때는 5일이 걸렸지만, 올라갈 때는 몇 시간이면 충분했다.

시계처럼 생긴 거대한 원반이 무서운 속도로 떠올랐다. 연구계 헌터 몇몇이 중심축을 붙들고 조종했다. 불행하게도 그들의 조종 실력은 간신히 원반이 뒤집히지 않을 정도에 불과했다.

물론 변변찮은 조종간 하나 없이, 격자무늬 돌판에 새겨진 이상한 문자를 누르며 앞뒤좌우도 분간하기 힘든 원반을 무사히 움직이고 있다는 것은 무척이나 대단한 일이었다.

하지만 고은유와 이서윤은 애초에 원반 가까이 다가가지도 않았다. 비행이 가능한 헌터들은 가만히 앉아서 목적지까지 도달하기를 기다리는 대신, 전부 스스로 스킬을 써 가며 피로를 무릅쓰고 날아가기를 택했다.

굳이 그 대단함을 체험해보고 싶지는 않은 모양이다.

“시발. 토할 거 같아. 저녁 좀 조금만 먹을걸.”

67호가 매스꺼운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곧 죽을 것처럼 얼굴이 새파랬다.

“난 이미 토했어. 한결 나아.”

44호가 배에 창이 꽂힌 것 같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지금도 원반 가장자리의 난간을 붙잡고 지상을 향해 웩웩거리는 헌터들 투성이였다. 원반이 거세게 흔들리는 탓에, 잘못 뿜어내면 옆사람의 얼굴이나 제 얼굴에 뒤집어쓸 수도 있었다.

“그러게 나처럼 저녁을 거르지 그랬어.”

43호는 승리자의 미소를 지었다.

“그래서 한결 나아?”

“방금 위산까지 다 토한 참이다. 목구멍 다 벗겨진 거 같아. 화끈거려.”

잃은 게 더 많은 피로스의 승리였다.


이럴 줄 알았으면 중력 마법이나 더 연습해놓을걸. 43호는 아린 속을 쓸어내리며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 물론 여기서 조금 더 많은 마력을 쌓았다고 수km 상공까지 날아오르는 건 불가능했다. 하지만 뭐가 어쨌든 분한 건 분한 거였다.


“좀 이따가 근처 하늘섬에서 쉰데!”

44호가 여섯 번이나 넘어져가며 중앙의 연구계 헌터들에게 다가가 들은 대답이었다.

“그 ‘좀’이 언제인데? 지금 내 몸뚱이하고 정신을 이 빌어먹을 하늘원반 멀미가 좀먹어가고 있다고! 이대로라면 전류 뿜어내는 법도 까먹을 거 같아!”

67호가 우울한 얼굴로 욕설을 퍼부었다.

“약 30분 뒤!”

거센 바람 소리를 뚫고 44호가 외쳤다. 주변의 C급, B급 헌터들이 30분을 외치며 난간을 쥔 손에 단단히 힘을 주었다.

그래. 30분 뭐 못 버틸 거 아니지. 근데 좀만 낮은 섬에서 쉬면 안 되나? 봐봐. 지금 옆에도 멀쩡한 섬 하나가 있잖아. 어? 방금 뭐였지?


“와이번이다!”


B급 헌터 하나가 품 안의 수정구에 대고 소리쳤다. 옆 섬의 그림자 사이에서 뭔가 움직인다 싶더니 거대한 그림자들이 미끄러져 내려왔다. 일곱 마리의 와이번이 편대 비행을 하며 원반 근처를 맴돌고 있었다. 어두운 가죽 색 탓에 잘 보이지 않았다.


“와이번은 얼마나 강한가요?”


종이새를 날리던 B급 헌터가 다급하게 대답했다.

“성체 기준으로 갑각 지네하고 비슷한 정도. 그런데 빠르고 방향 전환도 잘해서 잡기는 훨씬 어려워.”


대부분의 헌터들이 근거리전에 특화되어 있다는 걸 새삼스럽게 실감했다. 듣자하니 단순히 힘을 겨룬다면 반충헌은 주먹 한 방에 와이번을 때려잡을 수도 있다고 한다.


“그럼 시발, 지금 뭐 하고 있는 건데?!”

67호가 최소한의 경어조차 붙이지 않고 쏘아붙였다. 난간 너머로 고개를 내밀고, 점점 가까워져 오는 그림자들을 따라 고개를 이리저리 돌렸다.


“비행마법이 그렇게 쉬운 게 아니야. 마도구 없이 자유롭게 공중전이 가능한 헌터는 세계적으로도 손에 꼽는다고.”

“시발. 여기 모인 사람들이 그 세계적인 천재들 아니었어?”


쐐에에에에에에엑! 와이번 한 마리가 독수리처럼 내려꽃혔다. 연구자들은 금빛으로 빛나는 문자열을 미친 듯이 눌렀다. 원반이 한쪽으로 크게 기울고, 와이번이 흉흉한 발톱이 난간 옆을 스치고 사라졌다.


“좀만 더 올라가면 바로 착륙할 거야!”

연구자들이 고래고래 외쳤다. 44호는 난간을 붙잡고 열선의 구를 어깨 위로 띄워 올렸다.

“미치겠네. 어지러워서 아무것도 못하겠어.”

눈동자에 초점이 뱅뱅 돌았다. 사시라도 온 것 같았다. 결국 44호는 열선의 구를 흩었다.


“또 온다!”

“진짜 미치겠네. 아주 끝까지 말썽이야!”

원반이 옆으로 기울며 아찔한 곡예비행을 선보였다. 몸이 이리 쏠리고 저리 쏠리며 물풀처럼 흔들렸다. 대형 놀이기구를 타는 것 같았다. 손을 놓친다면 7천 미터 아래로 떨어지다는 게 아주 유쾌했다. 아직까지 튕겨나간 사람이 없다는 것에 의의를 두기로 했다.


덜컹! 아무래도 이번 와이번은 좀 끈질겼다. 반대편 난간에서 굉음이 들려왔다. 43호는 역장도검을 불러낼까 고민하다, 제대로 배기는커녕 가까이 가지고 못할 걸 깨달았다.


익폭이 20미터는 되는 것 같았다. 흉악한 발톱이 석재 원반의 난간과 가장자리를 으스러트리며 움켜쥐었다. 거대한 날개를 요란하게 펄럭일 때마다 광풍이 일었다. 난간을 놓친다면 곧바로 날아가겠지.


“잡으세요!”

43호는 부들거리는 C급 헌터의 팔을 꼭 붙들고, 옆 난간을 단단히 쥐게 했다.

연구계 헌터들은 중앙을 떠나지 않았다. 원반을 좌우로 회전시키며 와이번이 억센 발톱을 놓도록 유도했다. 하지만 이 원반의 출력은 와이번의 날개짓다 열등한 것 같았다.


“43호. 잡아줘. 내가 쏠게. 지금은 맞출 수 있어.”


44호의 허리를 꼭 껴안았다. 신체를 최대한 강화하고 팔뚝을 경질화시켜 만약의 만약까지 대비했다.


와이번이 용을 닮은 아가리를 벌리고 세로로 찢어진 눈을 연구계 헌터들에게 향했다. B급 헌터들이 황급히 방패를 치켜들었다. 넘어지고 구르면서도 연구계 헌터들 앞을 막아섰다.


때마침 44호의 열선이 불을 뿜었다. 질기지만 얇은 날개 피막을 열선이 길게 쓸었다. 됐다, 속으로 환호성을 내질렀다.


“왜 아무 일도 없어? 44호. 제대로 쏜 거 맞아?”

“마, 맞아. 아닌가? 이게 무슨?”


방금 공격은 강철굼뱅이의 피갑도 관통할 일격이었다. 비늘 덮힌 날개 따위가 막아낼 열선이 아니었다. 하지만 뱀 같은 무늬의 피막이 갈갈이 찢겨나가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약간의 그을린 자국만 남아 있었다. 키륵, 와이번이 우리를 비웃은 거 같았다.


“와이번도 일단 용종이라서 마법계 공격이 거의 안 통해. 열기랑 냉기랑 전기에 내성도 강해서...원거리 공격은 사실상 안 먹힐 거야.”

종이새를 날리던 헌터가 힘겹게 외쳤다.


“아니 시발 무슨-”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물리공격은 닿지도 않는 놈을 물리공격만으로 잡아야 하다니. 이게 무슨 등신 같은 상황이야.


“에이 씨. 통하나 안 통하나 보자. 저 새끼도 눈알에 전기 맞으면 비명은 지르겠지.”


67호가 호기롭게 외치며 전류를 방사했다. 밤하늘에 희고 푸른 빛이 요란하게 튀었다. 유도류가 주변으로 떨어져서 C급 헌터들이 황급히 피했을 정도였다. 하지만 와이번은 비늘을 세우며 67호의 전류를 대부분 대기 중으로 흩어냈다.

키륵, 다시 한 번 놈이 우리를 비웃었다. 저 너머에서 세 마리가 더 다가오고 있었다.


“이서윤 님! 언제 오십니까?”

B급 헌터가 수정구슬에 대고 울부짖었다.


***


43호는 싱그러운 풀밭 위에 드러우며 거친 숨을 내쉬었다. 44호도, 67호도 예외는 아니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한 명도 죽기 않았다. 이서윤은 늦지 않았고, 와이번들은 서윤이 가까이 오자마자 다 잡은 원반을 내버리고 도망쳤다.

고은유는 이를 바득바득 갈며 한숨을 내쉬었다. 세계적으로 이름 높은 콘체른 길드가 와이번 몇 마리를 어떻게 못 했다는 소문이 나는 건 상상만으로도 끔찍했다. 물론 제대로 된 전투 자체가 불가능한 상황이었지만, 그런 상황을 만들지 않는 것도 실력이었다.


“돌아가면 원거리 무기부터 연구해야겠어. 양산이 가능하도록.”

“어떤 사양을 원하십니까?”

벗어던진 옷가지처럼 늘어져 있던 연구계 헌터가 비척비척 일어나 고용주의 다리 곁에 달라붙었다.

“바람 마법을 응용해서 압축공기를 만들고, 금속 탄두를 발사하는 거야.”

“그런 무기는 와이번에게 씨알도 안 먹힐 것 같습니다. 고블린 정도나 견제할 수 있으면 다행일 겁니다.”

“그럼 마석을 이용해. 마나를 마법진을 이용해서 전류로 바꿔. 이동식 레일건을 만들 거야.”

“양산까지는 몰라도 일선 배치까지는 어찌어찌 가능할 것 같습니다. 예산은 별 문제 없을 겁니다. 문제는...반동입니다..”

“왜? C급 중위권만 되도 감당할 수 있을 거 같은데?”

“헌터가 감당해도 원반이 감당하지 못할 겁니다. 그대로 뒤집혀버릴 수도 있습니다. 튜브 위에서 갑자기 한쪽이 무거워지는 상황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럼 차라리 마도구 활을 연구해 봐. 화살도 마도구로 만들 수 있잖아. 창고에서 S급 활 있는 대로 꺼내 줄 거니까 분석해봐.”

“진심이십니까?”

“어.”

연구계 헌터가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 분노하셨습니다. 마석 사용을 허락해주신다면, 차라리 바람 마법을 응용한 중소형 비행장치를 만드는 게 훨씬 효율적입니다. 저희 헌터들이 싸울 수 있다면 와이번 발목 정도야 쉽게 잘라버릴 수 있습니다. 무기 개량은 늘 이뤄져야 하겠지만, 잘 싸울 수 있는 환경 조성이 더 필요합니다.”


조마조마한 대화가 끝났다. 다행히도 고은유는 연구계 헌터의 대답을 받아들였다.

“여기서 쉬었다 간다. 이 섬에는 와이번도 골렘도 없으니까 다들 편하게 쉴 수 있도록. 아, 너희 셋은 나 좀 보자.”


세 클론과 고은유는 10분 가량 걸었다. 별빛 총총한 초원 위로 상쾌한 바람이 불었다. 무릎까지 자란 풀들이 사르르 사르르 흔들렸다. 여기저기서 풀벌래 우는 소리가 났다.


“44호.”

“네.”

“감사히 여겨.”

“네?”

“지금까지 누구도 받지 못한 은혜야. 잊지 마. 내가 지금 뭘 주는 건지.”


고은유는 44호와 마주보고 앉았다. 당혹스러운 눈빛을 감추지 않는 44호와 달리, 67호는 아, 하고 중얼거리며 주변을 경계하기 시작했다.


“시발. 너 이따가 이야기해.”


43호는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67호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졌다. 당황과 옅은 모멸감, 그리고 지독한 안타까움이 차레로 떠올랐다 사라졌다. 그 중에 분노는 없었다. 감정이 옅은 67호는 빠르게 지난 2주간의 상황을 분석하고 합리적인 판단을 내렸다.

여전히 44호의 머리는 은발이었다. 붉은 기운이 아주 약간 맴돌았지만, 일치율은 아직 90%를 넘을 게 분명했다. 이대로라면 67호가 그리는 미래는 이뤄지지 못한다.

어느 새벽 바람결에 들려온 3년 이야기. 차라리 43호가 67호 자신을 팔아넘겼다면 마음껏 화라도 낼 수 있었겠지.


44호는 당황하며 고은유가 이끄는 대로 몸을 움직였다. 소맷자락을 걷고 고은유의 손목 동맥과 자신의 손목 동맥을 위아래로 맞댔다. 고은유의 손목은 달권 쇠처럼 뜨거웠다. 미간을 찌푸리고 이를 악물었다. 입 밖으로 신음이 새어나가지 않도록.


“아무것도 하지 마. 그냥 받아드려.”


고은유는 눈을 감았다. 두근, 심장 박동을 따라 정수를 가는 실처럼 풀어냈다. 이윽고 정수가 손목 동백에 도달한 순간, 아주아주 얇은 실과 같은 형태로 가닥가닥 스며나왔다.


정수를 따라 주변의 마나가 요동쳤다.

43호는 그 광경에서 한치도 눈을 때지 못했다. 고은유가 실수를 할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저 신비할 따름이었다.


실처럼 뽑혀나온 정수가 모여들어 콩알만 한 붉은 구슬의 형태를 이뤘다. 이글거리는 화마를 뭉쳐놓은 것 같았다.


한번 고은유에게서 뽑혀나온 구슬이 다시 실처럼 풀려나갔다. 셋으로 넷으로 갈라지며 나뭇가지처럼 덩굴처럼 뻗어 나갔다. 머리카락보다도 얇게, 어둠 속을 비추는 붉은빛과 그에 따라 움직이는 마나가 아니라면 알아차리지도 못할 만큼.


이윽고 고은유의 정수는 천천히 44호의 손목을 뚫고 들어가기 시작했다.


선물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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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6 117화 +1 21.06.02 28 2 13쪽
115 116화 +1 21.06.01 26 2 12쪽
114 115화 피와 꽃 Fin. +1 21.05.31 32 2 12쪽
113 113화 +1 21.05.28 26 2 12쪽
112 112화 +1 21.05.27 32 2 12쪽
111 111화 +1 21.05.26 31 2 12쪽
110 110화 +1 21.05.25 29 2 12쪽
109 109화 재시험 Fin. +1 21.05.24 27 2 12쪽
108 108화 +1 21.05.21 38 2 12쪽
107 107화 +1 21.05.20 41 2 12쪽
106 106화 +1 21.05.19 44 2 12쪽
105 105화 +1 21.05.18 30 2 12쪽
» 104화 선물 Fin. +1 21.05.17 39 2 13쪽
103 103화 +1 21.05.14 26 2 12쪽
102 102화 +1 21.05.13 36 2 12쪽
101 101화 +1 21.05.12 31 2 12쪽
100 100화 +1 21.05.11 38 2 12쪽
99 99화 +1 21.05.10 27 2 12쪽
98 98화 +1 21.05.07 42 3 12쪽
97 97화 +1 21.05.06 38 3 12쪽
96 96화. 짧은 밤 fin. +1 21.05.05 38 2 12쪽
95 95화 +1 21.05.04 35 3 12쪽
94 94화 +1 21.05.03 36 3 12쪽
93 93화. 중력도검 Fin. +1 21.04.30 37 3 12쪽
92 92화 +1 21.04.29 42 3 12쪽
91 91화 +1 21.04.28 36 2 12쪽
90 90화 +1 21.04.27 46 3 12쪽
89 89화 +1 21.04.26 35 3 12쪽
88 88화 +1 21.04.23 41 3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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