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혈천(6)
처음 의문이 들었을 순간은
주먹에 맞아 바위에 깔렸을 때였다.
과거 이금의 아버지와 전대 천마를 포함한
마교의 수 많은 사람들이 죽었을 때 죽은 시신들의
몸에 권이나 장으로 낸 구멍이 나 있었다는 이야기
평소였다면 시신들에 왜 그런
이상한 모양의 상처가 있었을까
하는 작은 의문을 가지는 정도였을 테지만
혈천과의 싸움은 그 의문을
조금 크게 생각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이 정도의 파워라면 평범한 사람은
빗겨 맞는다 해도 몸이 터지겠는데?
현경이라는 높은 경지에 올랐던
전대 천마와 이금의 아버지
그들을 죽일만한 존재라면
적어도 동등한 경지 혹은 그 이상의
경지에 오른 고수여야 할 텐데
혈천은 그 조건에 부합하는 몇 안되는 인물이었다.
그리고 거기에 더해 하나 더 추가된 의문은
그가 처음부터 이곳에 온 목적이 따로 존재하는 듯
눈앞의 이루를 치워버리자 마자
이금을 데려가려 했다는 거였다.
이것은 일부러 이금을 노리는 이유가 있는 게
아니라면 이해하기 힘든 행동이었다.
단순한 인질...이라기에는 조금 이상한데
왜 굳이 이금을 노리는 거지?
하지만 이때까지는 가벼운 정황을
의심하는 것에 불과했기에 이루는 그저
간단하게 물어볼 생각 정도만 가지고 있었다.
혹시 마교에서 발생한
7년 전 일에 대해 아는 게 없는지
적당히 제압한 다음에 물어볼까
허나 이 의구심이 확신으로 바뀐 결정적 이유는
순간 얕은 목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었다.
이 정도 상처를 입은 건...
전대 천마를 죽였을 때 이후로 처음인가
검으로 옆구리 쪽을 베여
허리에 큰 부상을 입은 채 뒤쪽으로 물러난
혈천에게서 들려온 정체 불명의 목소리
이것은 입으로 내뱉은 말이 아닌 그의 속내였다.
아니 잠깐 방금...무슨?
전대 천마를 죽였다고?
이 세계에 넘어온 이후 처음으로
들려온 다른 사람의 속 마음
안 들릴 때는 언제고 또 이렇게 갑자기
들려오다니 이게 대체 무슨 일인가 싶었지만
전대 천마를 죽였다는 속 마음이 들린 이후
다른 단어나 문장은 더 이상 들려오지 않았다.
더 이상 들려오지는 않는데...
왜 저 남자의 속 마음이 들려온 거지?
원했던 결과는 아니었지만
나름대로 긍정적인 상황이라 판단한
이루는 잠시 동안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했다.
몇 가지 의문점들이 남아 있기는 하지만...
마교에서 일어난 일의 배후를 알게 되었다는 건 좋은 일이지
이금의 아버지와 전대 천마에 얽힌 이야기들은
나중에 한번 찾아볼 계획이 있었지만
이렇게 뜻밖에 범인을 찾게 될 줄은 몰랐다.
안 그래도 조금은 찾아 볼까 생각했는데
이렇게 빨리 만날 줄이야...
상처의 고통을 억누르기 위해 지혈 중인
혈천과 그를 가만히 바라보며 서 있는 이루
잠깐의 침묵 끝에 결정을 내린 그는
오른 손을 튕기며 앞으로 걸어 갔다.
"그래"
"일단...이렇게 해 두는 편이 낫겠네"
이루가 오른 손에 제대로 된 힘을 실어서 검을 날렸다.
'콰앙!!!!!!'
머리 위로 떨어진 방금 전보다
한층 더 무거워진 검격에 혈천은
수비적인 자세를 취하며 계속해서 뒤로 물러났다.
뿌드득- 뿌득-
"크윽..."
방금 전에 당한 부상 때문도 있었고
그에게서 느껴지는 기세가
이전과는 사뭇 다르다 판단해서도 있었다.
뭔가 더 무거워 진 것 같은데...
내가 다쳐서 그렇게 느껴지는 건가?
이루는 혈천을 죽일 생각은 없었지만
적어도 그를 완전히 무장 해제 시킬 생각으로
최선을 다해 공격해야겠다 결론냈다.
그를 붙잡은 다음 과거에 마교에서 왜 그런 짓을
저지른 건지 확인 해 봐야 할 참이었다.
이것은 비단 자신 때문이 아닌
제자를 위한 일이기도 했고
그처럼 별로 좋지 않은 영향력을 끼치는 이를
이대로 방치하는 것은 좋지 않다 생각했던 것도 컸다.
나도 몸 상태가 정상은 아니라
시간을 끄는 건 별로 좋지 않으니 서둘러 제압하자
그리고 그 모습은 그대로 표정에 드러나
보호막 안에서 바깥을 바라본 이금은
꽤나 격정적인 표정의 스승을 보곤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평소보다 더 표정이 무서우신데...
스승님께서 왜 저런 표정을 지으시는 거지?
'까앙!!!!!!!!'
'콰아앙!'
뒤로 물러나며 이루의 공격을 받아내던
혈천은 뭔가 이전보다 더 무거워지고
빨라지는 것 같은 이루의 공격에 조금 당황했으나
아무래도 좋았기에 미소 지었다.
허허...더 무거워 지는 게 상당히 재미있군
그래 어디 한번 더 꺼내보게 강자여
강자와의 싸움은 그가 언제나 바라는 것이었고
눈앞에 그 강자가 있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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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질적인 느낌
수십여 합을 주고 받은 끝에
방벽의 경계선 끝자락에 도착한 두 사람
떨리는 주먹을 쥔 혈천이 숨을 헐떡였다.
"허억...허억...허억..."
몸 이곳 저곳에 무수히 많은 얕은 상처들을 입은 그는
이미 육체적으로 한계에 봉착 한지 오래였다.
앞으로 몇합이나 더 버틸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을 정도로 상태가 좋지 않았다.
이 몸 상태로는 도망가는 것도 쉽지 않을 터...
이거 참...외통수 인가
더 이상의 싸움은 무의미 하다 판단한
이루는 검을 아래쪽으로 내리며
그에게 이만 포기하라 이야기 하려 했는데
그런데...
그 순간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그---그그-그그그--'
혈천을 처음 만났을 때처럼
공기가 무거워 진 건 아니었지만
기압이 올라간 것 같은 이상한 느낌
갑자기 느껴지는 정체 모를
이질감에 주변을 두리번거렸지만
이 이상한 느낌은 눈 앞에 있는
이에게서 나고 있는 게 아니었다.
뭐지...?
이 이상한 느낌은 분명 혈천이나
천마와 처음 마주했을 때의 느낌과 비슷한데
이 이상한 기운이 느껴지는 건...위?
고개를 들어 방벽 위를 바라보자
그곳에는 정체 모를 매화가 그려진
새하얀 도복을 입은 한 노인이 서 있었다.
"...?"
누구?
나이가 지긋해 보이는 새하얀 수염이 인상적인 노인
그냥 평범하게 바라보았다면 나이에 맞는
인자한 인상의 노인이라 생각했겠지만
혈천이나 천마와 유사한
이 이상하면서도 압도적인 존재감은
분명 저 사람이 내뿜고 있었다.
뭐지...저 노인 분은?
뭔가 묘한 느낌이...
성벽 위에 서 있던 노인을 바라보고 있던
그때 혈천이 먼저 입을 열었다.
"검선-劍仙...오랜 만이군"
"그대가 여기는 어쩐 일이지?"
그의 입에서 나온 단어는 확실히
들어본 적이 있었던 이름이었다.
검선..?
현 무림의 몇 안되는
현경의 무인들 중 하나 이자
과거 전대 천마에게 부상을 입힌 화산의 무인
검선 화진연
정파를 대표하는 무인이자
화산의 장문인 인 그가 방벽 위에 서 있었다.
"......"
그리고 그를 바라보던 이루는 이쯤 되니 뭔가
억울하다는 느낌이 들어 허탈한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이게 맞는 건가"
분명히 마교에서 나오기 전 천마는
다른 현경의 고수들과 만날 가능성은 매우 적다 이야기 했다.
"그건 그렇다 쳐도"
"나를 비롯한 현경에 오른 이들은 좀 다르겠지만"
"그들은 각 문파나 세력을 대표하는 이들이니"
"보통 외부로는 자주 나갈 수 없네"
"그러니 그대가 먼저 찾아가지 않는 한 만날 일은 없겠지"
하지만 그 말이 무색하게도
이루는 평범한 무인이라면 평생
얼굴 한번 마주 보기도 힘들다는
현경의 절대 고수들을 고작 2주 만에 3명이나 만났다.
이걸 기뻐해야 할지...슬퍼해야 할지...
- 작가의말
속 마음은 그냥 들려왔다 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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